金欽突-亂
1 배경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사의 숙청왕으로 신문왕이 있다. 기나긴 삼국통일전쟁, 나당전쟁을 거치며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된 통일신라에는 전쟁이 끝났지만 여전히 전쟁공신이 가득했고, 훗날 고려의 광종이나 조선의 이방원이 그리했듯 강력한 왕권을 세우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숙청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2 전개
아버지 문무왕의 장례를 마친 지 1개월 뒤인 681년 8월, 신문왕은 삼국통일전쟁 때 김유신 휘하에서 종군하며 많은 공을 세운 장군 김군관을 상대등에서 해임해 병부령으로 강등시켰고 각간 진복을 상대등에 임명한다. 김군관은 백제, 고구려 공격은 물론 나당전쟁 때도 종군한 백전노장이었는데 그를 이렇게 강등시킨 것은 통일전쟁을 통해 비대해진 무관 진골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라는 해석이 우세하다.
이윽고 그 달에 바로 신문왕의 장인이기도 한 잡찬 김흠돌(金欽突), 파진찬 흥원(興元), 대아찬 진공(眞功)의 모반 사건이 있었다. 김흠돌 역시 김군관처럼 삼국통일전쟁에 상당한 군공을 세웠으며, 자신의 딸을 당시 태자였던 신문왕에게 시집을 보낼 정도면 상당한 위세를 자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문왕은 즉위하자마자 막강한 권력을 지녔던 김흠돌을 견제하고 전제왕권을 확립하고자 하였고, 김흠돌이 모반사건을 일으키자 그것으로 말미암아 상대등을 비롯한 상당한 수의 귀족들을 숙청하였다. 그리고 원래 왕비였던 김흠돌의 딸도 아비의 모반죄에 엮어 궁에서 쫓아내 버리고 일길찬 김흠운의 딸 신목왕후를 후처로 들였다. 토사구팽. 신문왕의 후계자인 효소왕과 성덕왕은 모두 그녀의 소생이다.
김흠돌의 모반에 대해서도 여러 견해가 있다. 김군관과 김흠돌이 긴밀한 관계에 있었는데, 김군관이 강등되자 위기의식을 느꼈으며 딸이 신문왕의 비였지만 소생이 없었던 것도 그의 위기의식을 부채질했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김흠돌은 어차피 왕의 장인이었던만큼 굳이 모반을 꾀할 정도로 무리수를 둘 이유는 없었으며 오히려 이 사건은 신문왕이나 그 수하가 조작한 친위 쿠데타였다고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일반적으로는 신문왕의 왕권 강화책에 대한 반발로 김흠돌이 모반을 꾀했다는 해석이 통설이지만, 해석은 읽는 위키러가 알아서 하자.
3 이후
며칠 뒤 김흠돌의 난을 완전히 진압한 신문왕은 앞서 병부령으로 강등한 김군관 역시 참수해 버렸다. 그 죄목은 김흠돌의 모반을 알면서도 이를 고하지 않았다는 죄목. 다만 반역에 연루되었음에도 김군관의 혈족을 멸족시키지는 않았고 김군관의 아들 한 명만 자결시키는 정도로 끝냈다. 어쨌든 즉위하자마자 일어난 이 정치판의 유혈사태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이런 숙청극을 통해 신문왕은 즉위하자마자 무소불위의 강력한 왕권을 세우는데 성공한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신문왕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div></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