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소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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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역대 국왕
31대 신문왕 김정명32대 효소왕 김이홍/김이공33대 성덕왕 김흥광
시호효소왕(孝昭王)
김(金)
이홍(理洪) / 이공(理恭)
생몰년도음력687년 2월 ~ 702년 7월 27일[1](16세)
재위기간음력692년 7월 3일 ~ 702년 7월 27일 (10년)

1 개요

Enzyme King
신라의 제32대 왕. 신문왕의 태자이고, 어머니는 김흠운의 딸 신목왕후다.

2 생애

효소왕은 삼국사기에 생년이 기록되어 있는데 신문왕본기 신문왕 7년(687년) 봄 2월에 원자가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효소왕이 태어나던 날 날씨가 매우 어두웠으며 천둥번개가 많이 쳤다고 한다. 692년에 즉위했으니 기록대로라면 6세 때 즉위하여 16세에 죽은 게 된다. 흠좀무한 기록이긴 한데 어쨌든 효소왕은 신문왕의 태자로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당연히 유년기에 즉위한 왕이 친정을 했다기보다는 모후나 신하들의 섭정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일단 삼국사기에 그런 뉘앙스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진짜로 천재 소년이었을지도 모르고 다만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된 황복사 3층석탑의 금동사리함기를 보면 발원자가 효소왕과 어머니 신목태후(=신목왕후) 명의로 되어 있는 것을 보아 신목왕후가 섭정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효소왕이 즉위한 692년에 좌리방부(左理方府, 형법 및 법률 담당, 651년 설치)와 우리방부(右理方府, 형법 및 법률 담당, 667년 설치)를 각기 좌의방부(左議方府)와 우의방부(右議方府)로 바꾸는데, 효소왕의 이름 이홍(理洪)에 이(理) 자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철저히 지켜졌고 현대 한국 문화에도 일부 남아있는[2] 피휘 문화가 슬슬 시작되는 것이다.

효소왕 시대부터 슬슬 옛 고구려 남부 영토를 개척하기 시작한다. 훗날 500년 고려왕조의 수도가 될 송악(개성)성을 694년 축성하고, 이것을 신호탄으로 이후 패서로 불릴 지역에 계속 성을 쌓고 주민을 이주시키기 시작한다.

695년(재위 4년)에 수도 서라벌시장 서시(西市)와 남시(南市)를 설치한다. 이미 지증왕 때 동시(東市)가 세워진 바 있으므로 이제 서라벌에는 3개의 큰 시장이 들어선 것이다. 이는 삼국통일 이후 수도 서라벌의 상업과 유통이 크게 발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후속조치로 서시와 남시를 관리하는 서시전(西市典)과 남시전(南市典)도 설치하고, 조세를 담당하는 조부(調府)의 사(史, 서기관) 2인을 증치한다.

698년에는 일본의 조공을 받고, 699년에 과 화해하여 오랜만에 조공을 재개했다. 이 시기 발해가 건국된다. (698년)

700년에 이찬 경영이 반역을 도모하다 살해 당했는데 중시였던 순원이 여기에 연좌되어 파면되었다. 일전에는 이찬 경영의 반역도모를 이후 왕비를 배출하게 되는 순원의 파문을 들어서 전제왕권에 대항하는 진골귀족세력에 대항하여 일으킨 것으로 보았으나, 최근에는 당과의 관계를 도모하고자 했던 세력과 일본과의 관계를 도모하고자 했던 세력 간의 다툼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뭐 그냥 그렇다는 이야기도,

어린 효소왕 대신 정치를 했을 신목왕후가 700년 6월 사망한다. 당시 효소왕은 고작 14세인데, 신라 촌락 문서에 따르면 신라에서 성인으로 여기는 나이는 15~16세인 만큼 아직 미성년일 때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까지 사망한 것이다. 2년 뒤인 702년에 효소왕이 사망한다. 이 왕도 아버지처럼 10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신라의 혼란을 왕들의 이른 죽음에서 보는 견해도 있다. 결혼도 하지 않았고 아이도 없었으므로 친동생인 융기가 즉위하는데 바로 성덕왕이다. 성덕왕 역시 기껏해야 10대 초반이었으므로 위 반역 사건과 더불어 상당한 국정 혼란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다행히 성덕왕이 명군이라 8세기 신라는 위기를 벗어난다.

3 일화

삼국유사에 따르면 진평왕천사옥대의 장식이 실제 임을 간파하고 하나를 연못에 넣어보아 용이 승천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왕이 총명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퍼진 설화일지도. 또 잠시 잃어버렸었던 만파식적을 되찾아 만만파파식적이라고 개명시키기도 했다 한다. 사실이라기보단 설화적 성격이 강한 일화들이지만, 이 이야기대로라면 어렸어도 총명하긴 했던 모양.

4 삼국사기 기록

一年秋七月 효소왕이 즉위하다
一年秋八月 원선을 중시로 삼다
一年 도증이 당에서 돌아와 천문도를 바치다
三年春一月 신궁에 제사지내고 사면하다
三年 문영을 상대등으로 삼다
三年 김인문이 당에서 죽다
三年 송악성과 우잠성을 쌓다
四年春一月 자월을 정월로 정하다
四年春一月 개원을 상대등으로 삼다
四年冬十月 도읍에 지진이 일어나다
四年 중시 원선이 물러나다
四年 서시와 남시를 설치하다
五年春一月 당원을 중시로 삼다
五年夏四月 가뭄이 들다
六年秋七月 완산주에서 가화를 바치다
六年秋九月 임해전에서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다
七年春一月 체원을 우두주총관으로 삼다
七年春二月 도읍에 지진이 나고 태풍이 불다
七年春二月 당원이 물러나자 순원을 중시로 삼다
七年春三月 일본국 사신이 오다
七年秋七月 도읍에 홍수가 일어나다
八年春二月 살별이 나타나다
八年 당에 방물을 바치다
八年秋七月 동해 물이 핏빛으로 변하다
八年秋九月 동해에서 수전이 벌어지다
八年 미짐이 주운 황금을 왕에게 바치다
九年 인월을 정월로 하다
九年夏五月 경영이 반란을 도모하여 죽이다
九年夏五月 순원이 반란에 연좌되어 파면되다
九年夏六月 목성이 달에 들어가다
十年春二月 혜성이 달에 들어가다
十年夏五月 영암군 태수 제일을 벌하다

一年秋七月 효소왕이 죽다
  1. 삼국사기에서는 '옛 기록(古記)'에 효소왕이 7월 27일에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황복사금동사리함기』에 기록된 효소왕의 기일과 일치한다. 공교롭게도 할아버지, 아버지와 같은 달에 죽었다. 한편 삼국유사 탑상 오대산 오만진신조에서는 16세에 즉위하여 26세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일연이 6세 즉위하여 16세에 사망한것을 잘못 기록한것 같다.
  2. 현대에도 우리나라는 상대방을 이름보다는 직책이나 관계로 부르는 일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