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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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역대 국왕
30대 문무왕 김법민31대 신문왕 김정명/김명지32대 효소왕 김이홍
시호신문왕(神文王)
김(金)
정명(政明) / 명지(明之)
일소(日怊)
생몰년도음력? ~ 692년 7월 2일[1]
재위기간음력681년 7월 22일 ~ 692년 7월 2일 (12년)

1 개요

新聞王 Newspaper king

숙청과 개혁을 통해 통일 신라 시대 270년의 서막을 연 명군
조선에 이방원, 고려에 왕소가 있다면, 신라엔 김명지가 있다[2]

신라의 제31대 왕. 자는 일초(日招). 문무왕의 장자다(삼국사기).[3]

내물왕 대부터 세면 내물왕 10대손이자 모든 고등학생들의 주적중 하나. 100년 후에나 즉위한 선덕왕의 족보가 부정확하다는 근거나 가족별로 대손 차가 크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문무왕이 겨우 삼국통일을 완수했지만 신라의 내치는 아직 불안정했었다. 오랜 전쟁으로 전쟁 영웅, 공신계층이 너무 많았고 외교도 불안정했으며 옛 고구려계, 백제계 유민들은 아직 신라의 체제에 완전히 편입되지도 않은 상태에 국토는 삼국통일전쟁이란 오랜 전란으로 피폐해진 상태였다. 신문왕은 그가 해야 할 시대적 과제를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위해 전제 왕권을 강화하고 제도를 정비해 통일신라의 제도를 다져 놓았다. 무열왕과 문무왕이 오랜 난세를 끝내고 통일신라라는 한반도 왕조의 형태를 갖춘 창업군주형에 가까웠다면[4] 신문왕은 수성형 군주의 전형. 특히 수성형 군주의 모범적인 모습을 온몸으로 보여준 국왕이다.

전반적으로 통일신라 전성기의 기틀을 마련한 명군이지만 통일전쟁기의 전쟁공신들도 자비심 없이 숙청하고 숙청한 귀족과 관련된 왕비까지 폐출시켰던 무시무시한 왕이기도 하다.[5] 신라 내에서 어느정도 세력을 가지고 있던 고구려 유민들까지 신문왕이 즉위 초에 가차없이 숙청해버렸다. 그만큼 신라 역대 왕 중에서도 강력한 왕권을 자랑했던 군주.

의외로 재위기간이 12년으로, 한 나라의 주요 군주로 꼽을 수 있는 행적치고는 별로 길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업적이 많아 각급 국사 시험에서 신라 중대를 물을 때 90% 확률로 선정되는 주제이기도 하다. 태종 무열왕-문무왕삼국통일전쟁은 다들 잘 아는 편이라 임팩트에 비해 변별력이 조금 떨어지는 편이고. 그 뒤에 경덕왕이나 성덕왕은 교과서 수준으로 단독 출제하기엔 업적이 미흡하기 때문. 그러니 평이한 시험에서 신라 중대를 묻는다면 안심하고 신문왕 관련 내용을 찍으면 된다. 단, 각종 임용 시험이나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같은 경우엔 그런 거 없다.

2 휘와 자에 대해

삼국사기 신문왕조를 보면 신문왕의 휘와 자를 소개하는 첫 부분의 원문이 神文王立諱 政明明之字日怊라고 되어 있다. 이 원문을 국사편찬위원회 번역본에서는 "신문왕이 즉위하니 휘는 정명이고, 정명의 자는 일소이다"라고 해석하고 있는데, 이와는 달리 저 원문의 '명지자일(明之字日)' 부분을 "(휘를) 명지(明之)라고도 하는데 자(字)는 일(日)이다"로 해석해서 '명지(明之)'도 신문왕의 또다른 이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일단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의 해당 부분 각주에서 이 해석에 대해 '명지'를 문맥상 휘로 보기 어렵다고 적혀 있지만, 대부분의 인터넷 백과사전에서는 '김명지' 역시 신문왕의 휘로 적어 두고 있기에 본 문서에서는 둘 다 표기한다.

신문왕은 역대 신라 국왕은 물론 한국의 모든 군주 중에서 기록상 최초로 가 확인되는 인물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자를 가진 인물들이 있었을 가능성도 충분하지만, 어쨌든 기록상으로는 신문왕이 최초.[6]

3 즉위 이전

태어난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681년에 사망한 문무왕이 56세였고, 신문왕은 문무왕의 장남이라는 점을 볼 때 즉위 시점에 대략 30대 중반으로 추정한다면 640년대 중반, 즉 선덕여왕 치세(632~647)쯤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 보면 백제 멸망 때는 10대 중반이었고 고구려 멸망~나당전쟁 때는 20대쯤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 문무왕이 태자 시절에 전장에 자주 나섰던 것과 달리 신문왕은 665년 8월 태자에 책봉된 것 외에는 즉위 전까지 별달리 활약상이 없다. 기록이 부실해서 그냥 행적이 안 남아있는 것일 수도 있고, 정치가 아닌 전쟁에는 그다지 소질이 없었거나 아버지 문무왕이 굳이 전쟁터에 보내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무튼 즉위 이전에는 청년기에 상당히 시끄러운 시대를 살았음에도 별달리 신문왕의 이름으로 기록된 사건은 거의 없다.

4 즉위와 숙청 작업

아버지 문무왕의 장례를 마친 지 고작 1개월 뒤인 681년 8월, 신문왕은 삼국통일전쟁김유신 휘하에서 종군하며 많은 공을 세운 김군관을 상대등에서 해임해 병부령으로 강등시켰고 대신 각간 진복을 상대등에 임명한다.[7] 김군관은 백제, 고구려 공격은 물론 나당전쟁 때도 종군한 백전의 노장이었는데 그를 이렇게 강등시킨 것은 통일전쟁을 통해 비대해진 무관 진골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라는 해석이 우세하다.

이윽고 그 달에 바로 장인 김흠돌의 모반사건이 있었다.(김흠돌의 난) 김흠돌 역시 김군관처럼 삼국통일전쟁에 상당한 군공을 세웠으며, 자신의 딸을 당시 태자였던 신문왕에게 시집을 보낼 정도로 상당한 위세를 자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문왕은 즉위하자마자 막강한 권력을 지녔던 김흠돌을 견제하고 전제왕권을 확립하고자 하였고, 김흠돌이 모반사건을 일으키자 그것으로 말미암아 상대등을 비롯한 상당한 수의 귀족들을 숙청하였다. 이건 뭐 태종보다 더하네요 그리고 원래 왕비였던 김흠돌의 딸도 아비의 모반죄에 엮어 궁에서 쫓아내 버리고 일길찬 김흠운의 딸 신목왕후를 후처로 들였다. 토사구팽. 신문왕의 후계자인 효소왕성덕왕은 모두 그녀의 소생이다.

김흠돌의 모반에 대해서도 여러 견해가 있다. 김군관과 김흠돌이 긴밀한 관계에 있었는데, 김군관이 강등되자 위기의식을 느꼈으며 딸이 신문왕의 비였지만 소생이 없었던 것도 그의 위기의식을 부채질했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김흠돌은 어차피 왕의 장인이었던만큼 굳이 모반을 꾀할 정도로 무리수를 둘 이유는 없었으며 오히려 이 사건은 신문왕이나 그 수하가 조작한 친위 쿠데타였다고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일반적으로는 신문왕의 왕권 강화책에 대한 반발로 김흠돌이 모반을 꾀했다는 해석이 통설이지만, 해석은 읽는 위키러가 알아서 하자.

며칠 뒤 김흠돌의 난을 완전히 진압한 신문왕은 앞서 병부령으로 강등했던 김군관 역시 참수해 버렸다. 그 죄목은 김흠돌의 모반을 알면서도 이를 고하지 않았다는 죄목. 다만 반역에 연루되었음에도 김군관의 혈족을 멸족시키지는 않았고 김군관의 아들 한 명만 자결시키는 정도로 끝냈다. 어쨌든 즉위하자마자 일어난 이 정치판의 유혈사태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이런 숙청극을 통해 신문왕은 즉위하자마자 무소불위의 강력한 왕권을 세우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나서 신문왕은 681년 10월에 왕을 경호하는 부서인 시위부의 장 위에 6인의 장군직을 더 설치했다. 이 조치만 봐도 왕권을 강화하려는 신문왕의 의도가 드러난다. 지금까지가 부왕 문무왕이 사망한 즉위 원년 가을 한철에 다 있었던 일이다.

5 신문왕의 개혁

5.1 국학 설치

이러한 숙청을 바탕으로 전제왕권 확립을 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단행하였다. 우선 682년 국학을 확립해서 국학의 경(卿) 1인을 설치한다. 본래 국학은 진덕여왕 재위기인 651년에 설치되었지만 이때는 아직 국학이 좀 미비된 상태였고 신문왕이 경을 설치하면서 국학의 위상을 높이려고 했다고 볼 수 있다.

5.2 지방 행정과 군제 정비

683년에는 보덕국안승을 소판[8]으로 삼고 김씨 성을 하사했으며 고구려인으로 구성된 황금서당과 말갈인으로 구성된 흑금서당을 설치한다. 이로써 통일신라의 '9서당' 중 6서당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나 684년에는 보덕국에 사는 고구려 유민들의 대대적 저항이 일어났는데, 안승의 조카인 대문이 금마저(익산)에서 거병하려다가 실패해서 죽음을 당했다. 그러자 이에 격분한 보덕국인들이 관리들을 죽이고 거병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신문왕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토벌군을 보냈고 토벌군도 많은 피해를 감수하면서 이 난을 진압했다. 이 때 바로 1년 전 만들어진 고구려인으로 구성된 부대 황금서당도 파견되었는데 아이러니한 건 보덕국인들도 고구려계고 황금서당도 고구려계라, 동족상잔이 일어난 것이다. 마치 태평양 전쟁미국에 살던 일본계 미국인들이 오히려 일본군과 더 용맹하게 싸웠던 것처럼 황금서당 소속 고구려인들은 충성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동포들과 처절하게 싸워야 했을 것이다. 이 때 황금서당의 지휘관 중 하나인 김영윤이 전사한다. 이 김영윤은 반굴의 아들이자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의 손자다. 신문왕은 진압 후 보덕국 유민들을 남쪽의 주나 군현으로 옮겼고 금마저는 이때 이르러 금마군으로 행정단위에 편입되었다.

685년에 사지(舍知)를 설치하여 영(令)·경(卿)·대사(大舍)·사지(舍知)·사(史)의 5단계 관직제도가 완성하였으며 이 해에 지방제도인 9주 5소경제를 확립했다. 신라의 9주는 일선주, 삽량주, 한산주, 수악주, 하슬라주, 소부리주, 완산주, 청주, 발라주를 가리키는데, 685년에 설치된 것은 완산주로 신문왕 대에 9주 체제가 완성된 것이다. 그리고 5소경은 이전에 북원경, 금관경, 중원경이 이미 설치되어 있었으며 이 해에 설치된 것은 서원소경과 남원소경으로 이렇게 신라의 지방통치체제가 완성되었다.

686년에는 예작부(궁궐, 관청 보수 담당 부서)의 장관직을 개편했고 이 해에도 여러 지방행정체제를 개편했다. 오늘날의 충청도 지역에 새로운 현을 설치하거나 군과 현을 승격하거나 단위를 내리는 작업을 했으며 이 해에 보덕국 유민들로 이루어진 백금서당과 청금서당을 만들어 8서당을 완비한다.

690년에는 남해안 도서지역에 군을 설치하고 개지극당과 삼변수당이라는 새로운 부대를 창설한다. 개지극당은 '극병'을 중심으로 한 부대이고 삼변수당은 한산주(지금의 경기)나 하슬라주(지금의 강릉시, 강원도 일대) 등의 북방을 지키는 부대였다.

5.3 관료전의 지급과 녹읍 폐지

687년에는 종묘의 시초격인 5묘제를 설치하여서 태종무열왕계의 전제왕권을 확립시켰다. 5묘에는 태조대왕(성한왕,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음[9]) - 진지대왕(진지왕) - 문흥대왕(김용춘) - 태종대왕(태종 무열왕) - 문무대왕(문무왕)을 모셨다. 또한 이 해에 문무 관료들에게 일정량의 토지를 차등 있게 내려준다. 이른바 '관료전'을 분급한 것인데 이것은 실제 정무를 수행하는 관리들에게 일정한 보수를 지급한 조치라는 데 의의가 있는 조치이다. 즉 골품보다는 후천적인 '직분'을 중시하여 진골귀족의 기득권을 약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조치로는 아직 미흡했다.

결국 689년에 폭탄 조치를 취하는데 바로 녹읍을 폐지한 것. 본래 신라에서 진골 귀족들은 녹읍을 지급받았고 6두품과 그 이하들은 '축년사조'라고 해서 일종의 월급처럼 한 해 혹은 한 달을 기준으로 국가에서 일정량의 곡물이나 토지를 제공받았었는데, 신문왕은 이 해에 녹읍을 폐지하고 진골이든 6두품 이하를 막론하고 전부 축년사조로 돌려 버렸다. 녹읍이 진골귀족의 세력 기반이 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신문왕의 조치는 진골들의 경제 기반에 타격을 입혀 진골도 6두품과 같은 행정관료층으로 편입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고 볼 수 있다. 이후 70년 뒤 경덕왕이 녹읍을 부활시킬 때까지 진골들은 6두품 이하들처럼 축년사조를 받아가며 생활해 간다.

5.4 달구벌(대구) 천도 시도

녹읍을 폐지한 그 해, 신문왕은 장산성(경산)에 행차해 거동했고 도읍을 달구벌(지금의 대구)로 옮기려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삼국사기 '악지'를 보면 이 해 신문왕이 신촌(新村)에 거동해 악인들에게 음악을 연주했다는 기록이 존재하는데, 이 '신촌'이라는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지만 이후에 이루어진 연구에 의해 이곳은 대구 천도 시도와 관련된 지명이라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신문왕이 경주를 떠나 대구 천도를 시도했던 이유는 불분명하나, 이 역시 신문왕의 왕권 강화 시도로 보는 의견이 우세하다. 본래 신라의 수도 경주는 진골 귀족의 세력이 막대했던만큼 이곳을 벗어나 천도하여 새 수도로 가면 대부분의 귀족들은 연고지를 떠나 권력이 약화되고 강력한 왕권 아래의 새로운 정치적 중심지를 만들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왜 대구인가?'에 대한 이유는 통일 수도로서 경주의 입지 자체가 너무 구석에 위치한 상황에서 전통적인 신라 영역[10]양주를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국가 중심부에 가까운 지역이 대구이기 때문에 경주의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이곳으로 천도를 계획했다는 의견이 많다. 교통도 동해 바다로 이어지는 경주보다는 낙동강과 금호강의 수운을 이용해 물자를 수송할 수 있는 대구가 편리하다.

5.5 대당관계

당나라와는 나당전쟁 이후 오랫동안 형식적인 조공조차 보내지 않으면서 교류가 없는 관계를 유지했는데, 686년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유교 경전인 "예기"와 문장을 요청한다. 이에 당시 당의 실권자 측천무후가 여러 유교적 예법과 모범으로 삼을만한 유교 경전 글을 정리해 50권의 책으로 만들어 신라에 보내주었다. 이는 나당전쟁 이후 신라와 당의 실질적인 첫 교섭인데 예기 전체를 그대로 보내주지 않고 일부만 발췌해서 보내 준 것은 아직 나당관계가 미묘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692년 봄에 당나라에서 무열왕의 묘호인 태종에 대해 시비를 걸고 묘호를 쓰지 말라고 압박을 주었지만 신문왕은 이에 답사를 보내 완곡히 거절했다. 답사의 요지는 무열왕 역시 덕이 있고 어진 신하 김유신을 얻어 삼한일통의 대업을 이루었으니 태종이라는 묘호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 이는 시사하는 바가 큰데 묘호는 원래 폐하 같은 용어처럼 천자국 전용이라서, 고려조선도 모든 왕에 태조, 문종, 고종 등등 묘호를 올렸지만 전부 일단은 중국 몰래 올린 것이다. 그런데 신라는 태종 묘호를 취소할 생각이 없다고 대놓고 당나라에 통지해 관철시켰으니, 신라 역시 당군을 나당전쟁으로 싸워서 격퇴한 후 자신감이 붙어 당에 대해서 당당한 외교적 자세를 유지했고 자국의 정통성을 지키려 했다고 볼 수 있다.[11]

5.6 일본과의 관계

당나라와 서먹서먹했던 반면 후방의 일본과는 그 어느 때보다도 사신을 많이 주고받았으며 삼국사기일본서기에서 모두 확인할 수 있다. 신라는 열심히 싸웠던 당나라와 아직 사이가 좋지 못한 만큼 후방에 있는 일본의 도움이나, 적어도 방해는 되지 않도록 일본과의 사이를 개선해놓을 필요가 있었으며, 일본 역시 원래 친밀했던 백제가 패망한 지 오래인 이상 신라와 계속 적대할 수만은 없었다. 일본은 아직 견당사를 본격적으로 파견하기 이전이기 때문에, 불교 등 선진문물을 전파받으려 했고 신라는 지식인 승려들을 일본에 보내주기도 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689년(신문왕 9) 4월에 “신라가 김도나 등을 보내어 영진인왕(瀛眞人王)의 죽음을 조문하고, 아울러 학문승(學問僧) 명총(明聰)과 관지(觀知) 등을 보내어 별도로 금동아미타상·금동관세음보살상·대세지보살상 각 1구와 채백금릉(綵帛錦綾)을 바쳤다.”고 한다.

5.7 사망

692년 7월 2일에 세상을 떴다. 삼국사기에는 그냥 692년 7월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신문왕 사후 그의 추도를 위해 건립된 황복사 3층 석탑의 '황복사금동사리함기'에 신문왕이 7월 2일에 죽었다고 적혀 있다. 아버지 문무왕과 아들 효소왕의 나이로 유추해 보면 짧게는 30대 후반에서 많아봐야 40대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문왕이 죽었을 때 원자 이홍(효소왕)의 나이는 아직 6세, 둘째 융기(성덕왕)는 이제 막 태어난 아기였다. 비록 젊은 왕비 신목왕후가 살아 있긴 했지만 어린 후계자를 남긴 채 죽음을 맞아야 했으니 근심과 걱정 속에서 죽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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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왕릉은 경주시 배반동에 있는데, 경주시울산광역시를 잇는 7번 국도 바로 옆에 있고 신문왕릉 정류장에 서는 경주시 시내버스도 대단히 많아서 접근성이 매우 좋은 편이다. 이전 시대의 신라왕릉보다 좀 더 장식물이 늘어나고 섬세해진 것이 보인다.

신문왕릉 문서 참조.

6 평가

10년이 조금 넘는 재위기간 동안 강력한 포스를 남긴 왕으로 왕권 강화책이나 행정제도의 정비라는 업적을 보면 뒷날 고려광종이나 조선태종과 비슷한 유형의 군주라고 볼 수 있다. 국가의 성격이 크게 바뀐 통일신라를 이전의 신라와 사실상 별개로 볼 경우 2~3번째이므로 광종, 태종과 더욱 유사하다. 전제왕권을 강화했다는 점이나 쉬지 않고 일했다는 점, 네임밸류에 비해 결국 오래 재위하지 못했다는 점 등 청나라옹정제와도 이미지가 비슷한 임금. 옹정제와 신문왕 둘 다 12년 재위했고 수명도 비슷했다.

유명한 전설 속의 피리 만파식적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가 왕권강화책을 펼친 영향으로 만파식적 설화가 나온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관한 것은 만파식적 항목을 참고할 것. 또한 설총으로부터 <화왕계> 이야기를 듣는 왕도 신문왕으로 이것은 유학자였던 설총이 화왕계를 통해 신문왕에게 바라는 군주상을 제시했다고 해석되고 있다.

삼국통일 이후 나라의 제도를 정비하여 8세기 중엽까지 지속되는 신라의 최전성기를 연 군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제도 정비를 통해 통일신라의 기틀을 굳건히 하고 문화 면에서도 업적을 남긴 만큼 오늘날 국사 교육과정에서도 상당히 중요하게 다뤄지는 임금이다. 위의 행적을 보면 길지 않은 재위기간동안 굵직굵직한 치적을 해마다 남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쉬지 않고 일했던 워커홀릭이 아니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 어쩌면 비교적 이른 죽음의 원인은 과로였을지도 모른다.

7 삼국사기 기록

一年秋七月 신문왕이 즉위하다
一年秋八月 진복을 상대등으로 제수하다
一年秋八月八日 김흠돌 등이 반란을 도모하다 죽임을 당하다
一年秋八月十三日 보덕국의 왕이 축하 사신을 보내다
一年秋八月十六日 왕이 소집한 군대를 돌려보내라는 교서를 내리다
一年秋八月二十八日 왕이 이찬 군관을 죽이라는 교서를 내리다
一年冬十月 시위감을 없애고 장군을 두다
二年春一月 신궁에 제사지내고 사면하다
二年夏四月 위화부령에 두 사람을 배치하다
二年夏五月 태백성이 달을 범하다
二年夏六月 국학을 세우다
二年夏六月 공장부감과 채전감을 두다
三年春二月 순지를 중시로 삼다
三年春二月 김흠운의 딸을 부인으로 맞기 위해 납채하다
三年夏四月 여름에 눈이 내리다
三年夏五月七日 김흠운의 딸을 부인으로 책봉하다
三年冬十月 보덕국안승을 소판으로 삼다
三年 혜성이 나타나다
四年冬十月 유성이 떨어지다
四年冬十一月 대문이 반란은 도모하다가 죽임을 당하다
五年 완산주를 설치하고 용원을 총관으로 삼다
五年 청주를 설치하고 복세를 총관으로 삼다
五年春三月 서원 소경을 설치하다
五年春三月 남원 소경을 설치하다
五年春三月 봉성사가 완성되다
五年夏四月 망덕사가 완성되다
六年春一月 대장을 중시로 삼다
六年春一月 예작부에 경을 두다
六年春二月 석산현·마산현·고산현·사평현을 설치하다
六年春二月 사비주를 군으로 하다
六年春二月 웅천군을 주로 하다
六年春二月 발라주를 군으로 하다
六年春二月 무진군을 주로 하다
六年 당에 《예기》와 문장에 관한 책을 요청하여 받다
七年春二月 원자가 태어나다
七年春三月 사벌주를 설치하고 관장을 총관으로 삼다
七年夏四月 음성서의 수장을 경으로 고치다
七年夏四月 조묘에서 치제를 올리다
七年夏五月 관료에게 전지를 하사하다
七年 사벌주와 삽량주에 성을 쌓다
八年春一月 대장이 죽다
八年春一月 원사를 중시로 삼다
八年春二月 선부에 경을 더하다
九年春一月 녹읍을 폐지하다
九年秋閏九月二十六日 서원경성을 쌓다
九年 달구벌로 천도하려하다
十年春二月 선원을 중시로 삼다
十年冬十月 전야산군을 설치하다
十一年春三月一日 왕자 이홍을 태자로 삼다
十一年春三月十三日 사면하다
十一年 사화주에서 흰참새를 바치다
十二年 남원성을 쌓다
十二年 대나무가 시들다
十二年 당 중종이 태종의 묘호를 고치라는 조칙을 전하다
十二年 태종 묘호를 못 고치겠다고 답하다
一年秋七月 신문왕이 죽다

신문왕부터 삼국사기 8권이 시작된다.

8 오늘날의 신문왕

대중적으로는 삼국통일의 주역들인 할아버지 무열왕이나 아버지 문무왕에 비해 덜 유명한 편이고 대중 매체에서도 다뤄진 적이 없다. 한 일에 비해 대중적 인지도가 낮은 걸 보면 투명라인일지도?

2012년 KBS 사극 대왕의 꿈에서 무열왕과 문무왕을 넘어 신문왕 치세까지 다루려 했으나 조기종영 크리로 무산되었다. 후반에 나온 아역조용진이 맡았다.
  1. 『황복사금동사리함기』의 기록
  2. 실제로 이 세 왕은 행보가 비슷하다.
  3.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차남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소명태자라는 장자가 있었는데 일찍 사망하여 신문왕이 태자에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단 화랑세기는 위서론이 다수설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자.
  4. 발해는 아직 건국되지 않은 시점이다.
  5. 기나긴 전란 끝에 평화가 찾아오면 평화의 시대에는 별로 필요가 없는, 그 동안 쌓여온 군인공신의 처리가 문제가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전국시대를 통일한 뒤 임진왜란을 일으켜서, 몽골 제국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남송 잔당군을 십만 단위로 보내서 잉여 전력을 소모했고, 신문왕이나 한고제, 홍무제, 광종 등은 무자비한 숙청으로 처리한 것.
  6. 신문왕의 숙부인 김인문도 '인수(仁壽)'라는 자를 썼다. 이로 미뤄 보면 정황상 할아버지 무열왕이나 아버지 문무왕도 자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7. 진복도 삼국통일전쟁에서 활약한 장군이다.
  8. 소판은 신라 17관등 가운데 셋째 등급 잡찬의 다른 이름. 참고로 신라의 관직 체계상 진골만 오를 수 있는 관등이므로 외지인인 고구려 왕가 출신 안승을 진골 골품으로 대우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에서 토착 신라왕가 이외에 외부 출신 세력을 진골급으로 대우한 것이 기록으로 남은 것은 금관국 가야계 신김씨, 고구려계 안승, 발해 왕가 셋 뿐이다.
  9. 대체로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나 김세한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10. 여기에 추가적으로 신라 투항 후 왕족인 진골로 대접받고 문무왕의 모친이자 신문왕의 조모인 문명왕후부터 모계혈통으로 실제 신라왕실에 혈통으로도 합쳐진 옛 금관가야 지역도 이 양주에 포함된다.
  11. 이 당시에는 묘호를 피휘하는것을 신라측에서 거부하였지만 성덕왕 때에는 당황제와 휘가 같아서 이름을 바꿔달라는 요구를 들어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