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명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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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역대 국왕
20대 장수왕 고거련21대 문자명왕 고나운22대 안장왕 고흥안
시호문자명왕(文咨明王) / 명치호왕(明治好王)
고(高)
나운(羅雲) / 개운(个雲) / 고운(高雲)
생몰년도음력? ~ 519년
재위기간음력491년 12월 ~ 519년(28년)

SMS King

고구려의 제21대 .

1 소개

고구려판 정조

명치호왕(明治好王)이라고도 하는데,옆나라의 명치천황과는 다르다삼국유사 왕력편에는 명리호(明理好), 개운(个雲), 고운(高雲)이라는 이름도 전하고 있는데, 개운은 나운의 변형으로 보이고, 고운은 이름인 고나운을 나자를 빼고 두글자로 이름을 줄인 중국식 이름으로 보인다. 명리호는 문자명왕의 별호인 명치호왕에서 고려 6대 임금인 성종의 이름 治(치)를 피휘한 것이다. 명왕이란 말은 태왕이나 성왕처럼 고구려에서 국왕에게 붙여주던 존호이지만, 문자명의 끝자와 명치호의 앞자가 겹치는 것을 보면 원래 시호는 문자명치호왕(文咨明治好王)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장수왕의 아들인 고추대가[1][2] 고조다(高助多)의 아들이다. 장수왕이 너무나 오래 산 나머지 아들이 먼저 죽어버려서(...) 손자인 나운이 그 뒤를 잇게 되었다.

2 최대 영토의 주인공?

일반적으로 문자왕대에 북부여를 흡수하여 최대의 영토를 일구었다고 보기는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영토를 확장한 것이 아닌 단순히 물길의 침략으로 쫓겨난 부여의 유민을 받아들인 것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 그리고 영양왕 때 고구려의 영토가 동서 육천리에 달해 초기 천리~이천리 수준의 수배의 달하는 당대 최대였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문자명왕때 영토라고 알려진 강역보다 넓었는지는 알 수 없다.[3]

어쨌든 고구려의 전성기가 문자명왕의 치세까지 유지되었다. 하지만 물길에게 북쪽 변방이 쓸렸고, 나제동맹과 일전일퇴를 거듭하는 지루한 전투를 계속했다. 북위와는 장수왕대에 이어 대체로 친선 외교를 지속했다. 허나 거란의 기병을 이용하여 북위의 변방을 약탈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죽자 북위 영태후는 동당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하라구로

장수왕의 후광에 미화되는 경향이 있는데 정작 한 것은 많지 않다. 절을 좀 세우기는 했다. 이렇게 들으면 그냥 절 좀 세운 아저씨 같은데평양 대동강변에 금강사(金剛寺)를 창건하여 많은 고승들을 배출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북한 학자들은 금강사가 아마도 청암리 사지에 있는 절과 동일할 것이라는 추측을 하고 있다.

그외에 일본서기에 따르면 사신이 일본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일본서기에서 처음으로 고려 사신이 등장한 것이다. 아마 이때 처음으로 일본과 "긍정적"인 접촉이 이루어 진듯 하다.

무인 백제가 작막고(灼莫古) 장군과 일본의 사나노아히다(斯那奴阿比多)를 보내었는데 고려의 사신 안정(安定) 등이 따라와 래조(來朝)하여 우호를 맺었다.

일본서기. 514년 9월

3 기록

492년3월위나라 효문제가 고구려 왕으로 임명하다.
6월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보내다.
8월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을 하다.
10월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다.
493년10월지진이 일어났다.
494년1월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2월부여왕과 처자가 나라를 들고 항복하다.
7월신라군과 살수 들판에서 싸웠다. 신라가 패했지만 백제 원병으로 우리 군사가 물러났다.
제나라 황제가 정동장군 낙랑공으로 책봉했다. 이에 사신을 위나라로 보내 조공했다.
10월복숭아와 오얏꽃이 피었다.
495년2월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크게 가물었다.
5월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7월왕이 남쪽을 행차하여 바다에 제사를 지내고 돌아왔다.
8월군사를 보내 백제를 쳤다. 신라의 지원군이 와 우리 군사가 돌아왔다.
496년제나라 황제가 왕을 거기장군으로 삼았다. 사신을 제나라로 보내 조공하였다.
7월군사를 보내 신라 우산성을 쳤다. 군사가 패해 돌아왔다.
497년8월군사를 보내 신라 우산성을 공격해 빼앗았다.
498년1월왕자 흥안을 태자로 삼았다.
7월금강사를 창건하였다.
8월위나라에 조공하였다.
499년백제 백성들이 굶주려 2천명이 투항해왔다.
500년8월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501년1월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12월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502년4월양나라 고조가 즉위하여 왕을 거기대장군에 삼았다.
8월메뚜기때가 나타났다.
10월지진이 일어나 백성들의 집이 무너지고 죽은자가 많았다.
11월백제가 국경을 침범했다.
12월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했다.
503년11월백제가 달솔 우영을 보내 군사 5천을 거느리고 수곡성으로 쳐들어 왔다.
504년4월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506년8월왕이 용산 남쪽으로 사냥하다 5일만에 돌아왔다.
9월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11월장수를 보내 백제를 쳤으나 병사들이 동상에 걸려 돌아왔다.
507년10월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왕이 장수 고노를 보내 말갈과 백제의 한성을 치게 하였으나
백제가 반격해 물러났다.
508년양나라 고조가 조서를 내렸다.
5월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12월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509년5월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510년윤6월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12월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512년3월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5월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9월백제를 침략해 가불, 원산 두성을 함락시키고 남녀 1천명을 사로잡았다.
513년1월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5월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12월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514년11월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515년10월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516년4월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517년4월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518년2월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3월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히고 왕궁 남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519년왕이 죽었다.


조공기록이 전체의 절반이다. 다만 이걸 가지고 '문자명왕은 고구려의 자존심 같은 건 내던져 버린 건가요?' 라고 하면 곤란한데, 삼국시대에는 외교사절도 조공사절이라는 이름으로 파견했기 때문으로, 조공을 많이 바쳤다는 건 그만큼 외교에 적극적이었다는 뜻이 되고. 상위 항목에서 장수왕의 뒤를 이어 북위와 친선관계를 계속했다는 부분이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4]

3.1 삼국사기 기록

一年 문자왕이 즉위하다
一年春三月 북위 효문제가 왕의 즉위를 축하하다
一年夏六月 북위에 조공하다
一年秋八月 북위에 조공하다
一年冬十月 북위에 조공하다
二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다
三年春一月 북위에 조공하다
三年春二月 부여가 항복해오다
三年秋七月 신라·백제와 전투를 하다
三年 남제가 문자명왕에게 벼슬을 주다
三年 북위에 조공하다
三年冬十月 겨울에 날씨가 따뜻하여 꽃이 피다
四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四年春二月 큰 가뭄이 들다
四年夏五月 북위에 조공하다
四年秋七月 남쪽 바다에 제사를 지내다
四年秋八月 백제를 공격하니 신라가 백제를 돕다
五年 남제가 왕의 벼슬을 올려주다
五年秋七月 신라 우산성을 공격하였으나 니하에서 반격을 당하다
六年秋八月 신라 우산성을 빼앗다
七年春一月 흥안을 태자로 책립하다
七年秋七月 금강사를 창건하다
七年秋八月 북위에 조공하다
八年 백제인이 기근으로 투항해오다
九年秋八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年春一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年冬十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一年秋八月 농작물에 병충해가 발생하다
十一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 사상자가 발생하다
十一年夏四月 양 고조가 왕의 벼슬을 올려주다
十一年冬十一月 백제가 침입하다
十一年冬十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二年冬十一月 백제가 수곡성을 침략하다
十三年夏四月 사신이 북위를 방문하여 황제를 면담하다
十五年秋八月 사냥을 하다
十五年秋九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五年冬十一月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눈과 추위로 인해 실패하다
十六年冬十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六年 백제를 공격하다
十七年 양이 조서를 보내 문자명왕의 벼슬을 올려주다
十七年夏五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七年冬十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八年夏五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九年夏閏六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九年冬十一月 북위에 조공하다
二十一年春三月 양에 조공하다
二十一年夏五月 북위에 조공하다
二十一年秋九月 백제 가불· 원산 두 성을 빼앗다
二十二年春一月 북위에 조공하다

二十二年夏五月 북위에 조공하다
  1. 고구려때의 직위로 일반적으로 태자가 맡았던 것으로 추측
  2. 고구려가 오부족 체제였을 때, 왕족인 계루부와 전왕족인 소노부, 왕비족인 절노부의 수장을 고추가라고 해서 별도의 조직을 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계루부의 최고 수장은 당연히 왕이니까, 정통 계승자가 고추가의 자리를 차지했다. 신라의 갈문왕이나 백제의 길사와 같이 왕권버금세력의 흔적이다.
  3. 5세기 때를 고구려 국세의 전성기로 보는 것에는 큰 이견이 없지만 이와 별개로 전성기보다 영토가 넓었다고 볼만한 건덕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고구려 최전성기로 간주되는 5세기에도 말갈의 전신인 물길이 이따금씩 문제를 일으켜 부여 땅을 잠식하곤 했다. 이후 고구려는 거란과 말갈을 꾸준히 공략해가며 말기에는 당나라로 이주한 일부 번장을 제외하고는 말갈 세력은 고구려 편이었다. 심지어 흑룡강 일대의 흑수말갈까지도 고구려에 붙었다는 기록이 등장하며 내몽골 일대에서도 고구려 세력이 당나라에 맞서는 모습이 보인다. 양면전선을 상정할 수 있었던 5세기나, 발해 초기보다도 안정된 상황이다. 또한 고구려는 북위가 쇠퇴할 당시 요서 일대를 공략하고 말기에는 중국과의 국경이 요하 서쪽, 영주에 이르는데 5세기 고구려의 영역 확장이 서쪽과 남쪽에 치우치고 북위의 요서 지배력이 수, 당의 그것보다 강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동서'로 더 넓어졌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6천리 기록이 말이 안 되지는 않는다...
  4. 애초에 조공은 소국이 대국을 섬긴다기 보다는 동아시아 특유의 상호무역체제로 보는 것이 현 학계의 중론이다. 대대로 중국의 북방을 위협했던 흉노와 돌궐과 같은 유목민족 역시 표면상으로는 중국의 왕조와 조공관계를 맺었다. 고구려 뿐만 아니라 역대 이민족의 국가들 역시 중국의 왕조들과 조공관계를 맺었고 국력이 강성했던시기에는 말이 조공이지 상대적으로 대등한 취급을 하거나 아예 상전노릇을 한 경우도 있었다.하극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