羅濟同盟
Silla-Baekje Alliance
1 개요
삼국시대 중반인 5세기~6세기의 신라와 백제의 동맹을 뜻한다. 신라의 '라'와 백제의 '제'를 따와서 붙였으니 '라제동맹'이라고 해야 맞지만 두음법칙에 따라 '라'자가 '나'자가 된다. 앞글자를 따오면 백신동맹이라 카더라[1]
2 동맹 결의
433년 신라의 눌지 마립간(訥祇麻立干)과 백제의 비유왕(毗有王)이 남진정책을 추진하는 고구려의 장수왕(長壽王)에게 대항하기 위해 체결한 동맹을 시초로 하며, 백제의 성왕(聖王)과 신라의 진흥왕(眞興王)이 관산성 전투에서 맞붙는 554년까지 근 120년이나 유지했다.
475년, 장수왕이 군사 4만을 보내 백제 수도 한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개로왕(蓋鹵王)을 처형시킬 때 신라에선 자비 마립간(慈悲麻立干)이 지원군 1만을 파병해 도와주기도 했다. 백제가 고구려의 침공과 개로왕의 끔살로 약화되자 혼인동맹을 맺어 종전의 동맹체제를 강화했고, 또 481년에 장수왕이 신라를 공격하자 백제의 동성왕(東城王)이 원군을 파견해 고구려군을 막아내었다.
3 동맹 붕괴
그럭저럭 5세기 말까지는 사이가 좋고 동맹도 잘 유지했으나 이후로 백제와 신라는 (예전부터 그러했듯이) 점점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가야를 놓고 신라와 백제 양국이 이권다툼을 벌여갔고 고구려와의 전쟁에서도 협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동맹이 붕괴되기 직전인 548년까지도 고구려가 백제를 치자 진흥왕이 신속하게 원군을 보내는 등(독산성 전투) 동맹이 아직은 유효한 것처럼 보였다.
지증왕(智證王), 법흥왕(法興王)의 통치기간을 지나면서 강성해진 신라는 가야를 놓고 벌인 백제와의 싸움에서 끝내 이겼지만 그래도 동맹은 계속 지키려고 했다. 하지만 성왕이 주도한 한강(漢江) 유역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났다. 나제동맹의 목표였던 고구려를 551년에 대대적으로 공격해 한강 하류는 백제가, 한강 상류는 신라가 차지했으나 신라의 진흥왕이 자신의 몫이었던 죽령 이북의 영토는 물론이고 백제의 몫이던 북한강과 한강 유역 등까지 모두 기습적으로 차지해서였다.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 참조.
정확히 말하면 백제가 뺏은 땅을 고구려와의 격전 과정에서 훔쳤지만, 백제에게는 그야말로 고토를 뺏는 배신행위이자 약조의 위반이었다. 다만 이를 백제가 스스로 한강 장악을 포기하면서 빈 공간을 신라가 장악했다라고 보는 해석도 있다. [2] 그리고 황초령비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가 신라의 강역 확정을 축하했는데, 나제동맹군의 동시적인 침입을 받은 고구려가 평양성까지 털리는 사태를 막기 위해 나 말고 저기 꿀땅 먹으라고 신라의 중부지방 장악을 조장, 묵인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백제와 신라가 나제동맹을 깨고 자기들끼리 다투면 가장 이득인 건 고구려일텐데, 정작 고구려는 원 주인임에도 불구하고 관산성 전투에 이르는 한강 유역 쟁탈전의 일련의 과정에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도 백제의 성왕은 혼인동맹으로 나제동맹을 지키려고 했으나[3], 얼마 뒤 성왕이 대가야와 왜를 끌여들여 신라를 공격하였다. 승성 3년(554년), 백제가 신라를 공격해 남녀 3만 9천 명과 말 8천여 필을 빼앗아가자(삼국유사), 그나마 형식적으로 남았던 나제동맹은 결정적으로 파탄났다.
끝내 신라의 진흥왕은 백제와 일대 격전을 벌였고, 그것이 관산성 전투와 성왕의 전사로 이어졌다. 일본서기에는 성왕을 처형한 도도(일본서기에는 '고도(苦都)'로 표기)가 처형하기 전 성왕에게 '맹세한 것을 어기면 아무리 국왕이라도 종의 손에 죽습니다'라고 동맹을 파탄낸 백제에게 한 비난이 있다. 신라의 입장에서 동맹은 백제가 깼다는 것. 지들이 먼저 뒷통수 알박기 해놓고서 맹세를 깼다고 책임전가하니 뻔뻔스럽다
4 동맹 파탄 이후
이후 백제는 660년 삼국통일전쟁에서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하는 그 날까지 신라와 불구대천의 원수로 치열하게 전쟁을 벌였다. 나제동맹이 깨지자 백제는 과거 적대하던 고구려와 손을 잡고 신라를 견제하는 외교 노선을 폈다. 한편 남아있던 대가야는 562년 이사부가 이끄는 신라군에게 멸망했으며, 왜는 향후 오랫동안 신라에게 다시는 무력으로 덤비지 못했다.
반면 신라는 그 뒤로 중국과 직접 무역할 서해안의 항구를 얻기도 하는 등 만신창이였던 백제를 밟아선 채 황금기를 맞는다. 정말로 신라 왕조 전체를 따졌을 때의 황금기는 남북국시대에서 찾아야겠지만, 삼국 시대의 신라만 보자면 이 때를 황금기로 보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진흥왕 대에 거의 영토가 3~4배 늘고 함경남도 일부도 빼앗아서였다.[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