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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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파티아 산맥과 다뉴브 강의 사이에 있는 영역 중, 판노니아[1]가 아닌 지역이 다키아다. 뭔가 설명이 애매하다?
사실, 설명이 애매할 수 밖에 없는 게, 이 땅이 좀... 기묘하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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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뉴브 강 유역을 나타낸 지도. 오른 편에 루마니아를 관통하여 올라가다가 서쪽으로 휘어지는 산맥이 카르파티아 산맥이다. 또한 헝가리 글씨 옆에 보면 티서(Tisa) 강이 보인다. 대체로 다뉴브 강, 카르파티아 산맥, 티서 강으로 둘러싸인 영역이 역사적으로 다키아라 불린 지역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로마 제국 정복 이후 건설된 다키아 속주는 정확히 이 영역에 건설되었다. 다만 다키아 인이라 불린 민족의 활동 영역은 그보다 더 넓을 때도 있어서 다뉴브 강 이남까지 내려오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림으로 그려보면 대강 요 정도.

루마니아 글씨 아래에서 카르파티아 산맥이 동서 방향으로 가로지르다가 다뉴브 강과 만나면서 끝나는 것이 보인다. 이 부분을 따로 트란실바니아알프스 산맥이라고도 부르며, 이 산맥을 기준으로 북쪽은 지금의 트란실바니아 지방, 남쪽은 왈라키아 지방으로 나뉜다. 자세히 보면 올트(Olt) 강이 트란실바니아알프스 산맥을 가로질러 남북으로 흐르면서 두 지방을 서로 연결시켜 주는 것을 볼 수 있다.

1 지리적 특징

1.1 모에시아와 트라키아

다키아를 이해하려면 모에시아와 트라키아와 같은 중요 인접 지역을 먼저 살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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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 시절의 로마 제국 속주 지도. 지금의 이스탄불을 포함하는 불가리아 지역에 트라키아가 있고, 그 주변에 상류 모에시아(Moesia Superior) 속주 및 하류 모에시아(Moesia Inferior) 속주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지금의 불가리아가 있는 영역이 바로 모에시아와 트라키아 속주로써, 어디까지가 헬레닉 영향권(펠로폰네소스)인지 보기 애매하게 만드는, 간지판도를 위한 지리적 경계선과, 실질적 경계인 문명 권역 한계가 겹치는 지역이다. 하지만, 이 지역은 분명히 다뉴브 강으로 구분이 안구정화 판도 깔끔하게 될 뿐더러, 흑해에 인접해 있다는 점 때문에 굉장히 쏠쏠한 가치가 있었고, 실제로 로마에 복속되자 빠르게 동서로 속주를 분리할 정도로 발전한다. 그 특히, 트라키아의 경우 인류 역대 최고의 부동산(...)인 비잔티움이 있는 곳으로, 바로 이 비잔티움이라는 개척미달 지역이 그 유명한 새로운 로마, 콘스탄티노플이 된다. 트라키아 서남부가 계륵이라서 아쉽다.

해서, 이 지역은, 페르시아가 "오 땅 좋네!"하고 와서 사트라피를 설립해 알박기를 시전했을 정도로 쏠쏠한 땅덩이인데, 마땅한 패권이 정립되어있지 않았기에, 지중해 세계에서 이미 오래전 부터 이어져 온 문명이 있는 상태에서, 옆에 눌러앉은 유민 정착촌 중에서 제일 꿀땅을 차지한 것이 바로 로마였고, 남은 쓸만한 땅이 바로 저 모에시아-트라키아였으며, 따라서 이곳은 후발주자들이 새로운 문명을 건립하기 적절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헌데, 이 지역에 초기에 정착을 시도한 트라키아 부족들이 문명에 도달하지 못했는지, 그 페르시아도 사트라피 개발살나고 철수한 것은 또 뭐인지, 심지어 그 로마제국의 숨통마저 조이는 유지 난이도를 자랑하는 땅이었다.

그것은 바로, 이 지역의 함정카드, 미칠듯한 후발주자의 폭주의 원흉이 다키아에 있었다. (...)

1.2 다키아 - 카르파티아 산맥의 함정카드

본격 지중해 판도 파괴자. 본격 로마제국 지도 파괴자. 세괴지도 생성기. 데쥬레 파괘전투종족. 지리적 안구테러
이게 다 왈라키아 때문이다.

모에시아 및 트라키아의 위쪽에 있는 다키아는 카르파티아 지역, 즉 판노니아의 흑해 방향 경계에 붙어있는 땅인데, 이 카르파티아 지역의 특징은 카르파티아란 이름 답게 카르파티아 산맥이 다른 땅덩이로부터 이 지역을 격리한다는 것이다. 즉, 천연의 성벽이 있는 셈이므로, 상당히 쏠쏠한 방어선이 되어 줄 것...이라 생각했다면 착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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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카르파티아 지역의 서편은 뻥 뚫려있으며, 카르파티아 지역의 동편에는 왈라키아라는 희대의 함정이 알박혀있다. 카르파티아 산맥이 커버하지 못하는 약간 삐저나와있는 왈라키아 지역은 그야말로 뻥 뚫린 대로와 같다. 그냥 뚫려있기만 하면 상관없는데, 문제는 그 주변에 각종 전투종족이 득시글거린다는 것. 서편에서는 켈트와 게르만이 몰려오고 동편에서는 스키타이 등의 중앙아시아 전투민족유목민족이 몰려오더니, 갑자기 바이킹이 몰려오고, 볼가강에서 멀티를 펼치는 또다른 전투 유목민 불가르, 마지막으로 슬라브가 몰려오는 정말 막장스러운 땅이다. 고대 문명이 망조가 들때마다 어김없이 튀어나오는 게 그지 깽깽이 유민의 침략인데, 이 곳은 그게 실시간으로 이어져온, 문명이 성립되기에는 헬게이트 수준의 조건을 갖춘 곳이다. (...)

해서, 이 땅은 그냥 모에시아와 트라키아에 눌러 앉으려는 유민들을 파.괘.하는 문자 그대로 헬게이트(...)역할 말고는 하는 게 없는 듣보잡 중의 듣보잡이었는데...

2 다키아 왕국

하지만, 이런 자비없는 땅에 왕국을 창립한 용자급 전투종족 다키아 인이 튀어나온다.

다키아 왕국은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까지 현재 루마니아 지역에 있었던 고대왕국이다. 로마와 다뉴브강 하류 북부의 패권을 둘러싸고 두번 전쟁을 치렀고, 도미티아누스 시절과 트라냐누스 시절에 로마와 격전을 치렀으나 결국 다키아 전쟁에서 패해 멸망했다. 최후의 왕은 데케발루스[2]

위에 설명했듯이, 원래 이곳은 다뉴브 강과 산악지역에 둘러싸여 있어서 그리스와 로마가 두각을 나타내던 고대에는 그저 듣보잡 지역이었다. 게다가 주변에는 켈트족, 게르만족 같은 야만족들이 둘러싸여 있어서 문명의 개화는 아무래도 늦을 수 밖에 없었다. 위에 설명했듯이, 아니, 그 이전에는 켈트족이 트라키아인을 개발살내러 지나가는 등 그야말로 거지떼 난입 아포칼립스(...)의 현장이었다. 그리고 꿀땅은 모에시아-트라키아니 부동산 가치(?)로서도 듣보잡이었으므로, 1세기 이전에는 아예 아무 기록조차도 없다. 진짜로! 이 지역에 다키아란 이름이 붙은 것부터가 신기할 수준이다.

로마제국이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잡으면서, 유민폭풍의 빈도는 잦아들었는데,[3] 그래도 여긴 결코 살 곳이 못 되었었다. 근데 그러던 와중에 여러 듣보잡 (...) 부족들이 모여들어 전투민족 다키아인으로 각성하더니, 기원전 1세기가 되어 브레비스타 왕(82-44 BC)이 여러 부족들을 다키아족의 이름 아래 규합하고 흑해연안과 중부유럽의 보헤미아까지 이르는 왕국을 세워낸 것이다! 브레비스타 왕이 죽은 후 분열되어 증발하나 싶었으나, 이후 루보보스테스 왕이 거지떼 켈트족을 몰아내고 다키아인의 패권을 세우게 된다. 프랑크 제국 꼴은 안 났다. 이후 데케발루스 왕이 올라서 제국을 확장하며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문제는 바로 그 아래에는 그 로마제국이 군사적 최전성기를 맞이한 상태였다는 것이었고, 다키아는 아직 온전한 문명 단계에 도달하기엔 상당히 먼 상태였다.

다키아인들의 빠른 확장은 당연히 비교적 최근에 모에시아와 트라키아를 정리해놓은 안구정화 판도를 만든 로마제국의 어그로를 미칠 듯하게 끌었다. 단순히 "웬 듣보잡이 튀어나왔네?" 하는 수준을 넘어서는, "중대 적성국이 튀어나왔다!" 급이었던 것이다. 당시 로마는 게르만 족의 산발적인 일리리쿰 침입 때문에 상당히 고생하고 있었는데, 다키아 왕국까지 다뉴브 강을 넘어오게되면 '서쪽에 게르만, 동쪽에 다키아'라는 버틸 수 없는 웨이브를 맞을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다키아의 확장은 로마에게 있어 눈엣가시였다. 일단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부터 로마는 다키아와 산발적으로 충돌하였고, 발칸반도 북부와 다뉴브강 유역에서는 계속 작은 충돌이 이어졌다.

기원후 87년 코넬리우스 푸스쿠스가 지휘한 로마군은 다키아에게 대패했고, 푸스쿠스는 전사했다. 로마군은 복수하러 갔다가 다른 지역에서 도미티아누스가 게르만족의 일파인 마르코마니족에게 패하는 바람에 다키아와는 강화를 맺고 철수했다. 이 강화는 매우 굴욕적이었고, 로마는 강화조건으로 다키아에게 기술자와 군사고문, 그리고 배상금을 지불할 정도였다. 이 시점에서 로마는 점점 다키아인을 '워낙 막장스런 환경이라서 듣보잡이던 땅에 떠억하니 왕국을 세운 막강한 전투종족'으로 여기기 시작한다.

3 다키아 원정

도미티아누스의 뒤를 이은 트라야누스는 이를 매우 굴욕적으로 생각했고 다키아에 적대적인 정책을 취했다. 다키아가 모에시아를 대규모로 침공하려는 시도를 하지는 않았으므로, 매우 위협적인 거대 야만족 세력의 덩치를 줄여놓으려는 시도였는데, 공교롭게도 이렇다 할 이름이 붙은 것부터가 신기할 정도의 벽지 중의 벽지 다키아에 갑자기 금광과 은광이 발견된다. 다키아가 듣보잡 땅에 세워진 왕국이긴 해도 카르파티아 지역은 그럭저럭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었다.[4] 그리고 옆에 붙은 흑해로 무역이 가능한 지역이기도 하다. 그게 하필 초원지대 쪽으로 뻥 뚫린 왈라키아란 게 함정이지만 그런 땅에 새로 발견된 금맥은 최소한 자원적 면에서는 신흥 왕국의 정립이 가능한 보증 수표였다.

다키아와 로마는 다시 전쟁상태에 들어갔고, 다뉴브 강 유역에서 예전처럼 계속 산발적인 전투가 이어졌다. 이때 다키아인들이 보여준 무용은 굉장했고, 로마군은 다키아인들이 팔크스(Falx)를 가지고 스쿠툼+사지 절단물을 찍는 광경을 경험했을 정도다.

파일:OPw4sus.jpg (...)

팔크스는 원래 라틴어로는 평범하게 그냥 '낫'이란 의미인데, 나중에 그와 비슷하게 생긴 무기를 지칭하는 것으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이 다키아인들의 팔크스는 날 끝을 굽힌 ㄱ자 형태의 곡도로써, 도끼의 찍기 성능과 창의 찌르기 기능을 합친, 만들기 나름이긴 하지만 좀 더 도끼 혹은 칼에 가까운 일종의 언월도였다. 현대에 사용되는 무기 중에서는 구르카 족의 쿠크리를 생각하면 된다. 간단히 말해 조선낫 같이 생긴 무기다. 농담이 아니라, 팔크스를 길게 만들면 창이 되고, 중간으로 만들면 칼이 되고, 짧게 만들면 낫이다. 다키아인들은 이 팔크스를 사용해 전방의 군단병 대형의 방패를 쪼개버려서 개발살 내고, 그 과정에 군단병들의 팔뚝도 덤으로 싹둑 잘라버렸다. 이들은 단순히 창칼 들고 덤비는 광전사가 아니라 정확하게 방패 옆으로 글라디우스를 겨누는 팔을 노려 대각으로 방패와 함께 팔을 절단하는 '충격보병+광전사'였던 것이다. 이놈의 팔크스에 하도 시달린 나머지, 너무 불편해서 순식간에 폐기되었던 로리카 세그멘타타(갑옷)는 다키아 원정 때 재생산 되었으며, 로마군은 라멜라 아머(찰갑)를 팔에도 덧대서 초중무장을 한 상태로 다키아인과 싸워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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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쿠툼을 슥슥, 로마군도 쓱쓱

마땅한 병법이 없는 야만인을 상대로 강한 위력을 보이는 레기온이 게르만/켈트가 렙업해서 오는 것을 막기 어려워져갔던 것은 상대가 진보한 것이니 당연한 거라 쳐도, 신생 부족기반 왕국이 저 정도로 로마군에게 피해를 입힌 것은 굉장한 것이다. 더군다나 이들은 새로이 등장한 것 치고는 무장 수준도 정말 좋았다. 당시 비문명권 부족들의 무장 수준이 날이 갈수록 향상되어 점점 서로마제국 멸망의 날이 다가오고 있기는 했어도, 그래도 아직 1세기다. 게르만족의 무장 품질이 여전히 듣보잡 수준이던 시기다. 이에 비해 다키아인들은 최소한 방패는 들고 나왔으며, 사슬갑옷이나 찰갑과 투구로 완전 무장한 상급병사들까지 있었다.

사실 장비의 수준은 다키아인의 위력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이유 밖에 되지 못한다. 진짜 중요한 건 다키아인들은 이미 통합된 군기를 따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더 이상 떼거리 부족민이 아닌 정규화된 다키아 군이었다. 장비만 쥐어주면 바로 몸통을 내놓고 돌격하는 야만 광전사에서 곧바로 극초기 로마군으로 돌변할 수 있는 조직화가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광전사들을 선발 충격군으로 내세우고 조직화된 중보병들을 중추에 배치시키고 진형을 짜는 등, 로마군을 아주 환장하게 했다.

결국 트라야누스는 밥줄에 돈줄까지 생긴, 호전적이면서 켈트/게르만 부족들의 폭풍에서 살아남은 막강한 지구력까지 가진 전투종족이 흑해와 다뉴브를 넘어 골드 러쉬(...)를 오는 광경을 상상한 모양인지, 다키아의 완전 정복을 위한 전쟁을 고려하게 된다.

그리하여, 101년, 트라야누스는 아예 다키아를 멸망시키려고 작정하고 대규모 원정을 실시했다. 이 원정은 로마제국 역사상 가장 많은 병력이 투입된 속주 단위 대규모 전쟁으로서, 갈리아 원정을 떠났던 카이사르도 한 수 접어줄 수준의, 로마제국 2000년 역사 상 전무후무한 규모의 전쟁이었다. 이것은 사실 상 다키아 왕국에 고대 로마 버전 십자군이 선포된 급이다. 로마가 동원한 총병력은 15만~20만. 정규 로마 군단병 뿐만 아니라, 각 속주나 동맹국에서 여러 병력을 제공했다. 여기에 맞선 다키아군은 4만명으로, 4-5배의 병력을 동원한 대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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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군을 자주 골탕먹였던 다키아 왕국은 이런 대규모 원정은 버틸 여력이 없었고, 끝내 101-102년의 원정에서 수도를 빼았겼으나 데케발루스는 산악지역으로 도피하여 계속해서 게릴라전을 펼쳤다. 트라야누스는 아예 저항을 뿌리뽑으려고 105-106년 다시 원정을 단행했고, 데케발루스는 로마의 대병력에 쫓기다가 결국 포위되자 포로가 되길 거부하고 자결했다.

이제 겨우 새로 생겨난 나라가, 그것도 아직 완전히 문명을 정립하기도 이전인 극신생국가가 군사적 최전성기 로마의 총력적 침공을 5년간 받아낸 것을 보면 정말 대단한 것이다. 애초에 트라야누스는 다키아 원정을 어설프게 갔다가 베트남 원정(...)이 될 수 있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다키아의 완전 정복을 이룰 수 있도록 철저히 단단히 요새를 하나하나 박아가며 진출했다. 이에 비할 수 있는 것은 훗날 바실레오스 1세를 상대하던 불가리아가 30년을 버틴 것인데, 그때는 로마가 망한다 싶던 위기시기였다. 이 불가리아가 다키아 원정 수준의 침공을 받았다면 다키아의 기록인 5년을 버티는 것도 힘들어 보인다.

4 다키아 속주

이로써 다키아 왕국은 완전히 멸망했고, 로마는 이 지역에 다키아 속주를 설치하고 트라야누스는 초대 총독에 카이우스 디오를 임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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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로마 영토 상황을 현대의 국경선과 겹쳐서 나타낸 지도. 노란색 영역이 다키아 속주.

183년 콤모두스 황제 시절에 다시 이 지역에서 전쟁이 발발하는데, 다키아족의 독립운동인지, 아니면 게르만족같은 야만족의 침략인지 자세한 정황은 알려져있지 않다.

한편 다키아 주변의 게르만족인 고트족은 계속 다키아 속주를 파상적으로 공격했고, 로마는 이에 견딜 수가 없어서 275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결국 다키아 속주를 포기하고 이 지역에 주둔하던 군단의 기지를 다뉴브강 남쪽으로 옮겼다. 트라야누스가 다키아를 멸망시킨 것은 일종의 순망치한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그나마 게르만족을 견제해주던 다키아를 완전히 멸망시켜서 로마 동부의 핵심지역인 발칸 반도 쪽이 게르만족에게 직접 노출되었고, 견제세력이 없는 게르만족만 성장시켜줘서 로마의 최후를 앞당겼다고도 볼 수 있다. 솔직히 금은광이 있다는 것이 장점이긴 했지만 위치가 교두보 수준이고 경계선도 그냥 산맥 아니면 평지인지라 적의 침략을 막는 게 힘들어 비용이 더 들었다.

이후 336년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이 지역을 다시 수복한다. 로마 동서 분열 이후 이 지역은 동로마 제국의 영역이 되고, 이후 중세로 넘어가며 루마니아가 된다.

이런 복잡한 역사 때문에 현재 루마니아인들의 기원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주로 받아들여지는 주장에 의하면, 루마니아측에서는 다키아인들은 로마인들과의 결혼 등을 통해 로마화 되었고, 그들의 후손이 루마니아인들이라고 한다. 이 주장의 근거는 다키아 속주 포기 등의 이유로 대부분의 로마인들이 도나우 강 남쪽으로 남하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루마니아에서는 데케발루스를 로마에 맞선 루마니아 독립의 선구자로 추앙한다.


루마니아에 있는 데케발루스 기념상

하지만 다른 이들은 다키아인들은 모두 쫓겨났고, 루마니아인들이 쫓긴 다키아인들을 대신해 들어온 로마인들의 후예라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이들은 현재 루마니아어가 로망스어군에 속한다는 점을 들고 있다. 루마니아(Romania) 국호는 Roma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루마니아에서도 이 설을 지지하는 사람이 있다. 악명높은 독재자 차우셰스쿠도 자신이 다키아와 로마의 적법한 후계자라고 주장하였다.

5 기타

대거의 어원이 다키아에서 나온 것이라는 설이 있다. '다키아 인', '다키아의 것' 등을 의미한 속화 라틴어 'daca'가 변해서 나온 말이라고. 영문 위키낱말사전 참고.

후기 동로마 제국에서 사용한 군기 비잔티움 드라코에서 다키아 지역이 로마에게 준 영향을 제대로 볼 수 있디. 원조 다키아 드라코는 개머리 모양 장식에 물고기 같이 생긴 몸체를 붙여놓은 것이었는대, 이것이 좀더 간지나게 아예 용 대가리로 개머리 모양을 대체한 것이 비잔티움의 드라코. 참고로, 다키아의 영향은 그냥 아주 펠로폰네소스발칸 반도 전역에서 발견되는대, 세르비아와 같은 다뉴브 강 주변 지역의 나라들에 전통으로 이어저오는 각종 드라코들로 짐작할 만하다.

안티바이러스 프로그램인 비트디펜더는 회사의 국적이 국적이다보니 아예 대놓고 원조 다키아 드라코를 박스 이미지로 쓰고있다. 꽤나 간지나게 디지털 시대에 걸맞는 이미지로 개량한 이미지가 박스 이미지에 그려저있다. 처음 보는 사람은 그냥 간지난다고 생각하고 땡이지만 다키아 드라코가 뭔지 아는 사람이 보면... 어쩌면 애국 마케팅일지도 모른다.
  1. 지금의 헝가리
  2. 라틴어식 이름이다. 다키아식 이름은 디우르파네우스(Diurpaneus).
  3. 달마시아 (일리리쿰) 속주를 막강한 로마를 뚫고 넘어올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뉴브강이 실질적으로 유일한 방어선이긴 하지만, 그걸 뚫기가 어려우니까.
  4. 애초에 농사가 되기 때문에 후대에 마자르족이 유목 생활을 포기하고 판노니아와 트란실바니아에 눌러앉을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