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역대 국왕 | ||||
초대 고왕 대조영 | ← | 2대 무왕 대무예 | → | 3대 문왕 대흠무 |
시호 | 무왕(武王) | |
연호 | 인안(仁安) | |
성 | 걸걸(乞乞) / 대(大) | |
휘 | 무예(武藝) | |
생몰년도 | 음력 | 680년경(?) ~ 737년 |
재위기간 | 음력 | 719년 ~ 737년 (18년) |
1 개요
발해의 2대 왕. 대조영의 장남이다. 719년에 즉위해 737년에 사망했다. 당측의 기록에 의하면 시호는 무왕(武王). 발해에서 왕을 칭하는 단어로 전해지는 가독부의 용례가 이미 무왕대에 확인된다.
2 생애
정확한 출생연도는 알 수 없다. 다만 대무예의 동생인 대문예가 705년에 당에 숙위로 입조한 점으로 보아 늦어도 680년경에는 출생하였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680년경은 그의 아버지인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 집단의 일원으로 당에 의해 영주로 강제 이주되어있을 때이다. 그의 유년시절은 아직 발해가 건국되기 전이였던 것이다.
698년 발해가 건국되고 719년 고왕(대조영)이 사망하자 즉위했다. 연호를 인안(仁安)이라 하였다. 그리고 발해 주변에 위치한 여러 나라들을 정복했다. 이러한 발해의 세력 확장에 당은 거슬렸는지 견제를 걸어오기 시작했다. 발해의 후방에 위치한 흑수말갈을 당의 세력권으로 편입시킨 것이다. 이에 무왕은 동생 대문예에게 흑수말갈 토벌을 명했다. 대문예는 원정군을 이끌고 흑수말갈의 경계에 이르러 귀환했다.
3 영토 확장
육로와 수로로 당나라를 선빵 공격 테러하여 발해를 무시하지 못하는 위치에 올려놓았다. 또한 여러 말갈족을 복속시켰는데 말갈중 가장 다루기 까다롭다는 흑수말갈또한 재상이자 외삼촌인 임아(任雅)를 시켜 이때 복속시킨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흑수부는 무왕의 정벌 시기도 상당 세력을 유지하였고, 애초에 흑수부 전체를 복속시킨 것도 아니었다. 사실 흑수부 자체가 다른 말갈 전부 더한 것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세력이 크고 수가 많았다. 사실 중국에서는 지명 + 말갈로 상대를 지칭했기 때문에, 일정 위치 외곽은 전부 흑수부로 보았다. 시베리아 쪽에서 몇몇 부락이 더 발견되면 그것도 흑수부가 되는 식이다.
3.1 당나라 공격
당나라 육로 공격은 영주를 통하여 당나라의 동북 변방을 공격 평로번진의 2만병력과 싸워 사상자가 1만명정도였다고한다.그이후 당의 장수가 큰돌을 주요통로에 400리에 걸쳐서 쌓음으로써 발해군을 막는다. 이 공격보다는 장군 장문휴가 산동반도의 등주를 공격한뒤 자사 위준을 죽인 해상 공격이 훨씬 유명하다.
이에 열받은 당나라는 1만의 병력으로 발해를 공격하는 한편 신라에게 발해를 칠 것을 요청하여 신라 성덕왕은 5만 군대를 발해 남쪽으로 보내나 당군은 마도산에서 거란 - 돌궐 연합군에게 궤멸당하고 신라군은 싸우러 가다가 눈이 많이 쌓여 못 가겠다는 이유로 별 성과없이 돌아왔다. 이 기록은 신라군이 진짜로 눈 때문에 못 갔을 수도 있지만, 굳이 발해와 원수져가며 싸울 이유와 의지가 없어서 당나라한테 보여주기식으로 대충 파병 시늉만 하고 돌아왔다고도 본다. 사실 이 당시 신라는 나당전쟁 이후 삐진 당과 외교가 거의 끊어지다시피해서[1] 통일 후의 영토를 공식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하는 상태였는데, 이 지원 요청을 계기로 대동강 이남의 지배권을 확실히 인정받았다. 어쨌거나 발해가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면서 신라 또한 북방에 성을 쌓아 전쟁에 대비하였다.
흑수말갈이 당나라와 연계하여 발해를 좌우에서 압박하려 하자 동생 대문예와 외삼촌 임아상에게 명하여 흑수말갈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대문예는 당나라가 고구려보다 강하고 발해는 고구려보다 약하다는 핑계를 대며 거부하고 당나라로 튀어 버렸다. 고구려보다 약하다는 말이 딱히 틀린 말은 아닌게 당시 발해의 인구와 생산성이 고구려의 인구와 생산성보다 좋을 리는 없다. 한 나라가 망할 정도의 전쟁을 겪은 지 60년밖에 안 된 시점이다. 이후 대문예는 죽을 때까지 당나라에서 벼슬하며 살았고 죽고나서 발해로 돌아오게 된다.
이는 단순히 국력 문제로 인한 성공 가능성의 희박으로 거부한게 아니라, 왕위 계승 문제가 얽혀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에 형 대무예는 당나라에게 대문예를 처치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당나라는 이를 거부하고 대문예를 이용하여 발해를 분열시키려 했다. 대무예는 암살자를 보내 대문예를 죽이려 하나 실패했다.
내정에서는 친당파들을 투옥해버리는 위엄을 발휘했으나, 당나라와의 관계가 호전된 후 이들을 석방했다.
공격적이고 냉정한 성격을 보인다는데서 고구려의 대무신왕과 비슷한 포지션이 아닐까 생각된다. 대무신왕이나 무왕이나 건국 초기 정복군주라는 공통점에다 가까운 가족에게 냉정했고 모험적인 군사활동을 벌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런 차가운 면모는 건국초에 국가의 기틀을 잡아야한다는 부담을 가지고 스스로를 통제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모양이다.
일반적으로는 선왕과 함께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비교되는 편이다.
4 외교
발해 건국 30년째인 727년 8월에 일본으로 처음 사신을 보내 국교를 맺었다. 일본으로 가는 루트는 부산 쪽까지 내려가서 대한해협을 넘는 게 가장 가깝고 안전한 루트이지만,[2] 남쪽은 아직 별로 친하다고 할 수는 없는 신라 땅이니 동해 바다를 관통해서 가는 수밖에 없었다. 727년의 첫 사절단은 폭풍을 만나 홋카이도로 표류했고 아이누족과 싸우다 여덟 명만 살아남아서 728년 겨우 교토에 도착해 덴노에게 국서를 전달할 수 있었다. 이 때부터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약 200여년 동안 발해사 34회, 견발해사 12회 등 빈번한 교류가 있었다.
5 기타
발해의 왕 중 대조영 다음으로 유명해 보인다. 아무래도 당을 두들겨 패고도 사실상 당이 제대로 대항을 못했다는 점이 민족주의 사관에서 보기에 띄우기 좋기 때문인 듯. 사실 분명히 대단한 업적이기는 한 게, 신라나 고려처럼 중국의 침략을 막아내고 격퇴한 사례는 있지만 중원 본토를 공격한 건 이 시기가 유일하고 이후 약 1300년 동안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 한번도 이와 같은 사례가 없다는 점에서 더더욱... 사실 이 시기 당은 발해보다 중동, 중앙아시아 지역에 관심이 더 많았다
아들로 대도리행(大都利行)이 있다는 기록이 전해지는데 이름말고 알 수 있는 것이 없다.
발해 왕들 중 유일하게 릉의 소재가 판명된 왕. 능호는 진릉이다. 그러나 진짜 진릉인지는...
6 연대기
719년 무왕 즉위
720년 9월, 당나라가 낭장(浪將) 장월래(張越來)를 보내다.
720년 왕자 대도리행(大都利行)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다.
721년 대수령(大首領)을 당에 파견함.
722년 미발계(味勃計)를 당나라에 보내 매를 바침
724년 하조경(賀祚慶)을 당나라에 보내 새해인사를 하다.
725년 오차지몽(烏借芝夢)을 당나라에 보내 새해인사를 하다.
726년 대도리행(大都利行)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다.
727년 9월 21일 고인(高仁)등을 일본에 보내 교류하다.
727년 이진언(李盡彦)을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내다.
728년(일본서기 성무천황 5년) 1월 17일 발해 고제덕(高濟德)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다.
728년(일본서기 성무천황 5년) 2월 16일 일본이 발해에 사신을 보내다.
728년 어부수토( 夫須討)를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냄
729년 아우 대호아(大湖雅)와 대림(大琳)을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내다.
730년(일본서기 성무천황 청평 2년) 8월 29일 발해에 갔던 일본 사신이 돌아오다.
730년 9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730년 아우 대낭아(大郞雅)를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내다.
731년 1월 당나라에 새해인사를 하다.
732년 대성취진(大姓取珍)등 120인을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내다.
732년 대장군 장문휴를 보내어 당나라 등주(登州)를 공격하여 그곳 자사(刺史) 위준(韋俊)을 죽였다.
733년 1월 당나라가 대문예(大門藝)를 보내어 발해를 공격하다.
733년 대무예(大武藝)가 자객을 보내어 대문예를 살해하다.
736년 수령(首領) 율기토(聿棄討)를 당나라에 파견함.
737년 무왕이 죽고 그의 아들 대흠무가 즉위하다.
7 《신당서》 기록
아들 대무예(大武藝)가 즉위하여 크게 영토를 넓히자 또 전중시(殿中寺)와 종속시(宗屬寺)를 두었는데, 각 시마다 대령(大令)이 있다. 문적원(文籍院)에는 감(監)을 두었다. 영과 감 밑에는 소령(少令), 소감(少監)이 각각 있다. 태상시(太常寺), 사빈시(司賓寺), 대농시(大農寺)에는 각 시마다 경(卿)이 있다. 사장시(司藏寺), 사선시(司膳寺)에는 각 시마다 영(令)과 승(丞)이 있다. 주자감(冑子監)에는 감장(監長)이 있다. 항백국(巷伯局)에는 상시(常侍) 등의 관직이 있다. 무관(武官)으로는 좌맹분위(左猛賁衛), 우맹분위(右猛賁衛), 웅위(熊衛), 비위(羆衛), 남좌위(南左衛), 남우위(南右衛), 북좌위(北左衛), 북우위(北右衛)의 8위가 있으며, 각 위에는 대장군(大將軍) 1명과 장군(將軍) 1명씩 있었다. 대체로 중국의 제도를 본뜬 것이 이와 같았다 관리의 품계는 질(秩)로 표현하는데, 3질 이상은 자색 옷(紫服)에 상아 홀(牙笏)과 물고기 모양의 금빛 주머니(金魚)를 찬다. 5질 이상은 분홍색 옷(緋服)에 상아 홀과 물고기 모양의 은빛 주머니(銀魚)를 찬다. 6질과 7질은 연분홍색 옷(緋衣)을 입고, 8질은 녹색 옷(綠衣)을 입는데, 모두 나무 홀(木笏)을 찼다. 발해의 민간에서 귀중히 여기는 것은 태백산의 토끼, 남해의 다시마, 책성의 된장, 부여의 사슴, 막힐의 돼지, 율빈의 말, 현주의 베, 옥주의 솜, 용주의 명주, 위성의 철, 노성의 벼, 미타호의 가자미이다. 과일로는 환도의 오얏과 낙랑의 배가 있다. 나머지 풍속은 고구려나 거란과 비슷하다.
유주절도부(幽州節度府)동북의 여러 종족들이 두려워 복속하였다. 또 사사로이 연호를 인안(仁安)으로 고쳤다. 현종이 책봉을 내려 왕위 및 관할 영역을 세습하도록 하였다. 얼마후 흑수말갈(黑水靺鞨)의 사자가 입조하자, 현종은 그 지역에 흑수주(黑水州)를 세우고, 장사(長史)라는 관직을 설치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대무예가 신하들을 불러 의논하였다.
"흑수말갈이 처음에는 우리에게 길을 빌려 당나라와 통교하게 되었고, 지난번 돌궐에게 토둔(吐屯)을 요청할 적에도 모두 우리에게 먼저 알렸다. 그런데 지금 당나라에 관리를 요청하면서 우리에게 알리지 않았으니, 이는 반드시 당나라와 함께 앞뒤에서 우리를 공격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동생 대문예(大門藝)와 외숙 임아(任雅)에게 군사를 일으켜 흑수말갈을 치게 하였다. 대문예는 일찌기 인질로 당나라 수도에 머무른 적이 있었으므로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대무예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흑수말갈이 당나라에 관리를 요청하였다 하여 우리가 공격한다면 이는 당나라를 등지는 셈이 됩니다. 당나라는 대국으로 군사가 우리보다 만배나 되는데 그들과 원한을 맺는다면 우리는 곧 망할 것입니다. 옛날 고구려가 전성기에 군사 30만으로 당나라와 맞서 싸운 것은 굳세고 강했다고 할 만하지만, 당나라 군사가 한번 이르자 땅을 쓸 듯이 다 없애 버렸습니다. 지금 우리의 군사는 고구려에 비해 삼분의 일밖에 되지 못하니, 임금께서 저들의 뜻을 어긴다는 것은 不可합니다."
그러나 대무예는 듣지 않았다. 군사가 국경에 이르러 대문예가 다시 상소하여 간절하게 간하였다. 대무예는 화를 내어 사촌형 대일하(大壹夏)를 보내어 대신 통솔케 하고대문예는 소환하여 죽이려 하였다. 대문예가 두려워서 사잇길을 통하여 귀순해 오니, 현종이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을 제수하였다. 대무예가 사신를 보내어 대문예의 죄악을 폭로하고, 죽이기를 요청하였다 현종은 대문예를 안서(安西) 지방에 거처하라고 조서를 내리고, 대무예에게는 "대문예가 곤궁에 처하여 나에게 귀순해 왔으니, 의리상 죽일 수가 없어서 벌써 나쁜 곳으로 유배보냈다"라고 꾸며서 답장을 보냈다. 아울러 발해 사신을 머물르게 하여 보내지 않고, 별도로 홍려소경(鴻臚少卿) 이도수(李道邃)와 원복(源復)에게 칙서를 보내도록 전하였다. 대무예가 전후 사실을 숨긴 알아채고 글을 올려 "陛下는 거짓을 天下에 보여서는 아니 되오"라고 비난하니, 그 뜻은 반드시 대문예를 죽이라는 데 있었다. 현종은 이도수와 원복이 국가의 기밀을 누설한 데 대하여 노하여 모두 좌천을 시키고, 거짓으로 대문예를 내쫓았다고 회답하였다.
10년 뒤에 대무예가 장군 장문휴(張文休)를 보내어 해적을 거느리고 등주(登州)를 치니, 현종은 급히 대문예를 보내어 유주(幽州, 지금의 북경)의 군사를 동원시켜 반격하는 하고, 태복경(太僕卿) 김사란(金思蘭)을 신라에 보내어 군사를 독려하여 발해의 남쪽를 공격하게 하였다. 마침 날씨가 매우 추운 데다 눈이 한 길(3미터)이나 쌓여 군사들이 태반이나 얼어죽으니,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대무예가 그 아우에 대한 원한이 풀리지 않아서 자객을 모아 당나라 동쪽 수도인 낙양(洛陽)에 들여보내 길에서 저격케 하였으나, 대문예는 자객들을 물리치고 살아났다. 하남부(河南府)에서 자객들을 체포하여 모두 죽였다. 대무예가 죽자, 발해에서 사사로이 무왕(武王)이라 시호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