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성 전투(東萊城之戰) | ||
날짜 | ||
1592년 5월 25일(음력 4월 15일) | ||
장소 | ||
조선 경상도 부산 동래성 | ||
교전국1 | 교전국2 | |
교전국 | 조선 왕국 | 쇼쿠호 일본 |
지휘관 | 송상현† 이각 박홍 조영규† 이언성 홍윤관† |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마쓰라 시게노부 아리마 하루노부 오무라 요시아키 고토 스미하루 |
병력 | 2500~3000명 군민 포함 2만명 | 약 3만여명[1] |
피해 규모 | 3000명 전사, 500명 포로 | 100명 전사, 400명 부상 |
결과 | ||
일본군이 승리하고, 경상도 및 충청도로 진군하게 됨. |
파일:/image/005/2008/07/03/080703 07 002.jpg
동래부순절도. 이 사진으로는 잘 안 보이지만 그림을 확대해서 보면 성문에 그 유명한 '팻말 문답'이 묘사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 그림 곳곳에 당시의 상황이 잘 나타나 있는데, 성 안에는 지붕에 올라가 기왓장을 던지며 왜군에게 저항하는 여성들도 볼 수 있고, 성 안 가운데에는 북향사례를 올리는 송상현의 뒷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그림 좌측 상단에 백마를 탄 장수는 경상좌병사 이각으로 전투에서 도망가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
1 소개
임진왜란의 두 번째 전투.
부산진 전투에서 정발 장군이 지키는 부산진을 함락시킨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은 동래성[2]으로 몰려들었다.
당시 동래성은 동래부사 송상현이 3천여명의 병력으로 지키고 있었다. 송상현 역시 부산진에 있던 왜관의 일본인들이 모두 떠나는 등 일본인들의 이상 징후를 느끼고 성 주변에 나무를 많이 심고 성벽 근처에는 마름쇠를 깔아두는 등 방비에 만반의 준비를 했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병력이 너무 많았던 탓에 이런 준비들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결국 1592년 4월 15일, 일본군은 동래성에 도착했다. 경상좌병사 이각과 경상좌수사 박홍이 동래성을 구원하러 왔지만, 병력이 열세였던 탓에 딱히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결국 이각은 동래성을 구한답시고 산에 진을 치겠다며 빠져버렸다. 양산군수 조영규도 동래성을 구원하러 왔지만 동래성 4km 전방에서 후퇴하고 만다.
고니시는 동래성 앞에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라고 쓴 나무판을 보였는데 송상현은 싸우다 죽는 것은 쉽지만, 길을 빌려 주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라는 답했다. 이후 일본군은 공격을 시작했다.
송상현은 조금이라도 더 방어를 수월하게 만들기 위해 성벽 위에 목책을 쌓았다고하며 일본군 역시 조선군의 활 공격 때문에 생기는 병력손실을 최소화 시키기 위하여 적장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궁수들을 유인했다고 한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일반 백성들은 물론 아녀자들까지 일본군에 맞서서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일본군은 동래성의 취약점인 동래성 동문을 집중공격해 결국 동래성으로 진입했다.
동래성의 함락이 눈앞에 다가오자, 송상현은 조복으로 갈아입은 뒤 북쪽을 향해 절을 하고 나서 고향의 부모님에게 보내는 시 한수를 썼다.
孤成月暈 고립된 성을 적이 달무리처럼 에워쌌고 列鎭高枕 여러 진들은 단잠을 자고 있네[3] 君臣義重 군신간의 의가 중하여 여기서 죽게되니 父子恩輕 부모님의 은혜를 소홀히하는 불효를 용서하소서 |
그 후 송상현은 몰려든 일본군과 끝까지 싸우다가 결국 일본군의 칼에 찔려 전사했는데, 송상현과 면식이 있던 마츠우라 시게노부(조선측 기록에는 평조익平調益)이라는 일본군 장수가 그에게 피신하라고 했지만 이를 거절했다. 송상현의 애첩과 동래성의 아낙들은 지붕위에 올라가서 기와를 던지며 일본군에 맞서다가 역시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동래 백성인 김상은 처, 딸이 기와를 깨뜨려주면 이를 던져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송상현의 소실 금섬은 송상현이 관복을 가져오라고 하자 이를 가지러 오려다가 일본군에게 사로잡혔고 며칠간 욕을 하다가 살해당했으며, 또다른 소실 이씨는 일본에 끌려갔지만 끝내 절개를 지켰다.
송상현과 함께 싸운 관군인 송봉수, 김희수, 향리인 대송백, 소송백, 관노인 철수, 매동 중에서 김희수, 대송백은 전사했으며, 이 전투에서 송상현의 측근으로 알려진 사람은 신여로, 김섬, 노개방, 문덕겸 등이 있다.
이 때 참전한 사람들 중에는 각지의 의병장 휘하에 들어가 일본군에게 항전한 경우도 있었으며, 훗날 임명된 선무원종공신 중에서 이 지역 출신인 인물이 66명이 되었다. 이들 중 뛰어난 24명을 선정한 명단으로 별전공신 또는 24공신이라 했는데, 김정서, 정승헌, 문세휘, 정순, 김일개, 김일덕, 송창문, 김근우, 강개련, 김흘, 이언홍, 김대의, 오홍, 박인수, 김달, 송남생, 김기, 황보상, 이응필, 송계남, 이복, 오춘수, 김복, 송의남, 철수, 만동 등이 있다.
2 전투 이후와 평가
고니시는 송상현의 충절을 높이 사서 그의 시체를 온전히 보존하게 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냈지만, 끝까지 저항한 동래성 백성들은 학살해버렸다. 동래성 백성들은 성의 해자로 끌려나와 모두 참혹하게 처형된 뒤 해자에 파묻혔다.[4]
왜란 종전 후 1608년에 동래부사로 부임한 이안눌의 회고에 따르면 동래성 전투가 있었던 4월 15일에는 동래의 집집마다 곡소리가 일어났다고 한다. 어쩐 일인지 동래에서 오래 근무한 늙은 아전에게 물으니 아전은 오늘이 동래성이 왜군에게 함락된 날인데, 송상현 부사를 좇아 모인 성안 백성들은 피바다로 변하고 쌓인 시체 밑에 투신하여 천 명 중 한 두 명이 생명을 보전할 정도였고, 가족들 중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전투에서 죽은 친족을 제사지내며 통곡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들은 이안눌이 눈물을 흘리자 이 아전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는 이 전투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를 단적으로 나타낸다.
"곡을 해줄 사람이 있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적의 칼날에 온 가족이 죽어 곡을 해 줄 사람조차 남지 못한 집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 이안눌, 동래맹하유감사(東萊孟夏有感祠)
3 트리비아
- 2005년 5월 부산 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부지에서 동래성 외곽 해자 유적이 발견되었다. 폭 30m x 길이 30m 좁은 공간에서 동래성 전투에 사용된 환도, 창, 찰갑, 투구, 활, 화살촉 등 임진왜란 당시 무기사를 새로 써야할 만큼 방대한 조선군 무기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약 20여구의 인골이 함께 발견되어 당시의 참상[5]을 전해주었다. 다양한 유물들과 몇 구의 인골(…)들은 수안역 내부의 동래읍성 임진왜란 역사관에서 볼수있다.
4 창작물에서의 동래성 전투
영화 난중일기에서 간단하게 나온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57화에 약 2분 반 정도 간단하게 다루었다. 여기서 고니시는 병사를 시켜 항복권유의 글귀가 쓰여진 목간은 동래성앞에 던지게 하였고 이를 본 송상현은 결사항전의 의지가 담긴 글귀를 활에 묶은 후 날려서 보낸다. 이후 간단한 전투장면과 함께 나레이션 설명이 나오며 송상현은 북향사배사배를 하지 않고 전투를 벌이다 일본군의 칼에 전사한 모습으로 나온다.
- 드라마 징비록에서도 13화에서 간단하게 다루었다. 부산진과 다대포 등의 함락소식을 들은 후 송상현은 이각과 합류를 청했지만 이는 무산되었고 곧 고니시의 항복권유글귀가 전해지자 결사항전의 의지를 담은 답서를 보낸다. 그 직후 일본군이 공격하자 송상현이 화살을 쏘라고 지시하는 것으로만 나오다가 자세한 전쟁 장면은 생략한 채 성이 함락되고 송상현 주위의 병사들이 모두 사망하는 것으로 나온다. 송상현 혼자서 고니시 휘하의 병사들에게 포위되었고 송상현은 갑옷위에 관복을 걸쳐 입은 후 통곡을 하며 절을 올린 후 고니시를 향해 달려들지만 싸우다가 일본군 병사들의 칼을 맞고 전사한다.
- ↑ 고니시 유키나가의 1군+ 수군+ 지원군.
- ↑ 지금의 부산광역시 동래구
- ↑ 실록의 기록은 大鎭不救라 되어있으나 청주 충렬사에 있는 혈선발에는 列鎭高枕이라 되어 있다.
- ↑ 전국시대 일본은 이런 식으로 적군과 피정복지 거주민을 다뤘다. 전국시대 일본의 공성전에선 전투시작 전에 항복하면 성주 이하 전원의 생명을 살려주고, 전투 중에 항복하면 성주 및 가신 급을 처형했으며, 끝까지 저항하면 민간인을 포함한 성 안의 모든 사람을 죽였다.
몽골군?물론 예외도 있어서 항복이고 뭐고 그냥 확 다 죽여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하여간 고니시는 일본 자국에서 하던 대로 외국에서 똑같은 짓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문화 자체가 완전 달랐던 조선에서는 오히려 조선인들의 분노를 끌어모아 결사항전을 유발하는 이유가 되었다. 왜구들의 악랄한 약탈과 무능하고 무기력하게 비친 조정의 모습이 더해진 탓에 백성의 분노는 더욱 심했던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사실 항복해도 죽일 거라면 병사들이나 백성 입장에서는 항복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전투 전에 항복하는 것은 일개 병사나 백성이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 ↑ 여자와 아이의 유골에도 조총과 철퇴 및 창검으로 찔린 자국이 선명했는데 특히 한 여성 유골은 칼로 몇 차례나 목을 베인 흔적이 있었다. 전투가 끝난 후 왜군이 시신과 버려진 조선군 무기들을 해자에 던져넣고 메워버린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