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진 전투

부산진 전투(釜山鎮之戰)
날짜
1592년 음력 4월 13일 ~ 음력 4월 14일
장소
조선 경상도 부산 부산진성
교전국1교전국2
교전국조선 왕국쇼쿠호 일본
지휘관정발[1]
이정녕
장희식
이정헌
애향
용월
신옥
가은산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마쓰라 시게노부
아리마 하루노부
오무라 요시아키
고토 스미하루
병력관민 총 800여 명18700명
피해 규모관민 800여 명 전멸140 여명 사상
결과
일본군의 결정적 승리
일본군의 조선 상륙 성공
이후 동래성으로 진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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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그림은 조선후기의 화가 변박(卞璞)이 그린 부산진순절도(釜山鎭殉節圖).

1 개요

임진왜란의 첫 전투.

2 전개

1592년 4월 13일, 일본조선에 침략을 감행하였으며 고니시 유키나가는 대장으로써 오전 8시경 쓰시마 섬의 이즈하라에서 자신의 사위인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와 함께 700여척의 전선과 18,100명[2]의 병력을 이끌고 오후 5시, 부산 절영도(絶影島)[3][4]에 상륙했다.

고니시가 이끄는 구성 병력과 그를 따르는 장수는 고니시는 7000명, 소 요시토시는 5000명, 마츠우라 시게노부는 3000명, 아리마 하루노부는 1000명, 고토 스미하루 700명이었다.

부산진[5] 첨절제사 정발은 1592년 3월 대마도주 요시토시가 길을 빌려달라는 내용의 서신을 건내는 것을 보고 심상치 않은 조짐을 느껴 절영도에서 군사훈련을 겸한 사냥을 하던 참이었다. 13일 대마도쪽에서 대규모 선단이 접근중이라는 보고가 들어왔으나 이를 세견선으로 여기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왜군 함대가 육지에 접근하며 조총을 쏘자 왜군의 침략임을 파악한 정발은 부산진 소속 전선 3척(전선(戰船), 방패선(防牌船), 중선(中船) 각 1척)을 자침시키는 한편 왜관에 남아있던 왜인 4명을 구금하고 백성들을 성안으로 소개시켜 농성준비를 갖춘 다음 남문의 성루에서 날을 지새웠다. 그러나 부산진의 병력은 600여명에 불과했고[6] 피난민들을 합쳐서 겨우 천여명에 불과했다.

1592년 4월 14일 새벽 절영도에서 밤을 지낸 고니시는 부산진을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정발은 서문으로 옮겨가 궁수들을 이끌고 방어했다. 정발의 완강한 저항에 서문을 깨는데에는 실패한 왜군은 서문 밖의 높은 고지로 올라가 아래로 조총 사격을 퍼부었다. 조선군은 활과 각종 총포을 쏘며 맞섰다.[7]

가열차게 전개되던 일본군의 공격은 조선군이 부산진 성벽 밑에 뿌려둔 뾰족한 마름쇠 때문에 아침 7시에 잠시 중단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일본군을 막아주진 못했고 잠시 물러나서 전열을 가다듬은 일본군은 10시에 다시 공세를 시작했다.

정발과 조선군은 힘써 싸웠지만 워낙 전력이 열세인데다가 배후 지원조차 받지 못해 오래 버티기는 힘들었다. 전세가 완전히 기울자 한 비장이 정발에게 성을 버리고 도망치자고 했지만 정발은 "성을 버리는 자는 베어버리겠다"라며 결사항전했다. 결국 12시쯤, 일본군은 부산진의 취약지구인 북문쪽으로 밀려들었고 정발은 일본군에 맞서다가 조총에 맞아 전사했다. 왜군이 성내에 진입하자 2차례에 걸쳐 시가전이 벌어졌는데 단병접전에 익숙한 왜군은 큰 피해없이 소수의 조선군을 무너뜨렸다. 정발과 함께 싸우던 이정녕과 중위장 장희식, 부사맹 이정헌 등은 전사하였으며 정발의 첩 애향은 자살하였고 그녀의 몸종인 용월, 기장 사람 신옥 등도 참전하였다가 전사하였으며 부산진에서 싸우던 병사인 가은산 등 3인은 시체더미에 숨어있다가 고니시가 살육을 중지하자 항복하여 포로로 있다가 4월 17일에 풀려나고 일본군 점령지에서 탈출한 뒤 부산진 전투에 대한 것을 증언했다.

3 전투 이후와 평가

비록 비극적인 패전이긴 했지만, 후에 조선 통신사 황신에게 일본 장수 마츠우라 시게노부는 "우리는 부산진 전투에서 좌절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하며 프로이스의 기록에도 "거의 전원이 전사할 때까지 싸웠다", "국왕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히 높은 훌륭한 병사들"라고 적고 있다. 정발과 부산진의 병사들, 그리고 백성들이 치열하게 맞서 싸웠고 별다른 저항이 없을걸로 예측했던 일본군의 입장에선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하다.

고니시는 정발의 시체를 온전히 보존하게 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진군을 멈추지는 않았고 일본군은 동래성으로 향했다.(동래성 전투) 일본군과 부산진 주변 백성들은 분전한 부산진첨사 정발을 기리는 의미로 정발을 흑의 장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정발은 잠시 적전도주 의혹을 사기도 했으나 이내 누명을 벗었고 조국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충신으로 인정받았다. 현재 부산 시내에는 정발의 동상이 세워져있다.

4 대중매체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징비록에서도 임진왜란의 역사적 첫 전투인만큼 디테일하게 다루었다. 두 드라마의 부산진 전투씬을 비교해서 보아도 좋을 것이다.

4.1 불멸의 이순신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57화의 초반부, 6~7분에 걸쳐 다루었다. 절영도에 상륙한 일본군 선발대에 의해 생선들을 말리던 백성들과 달려오던 일부 수군들이 거의 몰살당했고 간신히 살아남은 생존자가 사냥 후 회식을 하던 정발에 알려 정발은 전선을 좌침시킨 후 밤새 백성들을 부산진성으로 소개시킨다. 이후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명을 시작으로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정발의 명에 따라 조선 수군은 활로 저항하지만 이내 일본군의 조총사격에 무너지게 되고 정발도 다수의 일본군과 싸우다가 일본군의 사격에 주변에 있던 다른 일본군과 함께 사살당한다.

4.2 징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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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징비록에서는 13화의 초반부, 거의 30분에 가깝게 다루었다. 역시 정발은 병사들을 데리고 사냥 후 회식을 하였는데, 그동안 일본군은 척후병들을 보내어 조선군의 상태를 확인한 후 봉수대를 무력화 시킨 뒤 상륙을 한다. 정발은 복귀하던 중 다가오는 일본군 전선들을 보고 처음엔 대마도의 무역선으로 파악했으나 이내 그 숫자가 엄청나자 노략질을 하러 온 왜구들로 파악하고 급히 백성들을 소개시키며 전투태세를 갖추며 정발과 원균 그리고 송상현에게도 이 소식을 알린다. 이후 정발의 연락을 받고 합류한 박홍과 함께 일본군을 맞이하고 이때쯤이면 정발은 그들의 정체가 본토에서 온 일본군임을 파악한다. 소 요시토시의 명을 시작으로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조선 수군은 정발의 명령에 따라 총통과 화살 등을 쏴서 일본군의 병사를 어느 정도 죽였지만 곧 일본군이 방어 태세를 갖춰 조총을 난사하면서부터 무너지게 되며, 결국 일본군이 성 내에 돌입해 병사들 뿐만 아니라 백성들까지 보이는 즉시 마구잡이로 죽인다. 그 와중에 박홍은 한참 싸우다가 불리하다고 여겨 군량창고를 불태우고 퇴각하며, 나머지 군사들과 백성들은 모두 처절하게 싸우다가 전사하고 정발도 조총사격으로 치명상을 입은 뒤 일본군의 칼에 전사한다.

징비록내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대규모 전투씬으로서 좋은 퀄리티를 만들어냈고 관민들의 눈물겨운 처절한 저항과 병사들의 심리도 잘 살려냈다 .

  1. 정발 이하는 지휘관이 아닌 참전 장수.
  2. 이는 모리가의 문서의 기록이고 프로이스의 일본사에서는 16,70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3. 지금의 부산광역시 영도구.
  4. 후에 러시아 제국조차를 시도한 곳이기도 하다.
  5. 지금의 부산광역시 동구 일대. 현재 부산에는 부산진구가 따로 있지만 부산진성은 동구에 있다.
  6. 조선왕조실록에는 527명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병력이 적은 이유는 제승방략상 부산진은 요즘으로 치면 휴전선 GOP개념의 전방기지고 본격적인 경상도 남부 지역 방어는 동래성에서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7. 프로이스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조선군은 구리로 된 포를 사용하고 가죽으로 만든 흉갑과 철투구를 착용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