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아르헨티나 대통령 | |||||||
43대 | → | 44대 | → | 45대 | |||
로베르토 에두아르도 비올라 | → | 레오폴도 갈티에리 | → | 레이날도 비그노네 |
레오폴도 포르투나토 갈티에리 카스테이(스페인어: Leopoldo Fortunato Galtieri Castelli, 1926년 7월 15일 ~ 2003년 1월 12일)
1 소개
아르헨티나 육군 장교 출신으로, 군부 독재자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장군이 일으킨 쿠데타에 참여하여 후안 페론 정권을 뒤엎고 군의 실세가 되었고 결국 대통령까지 되었으나 국민의 관심을 돌리고자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켰지만, 영국의 역습으로 아르헨티나가 패배하자 결국 폭망한 독재자.
2 생애
2.1 군사 독재
갈티에리는 아르헨티나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군사학교를 졸업한 이후 오랫동안 육군에서 생활했다. 1976년 비델라 장군이 일으킨 쿠데타에 참여하여 페론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일조했고, 그는 군사정권의 주요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도입하여 외자 유치를 실행했지만, 이게 너무 과도하게 받아들여서 경제는 점점 하락세에 접어들었다. 또한 군부독재가 펼쳐질 당시에는 아르헨티나에서 벌어진 수많은 실종사건 등 이른바 더러운 전쟁으로 불린 인권탄압을 자행했다.
1981년 11월 대통령이 된 갈티에리 장군은 다른 아르헨티나의 군부독재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자비한 철권통치를 자행했는데 대표적으로 한 일이 민주화인사, 야당 정치인들을 공군 수송기에 태운뒤 비행기 안에서 마약을 잔뜩 투약시켜 환각상태로 만들고 대서양에다 떨궈놓는 짓(이른바 죽음의 비행)을 했다. 이건 이전 통치자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가 써먹은적이 있고, 시초는 허를러깅 처이발상 전 몽골 대통령의 사막 투하다.
2.2 포클랜드 전쟁과 패배
(포클랜드 말비나스 '수복'(아르헨티나 기준으로) 직후, 군중들의 환호에 답례하는 갈티에리)
그러던 중 갈티에리는 대통령 자리에 오른 지 불과 6개월 만에 군사정부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를 높일 목적으로 아르헨티나 연안에서 5백63㎞ 떨어진 포클랜드 섬을 침략하도록 군대에 명령했는데 갈티에리는 아르헨티나가 에스파냐으로부터 물려받은 남대서양상의 이 섬을 영국으로부터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그리고 이것이 바로 포클랜드 전쟁의 시작이였다.
이렇게까지 무리하게 전쟁을 강행한 이유는 1976년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이후 여러 육군 장군 출신들이 대통령직을 승계해오며 장악하고 있었지만, 미국 중앙은행의 고금리 정책에 의한 쇼크 때문에 심각한 경제난이 일어났고 민심이 들끓고 있었기 때문이며, 오랜 군부 독재에 반대하는 인사들을 납치하고, 고문하고, 살해하는 등의 이른바 더러운 전쟁을 저질르면서 국민들은 군부에 대한 지지는 싸늘해지기 짝이 없었다. 이에 군부는 1980년에는 비올라(Roberto eduardo Viola) 장군이 대통령직을 승계했으나 상황은 더욱 나빠져서 고작 2년도 되지 않아 1981년 12월 대통령직이 갈티에리에게 넘어왔던 것이다. 게다가 엎친 데 겹친 격으로 국내에서 반군부 민주화 운동등이 거세게 일어나자, 고유영토의 회복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포클랜드를 점령하면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하여 불안한 국내정세까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때문이였다.
(해군참모총장 아나야 제독(왼쪽)과 함께)
이에 정권의 핵심세력 중 당시 해군참모총장인 해군중장 호르헤 아나야(Jorge Isaac Anaya) 제독은 포클랜드 침공을 제안했다. 아나야 제독은 나름대로 정교한 전략을 짠 뒤 갈티에리에게 보고하면서 무력 점령을 하더라도 영국 본토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이 제도에 영국은 반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고 전체적인 경제력 군사력은 영국이 강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 영토를 모두 잃은 이른바 '이빨 빠진 호랑이' 꼴이 난 영국이 그럴 의지가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었고, 만에 하나 영국이 반격을 해온다 하더라도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수송할 병력의 숫자는 물론 전투기 등 무기의 양도 한정적일 수 밖에 없어서 실제 전장에서의 군사력은 아르헨티나가 앞설 것이기 때문에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것이였다.
그러나 아나야의 논지와는 정반대로 영국은 마가렛 대처 총리가 머리끝까지 화를 내며 포클랜드 제도에 대한 무조건 사수를 지시했고 그렇게 맞붙은 포클랜드 전쟁에서 아르헨티나는 영국에게 완벽하게 패배했다. 또한 아나야의 논지와는 달리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수송할 병력의 숫자는 물론 전투기 등 무기의 양도 한정적일 수 밖에 없기는 개뿔! 영국은 세인트헬레나 섬을 전초기지로 삼아 그 곳에 엄청난 물자를 쌓아놓고 무기와 보급의 양을 탄탄하게 했다. 이로 인해 갈티에리는 결국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럼에도 갈티에리는 자국 국민들에게는 언론통제를 통해 포클랜드 전쟁에서 이겼다고 거짓말을 해대가면서 버텼지만,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에 참가한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단에 의해서 패전 사실이 들통났다.
2.3 만년
결국 1982년 6월 17일 갈티에리는 대통령직과 3인 군사평의회 의장 및 육군사령관직에서 사임했다. 갈티에리는 아르헨티나 군부의 지지부족으로 현직을 수행할 수가 없어 대통령직과 육군총사령관직에서 사임한다고 발표했다.
퇴임 이후에는 일단 레이날도 비뇨네를 후임 대통령으로 하여 군사독재정권을 어떻게든 유지시키려 했으나 이마저 얼마 못가고 결국 이듬해 말인 1983년 12월 10일 라울 알폰신이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서 결국 호르헤 비델라에서 시작한 아르헨티나의 군사독재정권은 그 막을 내렸다. 결국 갈티에리는 일단 나부터 살자는 심산으로 이미 대통령이 된 라울 알폰신과의 협약으로 자신이 사법적으로 심판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알폰신 대통령은 뒷통수를 치며 군부의 핵심들을 모조리 감옥에 넣어벼렸다. 갈티에리는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전쟁 책임으로 인해 수감됐으나,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에 의해 풀려났다.
2002년에는 군부 독재시절의 의문사, 살해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확인되어 결국 20명의 좌익 게릴라들을 납치해 고문하고 처형하는 데 가담한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고령인데다가 췌장암을 앓고 있어 연금 조치만 내려졌다. 평소에도 췌장암을 앓아온 갈티에리는 증세가 악화되자 아르헨티나군 중앙병원에 입원했고, 결국 2003년 01월 13일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