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 보르하르트

Leo Borchard (1899.3.31 ~ 1945.8.23 )
러시아-독일의 지휘자. 러시아어 풀네임은 레프 르보비치 보르가르트(Лев Львович Боргард)다. 임시직이었지만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를 역임했다.

워낙 단임한 데다가 다른 역대 상임 지휘자들과 비교하면 존재감이 없어서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지만, 1995년 9월 5~6일에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지휘로 말러교향곡 제6번이 연주된 베를린 필의 추모 공연 이후로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모스크바에서 독일계 러시아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배웠다.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자 독일 베를린으로 이주해 독일 국적을 취득했고, 당시 크롤 오페라 극장 음악 감독이었던 오토 클렘페러의 부지휘자로 일했다. 1933년에 베를린 필 무대에 데뷰했고, 이후 베를린 필과 베를린 국립 관현악단 등을 지휘해 주로 가벼운 곡들을 위주로 선곡하는 대중 음악회나 현대음악 연주회에 출연했다. 그러나 나치 집권 후 현대음악을 옹호하고 좌파에 동정적이라는 이유로 '달갑지 않은 인물'로 찍혔기 때문에 1935년 이후 지휘 활동을 거의 중단하다시피 했다.

이후 역시 비슷한 이유로 나치 정권 하에서 핍박받았던 작곡가 보리스 블라허의 오라토리오 '대 이단심문관'의 대본을 집필하거나 지휘 강의를 하며 근근이 생계를 꾸려갔고, 2차대전 중에는 동거녀인 언론인 겸 작가 루트 안드레아스-프리드리히와 함께 베를린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을 숨겨주고 의식주를 제공하던 반체제 비밀 결사인 '에밀 아저씨(Onkel Emil)'를 조직했다.

전쟁이 끝난 뒤인 1945년 5월 26일에 영화관인 티타니아 팔라스트에서 열린 베를린 필의 종전 후 첫 공연을 지휘했다. 프로그램은 멘델스존의 극음악 '한여름밤의 꿈'서곡과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 제5번(악단 단원 울리히 그렐링 협연), 차이콥스키교향곡 제4번이었다. 당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를 비롯한 대부분의 독일 지휘자들은 나치 부역 혐의로 활동 금지를 당했지만, 보르하르트는 나치에 박해받고 저항 운동을 한 경력과 출신 덕에 유창하게 구사한 러시아어로 소련군 군정 당국의 신뢰를 받았다. 공연 직후에는 베를린 주둔 소련군 사령관 니콜라이 베르사린의 재가를 받고 베를린 필하모닉의 '임시' 상임 지휘자가 되었고, 22회의 공연을 개최했다. 이들 공연에서 보르하르트는 기존의 레퍼토리들 외에 나치 집권기 동안 공연되지 못한 멘델스존 등 유대인 작곡가들의 작품이나 러시아 작품들도 리바이벌했다.

그러나 1945년 8월 23일 공연을 마치고 친분이 있던 영국군 장교와 저녁 식사를 한 뒤 장교의 차를 얻어타고 집으로 오던 중 총격으로 사망했다. 사실 그 날 저녁 소련군과 미군 사이에 작은 실랑이가 있어서 점령군 지역 경계에서 검문이 강화되었는데, 미군 초병이 검문을 위해 차를 세우라고 지시했지만 히치하이킹을 시도하는 사람으로 오인해 그냥 지나쳤고, 미군 역시 영국군 차량 표식을 알아보지 못해 총격을 가했다. 동승한 운전자와 보르하르트의 동거녀 안드레아스-프리드리히는 무사했지만, 보르하르트는 미군이 쏜 여섯 발의 총알을 맞고 즉사하고 말았다.

바로 그 다음날 리허설을 하러 모인 단원들은 보르하르트의 사망 소식을 듣고 경악에 빠졌고, 베를린 필을 담당하던 미군 음악장교 존 비터가 주축이 되어 임시 지휘자를 구하던 중 루마니아 출신의 신인 지휘자 세르주 첼리비다케를 급히 섭외해 추모 연주를 맡겼다. 첼리비다케는 곧 보르하르트의 뒤를 이어 임시 상임 지휘자가 되었다.

음반으로는 1930년대에 텔레풍켄에서 녹음한 각종 관현악 소품과 오페라 아리아가 있고, 종전 후 가진 공연들 중 베버의 오페라 '오베론'서곡과 차이콥스키의 환상 서곡 '로미오와 줄리엣', 글라주노프의 교향시 '스텐카 라진'의 녹음이 남아 있다. 또 1930년대에 베를린 국립 관현악단을 지휘해 베토벤홀에서 녹화한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오페레타 '박쥐'서곡과 왈츠 '당신과 당신', 트리치 트라치 폴카의 영상물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