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계 러시아인

1 개요

독일 혈통의 러시아인들을 일컫는다. 비슬라브계 소수민족 중 러시아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민족 집단이다.[1]

2 설명

2.1 러시아 지배층과 게르만의 접점

러시아슬라브인의 나라이지만 국가성립 시기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의외로 게르만과의 접점이 적지 않았던 나라이다. 러시아라는 나라의 시초가 바랴그라고 불리는 바이킹이 세운 나라에 기원을 둔다. 노르만인 이었던 류리크(Рюрик)가 러시아 최초의 왕조인 류리크 왕조를 세웠으며, 이 류리크 왕조의 후손들이 키예프 공국모스크바 공국 등 여러 나라를 세운다.[2]

바이킹의 후손이었던 류리크 왕조는 이반 4세 때까지 700년간 러시아를 지배했다. 그러던 중 14세기에 프로이센에서 러시아로 건너온 귀족인 안드레이 이바노비치 코빌라와 그 후손들은 러시아에서 세력을 키웠고, 결국 16세기 미하일 1세가 귀족 들의 추대로 러시아의 차르로 즉위하면서 독일인 코빌라의 후손인 로마노프 왕조가 20세기 초반까지 러시아를 다스리게 된다. 18세기에 로마노프 왕조의 대가 끊겨질 뻔 했으나, 역시 독일인 이었던 표트르 3세예카테리나 2세가 러시아로 건너와 홀슈타인-고토로프-로마노프(Гольштейн-Готторп-Романовской) 왕조가 된다. 로마노프 왕조는 니콜라이 2세 때까지 러시아를 지배한다. 즉, 독일계 러시아인들은 러시아의 황가를 배출했다.

노르만의 후손인 스웨덴계 러시아인은 수 세기동안 러시아에 동화되었고 결국 핀란드의 독립으로 러시아 내에서 소멸했지만[3] 독일계 러시아인들은 여전히 정체성을 보존하고 있다.

2.2 의외로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독일과 러시아

현재 독일은 서유럽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러시아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 하지만 과거에는 독일과 러시아가 국경을 마주보고 있었다. 독일의 전신인 프로이센동유럽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동쪽에 치우쳐 있었는데 프로이센의 수도였던 쾨니히스베르크가 오늘날 러시아의 칼리닌그라드다!! 오늘날 발트3국과 서부 러시아는 13세기 부터 튜튼기사단가톨릭을 전파하기 위해 쳐들어와 찝적거리던 곳 이었고, 게르만계 농민 들의 이주도 활발했던 지역이었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에게 튜튼 기사단이 패한 이후, 독일 세력의 동진은 저지되었지만, 탈린 등 이 지역 도시들이 한자동맹에 가입할 정도로 게르만의 흔적은 건재했고, 이후 프로이센과 러시아는 폴란드를 사이좋게 나누어 가지고, 19세기 중반까지 러시아는 프로이센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런 구도는 20세기 중반,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남아있게 된다.

2.3 독일인의 러시아 이주

이들 외에도 많은 독일계 귀족들이 러시아로 건너와 러시아의 귀족이 되기도 했다.[4] 러시아 제국 시절 많은 독일인들이 러시아에서 출세하여 고관대작이 되었다.

이렇게 귀족이 된 독일인들 말고도 러시아로 이주한 농민들의 수도 많았다. 주로 독일 국내의 혼란을 피해 러시아로 이주하거나 역시 독일인이었던 예카테리나 2세가 종교의 자유와 병역면제 등을 조건으로 걸며 독일인의 러시아 이주를 정책적으로 장려하여 이주해온 독일인들도 많았다. 이 외에도 상업에 종사하던 독일 상인들이 러시아로 이주해 온 경우도 많았다.

2.3.1 볼가 독일인

1762년 러시아 제국 예카테리나 2세는 유럽으로 부터 대규모 이민을 받아들였다. 광활한 자국의 인구밀도도 높히고 가장 주요하게는 중/서유럽보다 현저히 떨어지는 농업 생산력을 제고하기 위한 목적...이 때 가장 많이 이주한 사람들이 프로이센을 비롯한 독일지역의 빈농들 이었다. 이때 이주 장려 정책에 의해 이민 온 독일인들은 볼가 강 유역-지금의 볼고그라드 인근-에 많이 정착했는데, 이들을 볼가 독일인(볼가 게르만)(Поволжские немцы)'이라고 부른다.[5] 18세기 내내 꾸준히 이민이 이루어져 1897년 기준으로 볼가강 하류 지역에 사는 독일인의 수는 179만 명에 달했다. 이민을 장려하기 위해 예카테니라 여제는 칙령을 통해서 그들에게 여러가지 파격적인 특혜를 주게 되는데, 자신들의 언어, 문화, 자치공동체를 보장해주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2가지...

종교의 자유징집(병역) 면제 (이민 1세대는 물론 그 후손들까지) 라는 조건의 보장이다.

이주민들의 고향과 종교는 다양했는데, 독일 남부 바이에른 출신들은 가톨릭, 그외 다른 지방출신들은 루터파 개신교를 믿거나, 메노이트라고 불리우는 재세례파의 일파도 많았다. 이 메노이트들은 미국의 아미쉬 교도들과 뿌리가 비슷한 교파인데 비폭력 평화주의 (즉, 징집 거부)가 중요한 교리 중 하나이기 때문에, 후일 문제가 불거지게 된다.

러시아로의 대이주 이후 자신들의 공동체를 이루고 한동안 잘 살던 이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러시아의 정책이 점점 자신들에 대한 특권을 줄여나가는 것에 직면하게 된다.
그 중 가장 문제가 된 것이 바로 징집 면제 특권의 페지....이주 당시의 약속이 파기된 것도 열받는 마당에 위에 언급한 메노이트파 독일 이주민들은 (마치 지금 한국에서 여호아의 증인들이 양심적 병역거부건으로 감옥살이를 하는 것과 같은) 종교적으로 큰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이에 많은 볼가 독일인들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무렵 다시 러시아를 떠나게 된다.

그들이 다시 떠나기로 한 곳은 다름아닌 신대륙. 이주민들은 러시아에서 떠나게 된 주된 이유 중의 하나가 종교문제였기 때문에 새로운 이주 대상국을 택하는 것도 주로 종교에 따라 이루어 지게 된다. 남부독일 바이에른 출신의 가톨릭 이민자들은 주로 아르헨티나브라질로 갔고...

루터파나 메노이트 등 신교 계통 이민자 들은 북미로 떠났다. 북미로 간 이민자들은 자신들이 아는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한지/건조형 농업에 맞는 미국 대평원 북부쪽에 정착하게 되는데, 제일 많이 간 곳이 노스 다코타, 사우스 다코타이고, 그 다음이 네브라스카캔사스 등... 또한 주변 미네소타미시건 등에도 많이 정착했다. ​캐나다로 간 사람들은 알버타주, 매니토바주, 서스캐처원 등에 정착하고...[6] [7]

한편 겨우 정착한 러시아에서 다시 떠나기가 뭐한 사람들은 볼가강 유역에 그대로 남았는데...곧이어 러시아에 소비에트 혁명이 일어난다. 소비에트 정부는 독일계 이민들이 사는 곳에 볼가 독일인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 공화국(Автономная Советская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ая Республика Немцев Поволжья)을 세워주고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부여해주기도 했는데, 다만 종교를 탄압하는 소비에트의 정책상 기독교 성직자들은 시베리아 수용소로 보내지는 등의 고난을 겪기도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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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자치공화국 영역

​그러다가 1941년 히틀러가 불가침 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공하는 순간, 독소전쟁이 발발하게 되면서 볼가 게르만들에게는 헬게이트가 열리게 된다. 마치 연해주에 있던 까레이스키 고려인들이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했듯이, 이들도 똑같이 스탈린의 지시에 의해서 대대로 살던 고향에서 쫓겨나 시베리아중앙아시아의 노동 수용소로 이주당하게 된 것. 후방에 있는 독일인들이 간첩질을 비롯해서 적대국 독일에 이로운 일을 할 우려가 있는, 즉 잠재적인 부역자로 몰렸던 것이다. ​스탈린의 탄압은 전쟁 종료까지 이어졌고, 이들을 몰아내고 이들 고향 볼가강 원주거지에서는 이들의 조상 묘비도 다 부셔서 도로포장용 돌로 쓰는 등의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전후 세월이 지나 스탈린이​ 물러나고 1965년에 볼가 게르만에 대한 강제이주 정책이 공식적으로 철회됐지만, 이들은 대부분 원래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물론 1941년까지 존재했던 그들의 자치 공화국의 부활도 불허. 이 때 고향-볼가강 지역-에 못돌아간 많은 독일인들이 시베리아나 중앙 아시아에 그대로 정착해서 살게 되었다. 이 독일인들의 후손은 현재에도 많이 남아있다. 러시아에 약 60만명의 볼가 독일인이 있으며 카자흐스탄에도 약 20~30만명 - 인구의 3% -이라는 독일인이 살고 있다. 그 외 키르기스스탄에도 그들의 후손이 남아있다.

타국 땅에서 서러움을 당하던 이들 중 상당수는 80년대 독일 정부에게 귀국권을 요구해서 많은 수가 독일로 귀환/이주하게 된다. 초기에는 독일정부도 적극적으로 이들의 이주를 지원하기도...그런데 이들이 이주한지 너무 오랜 기간이 지나서인지...독일어를 못하는 경우가 많고 문화도 달라서 독일 내에서 사회문제가 발생하자 - 한국의 조선족처럼...독일정부는 90년대 부터는 이들의 귀국을 까다롭게 받아주게 되는 일이...대신 독일 정부는 여전히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내의 독일인들을 많이 지원한다.

시베리아로 쫓겨난 볼가 독일인들의 자치체로는 알타이 지방독일인 민족구역옴스크 주의 아조프스크 독일인 민족구역이 있다. 다만 이들은 군(郡)급 행정구역이라 과거의 자치 공화국보다는 격이 떨어진다.

2.3.2 흑해 독일인

예카테리나 2세의 이주정책으로 유입된 독일인 들은 볼가 강 유역 뿐 아니라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일대에도 많이 정착했다. 이곳에 정착한 독일인을 흑해 독일인이라고 부른다. 주로 프로이센의 농민들이 많이 이주해 왔고, 독일에서 탄압받던 재세례파들도 단체로 이주해 왔다. 위에 설명된 볼가 독일인과 마찬가지로 예카테리나 2세가 이민장려를 위해 내린 칙령으로 종교의 자유징집면제 특권을 조건을 제시했기 때문에 많은 재세례파가 러시아로 이민을 결심한다. 프로이센이 근대국가로 성장해가면서 징집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들과는 별개로 우크라이나 일대에는 고트족의 후손들이 19세기까지 잔존해 있었다. 러시아 제국의 동화 정책으로 사멸.

2.3.3 발트 독일인

프로이센과 인접한 발트 지역에 살던 독일인들이다. 기원은 튜튼기사단과 함께 12세기 부터 발트 지방으로 진출하던 독일인들의 후손들. 이들 역시 스탈린 집권시기에 단체로 중앙아시아로 이주당하다가, 스탈린이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당시 히틀러와 빅딜을 보면서 대부분 독일로 재송환 되었고, 나치 독일은 점령지 폴란드에서 현지 폴란드인들을 추방한 지역에 이들을 집중적으로 재정착시켰다. 그러다가 독소전쟁이 터지고 독일군이 동진을 하니 다시 이들이 추방당한 발트해 연안에 정착시키려고 하다가, 결국 나치가 패망하고 독일의 동부 영토 상당 부분이 폴란드에게 떨어지면서 다시 이들은 재추방 당하는 (...) 비운을 겪었다. 이 후에도 한동안 이 발트 독일인들은 프로이센 독일인들과 함께 실향민으로서 긴 세월 동안 문화가 상당히 이질적으로 변한 전후 독일 본토에서 뿌리 박고 다시 정착하는데 많은 고생을 했다. 이것도 따지고 보면 히틀러의 자업자득이지만.

2.3.4 캅카스 독일인

러시아가 캅카스 지방으로 진출하고 아제르바이잔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독일인들도 따라 들어왔다. 그래서 카프카스에는 독일풍 건물들이 남아있는곳이 많다.

2.3.5 독일계 유대인

러시아로 이주한 독일인들 중에는 아슈케나짐 유태인들도 있었다. 독일계 러시아인이면서 동시에 유태인인 복잡한 혈통. 블라디미르 레닌의 어머니도 독일계 유대인.[8]

3 현황

2002년 기준으로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독일계 러시아인의 수는 60만명,[9] 카자흐스탄에는 30만명, 그 외 우즈베키스탄 등지에도 독일인들이 그 지역 소수민족으로 살고 있다. 소련 붕괴 이후 볼가 강 연안에 독일인 자치 공화국을 다시 세우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러시아 내의 반독 감정으로 무산되는 등 반독 감정 때문에 고생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10] 모국인 독일이 잘 사는 나라다 보니 독일이 지원을 많이 해 주는 편이다.

사실 독소전쟁 이전, 제정 러시아 시절부터 러시아인들은 독일인에게 묘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 편견이 집약된 것이 독일계 러시아인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알렉산드르 푸쉬킨의 소설 스페이드의 여왕.

독일과 거리가 먼 시베리아나 북극과 가까운 지역에 독일인 공동체가 존재하는 경우도 있다.

독일어의 H는 러시아어에서는 Г로 표기하기 때문에 하인리히, 헤르만 등 H로 시작하는 독일식 이름들은 게인리흐, 게르만으로 부른다.[11] 빌헬름은 '빌곌름(Вильгельм)'으로 부른다.

4 인물

★ 표시는 독일계 유대인.

  1. 러시아의 황가를 배출했다.
  2. 여기에 자존심 상해 하는 러시아 학자들은 바랴기가 러시아에 오기 이전에 이미 슬라브인들이 자체적으로 나라를 세웠다고 주장한다.
  3. 노르웨이계 러시아인은 극소수 남아있다. 이쪽은 19세기에 러시아로 이주해 온 노르웨이 어부들의 후손.
  4. 이런 현상은 러시아 이외에 다른 유럽 국가에서도 있었던 일이며 독일계 귀족 외에도 스웨덴계 귀족이나 스코틀랜드계 귀족도 있었다. 러시아 작가인 레르몬토프의 부계도 스코틀랜드계.
  5. 당시 서유럽의 빈농들은 신대륙으로 많이 가던 시절, 러시아로 이주한 독일인 들은 미지의 신대륙 서부개척보다는 상대적으로 만만한 리스크가 적은 동유럽과 러시아 이민을 택한 것. 독일인들은 러시아뿐 아니라 트란실바니아 지역으로도 이주를 많이했고 이들의 후손을 트란실바니아계 독일인이라고 부른다.
  6. 이들 미국으로 이주한 볼가 독일인들은 독일계 미국인으로 보기도 하지만 러시아계 미국인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미국으로 이민가서도 '볼가 독일인' 이라는 정체성을 지키며 살았다.
  7. 북미로 이주한 볼가 독일인중에 메노이트 파들은 또다시 시련을 겪기도 했는데, 역시 징집문제였다. 한국의 여호와의 증인들처럼는 사회적 차별과 여러 문제들이 발생해서 징집거부로 감옥에 가는 경우도 많았다고
  8. 정확히는 독일인과 스웨덴인의 혼혈.
  9. 최대치로 잡으면 150만명 정도까지 늘어난다.
  10. 2010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안드레 가임은 독일계라는 이유로 소련 시절, 대학 진학을 거부당한적이 있다고 한다.
  11. 예 : 알렉산데르 게인리흐.
  12. 2014년부터는 러시아 최대 은행인 스베르방크의 총재로 재임중.
  13. 중앙아시아 역사학의 대가.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소련시절 키릴문자를 채택한데에는 이 사람의 역할이 컸다.
  14. 그의 이름을 딴 벨링스하우젠해와 벨링스하우젠 남극 기지가 있다.
  15. 포츠머스 조약때 러시아 대표로 일본과 교섭을 했다.
  16. 혈통이 좀 복잡한데 원래는 알자스-로렌 출신의 독일계 프랑스인이었으나 보불전쟁 이후 알자스-로렌이 독일령이 되면서 독일인이 되었고 그 후 러시아로 귀화, 말년에는 다시 독일로 돌아가 독일에서 죽었다.
  17. 전임 러시아 정교 총대주교. 놀랍게도 발트 독일인이다. 이 사람이 총대주교로 있는 동안 정교회와 푸틴이 매우 가까워져 준 국교수준으로 위치가 격상되었다.
  18. 잠가라 밸브 짤에서 푸틴에게 사정을 말하는 그 분이시다!
  19. 빈 회의 때 러시아 대표로 참석. 그 후 외무장관이 되어 '유럽의 헌병'으로 조롱받던 러시아의 외교 정책들을 크림전쟁 때까지 시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