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샤오보

< 2010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
2009 - 버락 후세인 오바마류샤오보2011 - 엘런 존슨 설리프,
리머 보위, 타우왁쿨 카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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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샤오보 (刘晓波 | Liu Xiaobo | 유효파). 중국의 작가, 학자, 인권운동가.

1 개요

21세기 아시아는 물론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인권운동가 중 한 명이다. 중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에서 불의에 맞서 싸우는 대영웅이자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존경받고 있다.

세계에서 중국을 상당히 싫어하는 반중 감정이 매우 심각한 나라인 일본부탄에서조차 류샤오보를 영웅이라고 칭송하고 있다.원래 적의 적은 내편이잖아

2 생애

류샤오보는 1955년 12월, 중국 지린 성 창춘에서 태어나 지린대 중문과를 졸업했다. 이후 베이징 사범대학에서 중문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고, 문예창작으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1989년 천안문 6.4 항쟁(천안문 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야말로 촉망받는 젊은 작가이자 학자였다. 천안문 6.4 항쟁 이전까지 스위스미국에서 중국철학과 중국문화를 교수 자격으로 강의를 할 정도였다. 단순히 공부만 한 것도 아니라서, 1976년 젊은시절에는 건축 관련 노동일을 하기도 했었다. 아무튼 중국 베이징대나 베이징 사범대같은 학교에서 석박을 땄다는 것은 중국정부에서 인정한 실력있는 엘리트라는 소리. 그러나...

류샤오보가 미국 하와이 대학에서 객원 연구원으로 체류하던 도중, 1989년 6월 4일 중국 베이징 천안문에서 시민들에게 대학살을 저지른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다. 항목을 참고하면 알겠지만,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탱크와 총칼로 깡그리 깔아뭉갠 중국 공산당의 만행이었다. 이전까지 학술 활동에 전념했던 류샤오보는 단숨에 중국으로 귀국하고, 천안문에서 벌어지고 있는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게 된다.[1]

류샤오보는 시위대 대표로 중국 정부와 민주화에 대한 협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천안문 사태는 곧 유혈진압되었고, 류샤오보는 중국 내에서 모든 공직을 박탈당하게 된다. 그리고 류샤오보는 단식투쟁을 하면서 천안문 사태의 진상을 요구하는 한편, 각종 집필 활동으로 중국의 민주화와 인권활동을 활발하게 진행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이 이런 류샤오보를 그냥 놔 둘리가 없었고, 류샤오보는 노동개조형 3년을 선고받기도 했다. 그러나 노동개조형을 받은 이후에도, 활발하게 민주화 활동과 인권 운동을 추진하였고, 2008년에는 중국의 민주화 개혁을 요구하는 08헌장에 주도적으로 관여했다가 국가 전복 선동 혐의로 징역 11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류샤오보는 현재 까지 랴오닝 성 진저우 시의 교도소에서 수감중이다.

류샤오보는 중국 공산당의 뿌리부터 모두 깐다. 마오쩌둥은 물론이고, 덩샤오핑과 오늘날의 후진타오, 원자바오까지 모두 깐다. 투표로 지도자를 뽑는 민주주의를 강력하게 희망하고 있으며,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티벳 독립 관련 논란이나 중국인들의 비뚤어진 애국심 모두 대차게 깐다. 게다가 모든 비판이 허위사실에 근거하는 것도 아니라서, 류샤오보의 글을 보면 오늘날 중국이 어떻게 썩어문드러졌는지를 제대로 알 수 있다.

류샤오보는 중국 민주화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기 때문에, 중국 정부는 그를 함부로 죽이지도, 석방하지도, 그렇다고 그가 요구하는 대로 해주지도 못하고 있다. 민주화의 상징인데 왜 함부로 못 죽이는지 의아한 위키러가 있다면, 체 게바라피델 카스트로를 생각하면 된다. 류샤오보가 계속 살아있다면 언젠가 실수도 하고 비판도 나온다. 하지만 죽여버리면 류샤오보는 순교자가 된다. 요구를 들어줄 수도 없다. 그럼 공산당은 해체하거나 혹은 다당제를 인정하고 같이 선거를 해야 하는데, 중국 공산당 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의 이름은 중국 인터넷 검열 목록에 추가되었으며, 한국에서는 이를 이용해 그의 이름을 천안문과 같은 용도의 주문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당연하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다.(…)

3 노벨평화상

2010년 노벨평화상의 수상자는 류샤오보로 선정되었다. 당연히 중국 정부는 길길이 날뛰면서 노벨상 선정 위원회에 항의했지만, 중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에서 이 수상에 이의제기 따위는 그런거 없었다. 이렇게 중국 정부에서는 반발하였지만, 사실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자로는 최초의 수상자다. 단, 그 전에도 타국(중화민국 포함) 국적을 가진 한족 수상자들은 과학상 위주로 여럿 있었다.

2010년 12월 10일. 중국 정부는 류샤오보 본인은 물론 류샤오보의 모든 가족, 친척들과 인권운동가 등 수백여명을 출국금지 시켰기 때문에 노벨평화상 수상은 공석으로 진행되었다. 노벨위원회 측에서는 타국에서 활동하는 중국 인권 운동가에게 대리 수상을 시켰을 수도 있지만, 특별히 상징적으로 빈 의자에 노벨 평화상 메달을 수여하였다. 빈 자리에 노벨평화상을 수여한 건 나치 독일 히틀러 시대 이후 처음이며,[2] 현장에 참여했던 인원들 전원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3분 동안 기립박수를 쳤다.

류샤오보가 참석하지 못한 노벨 평화상 시상식장. 노르웨이 노벨상 위원회장이 연설을 하였다. 20분 경에 기립박수가 한 번 터진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는 국가도, 국가 내부의 주류 집단도 무제한적인 권력을 가지지는 않습니다. 인권이야말로 그들이 가진 권력의 범위를 제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국제연합의 모든 회원국이 따라야 할 것이고, 더 나아가 전 세계적인 선언으로 확장되어야 할 것입니다. (중략) 중국의 헌법조차도 기본적인 인권을 인정합니다. 중국 헌법 35조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시민들은 연설, 언론, 집회, 결사, 시위의 자유를 보장받는다'라고 규정합니다. 41조는 시민들에게 국가기관을 비판하거나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류는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했을 뿐이고,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습니다. 류는 석방되어야 할 것입니다.

연설은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는다.

아이작 뉴턴은 생전에 '내가 더 멀리 볼 수 있다면, 그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것은, 긴 세월동안 때로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도 신념을 지키기 위해 일어서서 우리에게 자유를 이끌어낸 수많은 이들의 어깨 위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다른 많은 이들이 돈을 세면서 눈앞의 국익만을 좇거나 무관심으로 일관할 때,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다시금 우리 모두를 위해 싸워준 이를 지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류샤오보의 2010년 노벨평화상 수상을 축하합니다. 류의 시각이야말로 결국에는 중국을 굳건하게 다질 것입니다.

연설 전문은 여기서 읽을 수 있다.

이후 세계 곳곳에서 류샤오보에 대한 석방요구가 빗발치고 있지만 중국 정부는 여전히 묵묵무답. 되려 노벨상을 쓰레기로 인식해버리더니 결국 진짜 쓰레기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2012년에 모옌노벨문학상을 받게되자, 중국 언론들은 모옌을 중국의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칭송하는 한편[3] 류샤오보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언급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오히려 모옌이 반체체 인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모옌을 최초의 중국인 노벨상 수상자로 포장하는 곳도 있다. 이뭐병도 아니고

4 트리비아

공자는 정치가들을 찾아다니다가 실패하자 결국 도덕의 교주가 되었다. 그가 스승 되길 좋아하고 스승을 자처했던 것은 거만하고 천박한 인격에서 비롯된 것이다. 공자는 태평할 때 세상에 나오고 난세에 숨는 처세의 대가였고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였다. 가장 교활하며 가장 실리적이며, 가장 세속적이며 무책임한 정신의 소유자 공자가, 수천 년을 이어 온 중화민족의 성인이자 모범이라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위 발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상당한 유교 비판론자다.
  1. 물론 그 전에도 1988년 11월에 마오쩌둥의 정치적 실책을 비판하고 마오쩌둥을 지옥에서 굴러들어온 악마에 빗대 비판하는 논설을 쓸 정도로 강단있는 지식인이었다.
  2. 이 때의 수상자는 '카를 폰 오시에츠키(Carl von Ossietzky, 1889년 10월 3일 ~ 1938년 5월 4일)였으며, 시상 당시 수감상태여서 1936년이 되어서야 상을 받을 수 있었다.
  3. 사실은 2000년에 가오싱젠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전적이 있다. 다만 가오싱젠은 80년대 말 이미 프랑스로 망명했으며, 이후 98년에 프랑스로 귀화해 수상 당시에는 프랑스 국적이었다. 가오싱젠의 작품은 89년 천안문 사태를 다룬 <도망> 발표 후 중국에서 모두 금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