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노 드 샤티용

1 개요

Renaud de Châtillon(1125 ~ 1187). 십자군 전쟁기사. 영어로는 Raynald of Châtillon(샤티용의 레이날드 또는 레날드)이기 때문에 두 가지 이름을 혼용하는 편이다.

2 2차 십자군 전쟁 시절

십자군 전쟁에서 나름 유명한 인물이지만 정작 이 아저씨가 샤티용에서 온 인물이란 것 빼면 알려져 있는 것이 없다. Donzy 지역 영주의 아들이란 것과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기 얼마 전에 샤티용 지역의 영지를 물려받은 것 정도만 기록되어 있을 정도. 그 때문에 기사이긴 해도 귀족으로써의 입지는 듣보잡급으로 추정하고 있다.

1147년, 2차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여 레반트 지역으로 건너왔지만 이 원정은 실패로 끝났고 이후 십자군 병력 대부분은 유럽으로 철수하였다. 하지만 르노는 유럽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안티오키아의 콩스탕스 밑으로 들어가 계속 활동하였다. 한편 콩스탕스는 1149년 남편을 잃었는데 1153년 자기보다 훨씬 어린 르노를 새 남편으로 맞이하였다. 이에 르노도 안티오키아 공작이 되었다. 다만 이 결혼은 비밀로 부쳐졌는데 이유는 르노의 신분이 비천했기 때문에 콩스탕스의 친족이자 종주권자인 예루살렘 왕국의 보두앵 3세나 안티오키아 교회의 총대주교가 이 사실을 알면 펄펄 날뛸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결국 안티오키아 총대주교가 이를 알게 되어 결혼이 무효라고 주장하자, 르노는 총대주교를 납치해서 벌거벗기고 온 몸에 꿀을 바른 다음, 파리가 들끓는 장마당에 묶어놓고 총대주교가 결혼이 적법하다고 선언할때까지 옆에서 느긋하게 기다리는 행각을 벌였다. 대주교가 항복하자 르노는 결혼식을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거행했고 대주교에게서 많은 돈을 뜯어낸다.

이후 별다른 행적이 없던 르노는 1156년 안티오키아 대주교에게서 뜯은 돈을 군자금 삼아 돌연 동로마 제국이 약속한 자금을 지원해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전쟁을 선언하였으며, 복수를 명목으로 키프로스를 공격하여 약탈하는 사건을 터뜨렸다. 제국의 황제 마누엘 1세는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에 하하하 이녀석 하하하란 반응을 보였고 제국군에 동원령을 내리고 안티오키아로의 진격을 시작하였다. 당시 마누엘 1세가 동원한 병력이 워낙 강대했기 때문에 이 병력을 막을 방법이 없었고, 키프로스 공격 자체도 내부의 반대를 억지로 찍어누르고 감행한 것이었기 때문에 도와줄 사람도 거의 없었다. 보두앵 3세는 니가 사죄해라라고 등을 돌려 예루살렘 왕국의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결국 르노는 맨발로 황제에게 찾아가 데꿀멍하는 수밖에 없었다. 마누엘 1세는 키프로스에 손실을 입힌만큼의 배상금 지불과 안티오키아가 라틴교회를 버리고 동방정교회를 따르는 조건으로 르노를 용서해주었다.

이후 르노는 성당 기사단과 함께 시리아아르메니아 지역에 준동하는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전투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1160년 그만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그리고 알레포로 끌려가 17년간 포로 생활을 했다. 그가 사로잡히고 나서 아무도, 심지어 그의 아내인 콩스탕스조차 구명운동에 나서지 않았다.[1] 그는 1176년 12만 디나르의 몸값이 지불되면서 석방될 수 있었는데 이를 계기로 르노는 그간 당한 굴욕으로 이슬람을 증오하기 시작하였고 복수심을 불태우며 이슬람인들을 무자비하게 다루기 시작하였다.

여담으로 르노의 몸값은 동로마 제국에서 지불하였다. 이는 르노가 포로로 잡힌 이후 안티오키아 공국에서 권력투쟁이 발생하였고, 귀족들과 주변 십자군 제후들의 압박을 받던 콩스탕스가 이 투쟁에 동로마 제국을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안티오키아의 마리아가 마누엘 1세의 황후가 된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다. 거기에 르노를 관리하던 사람은 누레딘의 아들이었는데 자신의 자리여야 했을 이슬람 세계의 지배권이 살라딘에게 간 것에 대해 열받은 그는 르노를 석방하는데 합의했다. 하지만 콩스탕스는 1163년 사망하였고 르노는 안티오키아 공작 자리를 잃었다.

3 예루살렘 왕국 시절

르노는 예루살렘 왕국의 신하인 Oultrejordain의 영주가 되었는데 이 역시 남편을 잃은 영주의 부인[2]과 재혼한 결과물이었다. 그 덕분에 알 카라크와 몬트레알 요새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요새는 이집트다마스쿠스 사이의 교역로를 견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더 나아가 홍해로도 진출할 수 있는 요지였다. 당연히 이슬람에 대한 복수를 불태우던 르노는 이슬람 상단을 약탈하고 포로들을 잔혹하게 대하면서 악명을 날렸다. 이후 1177년 몽기사르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나병을 앓고 있던 보두앵 4세를 보좌하였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살라흐 앗 딘을 대차게 바르고[3] 이슬람과 기독교 세력 사이의 휴전을 성사시켰다.

이를 계기로 잠시 조용해지나 싶었는데 1181년 르노가 알 카라크 성채를 지나가던 이슬람 상단을 공격하였다. 휴전조약을 어긴 것에 대하여 살라흐 앗 딘은 보두앵 4세에게 강력히 항의하였고, 보두앵 4세는 르노를 질책하는 행동을 보이긴 했으나 르노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었다. 결국 1182년 전쟁이 재개되었고, 르노는 아카바 항구에서 선단을 동원하여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 근처까지 진출하여 해적행위를 벌였다. 분노게이지가 차오른 살라흐 앗 딘은 동생인 알 아딜을 시켜 르노의 선단을 궤멸시켜 모조리 참수했고 아카바 항구를 점령해버린다. 그리고 즉시 병력을 이끌고 알 카라크를 공격하였으나 트리폴리 백작 레몽의 적절한 지원에 좌절하고 말았다. 이후 다시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양측의 대립은 잠시 멎었다. 살라딘은 그를 고삐 풀린 개라고 부르며 치를 떨었다.

1186년 보두앵 4세가 죽고 그 후계자인 보두앵 5세가 요절하자 예루살렘 왕국은 기 드 뤼지냥과 트리폴리 백작 레몽과 발리앙 가문이 중심이 되어 대립이 벌어졌는데 르노는 기의 편을 들었고 기는 예루살렘의 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르노의 힘 역시 막강해져 기가 마음대로 다룰 수 없게 되었는데 이는 결국 최악의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기가 즉위한 해 르노는 또다시 휴전협정을 어기고 이슬람 상단을 공격하였다. 당시 이 상단에는 살라흐 앗 딘의 누이들이 있었고 르노가 이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하자 살라흐 앗 딘의 분노게이지는 또다시 치솟았다. 한편 기는 살라흐 앗 딘과 맞설 경우 자칫 잘못하다간 나라망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르노를 처벌하려는 듯하 제스쳐를 취했으나, 르노는 이에 강력하게 반발하였고 기도 처벌의지를 꺾고 흐지부지 넘어갔다. 이때 르노는 "뤼지냥은 예루살렘의 주인이지만 카라크의 주인은 나다!"라고 호기어린 소릴했다. 결국 인내심이 폭발한 살라흐 앗 딘은 코란에 맹세코 저놈의 목을 직접 치겠다고 보복을 맹세하고 병력을 동원하였고, 르노도 이를 요격하기 위한 전투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하틴 전투에서 예루살렘 왕국군은 몰살당했고 기와 르노는 포로로 잡혔다. 살라흐 앗 딘은 협정을 어긴 르노를 강하게 질책하였고, 기가 보는 눈 앞에서 직접 르노의 목에 칼질을 하였다. 그리고 호위병들이 끌고 나가서 참수함으로써 생을 마쳤다.

4 평가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대립이 계속되던 시절에는 르노 역시 성지수호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란 평을 받았으나, 나중에는 이슬람 상인들을 상대로 벌인 학살이나 잔학행위 등으로 인하여 평판이 바닥까지 떨어졌다. 무엇보다 예루살렘 왕국을 멸망으로 몰아세운 인물인 까닭에 더더욱 평판이 바닥을 기는 상황이다.

아무리 이교도인 이슬람과 협정이라지만 심각하게 협정을 어겨서 보두앵 4세조차 사과를 명령했을 정도였다. 거기다 일반적인 약탈 정도면 이슬람 쪽도 어느 정도는 참고 넘기겠지만 통행료를 뜯는 수준이 아니라 무자비한 대우에다가 살라딘의 누이까지 건드리는 등 정치적으로 문제가 될 행동도 막 해댔다. 나름 영주라는 작자가 자기가 한 정치적 결과도 생각 안하고 복수심에 눈이 멀어서 행동하다가 나라를 말아먹게 만들었다.

5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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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덤 오브 헤븐에서는 아일랜드의 배우 브렌던 글리슨이 열연했다.
계속해서 캐러반들을 습격하여 티베리아스[4]의 경고를 받지만 "헐, 이교도의 증언은 증거로 안쳐줌, 내가 습격했다는 증거나 있수?"하고 뻔뻔한 태도로 일관하면서도 계속 정신 못차리고 무슬림들을 습격하며 협정을 어긴다. 작중의 행보와 호전적인 이미지가 고증이 잘 되었다.

다만 실제와 좀 다른 점이 있는데 르노가 기 드 뤼지냥과 연합하여 카라반을 습격한 일로 분노한 살라딘이 20만 대군을 이끌고[5] 케락에 접근하자 보두앵 4세가 자신이 직접 르노를 처벌하겠다며 살라흐 앗 딘을 달래 그를 철군시킨다. 대군을 이끌고 케락에 입성한 다음에 왕을 영접하는 르노의 앞에서 왕의 권위를 세우고 문둥병에 걸려 썩어들어가는 자신의 손에 입맞추게 한다. 비굴할 정도로 고개를 숙이며 불쌍한 표정을 지어보이던 르노는 필사적으로 보두앵 왕의 피고름이 흐르는 손을 거의 빨아당기지만 왕은 그걸 뿌리치고 말채찍으로 르노의 빰을 수차례 후려갈겨 피투성이로 만들고 사형을 선고한 다음에 투옥한다. [6]

보두앵 4세의 승하 이후, 감독판에선 보두앵 5세까지 승하한 다음에 왕이 된 기 드 뤼지냥의 요구에 따라 다시 캐러반을 습격하고 살라딘의 누이까지 살해한다. 살라딘은 르노만 처벌하면 전쟁은 없을 것이란 메시지를 보내지만 기 드 뤼지냥은 살라딘의 사신을 처형하고 전쟁을 선포한다. 그리고 신이 난 두 사람은 예루살렘 왕국의 모든 가용병력을 이끌고 우랴 돌격을 감행하다가 하틴 전투에서 전멸당하고 살라딘의 포로가 된다. 살라딘이 기에게 내미는 갈은 얼음을 기가 사양하고 자신에게 건내주자 살라딘의 여동생을 죽인 것 생각도 안하고 양심없게도 맛있게 받아먹었다. 살라딘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건 너에게 준게 아니야."라고 한 마디 하자 뻔뻔한 표정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폐하."[7]라고 답한다. 옆의 작중에서 계속 살라딘에게 예루살렘 탈환을 종용하던 이슬람 성직자가 살라딘에게 칼을 내미는 것으로 르노를 처형하라고 돌려서 권하자 살라딘은 잠시 그 칼을 쳐다보더니 자신의 단검을 뽑아서 르노의 목을 칼질한다. 르노는 피를 쏟으며 컥컥거리며 끌려나가서 살라딘의 부하들에 의해 목이 잘린다. 감독판에서는 부하들이 피를 흘리며 경련하는 그를 붙잡고 살라딘이 직접 칼을 들어 르노의 목을 잘라버린다. 그 모습을 보며 성직자가 살벌하게 웃는 모습이 성가와 어울려서 매우 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8]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2 : 에이지 오브 킹에서는 살라딘 캠페인 2, 3에서 직접 유닛으로 등장하는데 중반 캠페인 오프닝에 살라딘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언급이 나온다.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에서도 실제 인물과 비슷한 이미지로 등장했는데 여담으로 유언은 오 마이 숄더...
  1. 시오노 나나미십자군 이야기에서 이 일화를 서술하면서, 그 깽판(...) 다 쳐가며 (억지로) 결혼한 부인마저도 남편인 그를 구명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미 그가 어떤 인간이었는지 답이 나온다고 깠다.
  2. 유일한 상속녀란 말도 있다.
  3. 살라흐 앗 딘도 포로로 잡힐 뻔 했을 정도로 대패했다.
  4. 실제 역사에선 트리폴리 공작 레몽 3세.
  5. 물론 이것은 고증 오류. 실제론 많아봐야 4만이다.
  6. 그러나 실제 보두앵 4세는 그 정도로 르노를 강하게 다루지는 못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르노가 예루살렘 왕국의 봉신이긴 해도 종속된 독립영주에 가까운 위치여서 왕들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고 한다.
  7. 작중에서 나도 알아, 란 대사를 많이 한다. 연출상 아랍어를 못알아 들어서 그냥 얼무거리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영화를 보면 티베리아스나 시빌라 등 예루살렘측 등장인물들도 간간이 아랍어를 쓰는 장면이 나온다. 그래봐야 가마를 드는 사람(주로 아랍인)에게 명령할 때 쓰는 정도지만.
  8. 당시 포로에게 물을 주는건 신변보장을 해주겠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기에게 물을 준건 '넌 살려줄게' 이며, 기가 물을 안 마시고 르노에게 토스한건 '난 죽음을 받아들일 거니까 내 부하나 살려줘라' 라는 뜻이며, 르노에게 너에게 준게 아니다 라고 한건 '넌 죽인다' 라는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