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박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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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박산성을 설치하고 있을 당시에 찍은 영상

1 개요

2008년 6월 10일에 대한민국 서울 도심에 있었던 촛불집회를 막기 위해 서울시 종로구 세종로 한복판에서부터 시작하여 안국동, 사직터널 등에서 청와대에 진입하는 도로를 모두 봉쇄한 경찰컨테이너 구조물을 일컫는 말이다.

다음 날인 6월 11일에 철거되었다.

당시 이명박컴도저[1]를 자칭 하며 독불장군 식으로 밀어 붙이는 정치로 불통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었으며, 이런 소통 부족으로 인하여 나온 결과가 2008년 촛불집회였다. 집회가 일주일경 지속되면서 시위대로부터 대화, 소통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계속 나오는 와중에 설치된 것이 저 와이어로 고정된 컨테이너 박스였다. 이명박 정권은 언제라도 철거 및 재배치가 가능한 차벽과는 달리 공공시설인 광장에 신속한 철거가 불가능한 고정구조물을 설치해 놨다는 점에서 산성이라고 비꼼을 당하였다.

1.1 설치

2008년 6월 10일, 서울 시내에서의 전례 없는 대규모 시위에 대비하기 위해 당시 경찰청장인 어청수가 세종로에 설치하였다. 새벽에 구축을 시작해 당일 오후에 완공되었으며 대략 세종로의 이탈리아 음식접 '자콥' 에서 시작하여 세종로를 횡단, 정보통신부 건물까지 일직선으로 뻗어있었다. 용접된 다수의 컨테이너가 2층 구조로 세종로의 중심을 막았으며 양익을 다중의 경찰 버스로 보완한 구조. 그 내부에는 모래주머니를 가득 채워 넣었으며 길바닥에 와이어로 고정시켰다. 컨테이너 표면은 시위대가 기어오르거나 무너뜨리는 것을 막기 위한 윤활유가 칠해졌다. 또한 뒤에는 소화기가 대량 배치되었고 이어 대규모의 전경 부대가 배치되었다.

당시 명박산성 전경을 찍은 영상

1.2 문제점

물론 도로를 통째로 막아버렸기 때문에 많은 시민들의 출근길을 방해했다. 사실 어차피 그 전부터 세종로 일대는 시위대가 초저녁부터 다음날 아침 출근시간까지 계속 점거하고 있었기에 한낮을 제외하면 도로로서의 실제 기능이 마비된 상태였다. 그러나 산성(...)의 경우 이른 아침부터 설치하는 바람에 하루 온종일 도로를 마비시켰다는 데서 좀 더 문제가 컸다.

한때 태극기가 걸려있기도 했으나 윤활유에 더러워져버려 태극기는 설치 2시간만에 철거되었다.[2] "컨테이너 박스를 당기면 위험합니다" 라는 플래카드와 "경☆ 08년 서울의 랜드마크 명박산성 ☆축" 이라고 써있는 플래카드가 묘하게 공존하고 있었다.

2 전례

바리케이드 설치는 한국의 전통적인 전술이었다. 이러한 전술은 4.19 혁명 때 소방차, 경찰차, 시내버스를 동원하여 실시된 바 있으며[3], 박정희 정권 중 6.3항쟁 당시 [15.jpg 김대중 정권인 2002년 12월, 미군 여중생 압사 사건에 대하여 미대사관으로 향하는 시위대를 세종로에서 저지할 당시], [4.jpg 노무현 집권 7일차인 2003년 2월 31일 미군 여중생 압사 사건 시위 당시 주한미국대사관 앞 세종로] 등에서 시위대 진로 차단, 특정 대상 보호, 물리력 충돌 최소화 등과 같은 목적으로 실시되어 왔다.

2.1 컨테이너 차단막의 시초

이런 컨테이너 박스 설치는 노무현 정권에서 이미 실행된 바가 있다[4] 일부에서는 이걸 이유로 명박산성에 대한 반발로 무현산성이라는 용어가 나타났고, 이 과정에서 버스를 비롯한 저지선 일체로 그 의미가 확장되었다고 한다. 이에 일각에서는 중립적인 명칭으로서, 최초로 아이디어를 고안한 사람이 어청수였으므로, 청수산성이라 부르자고도 했으나 널리 퍼지지는 않아 아는 이가 많지 않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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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APEC 정상회담 당시 부산 BEXCO앞 시위장면

본래 과격시위대에 대한 컨테이너 방어전술이 처음 도입된 것은 참여정부 시기 2005년 11월의 일로 이후 경찰청장이 된 당시의 부산경찰청장 어청수가 APEC 정상회의장에 돌격하려던 2만여 명의 과격시위대에 대하여 컨테이너 바리케이드로 이를 방어하여 효율성이 입증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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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 당시에는 단순하게 컨테이너의 보강 작업 없이 순수하게 컨테이너만을 설치하였다. 그래서 시위대가 컨테이너를 끌어내자 속절없이 무너지고, 컨테이너 박스 위에 있던 경찰이 시위대 위로 떨어졌다. 떨어진 전경들은 그대로 집단구타를 당했다고...

3 철거, 그 이후

윤활유가 칠해져 있는 것을 보고 일부에서는 "프락치가 의도적으로 방화하게 하여 사건을 크게 만들려는 계략이다" 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시위 도중에 스티로폼으로 계단을 쌓아 넘어가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의지의 표현만 있었을 뿐 정말로 넘어가지는 않았다. 이후 스티로폼은 시민의 자유발언을 위한 연단으로 바뀌었다가 깃발과 플래카드(및 이것들을 든 이들)만 올려보내 퍼포먼스를 취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스티로폼도 "프락치가 폭력시위를 유발하기 위해 가져다 놓은 것이다"라는 주장이 상당히 크게 돌았으나 실제로 그 스티로폼을 가져온 사람은 실제로는 촛불시위 열렬 참가자였었고 뒤늦게 본인의 행동이 프락치의 소행이라고 욕 먹고 있는 것을 알고 "내가 알바고 프락치냐"라며 분개하는 글을 올려서 프락치설 주장하던 사람들이 일제히 버로우 타기도 했다.

그리고 결국 명박산성은 건설 하루 뒤인 6월 11일에 철거되었다.

행정부에 의한 독단적인 행정(쇠고기 수입 협상) 진행, 이를 저지하거나 공론화하지 못한 입법부(국회)의 무능함, 더 나아가 과장된 광우병 괴담 등으로 불만을 품고 길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 ㅡ 명박산성은 이런 2008년 촛불집회의 본질을 상징하는 매우 부정적인 상징물이 되었다. 물론 시위대와 전경의 충돌을 물리적으로 막아 폭력시위로 비화되는 것을 막았고 날마다 철야하던 전경들도 눈 좀 붙일 수 있었으니 100% 완전한 뻘짓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면도 있지만. 02년 전후만 하더라도 차벽만 설치해 줘도 전경들은 쉴수 있다고 굉장히 좋아 했다. 그런데 그 차벽도 결국 시위대가 무너뜨리고 컨테이너박스도 나중에 가만 결국 무너지고....

결국 2009년에는 광화문공원이 생겼다. 여의도 광장이 여의도 공원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시위대의 대화 요구에 '컨테이너 박스=소통 거부'로 대답한 격이 되면서 이에 비꼬는 의미로 '명박산성'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라는 평이 있다.
우스갯소리로 명박산성이 산에 있지 아니하다고 해 '명박평성' 이나 '이명박성', 또는 '명박요새', '명박철보', '명박읍성'(...) 이라고 부르자는 말도 있었다.

4 위헌성

차벽 문서 참조.

5 대중 매체 등장

이말년씨리즈 '불타는 버스' 에 등장. 불타는 버스는 그대로 들이받아서 폭발엔딩을 맞이했다. 야후 연재분에서는 'XX산성' 으로 검열삭제되었다.[5]

2014년 이터널시티3 티저 영상에도 비슷한 컨테이너 성벽이 등장했다. 이번에는 다행히도 악당들의 성(...)이 아닌 생존자들이 좀비를 차단하는 방어선으로 등장. 명박산성 탄생 이래 최초의 선역 사진의 경☆ 08년 서울의 랜드마크 명박산성 ☆축 플랜카드는 서울 자치 지구라는 뭔가 있어보이는 단어로 바뀌었다.

부산행 마지막 부분에서 낙동강 주변으로 추정되는 지역에 군인들의 엄호 아래 좀비 그리고 고라니 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서 컨테이너로 차단벽을 쌓고있다. 부산지역에 컨테이너가 잔뜩 있을테니 현명한 선택인듯.[6]
  1. 컴퓨터+불도저
  2. 이것 때문에 시위대에서는 한때 경찰을 국기·국장모독죄고발하자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물론 이 법률은 고의로 국기를 오욕한 자일 경우에만 해당하니 가능성은 없는 얘기지만 갈색 윤활유에 떡이 되어 현장에 방치되었던 대형 태극기를 보고 불쾌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도대체 어느 경찰 간부의 아이디어였는지...
  3. 동아일보 4월 19일 3면 참고
  4. 특히 2006년 포항에서는 컨테이너 바리케이드에 맞서서 건설 노동자들이 중장비를 휘두르며 해체를 시도,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그리고 이때의 사건을 바탕으로 컨테이너 바리케이드의 설치 및 운용에 관한 전술이 많이 발전하였다.
  5. 참고로 해당 화는 위헌 판결 이전에 그려진 만화다.
  6. 부산항과 부산신항에서 컨테이너를 공출해 온 걸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