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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개요
2008년 4월 중순부터 8월 중순에 걸쳐 한미 FTA 개정을 통한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 문제를 중점으로 하여 대한민국에서 대규모로 일어났던 집회.
요약하자면, 정부 측의 불통과 주최 측이 갈등을 빚으면서 집회 참여자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온갖 수단 방법을 동원하면서 정부와 주최 세력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기 시작하였으며, 2016년 현재도 진보 네티즌과 보수 네티즌들이 인터넷 커뮤니티 곳곳에서 키보드 배틀을 벌이며 본격적인 진영싸움을 하게 된 계기이다.
평가는 혼재되어 있다. 집단지성의 가능성을 보았다든가, 이명박 정부에 의해 훼손된 대의민주주의 대신 시민들이 직접 나서는 참여민주주의, 직접민주주의의 실험장이었다는 평가도 있는 반면 시위의 원동력이 되었던 광우병 관련 정보들이 허위사실임이 밝혀진 이후 선전, 선동이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주는 대표 사례이자 진보진영의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이율배반적인 행위로 보수진영의 과격화를 초래한 사건으로 보는 시선도 있다. 일부는 이 사건이 토론과 상대방을 기분을 존중하는 민주주의의 기본을 가르치고 이해시켜야 하는 이유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2 발단
한미 FTA 관련 쇠고기 통상 협상에서 광우병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었고 그에 대해서 정부의 불통으로 해명이 되지 않자 일부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광우병 위험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는 수입할 수 없다는 주장이 공감대를 얻기 시작하였고, 이 과정에서 정부는 시민들의 불안을 이해해보려는 시도보다는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시민들의 불만이 가중되었다. 노무현 정부 때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대해 반대하던 조중동과 한나라당 등이 몇 개월 만에 태도를 완전히 뒤바꾼 것도 신뢰를 주지 못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공식적인 집회의 시작일은 '광우병국민대책회의'가 공식으로 시위를 주최한 2008년 5월 2일이지만, 실제로는 4월 중순부터 연예인 팬클럽에 소속된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이후 5월 2일 '정책반대시민연대'와 '미친소닷컴'이라는 인터넷 모임에서 집회를 열었고 이런 모임들과 시민사회단체, 정당 등이 합쳐진 대책회의가 꾸려지면서 집회를 진행했다. 대책회의의 공식명칭은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을 반대하는 국민대책회의'였다.
3 과정
'촛불 문화제'라는 이름으로 진행되었다. 주로 자발적 참여자에 의한 연설, 즉석 토론, 노래와 구호 합창이 주된 프로그램이었다. 김장훈, 윤도현 등 문제의 취지에 공감한 몇몇 인기 연예인들의 즉석공연도 있었다. 물론 가두 행진을 막기 위해 전의경 병력들과 경찰 버스로 차벽을 만들고 당시에는 야간옥외집회를 금지[1]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후 10시 이후 해산 권고 방송을 반복적으로 했을 뿐 물리적 진압은 없었다.참가한 시민들도 해산권고에 응해 '내일 또 모입시다' 며 알아서 해산하는 분위기.이 때 당시 이명박 정부의 0교시수업과 학교자율화 정책추진의 영향으로 집단으로 참가한 10대 청소년의 비율이 의외로 높았다.
집회현장 전체를 동그렇게 차벽으로 둘러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게 하는 등 경찰의 대처는 촛불집회 이미 집회가 잘 끝나게 돕기 보다는 하기 힘들게 방해하는 형태에 더 촛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또한 해산 경고 방송은 오후 8시 정도만 되어도 했다. 이는 당시에 야간 옥외집회를 경찰에서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후에 헌법불합치 판결을 받았다.
이 상태로 장기간 시위가 이어지는듯 했으나 점차 경찰의 촛불문화제 원천봉쇄 압력이 강해지고 실효성 있는 공청회 등 정부의 성의있는 반응도 보이지 않자 시위대도 가두행진을 시도하는 등 점차 과격해지기 시작했다. 5월 31일 행진을 하면서 이뤄진 전경과의 대규모 물리적 충돌은 이러한 분위기를 가속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전경의 군홧발에 밟힌 여대생은 분노의 기폭제가 되었다.(물론 이는 완전한 선동이었다) 게다가 이 시기를 즈음하여 청와대와 대통령측의 "저 촛불들을 누구 돈으로 샀는지 조사하라"(배후세력이 있다는 식의 발언), "안 사먹으면 될거 아니냐"등의 발언이 이어지면서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 되었고 결정적으로 '여대생이 전경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되었다','임산부를 폭행해 유산시켰다' 같은 말도 안되는 루머들이 퍼지면서 시위는 들불처럼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이는 그 유명한 '안마열사'의 헛소문 유포로 밝혀졌다.
서울에서 시위대의 가두행진은 종로, 율곡로 뿐 아니라 서대문, 신촌 등 서울 시내 여러 곳에서 기습/산발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참가인원이 점점 늘어나면서 광화문과 시청광장으로 고정되기 시작했다.
4 최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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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7일, 서울 시청 앞 광장 |
달아오른 시위의 분위기는 6월 현충일 전후로 그 절정을 이루기 시작했으며, 10일에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서울 시위는 경찰 추산 8만 명이었다. 주최측은 서울 70만 명 전국 합산 100만 명으로 추산했다. 사람이 많고 적음을 인식을 할때는 로그스케일로 인식을 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많이 차이가 날 수 있는 것이다. 추산 인원의 차이가 크기는 하나, 정말 많이 참가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때 서울의 광화문-안국동-종로3가-종로2가-종각이 모두 사람으로 덮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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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10일, 서울 시청 앞 |
이후 대책회의 측은 의료 및 수도 민영화, 한반도 대운하 사업, 언론 탄압과 같은 정부 정책 전반에 대한 비판들로 의제를 확산했다. 여러 주제를 다루게 되면서 광우병에 대한 비중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같이 다루고 있음을 당시 사진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 #2
시위세력의 경찰에 대한 폭력 사용 빈도와 강도가 높아지고, 시위가 장기화되며, 시위의 이슈가 더욱 강한 정파성/반정부성을 띔에 따라 부동층 시민들의 참여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러한 와중에 천주교, 불교, 개신교 등 종교계가 시국선언을 발표하며 행진을 주도함으로써 7월 4일 다시 절정을 이루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소강상태로 접어드는 분위기가 되었다. 이 때는 시위대가 청와대로 가야한다는 쪽과 평화시위를 해야한다는 쪽으로 갈라졌다. 청와대를 가야한다며 행진을 시도한 쪽은 경찰에 의해 통로가 막혀 결국 광장으로 되돌아왔지만 어떻게 해야 할 것 인가에 대해서 중구난방의 다양한 의견들이 쏫아졌다. 의견이 통일될 수도 없었고 대책회의가 어떤 방향성을 제시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지만 힘을 합치지 못했고 분명한 소강상태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는 등 정부의 입장 후퇴로 점점 부동층 시민들의 참여가 감소하였다.
이전에는 시위대의 규모가 워낙 커서 방어위주 진압을 하거나 새벽/아침 무렵 진압/해산을 시작했으나 이 때부터는 시위진압 시각도 당겨지고, 그 강도도 훨씬 높아졌다. 시위대 또한 과격화되거나 내부에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이용하는 세력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런 사람들중 유명한 사람이 안마열사, 새총열사, 염산열사, 여대생 사망설 루머 유포 등 여러가지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한 것은 대부분 이 때의 일. 그만큼 누구나 나서서 대중을 선동하기 쉬운 상황이었다.
5 소멸
이 시기 시위는 과격, 극단화되어 정권의 퇴진을 직접적으로 요구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고, 불통하는 정부와 시위 진압으로 대응하는 경찰, 여론 분열, 시위대 내부의 물의와 유언비어로 인한 신뢰도 하락, 논조의 극단화로 인해 지지자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이후 정부의 사과 담화문 발표에도 경찰의 진압, 정부의 미숙한 대처로 인한 국민들의 신뢰 상실, 각종 과장된 유언비어에 선동된 시민들의 감정 격화 등의 복합적인 이유들로 인해 시위대와 전경 사이의 전투로 발전하였다. 이 때 보수/진보 언론의 논조가 다르기 때문에, 1면에 내건 신문의 분위기는 그 차이가 극명했다. 여기에는 촛불집회가 후반으로 갈수록 경찰이 진압과 검거를 공세적으로 했다는 점, 8월 부시 미 대통령이 방한한 시점부터 경찰이 색소물대포를 사용했다는 점 등이 큰 몫을 했다. 더불어 지속되는 정부의 대응에 시민들 스스로가 지치면서 결국 2008년 8월 15일을 마지막으로 대규모 촛불시위는 끝났다.
6 내용
6.1 반정부적 시위와 경찰과의 충돌
초창기까지는 평소의 시위처럼 그렇게 끝나갈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예정되었던 소고기 수입고시가 승인되면서 전반적인 시위 양상이 반정부 과격 폭력시위로 바뀌어가게 되었고 각종 루머와 선동성 자료들의 등장과 함께 성격과 규모도 과격하고 거칠어지게 되었다. 이에 경찰도 전의경 모든 중대를 경계투입하게 되었고[2], 경찰 특공대까지 출동하고, 경찰은 집회 현장이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게 전경버스로 주변을원천봉쇄하였다.
서울 시위에서 경찰은 일부 시위대가 청와대와 '혐오기업' 및 언론사까지 습격하려는 보고가 들어오자 전의경들을 길목에 배치하여 시위대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봉쇄를 하였고 뒤이어 물대포와 최루가스, 소화기 분말 등이 등장하게 되었다. 반면 시위대의 길을 봉쇄하자 충돌을 빚기보다는 시청, 신촌으로 돌아가는 등(...) 이전 시위문화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경찰이 당황했다는 사례도 있다.
집회 참가자들과 경찰의 대립도 격화되어 참가자들은 경찰이 과잉진압을 하고 연행하는 등 유혈사태를 일으킨다고 주장하였고, 경찰은 시위성격이 반정부 시위로 변질되어가기 때문에 일반시민의 안전과 사회안정을 위해 강경진압으로 풀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6.2 시위자들이 지목했던 우호기업과 혐오기업
시위세력은 국내 일부 기업 및 언론사에 대해 촛불시위에 대해 긍정적인 곳은 우호기업, 촛불시위를 옹호하지 않거나 또는 비판적으로 대하면 혐오기업으로 지정하였다. 우호적인 기업으로는 삼양식품, Daum, 경향신문, 한겨레신문, 오마이뉴스, 미디어오늘 등이었고 혐오적인 곳으로는 삼성그룹, 농심그룹, 롯데그룹, 조중동, KBS 등을 지목하였다. 이들은 조중동 계열 및 그들의 대형 광고주이다. 이들은 우호기업은 촛불시민들이 힘을 합쳐 밀어주고, 혐오기업은 망하게 하자라는 여론을 형성했다.
특히 서울 광화문에 있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본사 사옥이 시위대에 의해서 입구가 점령되고 습격을 당하여 동아일보 깃발이 강제로 끌어내려질 뻔도 하였고 사옥 외부 종이신문 열람대는 시위대가 불 끈 초로 낙서를 하여 훼손되는 등 기물테러를 당했다. 동아일보과 조선일보 그리고 코리아나호텔과 일민미술관 등이 시위대의 습격을 받아 간판이 파손되고 입구가 파손되어 봉쇄되거나 집회에 사용하고 남은 쓰레기를 모아다가 출입구 앞에 쌓아놓는 등 수난을 겪었다. 일부는 근처에 있는 삼성그룹 태평로 본관 사옥으로까지 습격을 시도하려다가 실패했다는 일설도 있다.
또한 이들은 삼양식품을 우호기업으로 표방하며 시위참가 때 삼양식품들의 제품들을 산성처럼 쌓아놓고 삼양식품 제품을 이용하자는 운동을 펼쳤다. 이들은 삼양식품은 국민들을 진정으로 위했던 양심적인 기업이고 농심은 우지파동으로 삼양의 아성을 빼앗은 비겁하고 치졸한 기업이라는 확인되지 않은 선동을 인터넷에 뿌려대어 이러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조중동" 절독 및 불매운동, 조중동에 광고를 게재하는 기업상품에 상품 불매운동도 벌이는 등 이들 기업에 대해서 반(反)기업 시위로 연장하기도 하였다. 이에 삼양식품은 조중동 지면광고를 내지 않기로 하는 등 일부 기업들은 시위대의 반응에 동조하기도 하였다. 이에 해당 언론들은 시위자들이 이제는 언론사 고유권한까지 방해하고 있다며 이를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다. 이에 "조중동"은 집회에 우호적인 미디어다음에 뉴스공급을 중단했고 다음측도 이에 2011년까지 조중동 관련 매체의 뉴스게재를 거부했다.
6.3 진보와 보수의 반응과 대립
이 시위에 대해서 진보와 보수간의 대립과 갈등이 이어졌으며 진보쪽에서는 정부의 무리하고 지나친 소고기 수입에 맞서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주최한 행사이자 평화적인 문화집회라며 지지를 표방하였으나 이후 불통하는 정부와 경찰의 진압, 여론 분열 등으로 물리적 행사가 늘어났다. 보수쪽에서는 이에 대해반정부, 반미를 앞세우고 심지어는 친북 및 종북 좌파들이 정부전복과 반미를 빙자하여 폭력시위를 찬동시켰다고 주장하는 등 대립각도 심각했다. 친미 성향에서는 종북 좌파 빨갱이들이 반정부, 반미를 조장하여 사회전복을 꿈꾸고 있다는 논란까지 주장하였다.
이 시위를 계기로 진보와 보수의 대립과 갈등도 격화되었으며 시위가 끝난 지금도 정치적, 사회적인 문제로 대립을 계속하고 있다. 좌파성향 일색이던 온라인 커뮤니티 환경이 해당 시위를 기점으로 좌우 대립이 뚜렷해진 양상을 보이게 됐다는 의견도 있다.
7 이런 저런 이야기
- 이 사건의 영향으로, 온라인 세계에서는 정치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거대 포탈과 취미 관련 커뮤니티, 블로그, 취미 사이트 등에서 연일 보수 vs 진보 대립으로 인한 개싸움이 수시로 벌어지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곳이 루리웹이나 이글루스. 지금도 보수/진보 대립이 심각한 곳들이다. 물론 이는 온라인에 국한되지 않았으며, 술집 등 오프라인 모임에서도 촛불시위가 화두로 나왔다가 싸움까지 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2016년을 기점으로는 이글루스는 보수 성향이 우세하나 어느 정도 진보 성향 블로거가 존재하고, 현재 루리웹은 완전히 친노+정치극단주의로 기울어졌다. 결국 보수쪽은 네이버, 디시인사이드 등지에 몰려가는 현상이 벌어지게 된다. 네이버가 N프로젝트등 좌편향 커뮤니티에 의한 검색어 순위조작 의혹에 휘말린 것도 이때부터 일어났다고 한다. 한편 디시인사이드 전체가 보수화된 것은 2010년 이후로 진행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정사갤의 보수화는 물론 그 이전으로, 보통 키보드 워리어의 어원으로도 알려진 전여옥과의 대담을 기점으로 보지만 이 정사갤은 당시에는 변방의 한 갤러리에 불과했고,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전성기를 맞았던 합필갤에서는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와 서울시장 이명박 짤 등도 적극적으로 합성에 이용했다.
- 이 사건으로 인해 인터넷에 활동하는 정치 관련 네티즌과 선동가들을 대거 양성화 하게 되어 연일 선동을 하거나 단순히 정치 성향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특정 언론사를 비난하는 등 극단적인 모습들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 SLR클럽에서 자체적인 시민 기자단을 구성해 운영하는 등 많은 커뮤니티들이 이에 호응하였다. 아프리카 TV 등 온라인 현장 중계도 이 때 유명해졌다.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폰카, 문자 등을 이용해 순식간에 시위 관련 속보를 온라인으로 퍼뜨리는 정보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 때 일부에서는 한국에서 쿠데타는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반란군이 움직이는 순간 순식간에 시민들의 폰카와 문자를 통해 소문이 퍼질 것이라고. 쇠고기 등에 반대 광고를 게제한 커뮤니티도 수십 곳에 달할 정도. 이 외에도 카이스트를 포함한 다수의 대학 학생회들도 참여하였고, 이 외에도 많은 사회 단체에서 참여하였다.
- 촛불시위 당시와 그 이후 한겨레로 대표되는 진보계열 언론에서는 촛불시위의 주 참여 계층 혹은 원동력을 10대 여학생이나 2, 30대 여성으로 파악하였다. 실제로 촛불집회 초기에는 10~20대의 여성이 더 많았다. 그 다음으로 많다고 알려진 건 40대의 남성으로 20~30대 남성의 참여 비율이 가장 저조한 편이었던게 사실이다. 때문에 20대가 촛불시위에 나오지 않았다고 단정하며 20대를 향한 20대 개새끼론을 구사하기 시작한다. 이 20대 개새끼론은 엄밀하게 말하면 '대학생 개새끼론'이 되겠다. 각 대학 단위의 참여는 미미했던 것도 사실이다. 개인이나 친구 단위로 참가한 대학생들도 많았겠지만, 대학 학생회 단위의 참여가 아니면 사회적으로는 그냥 참가한 일반인들과 아무런 의미 차이가 없는 것이다. '대학생 집단'이라는 대표성은 없었다. 당시 촛불집회 자체에 관심이 없거나, 심지어 '불법'이라는 이유만으로 아예 부정해 버리는 '대학생'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대학생들 참여가 저조했던 것에는 현실적인 여러 문제들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일단 기말고사와 방학기간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직적인 결집이 어려웠다. 운동권을 중심으로 한 학생회에서는 응집성이 높았던 광우병 문제를 넘어서 이슈를 정권 퇴진으로 몰고가면서 거부감을 주기도했다. 아울러 대학 본부의 제어노력과 학생회의 반발과정에서 벌어진 블랙코미디 등에 비운동권인 일반 학생들의 거부감도 있었다. 근본적으로는 취업준비소가 된 대학과 아직 운동권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학생회 지도부의 인식 차이가 자리잡고 있기도하다. 이 20대 개새끼론과 아울러 강남 좌파 혹은 20대 여성에 대한 찬양론이 잠시 일기도 했다.
- 2008년 7월 시민과함께하는변호사들, 바른사회시민회의 등으로 구성된 ‘바른 시위문화 정착 및 촛불시위 피해자 법률지원 특별위원회’는 광화문 주변 상인들의 위임장을 모아 광우병국민대책회의와 국가 등을 상대로 손배해상 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은 “불법·폭력적 시위를 조장한 광우병국민대책회의와 졸속협상으로 시위를 촉발하고도 시위대를 방치하고 차벽을 설치해 통행을 금지한 국가로 인해 매출액이 감소했다”고 주장하며 전년 대비 카드매출액 감소분과 위자료를 청구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현행 집시법은 공공의 안녕질서와 조화를 이루는 범위 내에서 집회·시위의 자유를 보장해 국민 전체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지, 집회·시위로 인해 피해를 입은 개개인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라며 “집시법 위반이 손해배상 책임의 부담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이어 “2008년 5~7월 해당 세무서 조회 결과 원고들이 운영하는 업소에서 오히려 신용카드 매출액이 증가한 경우도 있어 손해를 입었다는 증거가 부족하다”며 “또 손해를 입었다 할지라도 불법행위의 간접적 손해는 가해자가 그 사정을 알거나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인정되는 경우에만 배상 책임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당연한 결과다. 시위에 있어서 기물파손이나, 방화 등의 문제가 발생해 고의적인 손상이 있지 않은 이상, 그 손해배상을 시위자들에게 요구하는건 민주주의 사회에서 용납이 될 수 없는 행위다. 그리고 상인들의 증거마저도 신용카드 매출이 증가했다는 법원의 심리에 의해 부정되었다.
- 당시는 숭례문이 붕괴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관악산의 화기를 막으려 세웠던 숭례문'이 무너진 이후 들어오게 된 '화기'가 이 시위대를 말한다는 평도 있었다. 그리고 숭례문의 개방을 추진했던 당시의 이명박 서울시장(임기 2002~2006년)에 대한 비판이 시위와 연결되기도 했다.
- 2008년 시위 열기가 뜨거울 때 서울시 공공장소 여기저기에 빨간 스프레이로 "MB OUT" 문구가 써져 기물훼손 건수가 상당량 발생하기도 했다. 해당 낙서들은 해를 넘기기 전에 보수작업 등으로 제거되었다.
- 시위가 한창일 때 군대를 제대한 예비역 남성들이 경찰과 시위대의 사이에서 스크럼을 짜고 충돌을 막은 적이 있다. 자발적으로 벌어진 일이며 덕분에 해당 지역에서는 충돌로 인한 부상자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 당시 촛불시위 이전부터 1000일 농성을 벌여오고 있던 금속노조에선 촛불시위에 대해 '인터넷에서 사람들이 촛불집회 얘기는 많이 해도 비정규직 얘기는 잘 하지 않는다.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비정규직이어도 우리 아이는 비정규직이 되지 않을 거라고 자위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비판했다.#
- 촛불시위서 사모임 결성, 작정하고 쇠구슬·염산투척, 서울 남대문경찰서는 2008년 8월 28일 경찰에 염산병을 던지는 등 폭력시위를 주도한 혐의(특수공무집행방해 등)로 '열혈국민' 소속의 회원들을 구속하였다. 김모(41·무직)씨 등 3명을 구속하였다. 다른 김모(45·무직)씨 등 3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은 또 모임 회원 1명을 불구속 입건하고 3명의 행방을 쫓는 등 추가조치를 하였다.
- 당시 안재철 월드피스밀레니엄파크 건립위원회 위원장의 주도로 청계광장에서 6.25 사진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6월 25일 전시된 사진 일부에 낙서가 되거나 걷어차이는 등 훼손시도가 일어났으며, 이틀 뒤 6월 27일 새벽에는 폭도화된 일부 시위대가 사진 130점 중 90장을 불에 태우는 사태가 일어났다.
- 한국이 수입 제한을 풀은 30개월령 이상 미국산 쇠고기를 일본은 2013년에 30개월령까지 확대했다.
8 평가
- 행정부의 불통과 독단적 밀실적 쇠고기 협상 진행 (Wiki Leaks/2차 외교문건 공개 참고)
- 이를 저지하지 못한 공론화하지 못한 정당과 입법부의 무능함
- 많은 미디어에서 계속 쏟아져나오는 광우병에 대한 우려 제기와 추측
-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비난여론 형성. 이 와중에 불안감 확산으로 인한 대량의 유언비어 생성.
- 길거리로 나선 시민들이 상당한 규모로 집결.
- 여론이 양분되면서 다소 소극적으로 변화
- 시위대의 규모 축소, 경찰의 진압으로 인한 사건사고들, 시위의 과격 양상, 시위대의 전의경 폭행과 염산테러 같은 사고들, 정부의 모르쇠 대응 등이 겹쳐 시위대 해산
- 해산 이후 당 시위에 대한 다양한 평가 등장, 이는 현대의 정치 인식과 연결되기도 함
8.1 정치
집권 초부터 숭례문 방화 사건, 태안 기름 유출 사고 등 영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고 정치적으로도 이러한 사태가 일어나면서, 한동안 이명박 정권의 지지율은 부진을 면치 못했다. 이 시기후에 지지율이 올라갔다가 2011년 여름을 지나면서부터 곤두박질쳤다.
촛불시위로부터 2년이 지난 2010년, 정운천 전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을 비롯한 촛불시위 당시 정부의 주역들이 다시 복귀하였다. 동년 5월 11일 이명박 대통령은 촛불 시위에 대한 조선일보의 비판적 기사를 극찬하며 촛불시위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였다. 이명박 대통령은 "많은 억측이 사실이 아니었음이 밝혀졌지만 당시 참여했던 지식인과 의학계 인사 누구도 반성하는 사람이 없다. 이런 큰 파동은 역사에 남겨져야 한다."라면서 각 부처가 촛불시위에 대한 보고서를 만들 것을 주문했다. 대통령의 이 주문은 우파쪽으로부터는 찬사를, 좌파 시민단체 및 언론들로부턴 반발과 분노를 사기도 하였다.
8.2 직접, 참여민주주의에 대한 시각차
2008년 촛불시위 중 그리고 끝난 후 상당기간에 걸쳐 진보진영 및 지식인들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이명박 정부에 의해 훼손되었으며 촛불시위는 이러한 대의민주주의의 대안으로 시민들이 직접 목소리를 내는 직접민주주의, 참여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보여 준 계기였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이는 일부 평론가들이 '집단지성의 가능성을 보았다.'라고 긍정적 표현을 사용한 것과도 맥락이 일치한다.
여기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그러면 촛불시위가 이뤄낸 것이 뭐인가?'라고 반박하였다. 이들은 촛불시위를 유발시킨 광우병 관련 정보가 허위였기에 그 결과물들 또한 정당성이 없으며, 실질적으로 촛불시위가 무엇인가 건설적인 방향을 만들어낸 것은 없으며,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시스템이 생각만큼 튼튼하게 돌아가지 않고 괴담이나 선동에 뿌리채 흔들릴 정도로 취약하다는 현실만 드러냈다고 비판하였다. 직접 또는 참여민주주의는 준거가 될 지식인이나 전문가들의 정확한 정보가 바탕이 된 아래에 이루어져야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데, 그러한 공신력이 훼손된 상황에서 발생한 대중의 정치참여는 부작용만을 가져온다는 비판도 나왔다.
안타깝게도 바쁜 현대인들에게는 복잡한 말보다 심플한 선동 한마디가 훨씬 잘 먹힌다. 예를 들어 광우병때 고등학생들까지 길거리로 뛰쳐나왔는데, 뇌송송 구멍탁같은 선동 문구 한마디에 겁에 질려 뛰쳐나왔던 학생들이 많았다. 사실 한미FTA도 꽤 복잡하게 결정해야할 사안임에도 저런 식으로 특정 정치 세력이 악의적으로 선동을 퍼트리면 막기가 힘들다는 위험성을 보여줬다.
민주주의는 그냥 무조건 선이 아니고, 국민들이 차분하게 이성을 가지고 팩트로 논박하는 올바른 토론문화가 정착된 곳에서야 장점이 발화될 수 있다. 두 전문가가 치열하게 논리로 논박을 하는걸 지켜본 뒤 '누구는 맞고 누구는 틀렸다'라기보단, 둘 다 존중해주되 '누구 의견이 더 합리적이다'라고 손을 들어주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장점이 발화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성이 아닌 감성으로 지배되어 분노를 자극하는 선동이 난무하는 민주주의는 정말 위험한데, 바로 그 유명한 히틀러의 나치당이 국민들의 불안감을 부추기고 분노를 자극하는 감정적인 선동으로 합법적으로 당선되지 않았던가?
당시 광우병 시위하러 뛰쳐나온 사람들 중에는 그냥 인터넷에서 미국산 소고기 먹으면 광우병 걸려 죽는다는 식의 과장된 유언비어에 겁을 먹고 뛰쳐나와 이명박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한번 이렇게 분노의 감성으로 휩싸인 사람들은 상대의 말을 아예 들으려 하지 않고 자신과 다르면 이명박 앞잡이라고 낙인 찍고 공격했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장점이 아니라 단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다양한 의견을 표명할 수 있는 곳이 올바르게 민주주의가 뿌린 내린 곳이라 할 수 있는데, 당시 분노한 군중들은 입으로는 민주주의 외치면서 정작 자신과 의견이 다르면 집단으로 매장하는 등 오히려 민주주의와 역행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패망직전 월남도 간첩과 좌파들의 반정부 선동에 대학생들이 시국선언을 외치는 등 이미 제어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광기를 보여줬고 자멸할 듯 멸망했다. 또한 아랍 민주화의 봄 당시에도 일부에서는 민주주의로 이슬람 율법을 헌법으로 밀어붙이는 등 감정적인 선동이 난무하는 민주주의는 오히려 개념박힌 독재자가 통치하는 것보다도 못할 수도 있단 걸 보여줬다.
그래도 2008년 촛불집회의 긍정적인 면을 찾자면, 학습효과 덕분인지 과거에 비해 선동이 덜 먹힌다는 점이다. 사실 그 이후에도 일부 정치세력들이 틈만 나면 각종 사건사고를 빌미로 반정부 운동을 이끌어내려 노력했었으나 2008년 촛불집회만큼 큰 반향을 이끌어낸 것은 2016년까지는 딱히 없었다. 이것은 이전보다 한국인들의 민주주의 수준이 한단계 발전하고 성숙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광우병 이후에는 여러 방송이나 인터넷에서 팩트를 강조하는 현상이 정착되었고 팩트 폭력이란 신조어마저 생겨났을 정도다.
8.3 시위 문화에 대한 찬반여론
촛불시위가 공동체의 이슈를 통한 연대의 경험을 제공하였으며, 정부의 독선에 맞서 시민들의 힘을 보여주었다는 긍정적 평가가 존재한다. 특히 시위에 참여한 10대 청소년들 다수가 '즐기듯', 그러나 '진지하게' 자연스럽게 집회/시위라는 민주주의의 기초에 참여하였다는 사실은 적지 않은 진보진영 386세대 학자들과 운동가들을 설레게 하기도 하였다. 비장하고 숭고한 심정으로 집회에 임했던 이전 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부분이다. 당시 촛불시위대는 경찰버스 위에 시위대 또는 전경이 올라가자 "노래해! 노래해!"하고 외치기도 했었다. 경찰버스 연행은 "닭장차 투어"라고 불렀다.(…) 이를 두고 한 기자는 "발랄한 축제의 장"이라고 표현했다. 언론에 보도된 집회명 또한 '**문화제' 등으로 정치적 성격을 희석시킨 용어가 사용되었다.
이에 관해서 긍정적 여론과 부정적 여론이 모두 존재한다.
8.4 과장된 미국산 쇠고기의 위험성
정부는 광우병 사태 당시 각종 언론이나 백분토론과 같은 매채를 통해 미국산 소의 안전성을 어필하였으나, 이미 누구도 들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3] 당시 이명박 정부가 초기부터 BBK 논란이나 한반도 대운하 관련으로 인해 급격하게 신뢰도를 잃고 있었고, 여러 요인이 겹쳐 미국산 쇠고기 위험성이 과장되는 결과가 나오고 말았다.
8.5 과격하고 일방적인 여론 지형
2008년 당시 인터넷 공간에서는 촛불집회에 대해 약간의 부정적인 의견만 서술해도 악플 1000개정도는 가볍게 달릴 정도로 광기에 휩싸여 있었다. 악플의 주된 내용은 특정 정당 알바로 몰아가기, 부모님 안부 묻기였고, 심지어 신상털이까지 벌어졌다. 실제로 수많은 커뮤니티에서 촛불시위에 대해 부정적인 글을 썼다는 이유로 대규모 악플 테러를 당하고 유저 및 블로그가 폭발당했다.
이는 방송인 등 지명도 있는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당시 MBC 라디오 《정오의 희망곡 정선희입니다》를 진행하던 정선희는 “아무리 광우병이다 뭐다 해서 애국심을 불태우며 촛불집회를 하지만, 맨홀 뚜껑을 가져가는 사소한 것들도 사실은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하는 범죄이며, 촛불 집회처럼 큰일에 참여하는 사람 중에서 그런 사람이 없으리란 법은 없다.”라는 발언을 했다가 프로그램을 하차해야 했다. 사실의 진위 여부는 둘째치고 이 말 한마디로 '촛불집회에 참가한 숭고한 시민들을 모욕한다'로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되었고 이후 몇 달 후에야 잘못했다는 사과를 공개적으로 하고 방송계에 복귀할 수 있었다. 다만 이 때는 윤도현과 김제동 등이 방송 하차를 하거나 했던 상황들도 있었던 것을 생각헤 보면 단순히 어디에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언행을 해서이기 보다는 유명인이나 연예인이 정치적 발언을 할 수 없는 경직된 사회 분위기와 인식들 때문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정치적인 발언으로 하차한 연예인들이 방송사 자체적인 징계 기준에 따라서 자발적으로 제재한 경우와는 달리, 정선희는 네티즌들이 방송사 홈피에 몰려들어 마비가 될 정도로 비난을 퍼부어 여론에 떠밀려 여론재판에 의해 하차한 것에 가깝다. 따라서 여론이 진정될 때까지 일시적으로 스스로 하차했던 것에 가까웠기에 여론이 좀 진정된 뒤 사과하고 복귀할 수 있었다. 당시 정선희는 촛불집회가 옳다,그르다같은 정치적 발언도 아니었으며, 당시 과열되어 무질서해지는 시위문화에 대해 지킬 건 지키면서 시위하자는 의도여서 문제가 없는 발언이었기에 여론재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정선희가 시위를 하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니고, 시위를 촉구했던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대놓고 특정 정치인을 디스하거나 시위를 촉구하며 노골적인 정치색을 드러내던 연예인들과는 비교대상이 아니었다.
이는 나무위키의 전신인 엔하위키도 예외가 아니였다. 당시 엔하위키 유저들은 위키의 정체성 중 하나인 '중립성'을 완전히 잊어버린채, 촛불시위의 과격성과 과장된 위험성을 지적하는 위키러들에게 욕설과 패드립을 시전했고 운영자들도 욕설과 패드립을 제재하기는 커녕 오히려 욕설과 패드립을 당한 위키러를 분탕종자로 간주하고 영구차단을 걸었다. 이 시기는 진보 네티즌과 친노 성향 네티즌들의 완벽한 흑역사로 아직까지 언급된다.
8.6 반성 없는 시위주체들과 그 영향
문화재를 손괴하는 등의 행위를 반성하지 않는 비판 여론이 존재한다.
8.7 법원
야간 집회가 금지되어 촛불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이 처벌을 받게 되었으나 헌법재판소 헌법 소원 끝에 위헌 5명, 헌법불합치 2명의 불합치 판결이 내려졌고 결국 야간집회 금지 규정의 효력이 상실'되었다. 대법원도 기속력을 인정하여 야간집회 금지로 기소된 사람에 대해서는 무죄 판결을 내렸다. 그 이후로 야간에도 집회가 열리고 있다. 2014년 3월 27일에는 촛불시위에 참여한 시민 2명이 낸 헌법소원에서 결국 야간시위 금지에 대해서도 일몰후부터 자정까지 금지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나오게 되었다.
8.8 학계의 평가: 학문 커뮤니케이션의 실패
황우석 사태 이래 과학기술사회학계에서 가장 주목한 국내 이슈였다. 학계에서는 과학적 불확실성과 과학커뮤니케이션의 부재로 인한 무지가 가져오는 상황에서 사회적 논란이 증폭되는 양상이 주된 관심이었다. 광우병의 원인이나 발병기제, 인간에의 전염 가능성 등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의 과학커뮤니케이션 노력의 부족, 불투명한 집행과정, 과학이슈의 정치쟁점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사건으로 바라본다. 대중은 생명/신체에 대한 위험에 특히 예민하기 때문에 어느 나라에서나 유전자조작식품, MSG 등 식품과 관련한 논란 및 갈등은 격렬하며 많은 관심을 불러모은다. 그 갈등과정을 얼마나 평화롭게 해결하느냐의 문제가 위험 관리, 과학커뮤니케이션의 역할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명박 정부는 완전히 실패한 사례로 꼽히게 된다.
학계에서 숙의민주주의에 대한 논의가 격렬하게 이루어지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단순히 투표권을 주고 표를 던지라는 단순한 대중민주주의가 아니라, 선거권자에게 충분한 자료를 주고 이슈에 대해 이해를 하도록 해 "숙의"의 과정을 거쳐 합의를 도출하는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광우병처럼 위험의 불확실성에 대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이슈에서 요구되는 방식인데, 앞으로 사회가 점점 더 전문화/세분화될 것이라는 점에서 학계의 제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할 필요가 있다. 숙의민주주의적 절차로는 유전자조작식품의 허용여부을 둘러싸고 촉발된 논란을 해결하기 위해 영국 정부가 전 국민을 상대로 진행했던 GM Nation의 사례를 참고해보자(GM Nation과는 전혀 다르게, 전문가들 및 이해관계자들 간의 장시간 토론과 합의를 통해 결론을 이끌어 냈던 독일의 원자력발전 폐기 결정 역시 검토해볼만한 사례다). 참고 웹사이트1 참고 웹사이트2 독일 원전 폐쇄를 두고 끝장토론
소위 '위험사회학'은 단순히 과학적 정합성의 문제로 끝나지 않게 된다. 과연 어느 정도를 "위험하다"고 해야할지를 정하려면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과 수용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사회적 합의가 각 나라 별로 조금씩 다르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환경규제, 식품규제 등에 있어서 기준치가 각 나라마다 다르게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는 널리 쓰였던 은나노 세탁기의 경우 미국에서는 인체에 대한 유해성을 아직 알 수 없다며 아예 수입금지가 되기도 했다.
따라서 전문가가 나서 가능한 정확한 정보를 제시하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위험성에 대한 논의를 했어야 하는 것이다[4]. 그런데 광우병 논란 당시 우리나라에는 제대로 된 광우병 전문가도 없었고, 그나마 관련 있는 전문가들도 광기와 폭력이 난무하던 당시 분위기에 위축되어 이 논란의 해명에 나서기를 주저했다. 이로 인해 전문가들의 사회 참여에 대해 학계 차원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