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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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역대 국왕
22대 강종 왕오23대 고종 왕철24대 원종 왕정
묘호고종(高宗)
시호충헌안효대왕
(忠憲安孝大王)
능묘홍릉(洪陵)
왕(王)
[1] → 질(晊) → 철(㬚)
대화(大華)/법주(法柱)
절일경운절(慶雲節)
배우자안혜왕후(安惠王后)
아버지고려 강종
어머니원덕왕후(元德王后)
생몰년도음력1192년 1월 18일 ~ 1259년 6월 30일
양력1192년 2월 3일 ~ 1259년 7월 21일(67세 185일)
재위기간음력1213년 8월 무인일 ~ 1259년 6월 30일
양력1213년 8월 27일 ~ 1259년 7월 21일(45년 339일)

1 소개

고려의 23대 왕. 정식 명칭은 안효대왕(安孝大王)으로 나라가 내려준 칭호는 충헌왕이다. (뒤의 원종은 충경忠敬왕.) 강종의 아들. 최충헌의 적(嫡)매형이자 사돈 간이기도 하다. 최충헌은 부왕 강종의 서녀와 재혼하였는데, 아들 원종의 장인이었던 김약선은 최충헌의 아들인 최우의 사위였다.

2 재위기간"만" 길었던 왕

고려 왕 중 가장 재위기간이 길었다. 자그마치 46년.[2] 하지만 그 기간 내내 권력을 최충헌을 비롯한 최씨 정권에게 빼앗기고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강도)로 옮기며 7번에 벌어진 몽골 침략에 시달리는 등 안습 크리를 자랑했던 왕.[3] 그래도 최충헌 집권 때 5살로, 최씨 정권의 흥망(최충헌, 최이, 최항, 최의 4대)을 모두 지켜본, 풍운(?)의 왕.그전대왕도 그렇지않았나? 강화도에 들어와서 나오지 못한 채로 죽었다. 재위 기간 후반부 대부분을 몽골과의 전쟁으로 보낸 인물. 최씨 정권이 망하자 심한 낭비로 관리들의 상소가 좀 있었다고 한다.[4]

그런데, 고종의 업적 중 저평가 받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아들인 태자를 몽고에 입조토록 한 점이다. 고종은 9차에 걸친 몽고의 침입을 몸소 겪으면서 더이상의 전란을 막기 위해 화약을 맺도록 한 것이다. 본인이 나이가 많아 직접 입조할 수 없어 태자 왕정(훗날 원종)를 입조토록 했고, 이 부분은 몽고도 이해를 해줬다. 무인들의 반발을 누르고 오랜 전란의 시대를 마감케 하였지만, 그것이 항복으로 평가되기에 저평가되지 않았나 싶다.

3 여몽전쟁

고종 4년인 1216년부터 몽골의 고려 침입이 시작되었다. 자세한 것은 여몽전쟁 항목 참조.

유일한 업적이 있다면, 이 시기에 고려대장경(일명 팔만대장경)을 조판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비용은 최우가 댔다(...) 사실 뭘 하려고 했어도 최씨 정권이 정권을 잡고 있어서 할 수 있는게 없긴 했다. 막판의 낭비도 얼마 누리지도 못하고 갔고(...)

4 사망

태자 전이 원나라에 입조하려 간 사이 몸이 좋지 않아서 유경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가 결국 죽게 되었다. 당시의 집권자였던 김준이 고종의 둘째 아들인 안경공 창을 왕위에 올리려고 했으나 고종이 죽기 직전 남긴 유언에 의해 태손 심이 임시로 나랏일을 맡게 되었고, 태자는 그 이듬해인 1260년에 귀국해서 정식으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5 기타

베트남 리왕조의 마지막 후예 중 하나인 이용상 왕자를 받아줘서 잘 대우한 군주이기도 하다.동병상련

대한제국의 고종과 능호가 한자까지 똑같다. (홍릉, 한자로는 洪陵)

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코에이징기스칸 시리즈에서 고려 군주로 자주 등장한다. 능력치는 안습. 특히, 원조비사 정발판에서 플레이 가능 군주로 선택이 되는데. 고증에서 오류를 겪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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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瞋에서 눈목변 대신 날일변
  2. 2위는 37년의 문종, 3위는 33년 혹은 34년의 충렬왕. 한국사 전체를 보아도 8번째로 오래 재위했다.
  3. 최항 집권기에는 말 그대로 개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당시 강화도로 도망갔던 최항은 미친듯이 술잔치를 열어제꼇는데 정작 고종 본인은 왕실 재산이 바닥나는 바람에 점심식사를 줄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이 일을 지시하기 위해 좌창별감 윤평(말 그대로 창고지기...)을 불렀는데 윤평은 두세번이나 쌩까고 오지 않았다. 그래도 왕이라고 고종은 분노하여 윤평을 파직시키려 했으나 '오늘 내쫒아도 내일이면 다시 복귀할테니 이게 뭔 징계냐'라는 말과 함께 그만두었다. 이쯤되면 진짜 허수아비보다도 못한 신세다.
  4. 대궐을 나와 신하들 집에 머물면서 문을 걸어잠그고 미친듯이 바둑과 술잔치에만 빠져들었다고 한다. 물론 당시 기준에서도 욕을 많이 먹었지만 특이하게도 고려사의 사관은 '최씨 정권 밑에서 고생하다가 이제 살만해지니까 늙어 노망든거니 적당히 까여야 된다(...)'라는 평가를 내렸다. 왕정 복고후에도 신하들에게 멸시당했다
  5. 김갑수는 태조 왕건에서 궁예의 책사인 종간 역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