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국(야구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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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 10일, SK 와이번스와의 경기에서 끝내기 홈런을 친 뒤 환호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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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식 때 헹가래를 받는 모습.

KIA 타이거즈 No.74
김종국 (金鍾國 / Jong-Kuk Kim)
생년월일1973년 9월 14일
출신지광주광역시
학력광주서림초-무등중-광주일고-고려대
포지션내야수(2루수)
투타우투우타
프로입단1996년 해태 타이거즈 1차 지명
소속팀해태 타이거즈/KIA 타이거즈(1996~2010)
지도자 경력KIA 타이거즈 육성군 수비코치(2011~2012)
KIA 타이거즈 1군 주루코치 (2012~ )
응원가함중아 '내게도 사랑이'[1]

2002년 한국프로야구 2루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안경현(두산 베어스)김종국(KIA 타이거즈)안경현(두산 베어스)
2002년 한국프로야구 도루왕
정수근(두산 베어스)김종국(KIA 타이거즈)이종범(KIA 타이거즈)
해태 & KIA 타이거즈 등번호 16번(1996~2010)
문희수(1990~1995)김종국(1996~2010)김희걸(2011~2012.6)
KIA 타이거즈 등번호 77번(2013~2014)
이강철(2008~2012)김종국(2013~2014)김기태 (2015~ )
KIA 타이거즈 등번호 74번(2015~ )
김실 (2014)김종국(2015~ )현역
KIA 타이거즈 역대 주장
이종범
(2002~2004)
김종국
(2005)
이종범
(2006~2007)

1 소개

KIA 타이거즈의 내야수.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1번 타자[2]이자 KIA 타이거즈의 프랜차이즈 선수. 특징은 기본기가 확실하면서도 안타가 될 법한 공을 신기에 가깝게 잡아내는 화려한 수비. 수비에 있어 교과서적인 완벽한 모습을 보이며 국가대표로도 활약했다. 총 14시즌 동안 통산 실책이 단 112개. 통산 성적이라서 많아 보인다. 주 포지션은 2루수.

대표적인 별명으로 '종국성', '한남자', '한남신' 등이 있다. 동명이인 가수가 부른 노래 제목에서 유래한 것. 2009년에는 플레이가 달라졌다고 해서 '딴남자'라고도 불렸다. 타격 센스가 나아졌다는 긍정적인 의미가 크지만, 바로 전년도에 1년에 에러 2개[3]밖에 안 냈던 선수가 한 경기에서 에러 2개를 작렬, 악마와 거래를 해서 타격과 수비를 바꿨다는 말이 나올 정도라.. 안습.

이외에도 트레이드마크인 돌출된 입과 고글 때문에 '제트오리', '고글덕' 등의 별명도 있었으며, 국제전에서 특히 좋은 활약을 보였기에 '국제용'으로도 불렸다.

도루능력만보면 역대 최고일정도이고 정수근도 이긴적이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2할8푼을 칠 때고 2할6푼이하로 내려가면 꺠갱. 그래서 도루능력만큼은 이종범과 비교되는 선수.

2 선수 생활

광주일고고려대를 졸업하고 1996년에 입단했다.[4] [5] 입단 당시 2억 3천만원이라는 해태 역대 최고 계약금을 받았다.[6] 그리고 영원히 까이는 이유가 아마시절 라이벌이었던 박재홍이 프로무대에서 대폭발한 이유도 있다.
야구선수로서는 그리 크지 않은 덩치이지만 호타준족이고 야구센스가 뛰어나다는 점이 이종범과 흡사하였으며 또한 3년 선배인 이종범의 대히트로 인해 그만큼 해태가 그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7] 하지만 프로초년시절 그는 박진만과 더불어 프로 최고의 물빠따로 전락하고 만다[8]

학창시절에는 유격수가 주 포지션이었으나, 입단 당시 해태 타이거즈의 유격수는 한창때의 이종범이었기 때문에 2루를 맡게 되었다. 어쨌든 한대화의 LG이적에 이은 홍현우의 3루이동으로 한참 동안 비어있다시피했던 2루수 자리를 지키며 2년 연속(1996, 1997 시즌) 우승에 공헌했다.[9] 100타수에서 21안타치는선수가 2년간 전경기출전했으며 그렇다고 한해에 딱 홈런 10개 치는수준으로 이건 잠실구장도 아니고 당시 홈런치기 만만한 광주에서 친것이었다.이때 김종국이 2루타를 치면 다음 타자였던 이종범은 자동 고의4구였다 98년에 이종범이 일본으로 가면서 유격수 자리를 먹었으나 시즌 도중에 부상을 당한다.[10] 2000년에 간신히 재활에 성공했으나, 김종국에 비해 공격력이 뛰어난 홍세완이 유격수를 맡게 되면서 그냥 2루수로 고정되었다. 사실 주 포지션이 유격수이다 보니 유격수 수비는 당연히 가능하지만 큰 부상 이후 어깨가 많이 약해졌던 탓에... 그 후 2004년 홍세완의 부상을 시작으로 2009년 초반까지 계속 주전 내야수로 활약한다. 2007년에는 홍세완의 시즌 아웃으로 인해 2루를 맡던 손지환과 키스톤 콤비를 이루며 유격수로 주로 뛰었다.

21세기 접어들면서 이게 20세기(96~99)봤던 김종국이 맞나 싶을 정도로 타격실력이 향상되었다. 01~02 연속 규정타석 채우면서 2할8푼을 기록. 덕분에 해태의 마지막 1번타자가 될 수 있었다. 게다가 02년에는 도루왕도 했다. 근데 03년에도 전성기를 이어갔으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근데 결국 기아로 넘어가서 만개했으니 이사람 계약금줄라면 해태는 맛동산 96기준 500원이면 46,000개를 팔아야 했고, 2.3억이면 당시 선동열연봉의 2배수준 ㄷㄷㄷㄷ 종국아, 너 계약금줄라면 맛동산이나 부라보콘 선동열있을때보다 2배 더 팔아야돼

대학 시절만 못한 프로성적[11][12]에도 불구하고 광주 출신으로 단 한 번도 팀을 떠난 적이 없는 순혈 선수이며 팀에 대한 충성도가 높아[13] 선수생활 내내 KIA 타이거즈 팬들 사이에서는 인기 있는 선수 중 하나였다.

타격 능력은 분명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편이지만 완벽한 수비력으로 국가대항전에 자주 선발되었으며,[14] 역대급 2루수들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 작전 수행 능력 역시 뛰어나 타이거즈의 테이블세터로 기억하고 있는 팬들이 많다. 시즌 전경기 출전을 무려 4차례나 했을 정도로 내구성도 훌륭한 편이었다.

타격에서의 전성기는 2001년부터 2004년까지로, 이 시기 평균 타율은 2할 7푼 5리로 100안타 이상을 때려내며 상급 테이블 세터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특히 2002년에는 커리어하이를 기록, 타율 0.287, 도루 50개를 기록하며 2루수 골든글러브를 받았고 도루왕 타이틀을 얻었다. 이 시즌에는 총 133경기에 출장했지만 실책은 단 9개에 불과했다. 그러나 박해민과 비슷하게 삼진은 무려 116개를 당했다.

2009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야구 내적으로는 대주자나 대수비로 가끔 등장한 것 이외의 별 활약은 없었지만, 서재응정근우의 마찰로 일어난 벤치 클리어링 사태 때 오버하면서 맹활약(?). 순식간에 검색어 3위로 떠오르는 한편, 6차전 때의 싸인 훔치기 논란 때도 홀연히 등장하여 정근우에게 삿대질의 일침을 가하며 한남신의 위용은 필수요소가 되어가는 중이다. 어떤 의미로는 진정한 한국시리즈의 승리자.(...) 많은 KIA팬들은 팀은 졌는데 갤러리는 흥한다고 웃을지 울지 망설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참고로, 이 때 다소 오바를 한 것은 덕아웃을 지키며 팀내 고참으로서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우승 후 고백하였다. 은퇴 전에는 정근우에게 기사를 통해 정중하게 사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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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신의 위용.[15]

한국시리즈를 경험한 KIA 선수들이 고참급[16]을 제외하면 전무하다는걸 생각해보면 김종국의 오버는 그의 말대로 팀의 선배로서 필요한 제스처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정근우는 그 군기 세다는 고려대의 9년 차이나는 직속후배이기까지 했으니.. (김종국은 체교과 92학번, 정근우는 체교과 01학번) 신경전에 있어서 최강이라 할 수 있는 SK를 상대로 KIA가 밀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엔 그의 오버질이 한 몫 했다는데 전문가들은 이견을 보이지 않았다. 본인은 선배로서 할일을 한것 뿐이라고.. 오오오..타이거즈 팬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선수

그리고 2010년 4월,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와 관련한 글에서는 지난 선수생활과 한국시리즈에서의 '그 사건'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술회되었다. 한국 시리즈, 정근우에 대해서도 사과하였다. 가수 김종국 은퇴인줄 알고 기사 봤다고 욕하는 사람들은 제정신인가.. 은퇴와 더불어 팀 내 자체적으로 만든 3군에서 코치로 활동한다고 한다.

은퇴식은 2010년 9월 15일이 되어서야 치렀는데, KIA 타이거즈 팬들에게 그렇게 사랑 받은 선수인 것 치고는 관중수가 그야말로 안습을 넘어 안폭.(...) 한남신이 평일에 은퇴식이라니 뭐하는거냐 프론트[17]
은퇴식 사진

통산 성적은 14시즌 동안 1359 경기 출장, 타율 0.247, 604득점, 254 도루, 실책 112개.[18]

1994년 백호기 종합야구선수권 대회 타격상, 도루상
1995년 전국대학야구선수권대회 최우수선수,홈런상, 타점상
1997년 스포츠서울 선정 매직글러브상 2루수부문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금메달
2002년 골든글러브 2루수부문
2002년 시즌 도루왕
2006년 프로야구 올스타전 서군 대표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국가대표
2008년 프로야구 올스타전 서군 대표

3 트리비아

  • 외국인 선수들에게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광주일고 시절 및 KIA 타이거즈 인수 초창기에는 군기반장이었으며 주장을 한 적도 있다. 광주일고 후배인 이호준불타는 그라운드에서 특히 김종국에게 많이 맞았다고 털어놓았다.[19] [20]해태시절의 군기반장은 성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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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편 코치로 전향한 이후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안경이 사라졌다. 라식수술을 받은 뒤로 안경과 작별했다고..
  • 김종국의 선수시절 등번호였던 16번은 그의 은퇴 후, 김희걸이 가져갔으나[21] 2012년 시즌 중반에 삼성 조영훈과의 트레이드로 이적하면서 새로 들어온 조영훈이 이 번호를 달게 되었다. 조영훈이 안경을 쓰고 16번을 단 모습이 김종국과 유사해 일부 KIA팬들은 흥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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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두 사람을 같이 세우고 보니 좀 닮았다. 물론 조영훈은 왼손잡이 좌투좌타, 김종국은 오른손잡이 우투우타이기 때문에 전혀 다르기는 하지만.. 하지만 조영훈이 2012년 시즌 후 NC 다이노스의 특별지명으로 옷을 갈아입게 되면서 이 모습을 더는 볼 수 없게 되었다.
  • 해태시절나 KIA나 아저씨팬 비중이 높은 타이거즈 선수 치고 여성팬이 많은 편이었다. 은퇴한 지금도 종국 코치님을 연호하는 여성 팬들이 보이는 편이다. 홍세완이 김종국의 여성팬과 결혼했고 본인도 이것을 뿌듯하게 생각한듯. 여기

4 코치 생활

철밥통
최악의 3루 주루 코치
잘 하다가 여름만 되면 더위를 먹은건지 뇌주루를 시킨다 이젠 시작부터 뇌주루시켜서 철밥통처럼 될까봐 무섭다

코치 생활을 시작한 이후 2군 작전주루코치로 있었다가 2012년 백인호 코치 2군행의 반대급부로 1군 작전코치로 올라왔다. 전임자가 워낙 무능했던 탓에 평가는 좋은 편이다. 다만 KIA 선수들이 3루에를 못 가서 좀처럼 볼 수가 없다.

2012년 7월 26일 넥센 히어로즈전에서 더위를 먹었는지 정신줄을 놓은 주루 지도를 하여 까이기도 했다. 그래서 백인호를 잇는 백종국, 백남자라는 별명을 획득.(...)

2013시즌도 특별한 홈 주루사 없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시즌 후 팀의 부진에 의한 1,2군 코치진 전폭 교체에도 살아남았으며 일부 KIA팬들은 감독 수업이나 제대로 받게 연수 보내달라고 원성중.

2014시즌에도 별 나쁜 평은 없었으나, 이대형의 도루 개수가 적은 것과 도루 성공률이 높지 않은 것이 코칭능력의 한계가 보이기도 한다. 결국 이것은 이대형 탓이 되어 그대로 kt로 보내 버린다. kt이적 첫 해 도루 개수가 다시 늘어난 것이 함정

2015년 7월 25일 롯데와의 경기에서 2개의 판단미스로 인하여 선수들이 주루를 하다가 아웃당하며 박정수의 홈 첫 승을 날려버리게 되었다. 그 결과 롯데 박세웅에게 첫 승을 헌납하게 되며 팀이 아쉽게 패하였다.

2016시즌에는 은근히 선수들의 도루가 적어지고 뇌주루가 많아졌는데, 이것에다 백인호랑은 반대로 자꾸 3루에서 세워서 득점력이 낮아졌다.만루에서 안타쳐도 세울 기세 박흥식과 콜라보레이션 기아의 노답타선과 결합되어 만루잔루가 많아진 편. 4월 16일 경기에서 기아선수들 주루의 총체적 난국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박흥식에 묻혀서 그렇지 이 분도 은근 만만찮다 기아의 공필성

5월 5일 경기에서는 나지완이 김종국의 제지를 씹고 희생플라이 득점에 성공한다.(...)진작에 김종국의 실체를 알고 있는 나지완
5월 6일 경기에서 역시나 뇌주루코칭으로 김호령을 아웃시켜 버렸다. 나지완이 괜히 김종국 씹고 달린 게 아니다 언제까지 박흥식에게 묻어가나 보자
5월 15일 경기에서 김호령의 안타에서 가뜩이나 느린 이범호를 돌렸다가 아웃 시켰다.
7월 12일 3대 2 한 점차 경기에서 주력이 느린 필을 서동욱의 2루타 때 돌리다가 죽였다.

9월 8일 NC전에서 이해못할 선풍기질로 3루 주자를 홈에서 아웃시켰다.

5 역대 성적

역대기록
년도소속팀경기수타수타율안타2루타3루타홈런타점득점도루사사구장타율출루율
1996해태 타이거즈126428.215922121151522243.350.284
1997126371.21078150935521339.323.283
199842125.232292121115811.312.292
199923.333100122021.333.600
200086228.25959111231261524.342.324
년도소속팀경기수타수타율안타2루타3루타홈런타점득점도루사사구장타율출루율
2001KIA 타이거즈101361.285103153425632145.377.362
2002133527.287151
(5위)
26385395
(4위)
50
(1위)
64.393.363
2003125464.2501162316466731
(3위)
57.343.330
2004133491.26513020110466639
(4위)
51.371.333
2005117374.23588153
(5위)
440391140.324.305
2006111323.22673171126351628.294.286
200793288.24069130628471346.347.342
2008113300.23370163126331335.317.313
200951108.25027401912210.315.308
통 산13594391.24710861981966429604254495.346.321
  1. 이 응원가는 후배인 안치홍이 물려받긴 했으나, 실제론 별로 쓰이지 못했다. 안치홍 항목 참조
  2. 당시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라인업은 1번 김종국-2번 최익성-3번 장성호-4번 루이스 데 로스 산토스-5번 신동주-6번 이동수-7번 김창희-8번 김상훈-9번 홍세완 이었다.
  3. 참고로 이 기록은 역대 2루수 1시즌 최소 실책 타이기록이다.
  4. 동기생인 박재홍과는 광주일고 시절 3번, 4번 타순을 함께 담당했지만, 대학 시절 박재홍은 연세대로 진학했다. 여기에 김종국이 광주에서 타이거즈 프랜차이즈 선수로 남은 반면, 박재홍은 현대와 SK 등 인천 연고 구단에서 대부분의 프로 생활을 하여 오늘날 광주에서 상반된 평가를 받는 입장.
  5. 고려대 92학번 동기로는 조성민, 김지훈(이상 신일고), 홍원기, 손혁(이상 공주고), 유진호(중앙고), 그리고 현재 광주일고 감독을 맡고 있는 고교동기 김선섭이 있다. 동기생이 7명이어서 칠갑산회라는 동기회를 유지하고 있다.
  6. 김진우는 기아인수를 노리고 계약한 것이니 번외로 치자
  7. 대학시절 리그를 초토화시켰으며 입단 당시만 해도 해태에는 이종범이 또 한명 들어왔다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였으니..
  8. 공교롭게도 1996년에 입단한 점과 데뷔초 수비에서는 리그 탑급이라 꾸준히 주전출장한 점, 둘다 00년 이후 방망이의 실력이 급성장한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9. 언제까지나 수비나 주루에 한정된 것이고 공격은 환장할 정도로 못쳤다..230만 쳤어도 이렇게 개무시까지는 안당했을듯 당시에는 쌍방울에서 이적해 온 송인호가 2루를 맡았으나 수비는 물론 공격력도 김종국에 비해 나을게 없었다.
  10. 그 이후 해태의 유격수자리는 박계원, 김호, 정성훈, 홍세완이 경합을 벌인 춘추전국시대였으며, 그들의 공통점은 그래도 김종국보다 빠따는 나앗다 였다.
  11. 이게 바로 알루미늄 배트 효과라는 것이다. 알루미늄 배트 그것도 미국제 -5드롭 배트의 반발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12. 다만 김종국의 경우에는 대학시절 어깨를 다친 적이 있다. 투수만큼은 아니지만 야수의 어깨부상은 타격시 비거리와 같은 부분에서 큰 영향을 끼치는지라 이 점을 감안해야 할 필요가 있다.
  13. 대학시절 유망주였던 김종국을 돈 많은 타 팀에서 탐내기도 했지만 김종국은 돈없는 고향팀인 해태를 선택했다. 2006년 FA 당시에도 다른 팀과 계약하려는 페인트모션 하나 없이 스스로 KIA 타이거즈 프론트를 찾아가 계약했다.
  14. 혹 김종국의 타율을 가져오며 이런 선수가 어떻게 국제대회에 나갔냐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2010년 이후 프로야구를 접한 사람이다. 국제 대회만 나가면 신기하게도 주춤하던 타격도 일취월장하여 김종국의 선발에 대해서 논란은 단 한 번도 일지 않았다. 전성기를 다소 지나서 출전한 2006년 WBC에서는 타율 4할을 기록.(4경기에 주전으로 출전하였으나 부상을 당해서 그 뒤의 경기는 김민재가 출전했다. 김민재의 WBC 타율 기록은 2할 7푼.)
  15. 이 역동적인 포즈덕분에 수많은 합성짤을 낳았다. 우사인 볼트 옆에 붙인다든가 하는 식으로..
  16. 이종범, 김종국, 장성호, 이대진 이렇게 4명 밖에 없었다.
  17. 이는 당시 KIA타이거즈 순위와 관련있는 사항이다. 애초 조범현 감독은 팀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한다면 김종국을 엔트리에 넣을 예정이였지만 16연패로 가능성이 사라지자 프론트는 8월즘 휴일 홈경기에 은퇴식을 계획했다. 하지만 팀이 8월에 급상승세를 타면서 4강 싸움을 하게 되었고, 결국 은퇴식은 미뤄지고 미뤄지다 4강 희망이 없어진 9월 홈경기 때 은퇴식을 치루게 된 것. 남은 홈경기 중, 휴일 경기가 없었기 때문에 평일 은퇴식이 불가피해졌다.
  18. 부상으로 날린 1999년을 빼고 계산해도 한 시즌 평균 실책이 10개가 채 되지 않는다.
  19. 이 전에 이호준이 한 말은 "재홍이 형이 진짜 많이 때렸지"라고 하니까 옆에서 스윙연습하던 박재홍이 갑자기 "야! 누가 그러면 진짜 내가 때린 줄 알잖아~"하고 푸념섞인 원망을 했었다. 당황한 이호준이 타겟을 바꾼 인물이 김종국. 어쨌든 둘다 군기 잡긴 했었나보다.
  20. 하지만 프로에 와서는 성격을 바꾼듯, 점잖은 학구파 선수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안경도 한 몫한걸까? 그래서 09년 한국시리즈 때 사람들이 놀란 것. 근데 본인이 타격으로 보여준게 별로 없다
  21. 참고로 이 번호를 탐내던 또 다른 KIA 선수는 김주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