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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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홍현우(洪炫佑)
생년월일1972년 9월 28일
국적대한민국
출신지광주광역시
출신학교서석초-동성중-광주상고
포지션2루수, 3루수
투타우투우타
프로입단1990년 고졸연고자유계약
소속팀해태 타이거즈(1990~2000)
LG 트윈스(2001~2004)
KIA 타이거즈(2005)
지도자 경력광주동성고 타격 인스트럭터(2008~2009.7)
광주동성고 감독대행(2009.7~2009.9)
동강대학교 타격코치(2014~2015[1])
동강대학교 감독(2016~)[2]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5번
차영화(1982~1989)홍현우(1990~2000)정성훈(2002)
LG 트윈스 등번호 33번
김상호(1999~2000)홍현우(2001)박용택(2002~)
LG 트윈스 등번호 5번
안재만(1997~2001)[3]홍현우 (2002~2004)안재만(2005~2007)[4]
KIA 타이거즈 등번호 38번
소소경(2004)홍현우(2005)박정규(2006~2009)
1996년 한국프로야구 최고 출루율
장종훈(한화 이글스)홍현우(해태 타이거즈)김기태(쌍방울 레이더스)

1995년~ 1997년 한국프로야구 3루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한대화(LG 트윈스)홍현우(해태 타이거즈)김한수(삼성 라이온즈)

1 소개

20세기 마지막 10년 동안의(1991~2000) KBO WAR 1위[5]
해태왕조의 중후반기를 이끈 4번타자[6] 하지만 전성기가 딱 20대까지만이었던 먹튀
2루에 서있으면 서건창 3루에 서있으면 김동주였던 타자
커리어 초반부터 2루수로 갔으면 역대 전무후무한[7] 공격형 2루수로 남았을 선수가 중간에 3루수로 가는 바람에 아쉽게 된 케이스[8]
2루수에서도 3루수에서도 시즌 최고의 공격력을 보여준, 이종범이 없었다면 진정한 야구천재

커리어 초기에는 해태 최연소 4번타자, 중기에는 이종범에 가린 비운의 2인자, 중후반기에는 이종범이 떠난 해태의 마지막 자존심, 그리고 말기에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을 생략하게 만드는 먹튀[9]

前 야구선수. 등번호는 5번(해태) - 33번(LG, 2001) - 5번(LG) - 38번(KIA, 2005) 96,97 시즌 해태가 한국시리즈 2연패를 했을때 이종범과 투톱을 이룬 선수였다. 어찌보면 이종범의 워낙에 개사기였던 그늘에 가린 2인자라고 할 수 있다. 양준혁과 더불어 팀의 중심타자로서 볼넷을 골라내는 능력을 갖춘 '눈야구'의 황제[10]. 이 선수가 김기태박재홍[11]이 고향팀으로 와서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면?

1990년도에 해태 타이거즈에서 데뷔, 10년을 뛰고 LG에서 04년까지 4년간 선수생활을 했다. 마지막엔 다시 KIA로 넘어와 1년을 더 뛰고 2005년 은퇴.

해태 타이거즈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LG 트윈스의 흑역사. 한국 FA시장 최악의 먹튀이자 이후 진필중 - 마해영 - 박명환으로 이어지는 LG 먹튀계보의 시발점.

잔털 하나없는 빡빡 민 머리[12]로 인해 '홍미륵'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으나 LG팬들은 그 별명조차 부르기 싫어해 '그분'이라고 부르며 깐다. 해태 전성기 시절 별명은 "젊은 그대".

종합적으로 평가하자면 이종범의 신인 시절 이전부터 이미 해태의 4번을 차지하던[13] 해태의 최연소 4번타자, 90년 중반 타이거즈의 제 2차 전성기에 이종범과 함께 타이거즈의 타선을 이끌던 이끌던 투톱. 이로 인해 젊은 그대[14][15]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이런 점 보다 FA흑역사 때문에 LG는 물론 타이거즈 팬들에게 마저도 잊혀진 불운의 선수. 금전적으로는 대박을 이루었으나 명예는 잃은 비운의 선수.

페스트 스타터였다. 매년 올스타전 즈음 홈런5걸에 많이 들었다. 물론 수비부담 및 체력부담(그는 거의 매년 전경기출장)으로 인해 후반기 홈런이 줄어들긴 했지만 늘 10걸에 들었다.

2 프로 선수 시절

2.1 해태 타이거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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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프로야구에서 제이 데이비스, 박재홍, 그리고 훗날 어떤 관운장 닮은 외국에서온 굇수와 더불어 3할-30홈런-30도루-100타점을 이룩한 단 네 선수 중 하나. 그중 1루수와 외야수를 제외한 선수들중에는 2016년 현재까지 전무후무. [16] 단 1득점이 모자라 역대 최초 3할 30-30 100타점-100득점을 기록하지 못하기도 했다.[17] 어린 나이에 일찌감치 주전을 꿰차 역대 최연소 1000경기 출장 (25세 11개월 12일)이라는 기록부터 7년 연속 100안타, 두자릿수 도루와 8년연속 두자릿수 홈런, 3년 연속 골든 글러브를 수상하는 등 해태에서 선수생활을 할 당시는 국내 최고의 3루수였다. 홍현우를 믿고 코칭스태프와의 관계가 미묘했던 한대화LG 트윈스로 보내버릴 정도였으니.

한국시리즈에서도 상당히 강했다. 1993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이종범과 2승을 올린 조계현에 묻혔지만 그야말로 그 둘에 버금가는 활약을 펼쳤다. 3차전에서 광주상고 1년선배인 박충식에게서 6회 솔로홈런을 터뜨리며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박충식의 181구 완투를 유도했으며, 5차전에서는 결승 타점인 희생플라이를 쳤다. 7차전에서는 이종범의 도루에 이어 적시타를 터뜨리기도 했다. 야구에 만약이란 없지만, 만일 그의 홈런이 없었다면? 기력을 모두 소모하지 않은 박충식의 존재만으로도 시리즈의 향방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96년 시리즈에서 1차전에서 현대의 선발 위재영을 흔드는 2점 홈런을 터뜨리며 승기를 잡았으며 97년 시리즈에서는 4차전에서 김용수를 상대로 0:2의 불리한 상황에서 추격하는 솔로홈런을 쳐냈다. .

프로 첫 해에는 백업이었지만 91시즌부터 주전을 차지했으며, 92년부터 본격적으로 홍현우라는 이름을 알렸다. 2루수로서 0.333이라는 훌륭한 타율과 17홈런을 기록할만큼 준수한 장타력을 뽐냈고, 타점을 꼬박꼬박 올린 것은 덤이다.[18][19] 수비에서도 흠잡을 곳이 없었기에 골든 글러브도 기대할 수 있었으나 타율이 비슷했으며 우승 버프를 받은 박정태에게 밀려 골든 글러브를 놓치고 만다.[20] 해태가 우승했다면 홍현우, 해태와 롯데가 아닌 빙그레가 우승했다면 누구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중론이지만 위에서 언급했다 시피 스텟을 뜯어보면 당시 그냥 홍현우가 박정태의 우위였다. 더구나 92년은 이종범이 데뷔하기 전이다.

93년은 타격성적은 전해에 비해 대폭 하락했지만 그해에 입단한 대졸신인 이종범과 키스톤콤비를 이루었고 한국시리즈에서도 고비때마다 활약하며 그 해의 우승을 이끌었다. 13홈런이면 지금 6번타자도 우습게 치는 수준이지만, 당시 15홈런을 넘은선수가 김성래 양준혁 장종훈 이종범 김동수 꼴랑 다섯이었다. 게다가 태평양, 쌍방울, OB, 롯데에서는 아예 13홈런 친 타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94년부터는 한대화의 공백을 메우기위해 3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했으나 변함없는 활약을 보였고, 95년에는 이종범의 방위병 공백을 홀로 메운다. 해태는 그해 4위를 기록하며 팀방어율 1위(3.06)과 팀타율 7위(.242)의 엇박자 행보를 보인다. 그때 타선의 중심을 잡아준 선수가 바로 홍현우. 그가 있었기에 해태는 비록 4위에 머물렀지만[21] 선동열, 이강철, 조계현 등 투수진과 더불어 명가의 자존심은 유지할 수 있었다.[22] 다만 올스타전 직전에 폭행시비가 나서 팬투표에서 선발되었지만 올스타전에 나가지는 못했다. 그 대신 주전으로 출전한 한화 이글스정경훈이 미스터 올스타를 받았다.

96년의 홍현우는 스탯티즈 기준으로 3루수사상 유일하게 두자릿수의 WAR/144를 기록하였다.(10.001) WAR자체가 야수들 중 10위에 해당되고 WAR/144로 환산하면 9.555를 기록한 2010 이대호와 9.721를 기록한 1999 이승엽을 제치며, 그의 앞에 있는 선수는 이종범들과 2015년의 에릭 테임즈, 2003년의 심정수, 1991년의 장종훈 그리고 80년대 초반 80~100경기 체제의 백인천장효조뿐이다. 어쨌든 KBO야수들 중 10위안에 들만한 커리어를 기록하였다는 뜻.[23] 역대 최고의 3루수라 할 만한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0.332/0.453/0.533 의 기록적인 슬래시라인으로 0.986의 OPS를 남겼다. 96년은 KBO 역사에서 손에 꼽을 만한 투고타저의 시즌이었다. 0.346을 기록한 양준혁이 타격왕이었고 나란히 0.332를 기록한 이종범과 홍현우는 2,3위였다. (147/443의 홍현우와 149/449를 기록한 이종범, 역시 2모차이로 이종범의 승리였다. 굳이 따지면. 이종범은 초반 몇 경기를 방위로 빠졌음에도 저런 성적을 냈다는 점이 대단하다.) 타이거즈 선수의 개별시즌 역대 최고 출루율은 타율 0.393에 0.452라는 출루율을 기록한 94년의 이종범이 아니다. 96년의 홍현우이다. 96년에 97볼넷을 얻어나간 그대야 말로 눈야구의 황제. 홈런이 약간 부족해 보이긴 하지만 아시다시피 당시는 25~30개면 홈런왕을 하는 시기였고 홍현우의 17홈런은 9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

96년의 타이거즈의 팀타율은 0.245였다.[24] 이종범과 홍현우를 빼면 팀타율 .219였다. 타이거즈의 V8? 그가 없었다면 절대 없었다. 게다가 그는 이종범이 방위여서 몇경기 못나올동안 96시즌 전경기 출전 선수였다.

97년시즌에 그의 타율은 다소 하락했지만 장타력은 상승하여 처음으로 20-20을 달성하며 팀의 V9를 견인한다. 98년에는 동열이도 가고 종범이도 간 탓인지 리그 중간이상은 했지만 .269 15홈런 69타점으로 방망이가 하락해버렸다.

놀랍게도 93~97시즌 그는 10개 후반~20개 초반의 홈런을 쳤지만 홈런 10걸에는 늘 들었다. 그때야말로 투고타저시즌.[25] 이런 시기를 뛰었기때문에 홍현우의 누적기록 내지 비율기록은 요즘에 보기엔 낮아보일지도 모른다. 어찌보면 그렇게 꾸준하면서 2,3루를 동시에 볼수있는 선수의 가치상승은 당연한 것이었다.

99년 시즌은 그야말로 그의 전성기였다. 2015년 야마이코 나바로가 경신하기 이전까지 역대 2루수 한시즌 최다 홈런, 타점기록 이었던 34홈런 111타점을 쳐낸 시즌. 비록 타고투저의 영향은 있었어도 2루수로만 시즌의 대부분인 123게임을 뛰면서[26] 30-30을 이루었으며 2루수로서 쳐낸 34홈런은 87년 김성래가 홈런왕을 달성하면서 쳐낸 22홈런과는 까마득한 차이가 있었다. 3할타율은 덤. 말그대로 양준혁과 클린업을 이룬 우산효과와 더불어 종범이형보다 난 더 홈런을 잘칠수있다!! 절규하면서 타이거즈의 마지막의 불꽃을 태우던 영웅. 하지만 이 당시 타고투저의 영향으로 홈런이 빵빵 터지던 때였고, 그 때문에 뒤처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느끼며 무리하게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해 장타력을 보강하여 역대급 성적과 선수 생명을 바꿨다는 지적이 있다. 거기에 FA로이드도 한몫 한 것으로 보인다. 트레이시 샌더스와 홍현우, 양준혁의 홈런쇼로 해태는 역대 최초로 잠실구장에서 1점대 이상의 평균 홈런을 기록한다 [27] 정작 FA 전이었던 2000년은 부진했지만 그 이전의 압도적인 퍼포먼스와 젊은 나이 덕에 그해 FA 최대어로 떠올랐다.

90년대의 해태왕조 하면 우리는 흔히 이종범임창용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종범이 너무 찬란한 성적을 남겼고, 임창용은 76년생으로 한국시리즈에서는 96,97시즌에서만 활약했다. 더군다나 삼성에서 뛴 기간이 훨씬 긴 삼성의 레전드 투수이자 도박꾼이다. 조계현, 이강철 등 에이스들은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리는 찬란한 WAR을 보라.

플레이스타일은 삼진이 적은 편은 아니지만 삼진 수를 능가하는 볼넷을 얻어내는데다 장타력까지 갖춘 ops머신이었다. 출루율왕을 차지한 1996시즌엔 이종범과 거의 차이가 없는 WAR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홍병살이라는 별명은 근거가 없는것이 1995시즌에 전경기 출장을 했음에도 병살타는 단 1개에 불과했다. 단 근거가 있기도 한 것이 이종범이 두번째 커리어하이를 찍고 해태가 V9을 달성한 97년에 리그 병살타 1위를 한 것(...). 이것 때문에 사람들의 머리에는 홍현우 = 병살타라는 이미지가 남아있다.

해태시절을 본다면 그는 타격만 본다면 90년대 최고타자로 꼽히는 이종범, 양준혁, 김기태 그리고 당시 기준으로는 떠오르는 신성인 이승엽과 비교해본다면 조금은 부족했으나 수비 부담이 적은 1루수, 좌익수, 지명타자를 맡은 양준혁, 김기태, 이승엽과 달리 수비 부담이 큰 유격수 2루와 3루 멀티 포지션이 가능한 내야수였다. 즉, 타격은 위에서 언급한 선수들에게 밀릴지 몰라도 수비가 가능했기 때문에 더 가치가 있는 선수였다. 단적인 예로 외야 지타로 뛴 양준혁의 누적 POS는 마이너스 50 1루로 출장흔 이승엽은 누적 POS 마이너스 150이 넘어가는데 홍현우는 23이다. 게다가 고졸인데다 팀에서 빠르게 자리 잡은 덕분에[28] 29세라는 굉장히 젊은 나이에 FA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덕분에 2000년 당시 생겨난 FA제도에서 최고의 주가를 달렸다.[29] 오히려 WAR을 본다면 18억을 지른게 아깝지 않을 정도 였으나...

혹자는 김한수와 비교할려고 하기도 하는데 그냥 90년대 야구를 못 본 사람이거나 팬심으로 세이버 스텟조차 찾아보지 않은 사람이다. 홍현우와 김한수는 2시즌밖에 차이가 나질 않는데 누적 WAR이 20 가량 차이난다. 아예 같은 급이 아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홍현우는 90년대 누적 WAR 야수 1위다. 두 사람의 평균 OPS, wOBa 그리고 wRC+ 차이 확연히 난다. 누적만 그런게 아니라, 임팩트도 차이가 많이 난다. 단적으로 김한수 커리어 하이가 99년인데, 홍현우가 그 해에 거의 2루수로 나와서 타격에서 김한수보다 좋은 성적을 거뒀다. 까고 말해 김한수는 한대화-홍현우-김동주로 이어지는 3루수 계보에서 끼일만한 성적이 아니다. 혹자는 홍현우는 30살 넘어서 별로였으니 단기 임팩트만 좋은게 아니냐 할지 모르지만, 홍현우는 20대 초반부터 10년간 거의 매해 리그에서 5위~20위권정도에 들정도로 뛰어난 타자였다. 김한길은 선수시절 리그에서 한 해라도 5위권도 못 들어본 선수였고 총 14시즌동안 의미있는 성적을 낸 연수를 따져보면 홍현우의 10개의 시즌과 거의 동일하다. 즉, 임팩트나 누적이나 홍현우가 김한수에게 압도적인 우위다. 혹자는 수비는 그래도 김한길이 나았지 하는 소리는 하나, 누적 RAA나 WAA나 홍현우가 김한수보다 앞선다. 홍현우는 공수주 다 잘 하는 이종범에 가린 리그 TOP10에는 언제나 드는 타자.로 비교 대상자체가 안 된다. OPS나 누적 WAR만봐도 개소리인거 뻔히 보이는데 아직도 고전스텟가져와서 김한수가 홍현우랑 비슷하지 않냐고 비교질 하는 경우가 있다

2.2 LG 트윈스 시절 흑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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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얻어 4년간 18억의 거액을 받고서 LG 트윈스로 이적한다. 해태에서는 FA 보상 선수로 최익성을 받았다[30].

그런데... 그는 먹튀의 아이콘이 되고 말았다.

LG에서 그의 성적은 처참할 정도였는데 통산 2할9푼을 왔다갔다하던 타격은 2003년(.238)을 제외하고 2할을 넘겨본 적이 없으며 4년 동안 221게임에만 출장하며 홈런은 14개, 도루는 2개를 기록하는 등 진정한 추락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보여주었다. 이렇게 추락한 원인은 밀레니엄 버그 때문 FA를 앞두고 무리하게 파워를 끌어 올리기 위해 웨이트 트레이닝을 미친듯이 했는데, 그것이 무릎 부상이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31] 참고로 위키백과에 따르면 홍현우가 LG시절에 친 안타를 돈으로 환산하면 안타 1개에 약 1,117만원, 홈런 1개에 1억5,714만원[32], 그리고 도루 1개에 9억원을 투자한 셈이라고 한다. 흠좀무. 거기다 준주전으로 뛴 2003년을 제외하면 거의 매 시즌 부상 및 2군으로 허송세월을 보냈다.

사실, 박동희의 인터뷰에 따르면 금액은 SK가 LG보다 더 많이 제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서울이라는 큰 무대에서 놀고 싶다는 마음에 LG와 계약했는데, 자신은 이것을 나중에 후회했다고 한다. SK에게는 다행이지만.. 아니지 당시 SK는 91-110-91 아마보다도 작은 도원구장을 쓰고 있었다.잠실 야구장이 워낙 넓다 보니 해태시절에는 타격 슬럼프에 빠져도 홈런 한방 치면 금세 회복이 되었는데, 잠실에서는 바로 펜스앞에서 잡혔던 타구가 유독 많아서 힘들었다는 고백.[33] 홍현우의 타격이라면 당시 가장 짧은 구장을 사용하던 SK를 선택하는게 맞았다. 도원구장은 좌우측이 91미터였던, SK가 195피홈런을 기록했던 구장이다. 그렇게 따지면 박병호는??

2.3 KIA 타이거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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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2004 시즌 후 이용규와 함께 친정 팀 KIA 타이거즈이원식소소경을 상대로 트레이드되어 돌아왔다. 하지만 친정 팀에서도 제대로 뛰지 못해서 KIA를 꼴찌로 떨어뜨려 버리고 결국 2005 시즌 후 KIA에서 방출되어 현역 은퇴를 선언하였다.[34]

3 은퇴 후

한때 순천시에서 스포츠센터(덤으로 찜질방)을 운영하고 있다가, 동성고의 타격 인스트럭터로 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한다. 동성고 감독이 편찮았었을 때에는 감독 대행을 맡았다고 한다.

2009년 광주에서 열린 올스타전에서 해태 타이거즈 레전드 올스타중의 한 명(2루수)으로 선정되어 그라운드를 밟았다.[35]

2014년 현재는 동강대학교 야구부 타격코치로 야구계에 복귀했다. 야구부 감독은 해태시절 선배인 문희수이다. 그리고 가끔씩 광주지역방송인 광주CMB에서 KIA 타이거즈 홈경기 해설도 한다.

2015년 11월 4일 문희수 감독에 이어 동강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4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기록
년도소속팀경기수타수타율안타2루타3루타홈런타점득점도루4사구장타율출루율
1990해태 타이거즈5177.169133015408.247.244
199191226.2926617282936328.491.367
1992126420.333
(3위)
140
(3위)
2531797
(2위)
87689.529.447
(2위)
1993123446.2621172111361561068.401.355
1994126463.272126202167270
(5위)
1454.428.347
1995125465.305142
(2위)
24116656334
(4위)
62.465.385
1996126443.332
(3위)
147
(3위)
30
(3위)
4176783
(3위)
18101.533
(4위)
.453
(1위)
1997126436.2711182902279
(4위)
732093.489.395
1998126442.2691192411562801382.430.381
1999129487.30014626034111
(4위)
993167.563.382
200088291.234681621450421267.447.374
년도소속팀경기수타수타율안타2루타3루타홈런타점득점도루4사구장타율출루율
2001LG 트윈스60182.198369021618130.280.310
20022568.11883018305.206.173
200397286.2386812392734141.395.332
20043995.17917502121107.295.229
년도소속팀경기수타수타율안타2루타3루타홈런타점득점도루4사구장타율출루율
2005KIA 타이거즈2559.220133011603.322.258
통산(16시즌)14834886.275134426719188762765163805.453.375
  1. 2015년은 수석코치 겸
  2. 2015년 9월부터 감독대행직 수행
  3. 시즌 중 장재중+유현승을 상대로 SK에 트레이드 되었다.
  4. 김재현의 FA 보상선수로 돌아왔다. 때마침 홍현우가 이적하는 바람에 다시 등번호 5번을 달게 된 것이다.
  5. 스탯티즈 기준. 즉, 동시대의 굇수였던 장종훈과 김기태보다 타격은 좀 밀렸지만 수비부담과 주루플레이로 역전을 시킨 것이다. 1990년을 포함해서 90년대로 기준을 바꾸면 선동열이 불과 6시즌을 뛰었지만 걍 킹왕짱이었고 홍현우는 -를 기록하는 신인이었기에 선동열이 1위다.
  6. 김성한의 노쇠화와 홍현우의 급성장이 겹치는것이 1992년이다.
  7. 나바로가 4년 이상 갔으면 모를까 이젠 없다.
  8. 2000년 당시로도 2루든 3루든 역대급이었지만, 딱히 2루인지 3루인지 애매했다고 하나 따른 타자들도 비슷한 처지다. 김동주같은 경우도 역대급 타자이나 3루도 보고 지타로도 자주 들어왔다. 누적 시즌 35%정도가 지타였다. 게다가 96홍현우의 wRC+가 187.1 2007 김동주의 wRC+가 184.7이다. WAR현재는 박석민, 최정이 그의 커리어를 넘을 준비중이다. 다만, 박석민이나 최정이나 3루수 96홍현우를 넘은 시즌은 현재까지 없다. 2루에는 서건창나바로가 2년간 엄청 큰 임팩트를 남겼다고는 하나 서건창 커리어하이시즌인 2014보다 홍현우가 2루수였던 92년 wRC+가 더 높다. 다만 WAR/144로 계산하면 2014년 서건창이 92년 홍현우보다 높기는 하다. 누적 WAR을 볼때 서건창에게 밀리지 않으면 역대 최고의 2루수가 될 것이 확실해 보이는 정근우조차 단기 임팩트로 홍현우 2루수 시절 성적을 넘은 적이 없다. OPS를 보면 단기간 임팩트로 타격 성적이 최고로 좋은 2루수는 87년 김성래다. 그 다음이 92년 홍현우. 다음이 88년 김성래. 조정OPS나 wRC+를 봐도 대략 저 순서다. 참고로 김성래는 저 시즌들 빼고 성적들이 실망스럽고 누적 WAR도 별볼일 없다. 혹자는 단기간 김성래 누적은 박정태라는데 박정태는 진짜 누적이 별볼일 없는 케이스로 한참 순위권 밖이다. 단지 92년이 단일해 성적이 두드러질 뿐이다. 그것조차 92년 2루수 홍현우에게 밀린다.
  9. 물론 FA 당시 상황을 보면 16억도 별로 비싸게 산게 아니였다. 90년대 누적 WAR 1위에다가 근 10년간 내야에 아무대나 세워도 2016년에도 현역선수들과 비교가 될 정도로 괴물같은 성적을 내던 내야수였으니까.
  10. 이 둘은 1년뿐이긴 하지만 같은 팀에서 뛰었다. 99시즌 해태에서 양준혁이 주로 3번, 홍현우가 4번을 쳤다. 그 일년간 둘이 합작한 기록은 자그마치 .312 66홈런 52도루 216타점. 00년 두산의 우동수가 있고 03년 이마양이 있다지만 도루수를 고려한다면 이쪽도 크게 꿇리지는 않는다. 게다가 99년의 해태에는 전성기에 돌입하던 장성호와 .247/.408/.575 40홈런변태 스텟을 기록한 트레이시 샌더스까지 있었다. 홍현우-양준혁 라인의 연속타자 50-50(홈런-도루)는 최초의 기록이다. 참고로 12년의 박병호-강정호가 56-41을 기록하긴 했다. 그리고 15년에 나성범-테임즈가 16년만에 75-63을 기록하며 이름을 올렸다. ㅎㄷㄷ
  11. 박재홍은 1992년 드래프트에서 지명거부를 했을 정도로 해태를 싫어했다. 뭐 결국은 KIA로 와서 죽쑤다 가긴 했지만...
  12. 머리숱이 워낙 적었기 때문에 20대 시절부터 가발을 쓰고 다닐 정도였다고. 결국 거추장스러웠던지 95년 2월 전지훈련 때 아예 빡빡 밀어버렸다고 한다.
  13. 김성한, 한대화가 노쇠화로 서서히 실력이 저하되면서 4번타자를 하게되었다. 물론 홍현우가 잘했던것도 있고....
  14. 프야매에서는 앞서 말한 "해태의 최연소 4번타자"와 "젊은 그대"가 커리어하이 홍현우의 전용 특성으로 구현되었다. 다만 해최4는 장타특성, 젊은 그대는 2루 도루 특성이라 효율성에 있어서는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편,
  15. 마구마구에서는 베테랑효과로 2루수 파워형 하점이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16. 이종범이병규는 100타점을 기록하지 못했다.
  17. 이건 2000년 박재홍이 최초로 기록했으며 박재홍과 테임즈만이 기록한 기록이기도 하다.
  18. 그해의 홍현우는 전설인 빙그레 이글스장종훈에 이어 2위인 97타점을 기록한다. 김기태는 그에게 밀려 3위인 96타점을 기록한다. 참고로 이해에 기록한 97타점은 역대 만 20세 선수의 기록 중 최다이다. 이승엽의 114타점은 21세에 기록한것이다.
  19. 이 92년 성적은 역대 2루수들 성적을 쭉 나열하면 87, 88년 김성래 다음의 성적이다. 즉, 2014년 서건창보다 더 뛰어난 공격을 보여줬다는 거다.
  20. 다시 되돌아 볼때, 스텟으로 결산을 해보면 홍현우의 비교우위다. 확실히 성적대로 골든 글러브를 줬다면, 홍현우가 받는게 맞았다.
  21. 당시 3,4위와 3.5게임 이상 차이나면 준플레이오프는 치루지 않는다라는 규정때문에 해태는 4위를 차지하고도 포스트 시즌에 나가지 못했다. 이 규정은 98년까지 존재하다가 양대리그에서 다시 단일리그로 바뀐 2001년 폐지되었다.
  22. 단일리그가 시작된 89년 이후 4위 승률을 찍고도 포스트시즌 자체를 못치룬 팀은 95해태가 유일하다. 종범이가 원정경기에만 있었어도
  23. 3루수로는 WAR가 8.75로 8.82에 이은 2010년 7관광의 이대호에 이어 2위지만, 2010년은 133경기 체제였고 1996년은 126경기 체제인지라 144경기 체제를 전제로하면 당연히 홍현우의 우위. WAR는 타격능력 외에도 주루능력, 도루능력, 수비부담, 투/타의 고/저까지 고려한다.
  24. 이종범홍현우를 빼면 딱히 좋은 타격을 보인 선수는 없었다. 이순철도 한창 하락세를 타면서 삽질하던 시기였고, 김종국 은 프로초년에도 멘도사였다. 이건열이나 박재용, 이호성은 2할 5푼 전후의 타격을 보였다. 장성호 는 그때까지만 해도 백업이었다.
  25. 이 시기에 선동열은 1점대 방어율을 찍으며 철벽마무리로 뛰었고, 정명원의 40세이브, 김경원의 1점대 방어율이 나왔다.
  26. 3루수로는 단 6경기만을 뛰었다. 이때문에 마구마구에서 초창기부터 엘리 홍현우의 포지션을 3루수로 정한 것에 대해 비판이 많았었다.
  27. 이 시기부터 매니 라미레즈를 보며 벌크업을 했다고 한다. 99시즌에 전성기를 맞았지만 이후 급격하게 추락한 것은 이 벌크업의 부작용인 무릎 부상일지도 모른다.
  28. 2년차인 91년 시즌에 91게임을 뛰며 주전으로 자리 잡았다.
  29. 2014년 FA자격을 얻은 최정의 상황이 홍현우와 비슷한 점이 많은데(3루수, 3할+20-20을 기대할수있는 성적, 30세가 되지 않은 나이, 3년연속 골든 글러브 수상) 그해 FA최대어로 평가받으며 4년 86억의 대박 계약을 맺었다.
  30. 결국은 보상선수인 최익성보다도 일천한 성적을 남겼다. 최익성은 그럭저럭 대타로서는 쓸만한 성적이라도 남겼으니..
  31. 흔히들 LG 이적 후 부상이 찾아왔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부상은 FA 직전시즌인 2000 시즌에 당했다. 그리고 그 시즌에 커리어 로우급의 성적을 거두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FA 직전 시즌에 무릎부상으로 한 시즌의 성적이 바닥을 쳤으면 가치가 하락해야 정상인데 1999년에 보여준 퍼포먼스가 워낙 뛰어났고 고졸데뷔라서 나이도 젊은편이라 회복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LG가 저렇게 지른 것. 물론 당시에도 무릎부상을 우려하는 의견은 있었지만 그냥 묻혔다.
  32. 웬만한 선수의 연봉 수준이다!
  33. 이거 때문에 홍현우의 사례는 둘째치고, LG는 우타거포 육성 실패라는 참담한 결과를 박병호정의윤을 통해 인정하게 된다. 그래서 컨택트를 거포형보다 중시하게 된 것.
  34. 당시에는 홍현우에 대한 부활의 기대감이 있었지만 결과가 이렇게 되버려서 KIA가 큰 손해를 볼뻔 했다. 하지만 트레이드 과정에서 저울추를 맞추기 위해 타율 .125에 장타력도 없는 발만 빠른 외야 유망주를 LG에서 내줬는데 그게 바로 이용규 모두가 알다시피 이용규는 이후 리그 최고의 1번 타자로 각성하게 된다.
  35. 근데 홍현우는 2루수를 경험한 적이 있지만 3루수 포지션도 많이 봤다. 눈에 띄지는 않지만 유격수도 맡은 적이 있다. 2루수로서는 30-30을 달성한 적은 있지만 또 다른 2루수였던 김종국이 존재했었고, 골든글러브도 3루수로서만 받았기 때문에 3루수로서의 이미지가 강한 편. 거기다 잘 할 때마다 박정태에게 밀려 2루수로는 골든글러브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성적은 박정태보다 좋았다. 커리어하이는 96년 3루수시절. 이 때에는 정성훈이 유격수로 활동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