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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 5. 16 - 1956. 8. 24)
" 미조구치, 미조구치, 미조구치. "
ㅡ 장 뤽 고다르, 존경하는 감독 3명을 묻는 질문에 답하며
1 개요
일본의 영화 감독. 오즈 야스지로, 구로사와 아키라와 함께 일본 영화의 3대 거장으로 꼽힌다.
일본 고전주의 영화의 상징으로 통하며,[1] 한 컷에 평균 5분을 넘는 롱테이크로도 유명하다.[2]
흔히 '거장'이라 불리는 일본 감독들 중 가장 앞선 경력을 자랑하며, 당대 일본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말년인 1950년대부터 서구에 알려져 좋은 평가를 받으며, 세계영화사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다.
2 소개
여동생을 게이샤로 팔 정도로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으며,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학대를 일삼았다. 결국 생계를 위해 13세에 학교를 중퇴하고 1920년 닛카츠(日活)영화사에 입사했다. 처음 취직해서는 배우로 일하기도 했으며 1923년에 각본가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아 감독으로 데뷔했다.
그의 영화는 주로 에도 시대나 메이지 시대를 배경으로 핍박받는 여인의 삶을 묘사한다. 남성에게 지배당하는 여성의 삶에 대한 깊이있는 묘사로 최초의 대중적 페미니스트 감독으로도 꼽히지만, 엄밀히 말하면 상처받는 여성들에 대한 동정에 가까워 실제 페미니즘과는 거리가 있다. 실생활에서도 페미니스트와는 거리가 멀어서, 첫 아내가 그의 불륜과 권위주의에 견디다 못해 자살했으며, 겐지가 사귀다 배신당한 게이샤에 칼을 맞고 부상당한 일도 유명하다.(...) 평생 독신으로 산 인물인 오즈 야스지로와 여러모로 비교된다
오즈 야스지로 못지 않게 형식미를 추구하는 감독이었으나 오즈가 많은 컷을 사용하면서 카메라의 이동을 자주 했던 것과 달리, 한 컷이 5분 이상을 넘는 롱테이크를 사용해서 인물의 감정에 접근하는 방식을 추구했다. 1950년대 초반에 일본 영화가 유럽에 처음 소개될 당시 이러한 미조구치의 롱테이크에 감화된 평론가와 감독들이 많았으며, 특히 장 뤽 고다르를 포함한 누벨바그 세대들이 미조구치 스타일에 경도되고 영향받았다.
지독한 완벽주의자였으며 괴팍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그 예화로, 당대의 최고 여배우였던 다나카 기누요는 역할을 위해 도서관의 모든 책을 읽으라고 강요 당했으며, 와카오 아야코는 이름을 부르지 않고 별명(비하하는 의미)으로 불렀다고 한다. 스가이 이치로에겐 "너는 뇌에 매독이 있으니, 의사에게 가봐라." 라고 말했으며, 〈산쇼다유〉 촬영 때는 아역을 향해 "이 아이는 어쩔 수 없는 바보구나!" 라고 말해, 근처에 있던 모친을 낙담시켰다(...) 어디서 많이 본 성격이다?
1956년, 58세의 나이에 백혈병으로 별세했다.
3 기타
많은 해외 영화 평론가들이 임권택을 미조구치의 후계자 중 하나로 꼽는데, 정작 임권택은 일본 대중문화 개방 전까지 미조구치의 영화를 본 적이 없다고 한다(...)
4 대표작 일람
총 작품수가 100편 정도 되므로,[3] 이곳엔 대표작들만 나열한다.
- 기온의 자매 (1936년)
- 마지막 국화 이야기 (1939년)
- 겐로쿠 추신구라 2부작 (1941년~1942년)
- 밤의 여자들 (1948년)
- 서학일대녀-오하루의 일생 (1952년)
- 우게츠 이야기 (1953년)[4]
- 산쇼다유 (1954년)[5]
- 신 헤이케 이야기 (1955년)[6]
- 양귀비 (1955년)[7]
- 적선지대 (195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