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즈 야스지로

小津(おづ)
安二郎(やすじろう)

(1903. 12. 12 - 1963. 12. 12)

" 그에게 있어 시나리오의 완성은 곧 영화의 완성을 의미했다. "

ㅡ 배우, 류 치슈

1 개요

일본의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 미조구치 겐지와 함께 일본 영화의 3대 거장으로 꼽힌다.

미조구치 겐지나 구로사와 아키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늦게 발굴된 감이 있지만, 사후 그의 작품들이 서구에 재조명되면서 세계 영화계에서 가장 위대한 감독 중 한명으로 평가받고 있다.[1]

시간이 지날 수록 평가가 좋아져, 최근엔 "미국 영화존 포드, 프랑스 영화장 르누아르가 있다면, 일본 영화엔 오즈 야스지로가 있다" 같은 평가를 받고 있다.

2 소개

일본에서 활동했던 영화 감독. 생전보다 사후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여, 이란의 거장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대만허우샤오셴, 미국짐 자무쉬, 한국이명세홍상수등이 모두 오즈 야스지로를 멘토로 삼거나 깊이 영향을 받은 감독들이다. 다만 이 지지자들이 대중적인 영화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서, 구로사와 아키라에 비해선 지명도가 낮은 편.

부모죽음이나 자식결혼이나 취업, 실업으로 인한 일상적 문제들을, 평이한 홈드라마의 틀에서 묘사했다. [2] 이 틀 안에서 엄밀한 형식미를 추구하는 깐깐함으로 유명했는데, 일례로 책상 위에 놓인 맥주병위치cm단위로 조절했다고 한다. 이러한 완벽주의 속에서 결혼이나 부모의 죽음, 청년실업과 같이 대부분의 사회에서 가족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문제들을 깊이있게 다루어서, 일상의 문제를 다루는 많은 거장들이 그의 작품들에 경도되고 영향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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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다다미 쇼트의 대가로도 유명하다. 다른 영화들처럼 사람 상체 높이와 카메라 높이를 맞추지 않고, 카메라 높이를 다다미에 앉아있을 때 눈높이에 맞추는 앵글이자 쇼트로, 일본인들의 생활 감각을 정확히 반영한 시점 쇼트라고 평가받는다. 대신, 특유의 카메라 위치 때문에 카메라맨은 엎드려서 촬영해야 했다. 촬영 현장엔 다다미 쇼트 전용 삼각대까지 있었다고. 그래서 오즈 야스지로 사후에는 활용빈도가 거의 없다.

다만 서구 영화의 서사적 구조의 관점에서 보면 너무나도 시시해보이는(...) 내러티브나 비전형적인 영화 문법, 영화 유통의 어려움 [3] 때문에 일본 3대 거장 가운데 가장 늦은 70년대에 들어와서야 해외에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구로사와 아키라나 미조구치 겐지가 이미 40년대 말 ~ 50년대 초에 서구 평단에서 거장으로 인정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대단히 늦게 발견된 작가. 나루세 미키오는 10년 더 늦었다. 반대로 일본 평론가들 사이에서는 당대에도, 지금도 인기가 좋은 영화감독이다.

가장 유명한 대표작 《동경이야기》를 필두로 거의 모든 작품들이 국내에 DVD가 있기에, 영화팬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감독이다. 단, 1936년작 《외아들》 이전 작품들은 모두 무성영화라는 것을 밝힌다. 이 무성영화 중에서도 야스지로의 걸작이 있으니, 관심 있는 이들은 찾아보길 바란다.

사실 의외로 오즈 사후에 등장한 일본 감독들은 경외는 하되 적극적으로 그를 추종하는 사람이 드문 편이다. 오히려 그에게서 멀어지려고 하는 부류가 더 많다. 대놓고 오즈식 영화에게 반기를 들었던 이마무라 쇼헤이오시마 나기사 같은 일본 뉴웨이브 감독들부터 시작해 일본 집을 찍으면서 오즈의 영향을 드러낼까봐 걱정했던 스와 노부히로라던가 오즈 영향을 받을까봐 일본식 집에서는 영화를 찍지 않는다고 말하는 구로사와 기요시와 비슷한 성향을 보인 아오야마 신지, 세간의 평가와 달리 “나는 오즈 야스지로를 좋아한 적이 없다”라고 발언한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보듯이 일본 내 감독들에게는 일종의 거대한 벽으로 다가오는듯 하다. 오히려 해외 감독들이 그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편

3 일생과 일화

중산층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비교적 평범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1923년 쇼치쿠(松竹) 영화사에 취업하여 촬영 스탭으로 일하다가 1927년에 감독으로 데뷔했다. 필모그래피의 거의 모든 작품을 쇼치쿠에서 찍었기 때문에 쇼치쿠에서는 지금도 그를 쇼치쿠 역사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소개하고 있다. 1903년 12월 12일에 태어나 1963년 12월 12일에, 딱 예순의 나이에 급성 간염으로 별세했다.[4]

젊었을 때 잠시 교사로 일한 적이 있는데, 자격증 없이 일했다고 한다. 수업 시간에는 수업보다 할리우드 영화 이야기를 하거나, 만돌린을 연주해줘서 학생들이 좋아했다고 한다.

자신의 영화에서는 항상 결혼, 취업이나 실업과 같은 문제를 다루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감독 본인은 그 문제들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평생토록 독신이었으며, 잠시 중학 임시교사 일을 한 것 외에는 샐러리맨 생활을 해 본 적도 없고, 대학을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졸업 이후의 취업 걱정을 해 본 적도 없다. 그의 말년 작품들이 점점 현실적인 감각을 잃어버리고 패턴화된 이야기의 반복으로 끌려갔던 것도 이러한 일상적인 경험의 부재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

앞서 밝혔 듯이 평생 독신으로 산 인물로, 굉장한 쑥맥에 샌님이어서 평생동안 여배우 하라 세츠코를 짝사랑했지만 한 번도 고백을 못 하다가 죽기 직전에야 지인에게 실토했다고 한다. 바람둥이로 유명했던 미조구치 겐지와는 여러모로 비교되는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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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가 저녁 식사를 세 번하고도 관계가 진전이 안 되면, 단념하는 게 좋다

인터넷에선 위 발언으로 유명하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명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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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묘비엔 '' 라는 단 한 글자만 새겨져 있다고 한다.

4 연출작 일람

※ 대표작들만 나열한다.

  1. 세계적으로 보았을 때엔 늦은 평가지만, 일본 영화계에선 살아생전부터 인정하고 있었다.
  2. 평생 57편의 영화를 감독했는데, 데뷔작인 《참회의 칼》을 제외한 모든 영화가 동시대 가정을 다룬 홈드라마다.
  3. 생전 국제 무대에 알려진게 경력 후기 동경 이야기가 5년 늦게 BFI 영화제에서 상을 받고 말기작인 고하야가와의 가을이 미국 개봉에 베를린 영화제에 경쟁 부문에 초청되면서였다. 비슷한 시기 미조구치나 구로사와가 이미 해외 영화제에서 거장 대우받았던것과 대조된다.
  4. 비슷한 경우로 잉그리드 버그만이 있다. 1982년 67번째 생일인 날, 마지막 생일 잔치를 즐기고 그날밤, 병으로 눈을 감았다. 그 외에도 아타튀르크 양녀인 사비하 괵첸 (Sabiha Gökçen) 공군 대령이 딱 88살(1913.3.22~2001.3.22)까지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