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리(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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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이오와급 전함의 3번함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도중에 브루클린 뉴욕 해군 공창에서 건조되었다. 이름과 달리 뉴요커 되시겠다. 1944년 1월 29일 진수되어 동년 6월 11일에 취역했다. 초대 함장은 윌리엄 M. 캘러건 대령이며 미주리라는 이름을 받은 네 번째 배다. 즉 4대 미주리. 현재는 버지니아급 잠수함 중 한 척이 미주리의 이름을 물려받아 활동 중이다. 엔터프라이즈 해체의 당위성이 사라졌다. 한 번 퇴역했다가 재취역해서 전쟁을 한 번 더 겪은 우여곡절이 많은 전함이고 한국과의 인연도 은근히 깊은 함이다.

미주리는 2차대전으로 3개의 종군휘장을, 한국 전쟁으로 5개의 종군휘장을 수여받았다.

별명은 미주리 주의 약자 Mo를 따서 "Mighty Mo" 혹은 "Big Mo"였다. 상세한 제원은 아이오와급 전함 참조.

2 활약상[1]

2.1 제2차 세계대전

취역 직후 각종 테스트와 관숙 항해를 거친 뒤 1944년 11월 11일에 노포크를 출항하여 18일에 파나마 운하를 통과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기함 임무를 맡기 위해 약간의 시설 개장을 거치고 12월 14일 출항하여 1945년 1월 13일에 캐롤라인 제도에 도착하여 드디어 태평양 전선에 뛰어들게 되었다. 현장에서 마크 미처 제독의 기함을 한동안 맡았다. 1월 27일에 TF 58에 소속되어 항모들을 보호하기 위해 출격하였으며[2] 2월 16일에는 1942년 호넷에서 이함한 둘리틀 특공대 이후로 처음 일본을 공습하는 데에 참여하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 임무는 항모의 호위에 그쳤지만.

이후에는 이오지마 전투에서 2월 19일부터 화력지원을 시작했다. TF 58이 울리시에 귀항한 이후로 이번에는 항모 요크타운[3]을 따라 3월 14일 출격하여 18일 일본 본토를 공격하면서 항모로 접근하는 적 항공기 4기를 격추하였다. 이후 항모 프랭클린이 폭격으로 대파당하자 그를 호위하여 3월 22일까지 울리시 방면으로 동행하다가 귀환하여 오키나와 전투에 앞서 사전 포격에 나섰다.

4월 7일에는 야마토급 전함 1번함 야마토를 포함한 일본 해군의 잔존부대가 접근하였으나 미주리가 나설 것도 없이 함재기들의 공습으로 인해 어뢰로 격침되었다. 생존한 4척의 일본 구축함들은 사세보로 귀항했다. 4월 11일 미주리는 카미카제 공격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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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유로 인해 3번 5인치 양용포탑에 화재가 발생하였으나 함 자체의 손상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화재도 금방 진압되었다.

4월 17일 12마일 거리 밖에 있는 잠수함을 발견하여 대잠작전을 유도하였다. 결국 구축함과 경항모 바탄에 의해 일본 잠수함 이56이 격침되었다. 이 때까지로 미주리는 오키나와에서의 임무를 중단하고 기동부대에서 빠져나와 울리시로 귀항했다가 5월 18일 윌리엄 홀시 제독의 3함대 기함이 되어 오키나와로 복귀했다. 그리고 다시금 포탄을 퍼부었다. 이후로 6월 2일부터 3일까지 큐슈의 일본 비행장을 타격하였다.

6월 5일에서 6일간 윌리엄 홀시 제독이 이후로도 두고 두고 까이는 태풍 속 항해를 결행하였으나 미주리는 상부 구조물에 일부 손상을 입는 선에서 그쳐 중요한 부위의 손상은 피해갔다. 3함대는 8일에 다시 큐슈를 두들기다가 레이테 만으로 물러났다.

1945년 6월 13일 미주리는 레이테의 산 페드로에 도착하였다. 오키나와에서 지원작전을 편 지 3개월 만이었다. 7월 8일 일본을 향해 북쪽으로 항로를 잡고 7월 10일에 도쿄를 기습하었으며 7월 15일에는 수상함 최초로 일본 본토에 포격을 개시했다. 홋카이도의 무로란을 포격했으며 그 과정에서 일본 강철과 와니시 철공소의 시설이 파괴되었다.

일본 본토에 대한 공해 합동 타격은 7월 25일까지 지속되었으며 미주리는 주로 도쿄를 직접 타격하는 항모를 호위하는 역할을 맡았다. 7월 말이 되면서 일본에게 영해란 개념이 거의 상실될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8월에는 드디어 일본에서 원자탄이 터지면서 일본이 항복하게 된다.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미주리는 점령함대 기함 임무를 일시적으로 1번함 아이오와에게 넘긴 뒤 29일 항복 조인식장으로 쓰이기 위해 도쿄로 입항하였다. 그리고 9월 2일 미주리의 함상에서 전쟁이 끝났다. 5일에는 기함 임무를 사우스다코타에게 완전히 넘기고 괌에서 귀환병들을 태우고 본토로 돌아왔다.

2.2 대전 이후 한국전쟁 전까지

뉴욕의 해군 공창에서 한 차례 오버홀을 받은 뒤 1946년 3월 21일 주미터키대사의 시신을 고국인 터키로 옮기는 임무를 맡았다. 여기에는 상당한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미주리가 터키로 향한다는 것은 미국이 터키와 그리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정치적인 제스쳐였다. 당시 그리스는 지중해로 패권을 넓히려는 소련이 부추긴 공산주의자들이 내전을 일으킨 상황이었다. 소련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위협을 느낀 것은 터키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미주리의 입항을 환영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미주리는 입항하면서 예포를 18발 발사함으로써 최대의 예우를 갖추었다. 돌아오는 길에 그리스를 들러 소련을 견제한 것은 물론이다.

이후로 대서양 함대에 배속되어 항해훈련을 주로 하다가 1949년 9월 23일부터 1950년 1월 17일까지 오버홀을 받게 되는데, 이것이 뜻하지 않은 전쟁 준비가 되고 말았다.

2.3 한국전쟁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주리는 8월 19일 UN군에 합류하기 위해 노포크에서 출항했다. 9월 14일 큐슈의 서쪽에서 UN군과 합류한 미주리는 바로 스미스 제독의 기함이 되었다. 미주리는 한국 영해에 진입한 최초의 미군 전함이 되었으며 UN군과 합류한 바로 다음 날인 15일 삼척 앞바다에서 삼척에 포격을 가했다. 이는 인천 상륙작전의 양동작전의 성격이 짙은 것으로 삼척에 상륙 전 사전포격을 가하는 것처럼 움직인 것이다. 이후 중순양함 헬레나[4]와 구축함 두 척과 합류한 미주리는 미 8군의 진격을 지원하게 되었다. 미주리는 9월 19일 인천에 도착하였으며 10월 10일 제5순양함 전대장 히긴스 제독의 기함이 되었다. 10월 14일에는 사세보에 도착하여 7함대 사령관 스트러블 제독의 기함이 되었다. 에식스급 항공모함 밸리 포지의 호위함으로 동해안에 있던 미주리는 10월 12일부터 26일까지 천진과 탄천에 포격을 가했으며 그 뒤에는 원산을 포격했다. 12월 23일에는 흥남 앞바다에서 미군 제3보병사단이 크리스마스 이브에 철수하는 것을 지원했다. 이른바 흥남 철수다.

1951년 3월 19일까지 미주리는 항모 호위와 지원 포격 임무를 수행하다가 요코스카로 물러나 3일 뒤인 3월 24일에 요코스카에 입항했다. 그리고 잠시간 임무에서 해제되어 미국으로 돌아가 훈련에 쓰이다가 오버홀을 다시 받고 1952년 10월 17일 요코스카로 돌아와 7함대 사령관 클라크 제독의 기함이 되었다. 다시금 해상 포격 임무에 종사하게 되었는데 탄천, 청진, 선진, 원산, 함흥, 흥남이 미주리의 타겟이었다. 이 임무는 1953년 1월 2일까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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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리는 1953년 1월 5일 사세보로 잠시 돌아갔다가 23일 영국 해군 제독 가이 러셀의 방문을 받은 뒤 바로 다음 주부터 다시금 지원 포격에 나섰다. 원산, 탄천, 흥남 등지를 두들기며 북한군의 동해안 보급선을 끊었다. 그러나 3월 6일 미주리의 함장 워너 러셀 대령이 심장마비로 쓰러지면서 임무는 잠정 중단되었고 기함 임무도 2번함 뉴 저지에게 넘겼다. 미주리는 4월 7일 요코스카에서 출항하여 5월 6일 노포크로 귀항했다. 그리고 미주리의 한국전쟁은 그대로 끝났다.

2.4 퇴역

이후 미주리는 주로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항해훈련을 하다가 1954년 9월 18일 퓨젯사운드 해군 공창에서 오버홀을 받고 1955년 2월 26일 퇴역하여 예비 전력이 되었다. 미주리는 태평양 예비함대에 배속되어 브레머튼에 정박하여 연간 10만 명 정도의 관광객들을 받았다. 그리고 미주리가 다시는 현역으로 돌아올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2.5 재취역

1984년 미군은 잠들어있던 미주리를 다시 깨워 개장을 시작했다. 미주리는 무장 플랫폼으로서 전 세계에 퍼진 미 해군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데에 쓰이게 된다. 미주리는 1986년 5월 10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재취역했다.

미주리는 4개월 후 오스트레일리아, 디에고 가르시아, 이집트, 터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파나마 등 8개국에 돌아다니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1987년 7월 25일 중동의 정세가 급변함에 따라 미주리는 인도양으로 급파되었다. 페르시아만, 인도양, 북아라비아해 등지에서 100일 이상 수상에 머물던 미주리는 1988년 미국으로 귀환했다. 이후 몇 개월 뒤 림팩 훈련에도 참여하였다.

1989년 롱비치 해군 공창에서 정기 점검을 받았고 후반기에는 독립기념일 불꽃놀이에 참여하는가 하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수상한 배우와 가수들이 미주리의 선수쪽 갑판에서 락 뮤직 비디오를 촬영하기도 했다.

1990년에는 한국에 방문하여 부산광역시에 나타나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림팩 훈련에 참여하였는데 이 때는 대한민국 해군도 참여하였다.

2.6 걸프 전쟁

1990년 8월 2일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쿠웨이트를 침공했다. 8월 중순에 조지 부시 대통령은 선발대와 함께 강력한 함대를 사우디 아라비아로 파견하였다. 미주리는 당초 서태평양을 순회할 예정이었으나 출항하기 며칠 전에 모든 일정이 취소되고 중동으로 파견되었다.

11월 중순에 아라비아만으로 향한 미주리는 진주만에서 추수감사절을 보내고 필리핀을 경유하여 태국을 거쳐 훈련을 진행하며 이동했다. 포격 이외에도 화학전을 대비한 훈련이 주가 되었다.

미주리가 아라비아만에 도착한 것은 1991년 1월 초로 1월 17일에 이라크군을 향해 토마호크 미사일을 발사하였다. 총합 28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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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에는 미주리가 드디어 16인치 주포를 사격하였다.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로 처음 쏘는 것이었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무인기로 탄착관측사격을 실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2월 28일 이라크가 항복하면서 전쟁도 끝나고 미주리도 귀환하였다.

2.7 진짜로 퇴역

1991년 추수감사절 직후 미주리는 마지막 임무를 부여받았다. 바로 50년 전 진주만에서 1941년 12월 7일 숨진 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한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미주리의 마지막 공식 항해는 미국 본토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1,000발의 16인치 포탄과 6,000발의 5인치 포탄, 그리고 16개의 하푼 미사일과 남은 토마호크 미사일을 하역해야 했다.

미주리는 1992년 3월 31일 롱비치에서 마침내 퇴역하였다.

1998년 5월 4일 해군장관 존 달트는 미주리를 호놀룰루의 미주리 기념사업회에 기증함으로써 완전히 미주리를 민간에 이양하게 되었다.

현재 미주리는 진주만의 포드 섬에 정박해 있으며 아직도 바다 속에 있는 애리조나의 애리조나 기념관 근처에 있다.

3 매체에서의 등장

  • 영화 배틀쉽의 주역. 16인치 주포로 당당하게 외계인의 강냉이를 털어주신다.
  • 전함소녀에 등장이 예고 되어있다. 항복문서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 영화 언더 시즈의 주역이긴 한데 대역을 쓰셨다.
  • 월드 인 컨플릭트에서도 딱 한 번 출연하는데 이후로는 스토리 상 후반에 격침된다고 언급만 된다.
  • 상품화로는 아카데미과학스냅타이트, 옥스포드(회사)블록으로 출시되었다. 안그래도 함선모형이 난이도 높은데, 독도함 다음으로 인젝션으로 나와 입문하기 좋게 출시되었다.
  1. 이 부분은 미 해군의 미주리 설명을 참조하였습니다.
  2. 에식스급 항공모함 렉싱턴의 태스크 그룹에 소속되었다.
  3. 당연하지만 요크타운급 1번함이 아니라 에식스급 항공모함이다.
  4. 경순양함 헬레나와는 다른 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