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지마 전투

일본어 :硫黄島の戦い(いおうじまのたたかい), デタッチメント作戦
영어 : The Battle of Iwo Jima

이오지마 전투
제2차 세계대전태평양 전쟁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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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지마의 위치

▲ 상륙을 시도하는 미 해병대(2월 19일)[1]

▲ 이오지마에 상륙하는 미군

▲ 수리바치 산 정상에 게양된 성조기
날짜
1945년 2월 19일 ~ 1945년 3월 26일
작전명
Operation Detachment(파견 작전)
장소
일본 제국, 도쿄 도 이오 섬
교전국미군
미국
일본군
일본 제국
지휘관미 해군
체스터 니미츠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마크 미처
미 해병대
홀랜드 스미스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이치마루 리노스케†
결과
미군의 승리
영향
태평양 전쟁 후반기 미군 사상자가 일본군 사상자보다 많았던 유일한 전투[2]
병력70,000명22,060명
피해규모6,821명 전사
19,189명 부상
21,844명 전사

이오지마 전투 당시의 사진들

1 개요

World War Two: Iwo Jima 1945 Part One
승리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우리 모두가 의심했던 것은, 우리 중 어느 누구라도 살아남아서 최후에 묘지에 참배할 수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Victory was never in doubt. What was in doubt in all our minds was whether there would be any of us left to dedicate our cemetery at the end.)
- 제3해병사단장 그레이브스 B. 어스킨 소장 출처

이오지마에서 싸운 군인들 사이엔, 특별한 용기는 당연한 미덕이었다.

(Among the men who fought on Iwo Jima, uncommon valor was a common virtue.)
- 체스터 니미츠 제독, 이오지마 전투 이후

태평양 전쟁에서도 가장 치열하고 잔인한 지옥도가 펼쳐졌던 전장

이오지마는 원래 별 볼일 없는 손바닥만 한 화산섬이었지만, 사이판 점령 이후 중부 태평양에서 미 해군이 진격하자 이에 일본 해군이 이곳에 비행장과 레이더 기지를 건설한다. 이오지마 기지는 지리적으로 일본 본토 바로 앞의 전진 기지였으며, 본토 폭격을 목적으로 인근을 지나가는 미 육군항공대B-29 폭격기를 요격하거나 본토에 경보를 해 줄 수도 있었다. 또 미군은 미군대로 도쿄 폭격을 마치고 귀환하는 B-29 폭격기들을 위한 비상 활주로를 만들 장소를 확보하기 위해서 이 섬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결국 이러한 전략적인 위치 때문에 이오지마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2 양측의 대비

2.1 일본군의 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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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중장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장군. 후술할 해군의 이치마루 제독과 명목상 동급이었으나, 실질적으로 이오지마의 육해군 수비 병력 전체를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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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오지마의 일본 해군 측 최선임자였던 해군 중장 이치마루 리노스케 (市丸利之助) 제독은 제27항공전대 사령관[3]으로 해군 육전대를 이끌며 구리바야시 다다미치와 함께 이오지마 전투를 지휘했다.

이오지마 전투는 이전까지 태평양 전선에서의 전투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는데 이는 당시 이오지마 수비대 사령관으로 부임한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장군의 전술에 기인했다. 냉정한 현실주의자였던 그는 이오지마 방어가 강요된 자살 행위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 예정된 희생을 조금이라도 일본에 유리하게 이용할 방법을 강구했다. 구리바야시 다다미치가 구상한 방어 전술은 장기 방어전을 통해 최대한 미군의 희생과 출혈을 강요하여 본토에 시간을 벌어 주면서, 한편으로는 일본 본토 상륙을 눈 앞에 둔 미군에게 이오지마에서 지옥을 보여 줌으로써 상륙전에 대한 트라우마를 심어 주어 일본에 조금이라도 유리한 상황을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따라서 구리바야시 다다미치는 전멸을 앞당기는 옥쇄 돌격을 엄격히 금지하고 가능한 오래 병력을 유지하면서 집요하게 전투를 지속하기 위한 지침들을 만들어 부하들에게 숙지시켰다.

이오지마 전투에 대한 그의 구상들은 절반 정도는 유효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불행히도 이오지마와 이후 오키나와 전투에서 학을 뗀 미국이 직접 상륙 외의 다른 방식을 찾게되는 역효과를 불러 일으켰다.[4][5]

구리바야시 다다미치의 새로운 전술 때문에 이오지마 전투의 시작인 해안 상륙 시점부터 미군은 전혀 낯선 전황 속으로 끌려들어갔다. 그 당시 일본군은 해안선 방어를 할 때 '군대는 상륙하는 그 시점에 가장 방어가 취약하다'라는 논리를 따라 상륙정이 다가오는 동안 해안선 가까이에 대기하다가 적군이 상륙하면 바로 그때 공격하는 전술을 취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게 공수 양측의 물량과 화력이 어느 정도 비등하다는 전제가 있을 때의 얘기라는 것. 태평양 전역 곳곳에서 전력을 줄줄이 말아 먹고 본토마저 위협받는 이 시점에서 미국은 일본을 압도하는 물량과 화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객관적으로 상륙하는 시점이 가장 취약한 것은 맞지만, 미군은 이미 타라와 전투에서 일본군이 구축한 방어선에 호되게 데인 이후로는 상륙에 앞서 구형 네바다급 전함, 펜실베이니아급 전함, 테네시급 전함, 뉴멕시코급 전함들의 대구경 함포를 이용한 상륙 준비 포격[6]항공모함 함재기를 동원한 공습을 펼쳐 해안에 설치된 토치카나 방어선을 철저히 무력화시키고 있었다. 그랬기에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 일본군은 해안선에 올망졸망 모였다가 사이좋게 포탄 밥이 될 뿐이었다.

구리바야시는 이런 해안선 방어 전술의 문제점을 곧바로 파악했다. 그는 해안선에 방어선을 구축하는 대신 해안선 안쪽으로 병력을 빼고, 부임 직후 곧바로 거대한 땅굴로 연결된 탄탄한 방어망을 구축했다.[7] 그리고 일본군의 고질병 반자이 어택을 금해 쓸데없이 나가 죽기보단 최대한 오래 살아남아서 저항하도록 명령했다.[8] 그 결과 미군은 이오지마에서 이제까지 태평양 전선에서 마주쳐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는 일본군을 맞이하게 된다. [9]

2.2 미군의 대비

미군이 애를 먹은 전투에서 늘상 그래 왔듯이 미 해병대는 이오지마 점령에 그리 많은 시간이 들지 않을 것으로 또다시 오판을 하고 말았다. 심지어 펠레리우 전투를 겪고 나서도!! 다른 일본군들 같이 이오지마의 일본군도 상륙 시점에 총공격을 가하고 바로 그 저녁에 야음을 틈타 남은 병력을 모두 반자이 어택에 사용할 것이라 예측했기 때문이다. 이것만 견뎌 내면 남은 것은 미군의 일방적인 소탕만 남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러나 정작 해병대가 상륙할 때 일본군은 전혀 공격하지 않았고, 해병들이 다가올 반자이 어택에 대비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는 동안에도 자신들의 지하 벙커에서 나오지 않았다.

일본군의 총공격은 다음날 홀랜드 스미스 장군[10]미 해병대원들이 해안선에 모두 상륙하고 해안선에 진지를 구축하는 그때, 모든 해병들이 해안선에 모여 발이 푹푹 빠지는 화산재 같은 모래에 발이 묶인 바로 그때 시작되었다. 미군 사상자의 대부분은 이때 나왔다고 알려져 있다.

3 전투의 경과와 양측의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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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방의 인적 물적 손실이 얼마나 막대했던지, 개전 첫날에만 미 해병대 2,500여 명이 전사 및 부상으로 전열에서 이탈하는 참사가 빚어졌다. 당시 전황 보고를 들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만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물론 일본군 쪽의 손실은 말할 것도 없었다. 21,000명의 이오지마 수비대 중 살아남은 사람은 1/100에도 못 미쳤고, 그나마도 태반이 죽기 일보 직전의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포로 학살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그만큼 미 해병대가 철저하게 일본군 수비대를 쓸어 버렸기 때문이다. 화염 방사기를 동원해 동굴을 통째로 태워 버리는 일은 다반사였으며, 공병대가 TNT로 동굴 내부를 싹 쓸어 버리거나 불도저로 동굴을 메워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게다가 이런 지옥을 겪고 나니 진이 다 빠져 버렸고, 이미 잔혹한 풍경에 넌더리가 났기에 포로 학살 따위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처음에는 누구도 이런 지옥도가 펼쳐질 거라는 예상은 하지 못했다. 심지어 해군 수병들과 해병대원들은 "1주일 만에 끝나겠지? 저런 별볼일 없는 섬 따위... 일본 애들도 얼마 못 버틸 테고 말이야." 하는 농담을 주고 받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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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것이, 당시 이오지마의 일본군 수비대는 군수 지원이 끊긴 상태였으며, 미 태평양 함대는 함포, 함재기 공습을 총동원해 몇 달씩이나 이오지마를 두들겨서 섬의 모습이 연기에 감싸여서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8인치 함포에서 20㎜ 기관포까지 모두 동원해 섬이 박살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퍼부어댔지만, 이미 그 시점에 일본군은 지하 동굴에 틀어박혀 있었다. 사실 이오지마로 배치받은 것도 "포로는 없다. 모두 싸우다가 죽어라."는 말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일본군도 악착같이 싸울 수밖에 없었던 것. 그러나 누가 이런 일을 예상이나 했을까.

여기에 상륙 부대 지휘부는 원활한 상륙 작전을 위해 해군에게 7일간의 상륙 준비 포격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당시 해군은 전함의 주포탄 적재량 문제로 인해 난색을 표하였고, 이로 인해 함대 사령부와 상륙 부대 지휘부가 서로 떽떽거리면서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11] 결국 상륙 준비 포격은 3일 남짓 이루어졌고 그대로 상륙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상륙 부대의 피해가 컸다는 주장도 있지만, 쿠리바야시 장군이 지하 터널을 워낙 잘 구축해서 별 효력이 없었을 것이란 주장도 있다.

결국 1주일 만에 끝난다는 전투는 끔찍한 희생자를 만들면서 1개월 이상이나 계속된 끝에 미군의 승리로 끝난다. 이 전투는 최초로 일본군보다 미군의 인명 피해가 컸던 전투였다. 물론 미군의 인명 피해는 부상이 대부분이었으나 이는 기존까지 미군이 겪지 못한 뼈아픈 참사였다. 물론 일본군 자체는 전 병력이 전사하다시피하여 사실상 궤멸했지만. 전병력 11만 명 중 미 해군 및 해병대의 전사자는 6,821명, 부상은 19,189명에 실종이 494명이었다. 일본 육해군은 21,000명 가운데 216명만 남고 전원 전사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구리바야시 다다미치의 목적대로 미군은 이오지마와 뒤이은 오키나와 전투에서도 상륙군이 엄청난 피해를 입자 방어 시설이 잘 되어 있을 일본 본토 상륙에 대해 부담감을 가지게 되었지만, 다다미치의 목적과는 정반대로 미국이 히로시마원자폭탄을 떨어트리는 결정을 내리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4 이야깃거리

이오지마 전투에서는 총 27명의 병사들이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다. 해병대 23명, 해군 4명에게 수여되었으며 이 중 13명은 사후 추서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을 통틀어 해병대에서 수여받은 명예 훈장이 82명인데 약 28%의 비율이다. 심지어 전사자들 중에는 더 퍼시픽의 주인공으로도 잘 알려진 존 바실론 중사처럼 이전에 명예 훈장을 받고 다시 실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사례도 있었다. 그만큼 이오지마 전투가 매우 격렬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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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바치의 성조기는 해병대의 다음 500년을 뜻한다.

- 제임스 빈센트 포레스탈 해군성 장관, 1945년 2월 23일

다만 제임스 포레스탈 장관이 이 사진을 보고 이 말을 한게 아니라 첫번째 성조기를 내건 상황이었을 때 이 말을 했다. 원래 했던 말은 홀랜드 스미스에게 했던 말로, “Holland, the raising oh that flag on Subachi means a Marine Corps for the next 500 years.”이다. (홀랜드, 수리바치의 저 깃발은 해병대의 다음 500년을 의미하오.)

누구나 어디선가 한 번쯤은 본 기억이 있을 사진이다. 이오지마에서 가장 높은 수리바치 산 정상에 성조기를 게양하는 장면이다. 왼쪽부터 아이라 헤이즈, 프랭클린 수슬리, 존 브래들리, 할론 블럭, 뒤에 잘 보이지 않는 2명은 마이크 스트랭크, 렌 개그넌. 이후 마이크 스트랭크, 프랭클린 수슬리, 할론 블럭은 이오지마 전투 중 전사한다. 원 제목은 "Raising the flag on Iwo jima", 통칭 '아버지의 깃발'.

원래는 더 작은 깃발을 먼저 세웠지만, 사진에 찍힌 것은 후에 좀 더 폼나게 더 큰 깃발을 세우는 장면이다. 맨 처음 세워진 깃발은 전투가 계속되다가 급하게 올리느라 좀 작은 깃발을 사용했다. 이 때의 성조기도 사진이 남아 있는데 '루이스 R. 로워리' 기자가 촬영했다. 이후 해병대 대대장은 이 깃발을 대대 금고에 반납, 대대 소유물로 보관하고 "대신 더 큰 깃발을 달자!"라고 해서 두 번째로 깃발을 세우다가 사진이 촬영된 것. 조 로젠탈이 찍은 이 사진은 퓰리처 상을 받았다. 사족이지만, 로젠탈이 이 사진을 찍기 위해 깃발 세우는 연출을 반복시켰다는 카더라 통신이 우리나라에서 꽤나 나돌았다. 지금은 사진을 찍을 때 같은 곳을 촬영한 영상이 있고 회고록과 증언 등이 나와 사라진 상태.

여담으로 맨 오른쪽 할론 블럭의 어머니는 미국 신문에 실린 이 사진을 보고 가장 오른쪽에 있는 해병대원을 자신의 아들로 한눈에 바로 알아 봤다고 한다. 정부에서 초기 발표시 다른 사람으로 발표했기에 아무도 믿지 않았으나 18개월 후 의회 조사 결과 할론 블럭 본인으로 밝혀졌다. 뒷 모습밖에 안 보이는 흑백사진인데도 알아보다니, 어머니의 초능력이 대단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일화.

위 사진의 주인공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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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스트랭크

1919년생, 체코 출신. 해병대 보병중사.
1945년 3월 1일 이오지마에서 박격포탄을 맞고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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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론 블럭

1924년생 텍사스 출신
1945년 3월 1일 마이크 스트랭크가 전사하자 분대 지휘를 맡지만 그 역시 스트랭크가 전사한 지 수 시간만에 박격포 공격으로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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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클린 수슬리

1925년생 켄터키 출신
1945년 3월 21일 이오지마에서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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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라 헤이즈

1923년생 애리조나 출신. 피마 인디언 출신으로서 미국으로 돌아간 후 영웅으로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진정한 영웅들은 자신들이 아니라 그곳에서 전사한 군인들이라 말했다고 한다. "45명의 소대원 중 단지 5명만이 살아남고, 250명 중대원 중 27명만이 죽거나 다치지 않았는데 어떻게 내가 영웅이겠는가?" 또한, 그는 저 깃발이 꽂힌 날 상륙했으므로 역사적인 순간에 그 자리에 있었다면 몰라도 전투에 영웅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높으신 분들은 그런 데 관심이 없었고, 국채 판매고를 올리는 데만 열중했다. 더 안습인 것은, 전쟁이 끝난 후 고향 사람들은 그에게 가게를 차려 주었으나. 그 대신 해병대 작업복을 입고 관광객들과 사진을 찍을 것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2013년 6월 23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뤘다. 1955년 애리조나에서 알콜 중독으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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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 개그넌

중대 전령으로 저 사진에 나오는 깃발을 산 정상까지 가지고 올라간 인물이다.
1925년 뉴햄프셔 출신.
1979년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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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브래들리

해군 의무하사. 자신들이 영웅이라는 사람들 말에 그는 "우리들은 적당한 시간에 적당한 장소에 있었기 때문이지 영웅이 아닙니다"라고 했다. 깃발 게양자들 중 가장 오래, 가장 좋게 최후를 맞은 인물. 참고로 이 사람의 아들, 제임스 브래들리가 베스트 셀러이자 자기 아버지와 부대원들의 삶을 그린 저서 "아버지의 깃발"을 썼다.
1923년 위스콘신 출신.
1994년 사망.
2016년 미 해병대는 그가 2번째 게양자가 아님을 확인했다. 그는 1번째 게양자이다. 2번째 게양자는 존 브래들리가 아니라 해럴드 슐츠다.
또한 미 해병대는 사진에서 해럴드 슐츠와 프랭클린 수슬리의 위치를 서로 반대로 오인했었고 둘의 사진상 위치를 정정했다.

이 사진은 본국에 보내지자마자 잔악한 일본군에 미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 상징이 되었고, 정치적 쇼맨십에 능했던 루즈벨트 당시 미 대통령은 이 해병대원들을 본국으로 송환해 국채 판매의 광고판으로 써먹으려 했으나, 송환 명령이 내려지기 전 앞서 말한 3명이 전사하는 바람에 나머지 해병대원들만 본국으로 송환됐다.

여기서 살아남은 참전 용사들은 미국, 일본 할 것 없이 모두 끔찍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이오지마가 점령됨으로 인해 미국은 일본 본토를 공습할 B-29의 최전방 기지이자 피격기, 혹은 재보급기를 위한 중간 기착지를 얻게 되었고, 점령 이후 본격적인 일본 본토 공습을 가하게 된다. 미군의 이오지마섬의 확보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오지마 점령 이후 오키나와 공략 전 전진 기지의 획득과 함께 기존에 티니안이나 사이판에서 B-29 폭격기의 항속 거리 문제로 인한 폭장량의 제한이 점차 완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포함하여 손실되는 B-29 폭격기나 승무원의 희생이 줄어들게 되었고[12],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폭격기의 공습을 경고해줄 수 있는 경보망이 무너져 버려 본토 폭격의 피해를 고스란히 뒤집어쓸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리게 된 것이다. 특히나 피격 및 기체 고장으로 불시착하는 수많은 폭격기들이 이 섬 덕분에 구원받았다. 결과적으로 이 섬은 수많은 목숨을 희생한 대가로 수많은 목숨을 구했다.

다만 폭격기 조종사와 승무원이라고 해서 전사한 해병대원들보다 목숨의 가치가 더 높은 것은 아니므로, 이오지마 전투에서의 엄청난 피해 때문에 이오지마 전투의 의의에 대해 회의감을 가지는 입장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는 지나치게 인도주의적인 관점이고 조종사를 1명 육성하기 위해 얼마나 큰 비용이 발생하는지 고려해 보면... 게다가 이오지마는 일본 본토를 폭격하는 데 필수적인 전략 거점이라는 점도 있고 본토 상륙에 교두보이자 진격할 때 뒤통수를 맞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점령했어야 한다는 의견이 매우 강하다. 처음부터 핵을 쏘지 않는 한 통상 작전으로는 반드시 공략해야 했을 것이다.

전투의 처절함 때문에 흔히 미국에서 태평양 전쟁을 배경으로 한 창작물의 주요 무대가 되기도 하는데, 다른 전쟁 영화에 비해서 더더욱 반전 성향이 강한 작품들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소설 아버지의 깃발과, 쿠리바야시 장군이 집으로 보낸 편지를 묶어서 쓴 책인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그리고 소설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기반으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해서 동시에 촬영한 동명의 두 영화 등.

관련 사진들

한편 이 전투의 처절함에 빗대어 이글루스이오공감을 이오지마라 부르곤 했다.(현재는 이오공감이 없어짐.) 물론 이쪽은 비꼬는 의미.

과달카날 전투의 존 바실론처럼 이오지마에서도 기관총 무쌍이 등장했다. 주인공인 해병 병장 스테인 해병이 스팅어 기관총(미 해병대가 M1919에 브라우닝 자동소총M2 중기관총, M1 개런드의 부품으로 만든 기관총)으로 일본군 진지들을 쓸어버렸다.

5 루즈벨트에게 보내는 서(書)

이오지마의 일본 해군측 최선임자인 이치마루 제독은 미군이 지휘소 근처까지 쳐들어오자 죽음을 직감하고, 대담하게도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에게 직언을 고하기로 하고 편지를 쓴다.

이를 하와이 출신 해군 하사관인 미카미 히로부미(三上弘文) 병조에게 영어로 번역하게 하여 일본어, 영어 각각 1장으로 된 문서를 무라카미 해군 대위에게 건넸다. 무라카미 대위는 최후의 돌격에서 전사했는데, 이 서한은 일본 장교들의 시신을 뒤지던 미군에게 발견되어 7월 11일 미국의 신문에 게재되었다.

그 내용인 즉슨, '여태까지 앵글로색슨을 위시한 백인들이 세계를 갈라 먹고 있었는데 욕심이 너무 많은 것 아니냐? 우리 일본이 아시아의 유색 인종들을 해방식민지배 해놓고 뭐, 해방?시켜서 잘 살아 보려고 하는 것인데 니들이 딴지를 걸어서 전쟁이 난 것이다. 제발 우리의 진심을 이해하고 양보 좀 해라.'는 것으로,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개소리지만 찬찬히 읽어 보면 정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로 보인다(...).영문, 일문 편지 전문작성자 도위창 자세히 읽어 보니 역시나 개소리 왈왈 이는 일본 군부가 선전한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의 실체가 일선 군부대에는 알려지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만큼 일본 국민들이 군부와 덴노에게 철저하게 세뇌가 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정작 피해자인 한국인들 입장에서 보자면 너희도 타국 식민지로 만들고 꿀빨았으면서 왜 우리가 꿀빨려고 하니 못하게 하냐. 이 치사한 놈들아로 밖엔 안보인다.

구리바야시 다다미치처럼 이치마루 제독도 시신이 수습되지 않았지만 마지막 돌격시 함께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1. 사진이 흐려서 구별이 안되는 사람들을 위하자면, 하얀색 줄이 가로로 처진게 전부 미군 상륙정이 지나가면서 내는 파도다.
  2. 대전 전체로 보면 미군 사상자가 일본군 사상자보다 많았던 적은 많았다. 알류산 열도 전역에서도 미군의 사상자가 많았고, 무엇보다 진주만 공격에서의 피해 차이는 압도적이다.
  3. 항공대는 진즉에 전멸하여, 잔존 병력은 모두 육전대로 편성됐다.
  4. 하지만 붉은 군대연합군이 일본 본토에 상륙해 도쿄 대공습 따위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을 재배하는 몰락 작전이 시행되지 않게 되어서 결과적으로는 다행일지도?
  5. 이오지마에서의 피해 때문에 미국이 일본에 핵을 사용하는 심리적 저항감에서 벗어났다고 보는 의견도 있는데, 이는 후대에 창작된 카더라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 미군은 핵무기를 그냥 졸라 짱쎈 폭탄 정도로 알고 있었고, 이게 어느 정도로 위험한 물건인지는 일본에 2발을 투하하고 나서 온갖 연구와 실험을 통해 알았다. 특히 방사능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은 한참 이후에야 알려졌다. 물론 핵폭탄을 개발했던 연구진 당사자들은 처음부터 이게 얼마나 엄청난 물건인가를 알고 있었겠지만, 각국 정치가들을 포함해 전 인류가 핵무기의 무서움을 확실히 깨닫게 된것은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한 이후였다.
  6. 위엄 쩌는 파괴력으로 탱크와 비행기 잘 잡아먹기로 유명하던 독일의 8,8cm FlaK도 인치로 환산하면 3.46인치 정도 된다. 이 전함들이 구식이긴 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무식하게 9문 12문씩 탑재하고 다니는 12~16인치 대구경포의 파괴력은 지상 공격용으론 상상을 초월한다. 예를 들어, 155mm(6인치 좀 넘는다.) 곡사포의 살상반경이 50m 정도인데, 그 포탄 8개 부피를 차지하는 전함 주포탄이 터지면 어떻게 될까? 가령 미국의 전함 테네시의 14인치 함포의 별명은 '수영장 제조기'였다. 한 번 쏠 때마다 수영장만한 웅덩이가 파이니까(...) 게다가 대공용 부포로 5인치(127mm)를 달았다.
  7. 다만 이오지마가 화산섬이라 유황 가스가 많아 한 팀에 한명이 1분 간격으로 뛰어들어가 공사를 하고 바로 뛰어나오는 식으로 해야 해서 전투 당시 원래 계획의 80% 정도 완성된 상태였다.
  8. 이런 전술은 후일 오키나와 전투로 이어지게 된다.
  9. 사실 펠레리우 전투에서의 일본군도 이오지마 전투와 비슷한 방식으로 미군을 괴롭혔지만, 펠레리우 전투 자체가 워낙 유명하지 않다 보니 이쪽이 더 많이 알려져 있다.
  10. 그는 8개월 전 사이판 전투에서 제5수륙양용군단장(육군,해병 혼성)으로 지상전투를 지휘했었는데 휘하 육군 사단장을 임의로 해임시켜서 군종간의 큰 후폭풍을 일으켰다. 이후 일선 해병대의 군정업무를 담당하는 후방본부의 사령관으로 영전되었으나 전투병력에 대한 지휘권은 없었고 이 상태로 종전까지 지낸다. 스미스 해병중장에 대한 육군의 분노는 대단해서 일본 항복식이 열린 전함 미주리호에 참석할 수가 없었다. 사이판 전투 직후 해병 4사단장이었던 슈미트 소장이 군단장으로 승계했고 이오지마의 지상전투도 슈미트 장군이 지휘했다. 이 시점에서 스미스 중장은 감독자로서 전투 지휘권이 없는 의례적인 전선 시찰과 미국 본토에서 온 고관들(ex: 해군장관 포레스터)을 안내하는 역활로 지낸다.
  11. 아버지의 깃발에서 해병대 지휘관이 통신기를 들고 '포격 더 안 해 주면 당신네 해군도 다른 곳에 못가고 여기 발 묶이는건 마찬가지요. 기어이 3일 동안만 해주겠다고? x나게 고맙군!'라고 하면서 떽떽거리던 장면이 이 부분이다.
  12. 영화 아버지의 깃발을 보면 이에 대한 언급이 등장한다. 미군이 이오지마 섬을 함락한 직후, 곧 엔진이 파손된 B-29 폭격기가 연기를 내뿜으며 간신히 착륙하는 장면이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