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리틀 특공대

300px
300px
항공모함 호넷에서 발진하는 B-25 미첼 폭격기

1 개요

둘리 특공대
스파이: 백스탭 성공.

Doolittle Raiders.

1942년 4월 18일에 있었던 제2차 세계대전미 육군 항공대의 제임스 둘리틀(James Harold Doolittle) 중령이 이끌었던 특공대. 진주만 공습 이후 이에 대한 보복 작전을 실행, 일본도쿄, 오사카 등 주요 도시에 폭격을 가했다. 이로부터 3년 후, 미 육군 항공대도쿄를 태워버린다.

2 발단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군의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졌고,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러한 국면을 반전시키기 위한 보복 공격을 빨리 시행하라고 군 수뇌부를 날마다 질책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눈팔고 있다가 뼈아픈 한방을 맞고서 시종 일본군에게 밀리고 있던 미군으로서도 뾰족한 수가 없는 판이었다. 태평양 함대에 전함이 한척도 없는 상황에서 몇 안되는 항공모함순양함 이하 급의 호위함과 같이 일본 근처까지 접근시키기에는 당시 일본의 해군력이 너무 막강했으며, 그나마 개전 초반 괌과 웨이크를 빼앗기는 바람에 작전을 엄호해줄 비행장이나 거점이 하나도 없었다. 한마디로 말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접근도 못하며, 무작정 갖다 박으면 성공을 따지기 이전에 제대로 접근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추가적인 대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암울한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일각에서 항모에 육상기지용 폭격기를 싣고 가서 일본 본토에 폭탄을 떨구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 나왔다. 기존의 함재기는 항속거리가 짧기 때문에 일본에 항공모함을 엄청나게 접근시켜야 하므로 기습전에 들켜서 관광당할 확률이 많지만, 육상기지용 폭격기는 항속거리가 길기 때문에 멀리서 발진시켜도 되므로 최악의 경우 작전이 실패하더라도 항공모함을 비롯한 함대는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본격 미국판 치즈러시

그리고, 해당 제안의 경우 사실상 목표에 육탄돌입만 안했지 카미카제나 다름이 없는 제안이었다. 일단 육상기지용 폭격기는 활주거리가 길기 때문에 항공모함에서 이함시키는 것이 극히 곤란했고, 덤으로 착륙거리는 더 길기 때문에 사실상 착함은 불가능했다. 즉 한번 이함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것. 따라서 일단 작전을 시작한 후에는 항공모함과 호위함대는 즉시 반전해서 위험지역을 탈출하고, 폭격기만 혼자 목적지까지 가서 폭격을 한 후에 최대한 멀리 도망쳐서 비행기를 버리고 낙하산을 메고 탈출하는 막장 상황을 겪어야 할 운명이었다. 덤으로 해당 지역이 아군 따위는 하나도 없는 적지 한복판인 데다 먼 바다 위에서 파도에 흔들거리는 좁은 항공모함 갑판에서 거대한 폭격기를 이륙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진짜 엘리트급 조종사가 필요했다.엘리트 파일럿을 소모품[1]으로 쓰는 천조국의 위엄 진짜 엘리트 파일럿을 소모품으로 쓰는 나라는 따로 있지

width=100%
앞줄 왼쪽부터 제임스 H 둘리틀 소령(조종수), 리차드 E 콜 중위(부조종수), 뒷줄 왼쪽부터 헨리 A포터 중위 (항법사)
프레드 A 브레머 중사 (폭격수), 파울 J 레오나르드 중사 (항공기관사)

마침내 이 작전을 지휘할 사람으로 슈나이더컵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경력이 있는 제임스 둘리틀 육군 항공중령이 선발되었다. 참고로 슈나이더컵 대회는 항공기의 최고 속도를 겨루는 대회로 엄청난 항공기술의 혁신으로 슈퍼마린 스핏파이어A6M 등을 탄생시킨 배경이 되었다. 당시는 수상기가 조금 더 빨랐기 때문에 수상기 경주 대회로, 제1차 세계대전제2차 세계대전 사이에 열렸으며, 이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할 정도면 비행기 조종에 대해서는 최고급 전문가로 통하던 시절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슈나이더컵을 모델로 한 작품인 붉은 돼지의 미국인 조종사 커티스가 바로 슈나이더컵에 출전하던 시절의 둘리틀 중령을 모델로 하고 있다.

대단히 위험한 작전이었던 것은 사실이나, 엄밀히 말하자면 계획 자체는 카미카제와는 거리가 있다. 둘리틀이 처음 제안한 작전은 폭격 후 기수를 북쪽으로 돌려 소련블라디보스토크에 착륙하는 것이었다. 공격에 사용할 폭격기를 랜드리스로 넘기는 것을 미끼로 소련과 협상하였으나 당시 소련은 모스크바 방어전을 승리하여 일차적으로 나치 독일의 공세를 막는데는 성공했으나 뒤이은 스탈린의 반격계획이 실패하여 다시 전선이 밀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은 둘리틀 계획으로 인한 일제의 독소전 참전 가능성을 우려하여 거절하였고, 결국 중국 저장성(장강 하류지역)을 향하는 것으로 계획은 수정된다. 본래 계획은 저장성에서 재보급 후 일본과 싸우고 있던 중국 국민당수도 충칭 시까지 날아가서 귀환하는 것이었으나, 후술할 조기발각 문제 때문에 연료부족으로 목적지까지 도달하지 못해 논밭 등에 불시착하게 된다.

3 전개

호넷의 모습이 뭔가 이상했습니다. 갑판 위에 크고아름다운 이상한 비행기가 있었거든요. 색깔도 뭔가 다르고 해군 항공기가 아니었어요. 그러다가 색이 육군기의 위장색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육군의 B-25였던 거죠. - 제임스 피치[2]

둘리틀 중령은 특별히 개조한 B-25 미첼 폭격기와 육군 최고의 조종사들을 불러모아 연일 맹훈련을 했다.

B-25는 본래 육상에서 운용하기 위해 개발된 미 육군의 폭격기였으므로 활주거리가 짧은 항공모함에서 이륙하기에는 힘들었다. 그나마 항속거리가 길면서도 간신히 항공모함에서 이륙가능할 것으로 판단되었기에 해당 폭격기가 선정된 것이다. 기체무게를 최대한 줄여야 했기 때문에 무전기도 빼버리고 기관총도 기체 상부의 것과 기체 전면의 것만 남기고는 전부 빼버렸다. 대신 적기가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나무 같은 것으로 기총좌 자리에 가짜 기총을 달아 놨다. 또한 어차피 작전상 목적을 달성한 후에도 비행기를 버려야 하므로 기체가 격추당하거나 포획당할 경우 당시로서는 고급 기술인 노던 폭격용 조준기가 일본에 노획당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아주 단순한 간이형 폭격조준기가 달렸다.

한편 이 공습에 참여한 폭격기 중 2대는 카메라를 탑재하여 폭격상황을 촬영하도록 했다. 어차피 이 폭격의 의미는 실질적인 타격이 아니라 선전효과였으므로, 이 카메라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던 셈.

모든 준비를 끝낸 특공대는 미 해군 항공모함 USS 호넷에 도착했고, B-25 때문에 호넷의 엄호를 위해 모여든 함대에 마지막으로 USS 엔터프라이즈가 합류했다. 기동부대 지휘관은 해군 소장 윌리엄 홀시 제독이었다.

4 실행

- Are you nervous? / 떨리나?

- No-- Yes, sir. Yes. / 아니 - 네 그렇습니다.
- When did you find religion? / 언제부터 종교를 가졌나?
- When you assigned me to this mission, sir. / 이번 작전에 차출되었을 때 부터입니다.
- I want you to do me a favour. / 부탁 하나만 좀 들어주게.
- What's that, Colonel? / 무엇입니까?
- Pray for both of us. / 내 기도도 해주게.
- 영화 진주만에서.

4월 18일 아침 7시 38분, 작전 수행을 위해 항해하던 미 함대는 일본 연안경비정인 어선[3] 니토마루를 발견한다. 연안경비정 자체는 경순양함 USS 내쉬빌이 쉽게 격침시켰지만 격침당하기 전에 연안경비정이 암호로 일본에 긴급무전을 보낸 것이 포착되었으므로 이미 미 함대의 존재는 발각되었다,

결국 아침 08시 20분 원래 예정된 위치보다 310km 더 먼 35°N 154°E 지점에서 10시간이나 일찍 출격하게 되었다. 일본까지 1,200km를 날아야 하는 상황이였다

width=100%
항공모함 호넷의 비행갑판을 뒤덮은 폭격기들

여기에다 항공모함에서 이함하는 것은 단발기를 모는 해군 조종사들한테도 위험천만한 일인데, 모의훈련 이외에는 항공모함에서 이함한 적이 없는 특공대원들은 풍랑이 몰아치는 바다 위에서 이함을 시도해야 했다. 덤으로(?) 둘리툴 중령이 탑승한 1번기는 다른 B-25를 주기하느라 다른 대원들보다 이함 거리가 더욱 짦았다. 따라서 1번기는 거의 추락하기 직전까지 기수가 낮아졌지만... 이함에 성공했다! 그 뒤를 따라서 2번기, 3번기가 연달아 출격했고 결국 모든 특공대원이 무사히 이함하여 일본 본토를 향해 출격했다.

width=100%
작전 중 폭격기에서 촬영된 사진

한편 일본 해군은 적 함대의 경계부대로부터 적 항공모함의 존재를 확인하고 요격을 위한 준비를 개시한다. 다만 이것을 항속거리가 짧은 일반적인 함재기에 의한 공습일 것이라고 생각한 탓에 공습은 항모가 좀 더 접근한 다음날 아침에나 이뤄질 것이라고 판단(원래 미국의 계획은 그날 저녁이었다.)해 즉각 요격기를 발진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 B-25는 이미 발함을 개시했고 미 함대는 신속하게 퇴각하고 있는 상황이었다.[4]

그리고 일본의 판단보다 20시간 쯤 빨리 B-25 편대가 일본 상공에 모습을 드러낸다. 일단 그 시점에 일본 육군 비행장에서도 요격을 위한 준비는 갖춰진 상태였고, B-25 역시 공습 이전에 발견되었다. 하지만 폭격기의 고도가 묘하게 높은데다, 암만 봐도 항모의 함재기로는 보이지 않았던 탓에 일본군의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부대는 아군 육군의 쌍발 폭격기일 것이라고 판단하여 발견했으면서도 보고를 하지 않았고, 어떤 부대는 "국적 불명의 쌍발기 발견"이란 보고를 올렸지만, 일본군 사령부는 "미 해군은 쌍발기를 운용하지 않는다"믿으려 하지 않았기에 장장 15분간 전화 통화로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5]

추가로 원래 계획상으로는 야간폭격이었으나, 계획보다 일찍 이륙한 탓에 백주대낮에 폭격이 이뤄진 덕분에 그런 심리적인 효과가 더욱 극대화되었다. 게다가 그 때가 하필이면 방공훈련이 끝난 직후였다고 하니,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다 그지깽깽이들아!"가 따로 없었다(...). 하늘에 떠 있는 뭔가 이상한 폭격기도 자기네 나라 비행기인 줄 알았던[6] 일본인들은 그 폭격기가 폭탄을 떨어트리는 걸 보고서야 미군기라는 걸 알고 크게 당황했고, 일본군이 허겁지겁 반격을 시도했지만 이미 특공대 전원은 중국소련으로 진로를 잡은 뒤였다.

여담으로 이 과정에서 일본군 요격기를 세 대나 격추한다(...).무장 덜었다며 무장을 덜고 폭탄을 더 실었슴다

5 결과

아니 어떻게 나약해빠진 양키들이 우리 대일본제국의 수도에 폭탄을 떨구고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던 거지!?
- 당시 일본 국민들의 반응.
width=100%
둘리툴 특공대가 폭격한 현장을 살펴보는 일본군

오른쪽 일본군 병사가 갈굼당하는 것 같다

물론 불과 16대의 쌍발 폭격기를 투입한 둘리틀 특공대의 성과는 사망자 50명과 가옥 262채 파괴 , 제철공장 1, 석유저장소 1, 발전소 몇개, 개장중이던 경항모 류호 우현 직격 등으로 보잘것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그들의 목적은 전과가 아니라 보복 그 자체. 국면을 전환하는 것이었고, 그 결과로 일본 육해군 수뇌부는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언론에는 둘리틀 중령의 이름을 빗대어 "Do little"이라 깎아내리면서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대응하고 있었지만 실제 심리적인 효과는 진주만 공습에 못지 않았던 것이다. 일부러 언론이 이렇게 대응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의식하고 있었다는 의미. 일본군이 태평양 반쪽을 집어삼키고 인도양까지 넘보는 상황에서 일본 본토의 수도 한복판에 폭탄이 떨어지는 바람에 덴노까지 위험에 처하게 만든 것은 일본군의 장성이라면 진짜로 망신살이 뻗친 일이었다. 또한 이 사건 때문에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의 미 항모들을 격멸해야 한다는 생각이 힘을 얻어서 이런저런 이유로 지지부진했던 미드웨이 해전의 작전 준비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고한다. 상세는 미드웨이 해전 항목을 참고. 그리고 일본 육군은 이를 계기로 방공도시계획을 진행시키고 대폭격기 요격부대를 창설하게 된다.그리고 그것은 크나큰 실수였으니...

공습후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둘리틀과 그의 대원들이 "샹그릴라에서 날라 올랐다." 라고 표현. 샹그릴라는 히말라야 산맥에 있다는 전설속의 이상향이다. 작전에 사용된 호넷호를 숨김으로서 일본군의 보복을 막고 공습대에 신비감과 낭만적을 주려는 의도로 사용한듯. 그런데 기자들은 비행기가 USS 샹그릴라에서 날아 올랐다라고 오보를 냈는데, 이를 재미있게 생각한 해군이 나중에 정말로 USS 샹그릴라취역시킨다!

이 작전에 참가한 B-25 16대는 당연하게도 모두 손실되었지만, 특공대원 80명 대부분 본국으로 돌아왔다(3명은 전사, 8명은 포로). 둘리틀 중령은 중령 계급조차 출격 몇달 전에나 진급했던 것임에도 이 작전의 성과로 인해 대령 계급을 건너뛰고 바로 준장으로 진급했고 명예 훈장까지 받았다.

width=100%
중국인들의 보호를 받으며 이동중인 14번기 승무원들

포로가 된 8명의 조종사들은 당초 민간인을 살해한 전쟁범죄자로서 모두 사형판결을 받았지만, 덴노와 도조 히데키, 아돌프 히틀러 등이 자국포로에 대한 보복행위를 우려하는 뜻을 내비치며 최종적으로는 3명만이 처형되었다. 나머지는 종신형을 받고 베이징 포로 수용소에 수감, 그중 1명이 사망해서 결국 최종적으로 송환된 건 4명이었다. 또한 처형당한 3명의 포로의 시신은 화장후 적십자를 거쳐 미국에 인도했다.

한편 폭격 후 엔진 이상으로 소련으로 날아간 1기는 조종사들은 나중에 미국으로 탈출했지만, 기체는 소련이 압류하여 항공기 개발에 이용했다. 나머지 모든 둘리틀 특공대 기체는 중국에 추락하였고 중국인들의 도움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아무리 무모한 작전이라도 적지 한복판에서 비행기를 버리고 낙하산 탈출하면 살아남을 가능성이 0%에 육박하기 때문에 중국측의 반대를 어르고 달래서 폭격기들이 중국에 착륙할 수 있도록 허락받은 후에 작전을 시행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측의 우려대로 일본군은 중국인들을 상대로 분풀이를 열심히 했다. 그 보복으로 중국의 비행장을 공격하고 중국인들을 학살하여 상당히 많은 중국인들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때문에 둘리틀 특공대의 폭격기 착륙을 중국측이 대국적인 견지에서 허락하지 않아서 폭격계획이 무산되었다면 미드웨이 해전은 아예 없어졌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 중국에서 많이 나오고 있다. 이는 대륙과 대만 모두에게서 나온다.

여담으로 이 폭격에서 미군은 1908년 미 해군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받은 훈장폭탄과 함께 돌려주게 된다. 즉, 같이 떨어트렸다. 1940년대 당시 미국의 해군장관 프랭크 녹스가 보내왔다고. 영화 진주만에서도 폭격 직전에 폭탄창의 문이 열리면서 신관 앞부분에 묶어놓은 훈장이 바람에 흔들리는 장면으로 이 일화를 재현했다.

참고로, 둘리틀 공습에 참가한 대원은 총 80명 이었으며.

  • 1명은 불시착하던 비행기에서 탈출하다 사망.
  • 2명은 비행기가 바다에 떨어지면서 익사.
  • 5명은 그들이 탄 8호기가 소련영토에 착륙. 기체는 압수당하고, 5명은 억류자 수용소행. 13개월 후에 탈출하여 이란으로 망명 성공함.
미국과 소련이 당시에는 동맹국이었지만 소련과 일본이 중립국이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억류자로 분류된다. 정확하게 말해서는 이란의 억류자 수용소로 이송한 후에 거기서 이란 주둔 영국 육군 주둔지 근처에서 풀어준 것. 비행사들은 걸어서 영국 점령지대로 돌아가면 되었다. 그러면 서류상으로는 억류자 5명 수용소에서 탈출로 처리. 소련에서 잡혔는데 왜 이란인가 하면 랜드리스 물자의 이동 문제로 이란을 영국과 소련이 분할 점령하던 시기였다. 즉 영국령으로 송환하기 위해서 일부러 가까운 이란으로 이송한 것이다.
  • 8명은 일본군에게 붙잡혔다. 그들 중 3명은 총살. 5명은 포로수용소행. 그중 1명은 병으로 사망. 나머지는 종전때까지 수감.
  • 64명은 중국인들로 인해 보호받고 생존. 중국인 대부분은 일반인들.
  • 살아남은 공습 대원중 4명은 나중에 독일군의 포로가 됨.
  • 다른 13명은 2차대전중 전사.

2016년, 미 공군은 B-2의 뒤를 잇는 차세대 스텔스 전략폭격기 B-21에 Raider라는 명칭을 부여하며, 둘리틀 특공대에서 따온 명명이라고 밝혔다.

6 매체에서의 등장

영화 진주만의 후반부가 바로 둘리툴 특공대의 작전을 다루고 있다. 단 많은 부분이 영화적으로 각색되었다. 이를테면 불시착 후 미 육군 승무원들이 일본 육군과 총격전을 벌이는 부분은 완벽한 픽션.

루이스 마일스톤의 미국 전시 선전영화인 퍼플 하트가 여기서 생포된 조종사들의 영웅적인 투쟁기를 다루고 있다.

동경 상공 30초(Thirty Seconds over Tokyo)라는 전시선전 영화 역시 이 사건을 정면으로 다룬다. 일부 필름은 영화 미드웨이에 삽입되었고(앞부분에 나오는 빨간 화면의 특촬이 바로 그 작품이다.) 영화 진주만에서 폭격장면의 일부 화면 구성이 이 영화를 그대로 따랐다.[7]

감벽의 함대에서는 하와이가 함락된 상태의[8] 미국이 B-36을 실전배치해서 1942년 1월에 100여대로 동경공습을 감행한다. 작중 환생한 다카노 이소로쿠 제독의 대사에도 둘리틀 사건이 언급된다. 당연히 작품이 작품이니까 B-36은 일본에서 먼저 개발된 요격기 슈스이에게 개발살난다.

일본의 3차 진주만 공격 강행으로 하와이가 일본에게 점령된 해리 터틀도브의 대체역사물 Days of Infamy에서는 둘리틀 공습이 하와이를 목표로 진행된다. 하와이 해전 초반에 미 해군 항모 전단이 날라가는 바람에(...) 폭격기는 미 본토에서 출격해서 폭격후 그냥 바다에 빠지고 조종사들만 기다리는 구축함이 건져주는 스토리다. 한마디로 개그지만 작중에서 이 폭격을 교훈으로 해서 미국은 하와이 주변의 무인도에 기습상륙해서 몰래 B-17을 수용할 수 있는 비행장을 만들게 된다. 그리고 이런 전법으로 하와이 탈환전을 성공시킨다.

미국의 SF드라마 Space Above And Beyond(국내에서는 '스페이스2063'이라는 이름으로 방영되었다.)에도 둘리틀 특공대를 모티브로 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교전 중 우연히 나포된 외계인 우주선의 조작법을 익혀서 외계인 본거지를 습격하는 내용인데, 대놓고 작전 기획하면서 둘리틀 특공대처럼 아군의 사기 진작을 위해 자살에 가까운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대사가 나온다.
  1. 이 작전은 국민들의 사기를 증진시키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했으며, 중국과 협상해서 파일럿들이 생환할 루트를 확보해두었다. 실제로 사망자 수도 작전 난이도에 비해 얼마 안된다. 작전 난이도가 일반 파일럿은 감당하기 힘들만큼 높기는 하지만, 파일럿을 소모품 취급한 것은 아닌 셈이다.
  2. 히스토리 채널, <배틀 360>, 출격! USS 엔터프라이즈
  3. 당시 일본은 어선들을 징발, 선원들 외에 해군 하사관 1명과 무전기 1대를 배치해 연안 감시 임무를 맡겼다.
  4. 만일 작전의 실체를 알았더라면 호위 전투기도 없고 마개조로 빈약한 무장을 지녔던 둘리틀 특공대는 일본 본토 상공에 도착하기도 전에 전부 요격당했을 것이다.
  5. 육군항공대가 운용하는 1식 육공 G4M으로 오인했다는 설도 유력.
  6. 손을 흔들어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7. 심슨가족의 한 에피소드의 제목이 이 영화의 제목을 패러디한 "Thirty Minutes over Tokyo"다. 시즌 10의 23화. 심슨가족이 졸지에 일본 도쿄로 여행을 가서 바보스러운 짓들을 해대는 에피소드인데, 그 백미는 호머 심슨이 아키히토 덴노를 집어던지는(...) 부분. 당연히도 이 에피소드는 일본에서 방영되지 못했다.
  8. 실제로는 이것부터가 현실성 없다. 그때 하와이는 미국이 점령하려 해도 못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