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홀시

미합중국 해군 4 원수
체스터 니미츠어니스트 킹윌리엄 홀시윌리엄 리히


쪽발이놈들아, 지금 잠이 오냐?


▲ 컬러 사진.

1 개요

이름William Frederick Halsey[1] Jr.,
(윌리엄 프레드릭 홀시 주니어)
출생1882년 10월 30일, 미국 뉴저지
사망1959년 8월 16일, 미국 뉴욕 피셔아일랜드
복무미합중국 해군(1904–1959)
최종 계급해군 원수
주요 이력미 해군 제3함대 사령관
주요 참전제1차 세계대전
과달카날 해전
레이테 만 해전
주요 서훈해군 십자장
아시아-태평양 전역 메달
제2차 세계대전 승전 메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합중국 해군제독으로 최종 계급은 원수. 별명이 황소(Bull), 쪽바리 킬러[2]였다. 체스터 니미츠, 어니스트 킹, 윌리엄 리히와 함께 미 해군 역사상 단 4명만 배출된 해군 원수 중 한 명이다.

2 일생

2.1 생도 시절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아버지가 동명이인이고 해군 대령까지 지냈던 인물인데, 홀시와 체스터 니미츠가 사관생도였던 시절에 중령이었던 아버지가 해사 항해학부 부장으로 근무했다보니 홀시와 니미츠가 홀시 시니어에게 함상 훈련을 받기도 했다.

2.2 제2차 세계대전 이전

행정상의 이유로 소위에서 중위로 진급하자마자 바로 대위까지 진급(사실상 중위 계급을 스킵)해 버린 독특한 전력이 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에는 대서양 함대의 어뢰 전대를 지휘하기도 하였으며, 여러 어뢰정과 구축함을 지휘하면서 이미 상당한 공훈을 세운 인물이었다.

이후 구축함 전단을 지휘하다가 1930년대 중반에 해전대학(Naval war college)과정과 비행사 훈련을 거친 뒤 항공모함 함장을 역임하였으며, 이후 소장으로 승진한 뒤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지휘하였다.[3] 그리고 진주만 공습 이전에는 중장으로 태평양 함대에 배속되어 있었으며, CV-6 엔터프라이즈를 중심으로 한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2.3 제2차 세계대전

진주만 공습부터 미드웨이 해전 사이에 있었던 주요 항공모함 작전의 야전 사령관은 홀시 제독이었다. 하지만 미드웨이 해전 직전에 풍토병을 얻는 바람에 장기간 요양을 해야했고, 그 후임으로 엔터프라이즈 기동부대를 지휘했던 사람이 훗날 홀시 제독과 함께 태평양 함대의 야전 지휘관으로 활약하는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이다.

과달카날 전투 중반에 완전히 회복되었으며, 원래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지휘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당시 과달카날 전투에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남서태평양 방면 해군 사령관 곰리 제독이 워낙 소극적인 지휘를 하고 있었던 까닭에 덜컥 교체를 해 버림으로써 남서태평양 방면 해군 사령관으로 부임하였다. 당시 이 소식을 들은 남서태평양 방면의 해군과 해병대원들 모두 환호했다고 하며, 이후 적극적인 지원을 하여 과달카날 해전에서 최종적인 승리를 얻는데 일조를 하였다.

이후 남태평양 방면군의 해군 부대를 중심으로 미 제3함대[4]가 창설되자 초대 사령관(당시 대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그리고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는 남서태평양 방면군[5][6]과 긴밀한 협력 하에 수레바퀴 작전(Operation Cartwheel)[7]에 참여하였다.

남태평양의 주요 섬들이 정리된 후로는 딱히 굵직한 전투가 없었는데, 그 때문에 홀시 제독의 능력을 묵혀 두기 아깝다고 판단한 태평양 함대는 전투 부대의 지휘관을 스프루언스 제독과 홀시 제독이 1년씩 번갈아가면서 지휘하도록 조치하였다. 이 때문에 홀시 제독이 지휘하는 동안은 3함대, 스프루언스 제독이 지휘하는 동안은 5함대로 불리면서 사실 부대원은 바뀌지 않은 해괴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레이테 만 해전 당시 일본군 해군 오자와 지사부로의 유인 작전에 낚여서 주력 부대를 끌고 추적하는 바람에 상륙 부대가 털릴 뻔한 적도 있으며, 이후에 태풍이 몰아치고 있는데도 별다른 대처를 안 했다가 함대가 큰 피해를 입어서 군법 회의에 소환되어 강제로 퇴역될 뻔한 적도 있는, 다소 안습한 이력도 남아 있다(…)[8].

이후 일본 침공 직전에 스프루언스 제독과 교대를 하였다가, 다시 귀환하여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함대를 지휘하였다. 참고로 일본이 항복문서를 서명한 전함 미주리가 바로 홀시 제독의 기함이다.

2.4 전쟁 이후

일본의 항복 후 항복 조인식에 참석한 홀시 제독은 그 후 10월 25일에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서 퇴역신청을 냈는데, 오히려 트루먼 대통령은 4일 후에 그를 원수로 추대했다. 원래 원수로 추대되는 것은 전쟁 중에 이미 결정이 난 상태지만 동일한 함대를 교대로 지휘하면서 아직 대장계급인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의 문제 등이 있어서 미루어진 것이었다. 그래서 홀시는 1947년에 퇴역했다. 그 후 홀시는 정부 임원과 여러 회사의 중역을 거치다가 1957년에 뇌졸중으로 모든 직함에서 물러났는데 1959년 8월 16일, 자택에서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다. 홀시의 장례는 국장으로 진행되어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혔다.

3 평가

"머리가 나쁘다"

- 미합중국 함대 총사령관 겸 해군참모총장 어니스트 킹(Ernest Joseph King)[9]

근데 이 양반이 스프루언스에 대해 평가한 걸 생각하면 안습

레이테에서 낚인 일화[10]와 태풍 크리가 워낙 유명해서 그렇지 실제론 상당한 기간 동안 기동부대를 이끌어온 베테랑[11]이었으며 둘리틀 특공대, 산타크루즈 해전, 과달카날 해전, 시부얀 해전, 구레 군항 공습 등 다양한 전투에서 기동부대를 지휘한 지휘관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는 여러모로 레이먼드 스프루언스처럼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인물보다는 장기적인 안목이 필요한 자리나 오히려 인간적인 면모로 사람들을 끌어 모을 수 있는 자리에 적합한 인물이라는 평가가 많다. 실제로 그가 이끈 함대의 승무원 대다수가 레이테 만 해전 당시 오자와에게 낚여 즈이카쿠를 잡으러 갔을 때 그의 심정은 이해한다고 말했다. 또한 과달카날에서도 그가 부임해 온다는 소식을 듣자 장병들이 환호했었을 정도. 하지만 그 함대 장병들도 행동은 부적절했다는 것은 인정했다.

물론 고위 제독으로써 역량이 부족한 것은 아니기에 남태평양 해역군 사령관 재직 시절 수레바퀴 작전을 이끈 홀시는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해줬는데. 흔히 알려져 있던 불같은 성미와는 전혀 다르게 전술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와 그렇치 않는 곳을 잘 가려냈다. 또한 육군을 제외한 미군의 타 군종과 호주 같은 타군을 깔보았던 맥아더 장군과 달리, 특유의 친화력을 잘 살린 지휘 덕분에 휘하 육군과 해병대 장성들과의 마찰도 없었고, 같은 해군의 마크 미처 제독과 켈리 터너 제독 같은 실력 좋으면서도 성격이 정 반대인 제독들을 마찰없이 지휘를 하며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나중엔 해군을 무시하던 맥아더 장군과도 거의 절친에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전체적으로 명장이고 용장이긴 하지만, 감정적인 성격이 강한 데다 같이 싸운 동료 중 하나가 태평양 전쟁 불패의 명장 스프루언스 제독이고 레이테에서 낚인 것이 커서 평가가 많이 깎인다.스프루언스 : 똑똑해서 죄송합니다 선배님[12]

4 유명한 일화들

  • 체스터 니미츠 제독이 태평양함대 사령관으로 부임하고 항공모함을 투입한 첫 작전을 입안했을 때, 항공 관계 쪽 지휘관들이 크게 들고 일어났던 적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니미츠 제독은 항공 보직쪽에서 근무한 적이 없으며, 수많은 선배들을 재끼고 소장에서 바로 대장으로 승진한 새까만 후배[13]인 데다가 똑같이 새까만 후배였던 허즈밴드 킴멜 제독이 말아먹은 태평양 함대를 니미츠가 더 말아 먹을까 봐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작전에 나갔던 홀시 제독이 돌아와서 회의에 참석하였는데, 돌아가는 꼬라지에 꼭지 돌아서 대성 일갈하고 작전을 지지함으로써 반대파들을 버로우하게 만들었다.[14]
  • 기자들이 일본군을 상대할 때 어떤 자세로 지휘를 하느냐고 질문을 하였는데, 다소 엄하게 노려보는 자세를 취하였다. 근데 사진에 촬영된 그 모습이 황소와 같다고 하여 이후 황소(Bull)란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런 별명에 어울리는 화끈한 성격의 소유자였는데, 그의 명언들로 알려진 이야기들, 그리고 이 항목에 소개된 일화들에서도 그렇긴 하지만 행동도 과격해서 머리 위로 일본의 폭격기가 지나가는데 함교 위로 올라가 욕을 하기도 했다.
  • 홀시 제독이 작전을 나가기 직전 사령부에서 제13기동부대란 번호를 부여받았다. 게다가 작전을 위한 출항일까지도 13일. 서양에서 불길한 숫자로 받아들여지던 13을 두 개나 받자 홀시 제독은 심기가 불편하였고, 유능한 참모장이었지만 성질이 좀 개떡같았던 브라우닝 중령을 사령부에 보내 온갖 진상을 부리게 함(!)으로써 결국 출항일을 하루 미루고, 제16기동부대란 번호를 새로 부여받았다. 그후 제16기동부대는 이후 엔터프라이즈 부대의 상징적인 번호로 자리잡게 되었다.
  • 진주만 공습을 날린 일본을 매우 싫어해 일본을 비하하는 발언은 많이 했지만 일본계를 비롯한 동양계 미군 장병들에게는 매우 관대했다고 한다. 동양계 수병이 괴롭힘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는 '그 녀석은 선량한 미국의 국민이자 우리 군의 수병이다. 한 번만 더 그랬다간 피곤죽으로 만들어 버릴 테다.'라며 길길이 날뛰기도 했다고. 그밖에도 부하들을 소중히 여기는 인간적인 에피소드가 많아 부하들에게 굉장히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일개 수병조차 '그 할아버지를 위해서라면 몇 번이든지 목숨을 바칠 수 있다'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
  • 과달카날 전역이 후끈하게 달아올랐을 때, 니미츠 제독이 잠시 말라리아에 걸려 입원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 홀시 제독이 "니미츠가 와병 중이라 근무를 할 수 없으니, 현재 태평양에서 내가 니미츠 다음으로 유일한 사성 제독이니 잠정적인 태평양함대 사령관"이라면서 나설까 봐 두려워서 태평양함대 사령부의 사성제독 깃발을 계속 게양했다고 한다(…). 조금 오지랖이 넓은 분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깃발을 계속 게양하도록 지시한 사람은 당시 태평양함대 참모장인 스프루언스 제독이었다(…).
  • 원래 1944년 겨울에 미 의회가 해군 제독 네 명의 원수 승진을 승인했었으며, 그 대상자에는 홀시 제독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만 동격의 5함대 사령관인 스프루언스 제독이 대장인데, 3함대 사령관인 홀시 제독을 원수로 승진시키기가 좀 그렇다는 의견으로 인해 승진 추천이 보류되었다는 뒷 이야기가 있다.
  • 대만 항공전 이후 일본군이 "대규모 공격으로 미 제3함대에 큰 피해를 주었으며, 여러 척의 군함을 격침하였다"고 거짓발표정신승리를 하자, 홀시 제독은 즉시 니미츠 제독에게 "침몰당했다는 제3함대는 현재 해저에서 무사히 인양되어예토전생 적을 향해 급속 퇴각중"("The Third Fleet's sunken and damaged ships have been salvaged and are retiring at high speed toward the enemy.")이라고 보고하였다.
  • 3함대 사령관을 역임하는 동안 휘하에서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지휘했던 사람이 존 S. 매케인 Sr. 제독인데, 오바마 대통령의 상대였던 존 매케인의 할아버지되시는 분이다. 참고로 존 매케인의 아버지 존 S. 매케인 Jr. 제독도 월남전 당시 해군 대장으로 태평양사령관까지 올랐던 사람. 다만 홀시는 매케인 1세가 급사하는데에 큰 원인을 제공했다. 당시 매케인 제독은 상당한 고령에 건강도 좋지 않았는데도 해군의 주요 장성이라 직무 강도가 매우 높았고, 때문에 전쟁 기간 내내 수십 kg이 빠질 정도로 몸을 해쳤다. 매케인 1세는 일본이 항복하자 바로 군복 벗고 미국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홀시가 항복 조인식에 참석해 달라고 붙들어서 종전 이후에도 쉬지 못하다가 결국 본국으로 돌아간 지 얼마 안되어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 일본 방송에서 하도 전사설, 사망설을 보도해서 막상 일본 항복 조인식 때 중화민국 대표단은 홀시가 살아서 행사에 참석한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 전후 여생을 레이테 만 해전에서의 자신의 결정에 대해서 변명 해명하는 데 보냈다. 유명한 역사가들과의 논쟁은 아직도 말이 많았던 사항. 홀시는 기본적으로 그때 자신이 그 상황이라도 동일한 결정을 했을 거라고 했다. 다만 지나가는 말로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 때 자신이 있었고 레이테에서 스프루언스가 있었으면 좋았을거라는 말을 남겼다.[15]
  • 미드웨이 해전에서 크게 활약하여 두고두고 회자되는 엔터프라이즈 함상 비행대의 급강하 폭격기 조종사 딕 베스트 대위의 풀네임은 Richard Halsey Best였다(...)

5 대중매체에서의 홀시

  • 50년대 이미 세미 다큐 영화가 제작될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이때는 40년대 유명한 악역 전문배우(...) 제임스 커그니가 역을 맡았는데, 의외로 닮았다.
  • 영화 도라 도라 도라에서는 제임스 위트모어[16]가 홀시 역으로 출연했다. 앞 부분에 항모를 끌고 나가기 전에 잠깐, 진주만 공습 후에 파괴된 진주만으로 항모가 입항하는 장면에서 등장한다. 유명한 대사를 원래 상영분에서 하지만 일본과의 관계 때문에 이후 나온 매체에서는 이 부분이 삭제되어 있다.
  • 1976년작 영화 미드웨이에서는 로버트 미첨이 홀시 역을 맡았다. 실제와 같이 피부병에 걸려서 미드웨이에 안 나갔기 때문에 앞부분에 병원에서 이야기 하는 부분만 처리... 실제와 달리 스프루언스한테 "레이, 나한테 묻지 말고 자네 방식대로 하게."라며 전폭적인 신뢰를 보낸다.
  • 허만 우크의 Winds of War 미니시리즈에서는 거의 병풍...이다. 원작에서는 레이테 해전 부분에서 유명한 결정 때문에 꽤나 까이...지만[17] 드라마판에서는 그 부분이 많이 나오지 않아서 그냥 병풍..
  • 붉은 10월에서 잭 라이언이 홀시 관련 연구를 하는 역사가이다. 원작에서는 홀시의 전기를 쓰고 있다가 호출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고 홀시의 결정이 정당했다고 이전 책에 썼다... 소련에서 라이언의 책을 읽었던 라미우스가 "나도 당신이 쓴 책을 읽었소. 하지만 당신은 틀렸어. 그의 선택은 잘못된 거요. 홀시는 치명적인 오판을 했지.라고 이야기 하는 건 원작이나 영화나 다 묘사 된 장면.
  • 굽시니스트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선 '윌리엄 시'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황소라는 그의 별명답게 황소뿔을 달고 나온다. 또한 그 레이테 만 해전에서는 오자와에게 항모를 내놓으라며 투우를 건다. 그렇지만 태평양 전쟁의 다른 인물들처럼 비중은 공기 그 자체.
  • 일본 가공전기 만화 몽환의 전함 야마토에서는 주적으로 등장. 현대에서 타임슬립한 주인공 쿠루스의 활약에 빡친 나머지 쓰러진다.

6 명언

성격만큼이나 강렬하고 인상적인 말도 많이 남겼다. 아래는 그 말들.

"Before we're through with them, the Japanese language will be spoken only in hell."

'이 전쟁이 끝나면, 일본어는 지옥에서나 쓰는 언어가 될 것이다.' [18][19]

  • 진주만 공습 당시에 기동부대를 이끌고 진주만으로 오던 중이었는데 약간의 시간 차이[20]로 진주만 공습이 끝난 후에 도착해서 진주만의 참상을 보고 한 말[21].
"I'll take it! If anything gets in my way, we'll shoot first and argue afterwards."

"내가 책임지겠소! 내 앞길을 가로막는 게 있다면 일단 쏴 버리고, 언쟁은 그 나중의 일이오."

  • 진주만 공습 이후 기동부대를 이끌고 웨이크 섬으로 가려는 그를 허즈밴드 킴멜이 막으며 "자네 혼자 전쟁할 생각인가? 책임은 누가 지는데?"라고 하자 한 대답이다.
"Attack. repeat, Attack!"

"공격해라, 반복한다. 공격이다!"

"Hit hard, hit fast, hit often!"

"세게 치고, 빠르게 치고, 자주 쳐라!"

"Kill Japs, kill Japs, kill more Japs!"

"쪽발이들을 죽이고, 죽이고, 더 많이 죽이는 겁니다!"

halsey.jpg
  • 남서태평양 방면 사령관이 되고 과달카날 시찰에서 앞으로의 전략을 묻는 기자들에게 한 대답으로 이게 기사화된 이후로는 태평양 방면의 미군은 물론이고 미국 본토에서도 크게 유행하였다. 국내 웹에서도 홀시가 한 명언 하면 가장 많이 나오는 말.
"The Third Fleet's sunken and damaged ships have been salvaged and are retiring at high speed toward the enemy."

"침몰당했다는 제3함대는 현재 해저에서 무사히 인양되어 적을 향해 급속 퇴각중"

"There are no great people in this world, only great challenges which ordinary people rise to meet."

"세상에 위대한 사람은 없다. 오직 평범한 인물들의 위대한 도전이 있을 뿐이다."

  • 한국에서는 그렇게 유명하지는 않지만 홀시가 남긴 말이다. 임팩트가 부족해서 그렇지 홀시가 남긴 문구 중에는 가장 멋진 말. 브래디 제임스의 논픽션인 아버지의 깃발에도 기록되어 있다. 본인의 전공과 미국 국방을 위해 세운 위대한 업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7 진급 내역

  • 1906.02.02 : 소위(Ensign)
  • 1909.02.02 : 대위(Lieutenant)
  • 1916.08.29 : 소령(Lieutenant commander)
  • 1918.02.01 : 중령(Commander)
  • 1927.02.10 : 대령(Captain)
  • 1938.03.01 : 소장(Rear Admiral)
  • 1940.06.13 : 중장(Vice Admiral)
  • 1942.11.18 : 대장(Admiral)
  • 1945.12.11 : 원수(Fleet Admiral)
  1. 사람마다 읽는 방법이 다양해서 홀시 외에도 헐지, 할제이, 할시, 핼시 등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2. 이 별명은 과달카날 시찰에서 그가 앞으로의 전략을 묻는 기자들에게 한 "Kill japs, kill japs, KILL MORE JAPS!(쪽발이들을 죽이고, 죽이고, 더 많이 죽이는 겁니다!)" 라는 발언에서 온 것이다.
  3. 여담으로 그는 미 해군 내 최고령 비행사(52세에 취득!)면허 취득자였다. 그 과정에서 살이 30kg이나 빠졌다고...
  4. 남태평양 주둔 미국 해군에 번호 함대를 부여하여 제3함대로 개칭되었다. 홀시 제독의 경우 이미 42년 10월 남태평양해역군 사령관으로 전구사령관(통합군)이 되었으며 직책상으로 제3함대의 사령관도 겸직했다.
  5. 미국이 치른 태평양 전쟁은 크게 볼 때 맥아더 장군과 니미츠 제독이 각각 책임지는 두 곳의 전쟁 구역으로 나뉘어 각자의 통합군, 연합군을 지휘하여 전쟁이 진행되었으며 맥아더의 구역-동남아시아(+필리핀),뉴기니섬,오스트레일리아-를 제외한 나머지의 태평양 지역은 전부 니미츠의 구역이었다.
  6. 니미츠 제독이 관할하는 구역 자체도 무척 넓어서 다시 남태평양, 중태평양, 북태평양으로 나눠서 중부태평양은 직접 책임지고 나머지는 헐지 제독같은 부하 제독, 장군들을 책임자로 앉혀서 위임했다.
  7. 과달카날 전투 종료후 일본군의 전략거점인 라바울을 목표로 실행한 1943년 전 기간에 걸친 남태평양(맥아더,헐시)의 미군들이 벌인 공세전역작전, 홀시 제독의 미군은 중부, 북부 솔로몬제도의 주요 섬들을 점령했고 맥아더 장군의 미군은 북부 파푸아 지역을 장악, 뉴브리튼 섬 서부에 상륙했다. 1943년 후반 미군의 전략이 변경되면서(개구리 뛰기) 양쪽의 미군은 라바울을 포위한채 그 외곽 거점들만 점령하고 1944년 3월경 종결되었다.
  8. 홀시를 퇴역시키면 승리의 공이 모두 육군의 맥아더에게 돌아가 버린다는 해군의 내부 사정으로 인해 처벌은 받지 않았다.
  9. 사실 하단에서 서술한 것과 같이 킹 제독이 긍정적으로 평가한 사람은 별로 없다(...)
  10. 레이테에서 낚인 원인은 진주만 공습 당시 공습에 참가한 항공모함 중 한 척인 즈이카쿠 때문이다. 그러나 홀시가 낚시인 것을 알고 갔다는 의견도 설득력이 있다. 홀시는 진주만 공습에 가담했던 즈이카쿠를 잡기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릴 성격이었기 때문.
  11. 태평양 전쟁 초기부터 미드웨이 해전까지 기동부대를 지휘해 왔다.
  12. 스프루언스 제독에 관해 해군 사령관 어니스트 킹 제독이 한 유명한 말이 있다. "난 미합중국 해군에서 가장 똑똑하다. 스프루언스만 빼고 말이다."
  13. 일단 짬밥 순으로는 해사 1년 후배지만 니미츠는 고등학교를 마치지 않고 해사에 진학했기 때문에 동기들에 비해 나이가 어렸다.
  14. 이 내용은 홀시가 2차 대전 종전 후에 썼던 자서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참고로 이 시기에 좀 유명하다 싶은 장성들이 죄다 자서전을 써갈겨서 니미츠가 싫어했다고.
  15. 단 이 말을 했을 때만 해도 칠면조 사냥 때의 스프루언스의 행동에 대한 비판 여론이 존재했을 때이다. 전후 일본 기록의 조사 및 1980년대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스프루언스의 행동이 가장 적합한 행동이었다.
  16. 쇼생크 탈출의 브룩스 영감 역할을 맡았던 배우. 2009년 별세.
  17. 원작 자체가 대단히 스프루언스를 찬양한다.
  18. J. Bryan (1947). Admiral Halsey's Story. Whittlesey House. pp. 75–76. ISBN 978-1-4325-6693-7.
  19. '이 전쟁이 끝나면'이라고 번역된 것이지만 실제로 "Before we're through with them"은 "이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로 해석하는 게 정확하다. 몰락 작전이 계획대로 진행됐으면 진짜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일본어가 지옥에서나 쓰는 언어가 될 수도 있었다는 게 함정이지만.
  20. 하필 열대폭풍으로 인해 늦었다.
  21. 이때 홀시 제독의 기동함대에 소속된 항공모함 중 한 척이 후에 해전사의 전설을 만드는 요크타운급 항공모함 2번 함USS 엔터프라이즈.
  22. 여기서 참고할 것이 하나 있는데, 태평양 전쟁에서 격침당한 미군 항모는 10척도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