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카 하키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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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미카 파울리 해키넨(Mika Pauli Häkkinen)
국적핀란드
생년월일1968년 9월 28일
출생지반타
179cm
레이스165경기
월드 챔피언2회 (1998, 1999)
그랑프리 우승20회
포디움51회
폴포지션26회
패스티스트랩25회
첫 레이스1991년 미국 그랑프리
마지막 레이스2001년 일본 그랑프리
첫 그랑프리 우승1997년 유럽 그랑프리
마지막 그랑프리 우승2001년 미국 그랑프리
소속팀로터스 (1991~1992)
맥라렌 (1993~2001)
1998~99년 포뮬러 원 드라이버 월드 챔피언
1997 - 자크 빌르너브미카 해키넨2000 - 미하엘 슈마허

1 인적사항


풋내기들과 하키넨...

풀네임은 Mika Pauli Häkkinen으로 플라잉 핀의 대표적인 인물이자 대부분이 인정하는 미하엘 슈마허의 가장 강력했던 라이벌. 그리고 맥라렌의 암흑기와 영광을 함께한 (거의) 프랜차이즈 스타.

1968년 10월생으로 69년 1월 생이었던 슈마허와 그냥 같은 나이로 보면 된다. 실제로도 둘은 포뮬러3에서 종종 같이 달리기도 했으며 F1 데뷔년도도 1991년으로 같다.

5살때 카트를 시작하며 레이싱에 입문했고 핀란드 카트계를 그야말로 작살내면서 1982년도 F1 챔피언이었던 케케 로즈버그의 눈에 띄게 된다. 원조 플라잉 핀이자 핀란드인으로 처음 F1을 제패했던 로즈버그는 하키넨의 재능을 알아보며 그에게 물심 양면의 지원을 해준다. 이는 후일 하키넨이 키미 라이코넨을 지원해주는 모티브가 되었을지도...근데 정작 이 형은 F1에 대한 지원은 안하고 WRC 나가라고 지원했다

로즈버그의 지원 아래 포뮬러계로 들어오게 되었고 포뮬러 포드, F3 챔피언쉽 등에서 우승하며 차곡차곡 실력을 쌓아나갔다. 마침내 1991년 로터스에서 그를 영입하며 F1에 데뷔한다.

2 1991-1992 시즌


데뷔전이었던 1991 미국 GP

여차저차 데뷔는 하게 되었지만 로터스는 약체에 속하던 팀이라 포인트 내는 것도 버거웠다. 그래도 1991년 3라운드였던 산마리노 GP에서 25그리드(예선 25위)로 출발하여 5위로 피니쉬하는 깜짝 활약을 보이며 2점을 따내기도 했지만 그게 끝.[1] 더군다나 시즌 막바지에 영입되어 몇경기 안뛰고 4점을 따낸 슈마허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그냥 묻혔다...

1992시즌에는 더 나아진것도 없는 성능의 차로 무려 11점을 올리며 타 팀의 눈길을 끌게 된다.[2] 요즘으로 치면 올 시즌 Lotus-Renault의 차로 두어번 4위 피니쉬를 했다고 보면 된다.

1991년 2포인트 16위
1992년 11포인트 8위

3 1993-1997 시즌

1993년 맥라렌에서 테스트 드라이버[3]로 영입했다. 그래도 시즌 후반 자리가 생기며 3경기에 뛸 수 있었고 4점을 얻을수 있었다.

하지만 세나가 94년 윌리엄스로 이적을 하게 되어 얼떨결에 팀의 퍼스트 드라이버가 되었고 더불어 맥라렌의 암흑기가 이때부터 시작된다. 93년에 84점을 기록했던 팀 성적이 1년만에 42점으로 정확히 반토막이 난 것이다. 하키넨의 부진이라기보단 5차례나 고장으로 멈춰야 했던(충돌사고로 인한 것을 제외하면 시즌 절반이상을 고장으로 리타이어한 셈이다.) 그 해 맥라렌의 차가 좀 망작이었다. 전 해까지 쓰던 포드엔진에서 푸조엔진으로 교체를 했는데 대부분의 리타이어가 엔진블로우였다...그나마 하키넨이 리타이어 하지 않은 8경기중 6경기에서 포디움 피니쉬를 하며 꾸준히 포인트를 얻어 총 26점을 기록했다.

94년도에 푸조엔진으로 시즌을 망쳐버린 맥라렌에서는 95년에 엔진공급업체를 메르세데스로 바꾸어 재도약을 노리게 된다. 결과는? 망했어요...팀 득점은 30점으로 전 해보다 12점을 더 깎아 먹으며 부진의 나락에 빠지고 그 와중에 하키넨은 호주GP에서 생명이 위태로운 정도의 부상을 입게 된다.

시즌 최종전이었던 호주 GP 연습 주행중 타이어파편을 밟으면서 컨트롤을 잃고 방호벽을 들이 받았다. 의식을 잃고 피까지 토할 정도의 중상이었다. 다행히 의료진의 빠른 응급처치와 후송으로 의식을 찾긴했지만 이후 몇달간 아무것도 못한채 요양을 해야했다. 큰 후유증은 없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빠른 은퇴의 주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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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하키넨이 복귀 할 수 있을지, 복귀하더라도 사고의 트라우마로 제 기량을 잃은게 아닌지 하는 걱정의 시선들이 많았는데 하키넨은 테스트를 통해 아무 문제가 없음을 입증하며 팀에 돌아온다. 그리고 앞으로 맥라렌의 부흥을 함께하고 각종 어그로를 홀로 떠맡게되는 데이빗 쿨싸드를 팀메이트로 맞게 된다. 두번째 시즌에 들어온 메르세데스도 95년의 실패를 거울로 좀 더 개량된 엔진을 공급하며 맥라렌의 성적도 점차 상승곡선을 그리게 된다.(하지만 타팀의 성능은 더 굇수급이라 눈에 띄게 성적이 좋아지진 못했다.)

드디어 1997년 최종전이었던 유럽GP에서 생애 첫승을 거두게 된다. 여기에는 챔피언쉽을 다투던 쟈크 빌레너브를 들이받으며 같이 자폭한 슈마허의 삽질이 있었지만...여기까지만 보면 94-95년도 챔피언에 20승 넘게 기록하고 있던 슈마허와 데뷔 7년만에 겨우 첫승을 신고한 하키넨은 비교대상이 되지 못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1993년 4포인트 15위
1994년 26포인트 4위
1995년 17포인트 7위
1996년 31포인트 5위
1997년 27포인트 6위

4 1998 시즌

98시즌 규정에 큰 변화가 있었다. 차의 너비가 줄어들고 27년간 사용하던 슬릭타이어의 사용이 금지된 것(우천시에만 가능). 그 동안의 부진에 절치부심했던 맥라렌은 작정하고 엔지니어들을 굴리고 또 굴려 MP4/13이라는 명차를 완성시킨다. 시즌 전 여러팀에서 모여 시행한 테스트 주행에서 맥라렌 경주차는 다른 팀 관계자들이 경악할 기록을 보여주었다. 맥라렌 경주차의 월등한 성능이 입증되자 감독 론 데니스는 '둘(하키넨과 쿨싸드) 중 먼저 첫코너를 통과하는 사람에게 1위를 양보하자'는 협정을 제안하게 되고 선수들은 이에 동의한다.

시즌 개막전이었던 호주 GP 퀄리파잉에 하키넨이 1위, 쿨싸드가 2위를 차지했다. 결승레이스에서 하키넨이 첫코너를 먼저 통과하게 되었고 예상했던대로 맥라렌 듀오는 3위와 1바퀴차이를 벌리며 1-2위를 차지하게 된다. 경기 중간에 잘못된 교신으로 하키넨이 이유없이 피트에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는 바람에 2위로 떨어지기도 했었지만 약속대로 쿨싸드가 선두를 양보하여 우승할 수 있었다. 이에 페라리쪽에서 팀오더 아니나며 항의를 했었지만 기각됐다. 사실 예나 지금이나 팀오더는 (은연중에) 페라리가 더 많다...

맥라렌 경주차의 성능이 너무 압도적인지라 페라리(와 페라리가 꼬드긴 다른 팀들)에서는 맥라렌의 비대칭브레이크와 엔진출력재생장치등이 규정위반이라며 FIA에 항의 했지만 FIA에서는 규정밖의 문제로 항의할 꺼리가 아니라고 일축. 2009년 브라운GP가 디퓨저로 대박친 상황과 비슷했다. 그렇지만 디퓨저같이 금새 따라 할 물건들이 아니었던지라 페라리에서는 성능을 게임플랜을 통해 따라잡기로 방향을 잡게 된다.

그래서 채택한것이 2스톱작전과 광폭타이어였다. 최대한 연료를 적게 넣어 가볍게 하고 타이어의 그립은 최대로 살려서 맥라렌 경주차와 비등하게 싸워보자는 전략은 주효한다. 다만 퀄리파잉은 모든 팀이 연료를 적게 넣고 달리기 때문에 시즌 개막후 9전 연속 폴포지션은 맥라렌의 차지였다. 시즌 중반까지 하키넨이 앞서가고 슈마허가 뒤쫓는 형태로 경쟁이 지속된다.

12전까지 하키넨 77점 슈마허 70점

그리고 승부의 분수령이 된 13전 1998 벨기에 GP가 개최된다.


시작부터 대형사고로 레드 플래그가 뜨고 1시간만에 재개된 경기에서 하키넨은 첫코너에서 스핀이후 다른 차에 들이 받히며 한바퀴도 못 돌고 리타이어한다. 남아서 슈마허를 견제해야할 쿨싸드도 사고로 피트에 들어왔다가 꼴지로 복귀한다. 맥라렌이 그렇게 헤매는 사이에 비에 강한 슈마허는 1위로 나서며 우승을 예약한듯 했지만...


백마커였던 쿨싸드와 선두로 달리던 슈마허가 충돌하며 슈마허 리타이어. 열받은 슈마허는 맥라렌 피트로 달려가 쿨싸드를 찾아 현피를 뜨려했지만 쿨싸드는 꿋꿋히 살아남아 레이스를 완주했다...맥라렌은 슈마허가 무리하게 백마커를 추월하려다 일어난 사고라 주장했는데 판단은 알아서. 이 사고로 인해 슈마허는 거저 먹을 수 있었던 10점을 잃었고 쿨싸드는 티포시들에게 평생까임권 획득과 동시에 다음에 벌어질 (페라리의 홈 그라운드인)이탈리아 GP에서 살해 협박까지 받게 된다. 팬들의 난동을 우려한 FIA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둘을 데려와 화해를 시키는데 서로 아무 말없이 악수를 하는것으로 상황을 종료...되었을리가 없고 슈마허와 쿨싸드는 그 후로도 계속 앙숙관계로 지냈다. 반면에 하키넨은 반대급부로 슈마허와 라이벌 플래그를 세우기 시작한다.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벌어진 14전 이탈리아 GP에서 슈마허가 우승, 하키넨은 4위를 차지하며 결국 80점 동률을 이루게 된다. 남은 경기는 룩셈부르크GP와 일본 GP 둘.

15전 룩셈부르크GP 예선에서 의외로 슈마허가 폴 포지션을 차지하게 되었고 하키넨은 3위에 머물렀다. 하지만 결승에서 2위였던 어바인(페라리)이 하키넨을 막아주는 사이 슈마허가 치고 나가 기선을 제압한다는 페라리의 작전은 초반부터 강공에 나선 하키넨의 질주에 무너졌다. 14바퀴째에 하키넨은 어바인을 제쳐내며 2위로 올라섰고 그때까지 선두였던 슈마허가 24바퀴째에서 피트인, 5위로 트랙에 복귀한다. 하지만 4위 차에 막혀 버벅대던 사이 28바퀴째에 하키넨이 피트인을 했고 슈마허보다 앞서 트랙에 복귀하며 선두가 된다. 그대로 경기가 끝나면서 하키넨은 90점 슈마허가 86점인 상황에서 최종전 일본 GP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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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최종전은 싱겁게 끝난다. 슈마허가 폴포지션을 잡고 하키넨이 2번그리드를 차지한 결승레이스에서 슈마허가 엔진을 꺼트리며 스타트에 실패, 맨 뒤에서 다시 출발하게 된 것이다. 그래도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며 티포시들은 기대했지만 경기 중반 슈마허가 파편을 밟고 펑크가 나면서 리타이어, 하키넨이 생애 첫 챔피언자리에 오르게 된다.

1998년 100포인트 1위

5 1999 시즌

98년 막바지까지 치열했던 하키넨과 슈마허의 대결로 인해 이번 시즌도 비슷하게 가려니 했던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개막전 호주GP는 슈마허의 팀 동료 어바인이 우승하며 혼전의 서막을 알린다. 하키넨과 쿨싸드가 예선에서 원투를 차지했지만 결승에서 모두 고장으로 리타이어하며 멕라렌 경주차는 빠른데 불안정하다는 인식을 이때부터 심어간다. 2전이었던 브라질GP에서도 기어박스가 고장나며 리타이어할 뻔하지만 기적같이 기어가 살아나 시즌 첫승을 할 수 있었다. 같은 차를 몰았던 쿨싸드는 끝내 기어박스 고장으로 리타이어. 이런식으로 하키넨은 불안정한 경주차를 잘 컨트롤해서 꾸준히 점수를 쌓아나갔지만 쿨싸드는 머신에 적응을 못한듯 자주 고장으로 리타이어하게 된다. 이러다보니 하키넨은 페라리의 슈마허-어바인 듀오를 혼자 상대해야 할 상황에 놓이는데...

8전 영국GP에서 슈마허는 정강이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하며 경쟁에서 리타이어한다.

이때까지 점수가 어바인 40점 하키넨 32점 슈마허 32점 H.H.프렌첸 26점 쿨싸드 22점 랄프 슈마허 19점으로 시즌 절반이 지난 시점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낮은 득점이었다. 슈마허의 이탈에 중위권 드라이버들까지 우승 한번으로 챔피언을 넘볼수 있을 정도로 혼전이 심해졌다. 일단 어바인과 하키넨의 대결로 압축은 되었는데 이 와중에 맥라렌은 팀 내 자유경쟁을 선언하며 쿨싸드가 맘껏 챔피언 경쟁에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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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앙 내가 리타이어라니 ㅠㅠ
뒤에 벌어진 경기들에서도 어바인-하키넨-쿨싸드-프렌첸 등이 고루 1승씩 챙겨가면서 혼전양상은 계속 이어진다. 13전 이탈리아GP에서 폴포지션을 따내 결승에서도 줄곧 선두로 달리던 하키넨은 마지막 코너에서 스핀하며 리타이어했고 경주차에서 나와 자신의 실수를 자책하며 울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갭 모에? 이 경기에서 이겼으면 하키넨이 경쟁에서 치고 나올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렇지 못했기에 3경기 남은 상황에서 점수가

하키넨 60점 어바인 60점 프렌첸 50점 쿨싸드 48점 이 된다.

그러나 14전 유럽GP에서 폭우 덕분에 하키넨은 5위로 2점을 얻는데 그쳤고 어바인은 7위로 1점도 못얻으며 당최 승부를 예측할 수 없게 만든다. 이에 현기증이 나기 시작한 페라리에서는 하라는 휴양은 안하고 열심히 축구를 하고 있던(...) 슈마허를 해결사로 불러들인다.

15전 말레이시아 GP로 복귀한 슈마허는 3개월의 공백이 무색하게 어바인-하키넨-쿨싸드를 제치고 폴포지션을 차지한다. 그리고 결승에서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전략을 보이게 되는데...

결승레이스 당일 연료를 풀로 채워 1스탑작전을 노리면서 타이어는 엑스트라 소프트(지금의 슈퍼 소프트라 보면 된다.) 골라 나온것. 처음부터 1위에는 안중에 없었던 슈마허는 4바퀴째에서 어바인을 선두로 내보낸 뒤 하키넨-쿨싸드를 상대로 장판파를 시전한다. 철저히 타이어 관리를 하며 버텨내는 슈마허의 완벽한 방어에 똑같이 1스톱작전을 세웠지만 하드타이어를 끼고 나왔던 하키넨은 피트스탑에서 승부를 보기로 결정, 페이스를 늦춘채 피트인을 준비한다. 그런데 연료를 다 채우지도 못하고 출발해버리는 바람에 생각치도 못한 피트스탑을 한번 더 해야했고 그것이 승부를 결정지었다. 우승은 어바인, 2위 슈마허, 3위를 하키넨이 가져가게 되었다. 그리고 점수는 어바인 70점 하키넨이 66점이 되어 최종전 일본 GP에서 챔피언이 가려지나 했는데...

경기 후 페라리 차에서 규정위반이 발견되어 두 선수 모두 실격되는 일이 발생한다.

하키넨 72점 어바인 60점이 되어서 하키넨이 최종전에 상관없이 챔피언 확정이 되는듯 했으나...

페라리의 항소가 받아들여져서 실격취소와 함께 도로 어바인 70점 하키넨이 66점이 된다. 그냥 삽질

F1 규정상 동점이 되면 우승횟수가 더 많은 사람이 이기게 되어 있다. 이에 따라 우승 횟수가 더 많던 하키넨은 최종전에서 1위를 차지하게 되면 어바인이 2위를 차지하더라도 같이 76점이 되어서 자력으로 챔피언이 될 수 있었다. 역으로 페라리에서는 하키넨의 1위만 막아내면 어바인이 4위만 하더라도 챔피언이 될 수 있었으므로 슈마허를 1위로 만드는데 온 힘을 기울이게 된다.뭔가 이상하지만 일단 넘어가자.

최종전 일본 GP 예선에서 페라리의 목표대로 슈마허가 하키넨을 2위로 제치고 폴포지션을 차지하는데 성공하지만 정작 어바인이 5위로 출발하게 되는 난감한 상황이 되고 만다. 저래서 어바인 1위 만드는걸 포기하고 슈마허를 민 것일지도... 게다가 어바인 앞에는 쿨싸드가 자리잡으며 이래저래 맥라렌이 유리한 상황이 된다.

결승전. 하키넨은 환상적인 스타트로 슈마허를 제치며 선두로 나서고 슈마허와의 간격을 벌려 나간다. 어바인도 쿨싸드를 추월하며 4위로 오르기는 했지만 쿨싸드의 재반격에 시달리느라 3위 공략은 엄두도 못내고 방어에만 급급한 상황. 결국 페라리에서 믿을건 슈마허가 하키넨을 추월하는 것 밖엔 없었다.누구를 챔피언 만들려고 죽어라 달리던 누구랑 같은 상황 중간에 있던 파니스가 리타이어 하며 순위는 하키넨-슈마허-어바인-쿨싸드 순서가 된다.

1차 피트스탑에서 어바인은 쿨싸드에게 추월을 허용하며 다시 4위로 떨어진다. 하키넨과 슈마허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상황. 이 때 3위로 달리던 쿨싸드가 4위 어바인을 막다가 실수로 노즈가 망가지게 된다. 속력이 떨어진 차를 몰고 어렵게 피트로 돌아가던 쿨싸드 뒤에 슈마허가 다가 왔다. 여기서 백마커가 된 쿨싸드는 교묘하게 슈마허를 방해하며 좁혀지지 않던 차이를 더 벌려버리는 큰 전과를 세우게 된다.(...) 경기 후 기자회견장에서 슈마허는 다시 쿨싸드와 현피를 시도했지만 사람들이 뜯어말려서 실패. 사실 저 방어가 없었더라도 하키넨이 워낙 빨라서 슈마허의 추월은 어려웠을것이라는게 중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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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하키넨은 체커기와 함께 2년 연속 챔피언 자리에 오르게 된다. 특히 1999년은 한시즌 16전, 10-6-4-3-2-1 점수제가 도입된 이래 가장 적은 점수로 챔피언이 결정난 대혼전속에서 따낸 것이었다.[4]

1999년 76포인트 1위

6 2000 시즌

시즌 초반부터 맥라렌의 경주차는 '빠른데 불안정하다'라는 공식을 확실하게 각인 시켰다. 하키넨은 초반 3경기에서 연속 폴포지션을 차지했지만 고장으로 2번이나 리타이어했고 나머지 한번도 슈마허에게 역전을 허용하며 순식간에 20점 넘게 포인트가 차이나게 된다.

스페인 GP에서 시즌 첫승을 기록하며 잠시 숨을 돌리기는 했지만 이후로도 부진과 고장은 계속 이어져서 시즌 절반이 지날때까지 포인트가

슈마허 5승 56점 하키넨 1승 32점

에서 볼수 있듯 챔피언쉽경쟁이 무의미해질만큼 밀려버린다.

하지만 후반기의 시작이었던 프랑스 GP를 시작으로 오스트리아 GP, 독일 GP 3전 연속으로 슈마허가 리타이어를 하게 되고, 하키넨은 착실히 점수를 따라붙어 슈마허 56점 하키넨 54점까지 추격하게 된다.

그리고 시즌 12전 헝가리 GP에서 슈마허를 2위로 밀어내고 우승을 하며 처음으로 챔피언쉽 선두로 나섰다. 다음 대회였던 벨기에 GP에서 하키넨은 슈마허와의 대결에서 최고의 명장면을 만들어낸다.

원스탑 작전으로 나온 슈마허를 투스탑작전으로 나왔던 하키넨이 두번째 피트스탑 이후 맹추격을 하게된다. 타이어 상태가 슈마허보다 나은 하키넨은 매랩 격차를 좁히며 추격을 했고 5바퀴 남은 상황에서 슈마허와의 거리를 사정권까지 좁혔다. 하지만 슈마허도 강력하게 저항하며 자리를 내주지 않았고 하키넨도 쉽게 파고들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두 사람앞에 백마커 히카르도 존타가 나타나는데...


여기서 하키넨은 F1역사에서 최고의 추월중 하나로 꼽히는 순간을 만들어내며 역전에 성공,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점수도 하키넨 74점 슈마허 68점이 되며 기세를 타는가 싶었지만

이 대결에서 모든 힘을 쏟아낸 하키넨은 이어지는 4경기에서 거짓말처럼 참패를 당하며 슈마허에게 챔피언을 내주게 된다. 슈마허에겐 5연속 챔피언이 되는 시발점이요 하키넨에게는 너무나도 허무한 결과였다.

2000년 89포인트 2위

7 2001시즌과 은퇴선언

2001시즌 페라리의 경주차는 맥라렌의 성능을 넘어서게 되고 윌리엄즈마저 페라리-맥라렌의 양강구도에 맞설정도로 성장하게 되지만 맥라렌의 경주차는 첫경기부터 서스펜션이 나가면서 유리몸을 증명했다. 브라질에선 스타트 그리드에서 출발조차도 못하는 부실함마저 보여주며 초반 4경기동안 하키넨의 점수가 고작 4점이라는 믿지 못할 상황까지 몰렸다.(2차례 리타이어. 4위 1번, 6위 1번)

그러던 5전 스페인 GP에서 하키넨은 간만에 부활의 모습을 보이며 경기내내 선두로 달렸고 슈마허를 반바퀴 이상 따돌리며 지난해 벨기에 GP이후 처음으로 승수를 추가하나 싶었는데


마지막 랩에서 터졌다...하키넨 불운의 정점.

그리고 시즌 중반 하키넨은 은퇴선언을 하게 된다. 이유는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여자친구였던 아내 엘자가 95년 부상때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으며 간호를 해주는 것을 보며 사고에 대한 부담감이 생겼었고 2000년에 아들 휴고가 태어나면서 은퇴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이유가 저렇다보니 사람들은 '몸이 근질거리면 복귀할지도...'라며 기대를 했지만 하키넨은 고향후배 키미 라이코넨에게 시트를 넘겨주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2012년까지 현역을 고수했던 슈마허와 비교하면 너무나도 이른 은퇴였던지라 사람들의 아쉬움이 컷다.

시즌 16전 미국 GP에서 마지막 우승을 하고 최종전 일본 GP에서는 4위로 끝마치며 F1에서의 경력을 끝내게 된다.

2001년 37포인트 5위

8 평가

슈마허가 5연속 챔프에 오르며 F1을 초토화 시킬때 많은 사람들이 하키넨이 있었더라면 독주를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때의 페라리과 맥라렌 경주차의 성능차이를 생각해보면 하키넨이 있었더라도 슈마허를 막는건 무리였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하키넨은 슈마허의 7연속 월드챔피언을 저지한 인물이 된다. 1998년도는 그렇다치고 1999년도 만약 하키넨이 없었더라면 슈마허는 중반에 시즌 날려먹은 것을 감안해도 챔피언 경쟁에 뛰어들 수 있는 점수를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승부를 걸어볼만 하다 생각했으면 슈마허도 축구를 하는 대신 조기복귀를 했을테니...

경쟁심이 센 F1드라이버들 사이에서 의외로 순하고 섬세한 성격이다.(같은 전투 종족키미 라이코넨과 비교해보라.) 한마디로 안티가 없다. 슈마허는 여기저기서 어그로를 끌어왔던지라 특히 챔피언쉽 경쟁하면서 안티를 만든 경우가 많다. 94년의 D.힐 97년의 쟈크 빌레너브의 경우 슈마허와는 원수지간이 되었고 쿨싸드와는 서로 그냥 죽어라 씹어대는 사이. 심지어는 팀 동료였던 어바인과 바리첼로마저 팀을 옮긴후 독선적이라며 씹을 정도인데 유독 하키넨과는 사이가 좋다. 슈마허 본인도 최고의 라이벌을 꼽는 질문에 하키넨을 지목할 정도.

이렇게 슈마허와 같이 찍은 광고가 꽤 있다.

은퇴후에는 DTM에서 뛰기도 했고 현재는 종종 WRC에도 출전하며 F1서킷에도 게스트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9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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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데스의 리더, 데이브 머스테인과 판박이다! 양쪽 다 이 사실을 잘 아는듯.


키미 라이코넨WRC로 끌어들인 장본인이 바로 미카 하키넨이다.

상당한 애처가이다. 애초에 은퇴사유가 아내와 아들때문이기도 했지만...덕분에 아내 엘자도 F1 팬 사이에선 꽤 인지도가 있다.(하키넨이 잘 나가던 시절 피트에 언제나 등장해서 방송 중계를 탄 영향도 크다.)


핀란드에선 사실 전 국민이 하키넨 급이라카더라...

탑기어제임스 메이에게 드리프트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추가바람

  1. 로터스가 얼마나 약체였는가 하면 1991년 총 득점이 3점에 불과했다. 그 3점중에 2점을 하키넨이 얻어낸것에서 어느정도 약체였는지 알 수 있다.
  2. 이 해 로터스의 총 득점은 13점이었다. 그중 11점을 하키넨이 얻어낸것이니...
  3. 대회에는 참가하지 않고 차의 세팅 변경등에 대한 성능시험을 주로 하다가 팀의 레귤러 드라이버가 부상이나 계약해지등의 이유로 공석이 생겼을때 대회에 바로 투입되는 리저브 멤버로 보면 된다.
  4. 한 레이스당 가장 적은 점수로 챔피언에 오른 것은 하키넨을 F1으로 이끈 82년도 챔피언 K.로즈버그였다. 15전에서 44점으로 챔피언이 되었다. 당시 점수제가 9-6-4-3-2-1이었던걸 감안하더라도 경기당 3점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