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예지트 2세

II.Bayezid 또는 II.Beyazıt 터키어
بايزيد ثانى 오스만 터키어
(1447 ~ 1512)

1 개요

오스만 제국의 제8대 술탄. 메흐메트 2세의 장남이자 셀림 1세의 아버지. 별칭인 Adlî는 '정의제'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별명은 아버지의 친유럽 성향[1]을 거부하고 이슬람 율법을 가르치는 학교나 종교재산 원상회복, 모스크 건립 등의 활동을 한 결과 붙은 별명이라고[2].

이름을 부르는 법은 바예지트 1세와 동일하다.

워낙에 포스 넘치는 아버지메소포타미아 및 이집트를 정복해 제국의 영토를 1.5배 이상 늘린 아들, 오스만 제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손자 사이에 끼어서 뭔가 듣보잡같은 느낌을 주는 인물이지만, 20여년 동안 큰 전쟁을 거의 벌이지 않으면서[3] 아버지의 군사 원정으로 인한 재정 위기를 극복하고 아들과 손자의 대대적인 군사 원정의 기틀을 놓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인물.

2 즉위 이전

즉위 이전의 기록에 대해서는 많이 남아있지 않다. 터키 전설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가 된 후궁프랑스에서 납치된 공주였다고 하지만, 확인도 안되고 뭐.

메흐메트 2세 말년에 상당히 말을 안들었다고 하는데, 자신에게 반하는 자에게는 살벌하기 그지없었던 '정복제'에게 개기고도 무사했다는 건 이미 상당한 수준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뜻한다. 실제로 메흐메트 2세는 독살당했다는 의혹도 있다.

3 즉위와 내전

1481년, 바예지트 2세는 오스만 술탄들 중에서는 상당히 독특한 환경에서 즉위했다. 바로 동생인 잼(Cem)이 상당한 실권을 가지고 버티고 있었다는 것이다.[4] 이스탄불에서 고관 및 관리들의 지지를 받고 즉위한 바예자트 2세와 이집트 원정군을 끌고 귀환한 잼과 부르샤에서 내전을 벌였고, 이를 격파했는데....

동생이 구호기사단에게 튀었다.

이 '동생이 언제 돌아와 술탄직을 요구할 지 모른다' 는 문제는 바예지트 2세를 끝끝내 발목잡았으며, 때문에 '동생 좀 잘 붙잡아 주십쇼' 하면서 구호기사단교황(구호기사단은 나중에 이 거물급 인질을 교황청으로 넘긴다[5])에게 꼬박꼬박 뇌물을 먹여야만 했고[6] 이 때문에 주력 부대를 본토에서 멀리 밖으로 움직이는 일은 꺼리게 되었다.[7]

이 골치아픈 동생은 프랑스왕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원정때 교황청에서 프랑스로 인도되어 원정에 동행해 나폴리에 이르렀다가 1495년 나폴리 감옥에서 사망했다.[8] 이는 바예지트 2세에게 걸려있던 족쇄를 풀어준 셈이 되었지만 이를 우려한 교황청의 은폐 공작으로 인해 바예지트 2세는 자신의 동생이 확실히 죽은 건지 확인할 수 없었다.

4 통치

대외적으로 바예지트 2세는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받긴 했지만 친정을 벌인다거나 주력부대를 장거리 원정보내는 일은 꺼려했다. 우선 동생인 젬 문제도 있었고, 메흐메트 2세 때에 거의 매년 전쟁을 벌이다 보니 나라 살림이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 게다가 대외적으로도 유럽에는 헝가리의 마지막 현군이라 일컬어지는 마차시 1세 코르비누스와 그가 창설한 강력한 상비용병군인 '검은 군대'(Black Army)가 버티고 있었고, 페르시아 방면에서는 이스마일 1세에 의해 사파비 왕조가 건국되어 발목을 잡았다. 물론 이집트 맘루크 왕조도 만만찮은 적수이긴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바예지트 2세가 주적으로 삼은 건 베네치아였다. 1483년 헤르체코비나를 점령해 베네치아 본토에 대해 압박해 갔으며, 1499년 ~ 1503년 베네치아와 전쟁을 벌여 에게해 일대의 베네치아 해얀 요새들과 섬들을 코로네 섬과 모도네 섬 들을 제압해 국내을 정리해 나갔다. 이를 위해 해군력을 부지런히 증강시켰는데, 이는 언제 돌아올 지 모르는 동생에 대한 대응책을 겸하기도 하였다. 도나우 강 하류지역의 요새를 장악하여 크림 칸국과의 연계도 강화했다.

근동 일대에서는 일단 맘루크왕조와 교전을 벌여 국경선을 확정짓고 꾸준히 동쪽으로 팽창해 나아갔으나, 시아파를 기조로 하는 사파비 왕조의 건국과 충돌로 인해 곤란을 겪었다.

그외에 내치 분야에서는 모스크, 대학, 병원, 교량 건설 등에 상당한 시간을 투자했고, 철학과 법학, 문학을 적극 지원했으며 아버지가 몰수했던 종교 재산들을 되돌려주었다.

5 퇴위와 사망

1509년 콘스탄티노플을 덮친 지진 이후 바예지트 2세는 급속도로 노화된 모습을 보였고, 이에 자식들은 차기 술탄직을 노리며 내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본래 바예지트가 후계자로 낙점했던 인물은 장남인 아흐메트(Ahmet)였지만[9], 페르시아 사파비 제국의 사주를 받아 시아파 신비주의자들이 일으킨 반란인 샤 쿨루(Shah Kulu)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인망을 잃었다[10]

한편 이와 같은 무렵, 셀림은 바예지트에게 자신의 임지를 루멜리아. 즉 발칸 반도로 옮겨주기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는 당연히 유사시에 코스탄티니예에 먼저 들어가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가 임지로 받은 곳은 저 북쪽에 위치한 변방[11]. 결국 셀림은 코스탄티니예 부근을 지나가던 중에 임지로 향하기를 거부하고 눌러앉아버렸고, 그를 반역으로 여긴 바예지트는 군사를 보내 셀림의 군대를 제압. 셀림은 크림 칸국으로 망명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크림 칸국에게서 군사를 빌려 곧 귀환했고[12], 거기에 예니체리들이 동조하면서 결국 바예지트는 셀림에게 양위하고 셀림 1세로써 술탄직에 오르는 것을 바라보게 된다[13].

양위 후 1달 뒤에 바예지트 2세는 사망한다. 공식적으로는 실의에 빠져 죽었다고는 하나 셀림 1세가 독살한 것이라는 의혹이 상당히 짙다. 아버지를 독살했다는 의혹을 받더니 자식에게 독살당했다는 의혹도 받는군.

6 기타

아버지인 바예지트 2세가 동생 문제로 끙끙 앓는 것을 지켜본 셀림 1세는 자신의 동생들 뿐만 아니라 조카까지 모조리 참살하는 살벌한 행위를 벌였다[14][15].

어쌔신 크리드 : 레벨레이션에선 언급은 많긴 많은데 콘스탄티노플을 떠나 아예 어딘가에 은둔해버리고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맨 끝에 나오는 셀림과는 달리 결국 끝까지 나오지 않는 맥거핀이다.

일본의 소설가 시오노 나나미의 작품들에서는, '창업주인 아버지 메흐메트 2세의 업적을 정착시키는 데에만 열중한 인물' 이라거나, 그보다도 못한 평가로 '아버지 메흐메트 2세의 업적을 정착시키는 것만도 힘에 부쳐한 인물' 이라는 식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가 않은데, 이미 소개했던 것처럼 바다에서는 베네치아의 영토를 적지 않게 빼앗았으며 육지에서는 헤르체코비나를 점령했다. 바예지트 2세 시대의 오스만 투르크가 상대적으로[16] 영토를 많이 확장하지 못한 것은, 동생인 젬이 십자군을 이끌고 쳐들어온다는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수 없었으므로 군사활동을 벌이기가 더 조심스러웠던데다 아버지가 허구헌 날 전쟁을 벌였던 탓에 국고에 큰 부담이 갔기 때문에 일부러 대규모 전쟁을 삼갔기 때문이다. 또한, 바예지트의 군사적 재능이 다소 떨어진다는 것[17]도 원인이 될 수 있을 듯.
  1. 단순히 '친유럽 성향' 이라고만 하면 유럽의 여러 국가들과 두루 친했다고 오해할 수 있는데, 어디까지나 문화 한정.
  2. 역대 오스만 제국의 황제들 가운데 유독 내정에 관심을 많이 기울였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즉 아버지가 만들어놓은 각종 법과 제도가 잘 돌아가나 어쩌나 눈에 불을 켜고 감시했다는 이야기.
  3. 메흐메트나 셀림처럼 주력군을 움직인 대규모 원정보다는 지방 주둔군이나 크림 칸국의 군대를 주로 움직여 전쟁을 치뤘다.
  4. 오스만 투르크에서는 술탄이 죽은 뒤 자식들끼리 다음 술탄 자리를 놓고 겨루는 관행이 있었는데, 메흐메트 2세는 이를 법제화한다('술탄이 된 자는, 그의 형제들을 모조리 제거하라').
  5. 오스만 황태자의 신병을 확보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교황이, 자신에게 넘길 것을 요청했기 때문. 당시 교황이었던 인노첸시오 8세는, 젬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켜 십자군을 이끌게 해, 결과적으로 오스만 제국을 유럽에서 몰아내려는 원대한 꿈이라고 쓰고 망상이라고 읽는다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젬은 끝끝내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아, 십자군도 물 건너 갔다.
  6. 롱기누스의 창으로 알려진 성유물을 교황 인노첸시오 8세에게 선물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는 롱기누스의 커다란 조각상과 함께 이걸 기념하는 명문을 조각상의 대좌에 새겨놨는데, '교황 인노첸시오가 투르크의 폭군으로부터 받은'이라고 적었다(…).
  7. 이때 교황이였던 알렉산데르 6세는 이 인질의 가치가 날이 갈수록 올라간다는 것을 꿰고 있었고, 때문에 바예지트 2세가 몇번이나 '좀 죽여달라'고 뒷돈을 주는 걸 그냥 먹튀했었다고 한다.(...)
  8. 감옥에 있었다고는 하나 귀한 인질이니 만큼 '황제같은 죄수생활' 을 누렸다고 한다.
  9. 오스만 제국의 황위 계승법에 따르면, 황제가 죽은 뒤 여러 황자들 가운데 가장 먼저 수도 코스탄티니예에 입성하는 자가 다음 황제로 즉위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황자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아나톨리아 반도의 중요 도시의 총독직을 지내며 제왕교육을 받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 말은 어느 황자를 어느 도시로 보내는가를 보면 후계자로 누구를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알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당연히 후계자로 낙점된 황자는 코스탄티니예 코앞으로, 영 아니다 싶은 아들은 먼 변방으로 보낼 테니.
  10. 이후의 제위분쟁을 생각했는지, 반란 진압보다도 휘하 병력 보존에 연연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로 인해 그와 함께 진압군을 이끌었던 재상이 전사하는 등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고, 이는 예니체리들이 그가 아닌 셀림을 지지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11. 문자 그대로 국경지대였다. 위에서 각주로 소개했듯이 황자들은 아나톨리아 반도로 파견되지 루멜리아로 보내지지는 않았는데, 셀림의 생각을 읽은 바예지트가 강수를 둔 것.
  12. 셀림의 아내인 아이셰 하프사 술탄이 크림 칸의 딸이었다.
  13. 이후 아흐메트는 아나톨리아 반도를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키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셀림이 친히 이끄는 군대에게 진압당했다.
  14. 동생 살해는 오스만 투르크의 4대 술탄인 바예지트 1세 때에 처음으로 벌어졌으며, 위의 각주에서도 언급했듯이 메흐메트 2세는 이를 법제화해 버린다. 이후 13대 술탄인 메흐메트 3세에 이르기까지 형제 살해가 계속된다.
  15. 그나마 다행인건진 모르겠지만 셀림은 친아들까지 죽이진 않았다. 셀림의 아들이자 뒤를 이은 쉴레이만은 정말 운이 좋게도 외아들이었기 때문. 셀림은 쉴레이만 이외에 하티제 술탄, 베이한 술탄, 샤 술탄, 파트마 술탄, 셰자데 술탄 등을 낳았는데, 이들은 모두 딸이었다.
  16. 아버지아들, 손자 대에 비해
  17.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 사실, 앞뒤에 포진한 여러 먼치킨들에 비교하는 것 자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