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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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琦緖

1 개요

백범 김구의 암살범으로 유명한 안두희를 1996년 10월 23일 오전 11시 30분경 인천 중구 신흥동에 있는 그의 집에서 살해한 인물.

1950년 전라북도 정읍 태생으로, 2016년 현재 67세다.

2 안두희 살해

범행 시점인 1996년 당시 박기서는 47세로 부천 소신여객 버스 기사였다. 그는 1995년 권중희의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를 읽은 뒤 범행을 결심하였다고 한다. 살인의 동기는 민족정기를 해친 사람이 천수를 누리면 안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는 길이 40cm 정도의 홍두깨에 매직으로 '정의봉' 이름을 썼고 근처 문방구에서 장난감 총을 구입한 뒤, 사전답사했던 안두희의 집에 침입해 안두희의 부인을 묶고 자리에 누워있던 안두희를 죽을 때까지 정의봉으로 때려 살해했다.

오마이뉴스에서는 그를 여러번 인터뷰했는데 본인 증언에 따르면 처음에는 죽일 생각이었으나 막상 대면하고 보니 나이들고 힘없는 노인이어서 주저하는 사이에 안두희 눈을 보았는데 매우 날카롭고 기회를 노리는 눈빛이었다고 한다. 순간, 잘못하면 자기가 당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범행에 이르렀다고. 그의 직업 때문인지 '버스에 우연히 탑승한 안두희를 때려 죽였다.'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은근히 있다. 당연히 잘못 퍼진 이야기다.

범행 직후 본인이 다니던 성당에 가 고해성사를 하였다.

당연히 뉴스에도 보도되었고 당시 큰 화제가 되었다. 일단은 물증, 계획성, 고의성, 자백 등이 모두 완벽하게 있는 확신범이자 살인자였으므로 버스회사에서도 해고되었고 구속 상태에서 재판에 회부되었다. 가족들도 평소 그가 그런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면서 매우 당혹스러워 했다.

초기 8년 구형에 5년이 선고되었으나 최종적으로는 법정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다. 살인죄의 법정 최저형량이 5년임을 감안하면 징역 3년은 엄청난 선처를 한 것이다. 당시 대법원이 형량을 결정한 취지를 '박기서의 살인행위는 주관적으로는 정당성을 가지나 우리나라 법질서 전체 관점으로 볼 때에는 정당하다고 볼 수 없다.'라고 밝혔는데, 표현상 원칙을 고수한 것처럼 보이지만 관점에 따라서는 결국 법조계가 박기서의 행위에 면죄부를 준 게 아니냐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후 김대중 대통령 취임 직후인 1998년 3월 1일 3.1절 대사면 때 대상자에 포함되어 3월 13일 수감 1년 5개월만에 출소하였다.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사회 각계 단체 및 개인들이 박기서의 처단을 응원하는 취지에서 격려금과 편지들을 보냈다. 초등학생인 아들이 다니던 태권도학원 관장이 수업료를 면제해주고, 백범기념사업회에서 그의 아내에게 취업자리를 알선해 주기도 했다. 본인은 익명의 누군가에게 출소할 때까지 매달 백만 원씩을 받았다고도 한다. 출소 후에도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일자리, 집 등을 제공받아서 출소 이후에는 택시 기사가 되었다.

한편 안두희 사망 전 그를 추적하면서 김구 암살의 배후를 밝히려고 하던 몇몇 인사들은 그의 죽음으로 진상이 영원히 묻히게 되었다 면서 다소 유감스러워하는 인터뷰를 남겼다. 하지만 반대로 당시 어차피 다 죽어가던 79세 노인이였고 무덤까지 가져가려는 듯 굳게 입을 다물던 안두희였기에 어차피 오래가지 않아 자연사하던지 죽더라도 말문을 열지 않으리라는 전망도 많았다.

3 살해 이후

2004년 각종 친일반민족성 발언으로 구설수에 올랐던 김완섭을 구타해서 불구속 입건된 적이 있다. 이때 구타당한 김완섭은 "박기서는 안두희 살해범 박기서가 아니라, 나 김완섭 구타범 박기서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라는 발언을 하였다.

2011년 김삼웅 前 독립기념관장과 사진도 찍었다. 안두희 척살 15주년 기념 서울의 소리 인터뷰.

2013년 8월 4일 장준하 선생 관련 최고 의혹 용의자 김용환을 찾아가 따귀를 때리고 추궁하기도 했다. 이때는 김용환이 박기서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하여 별다른 충돌 없이 마무리 되었다.

안두희 살인 사건의 임팩트 때문에 그의 이후 행적은 크게 알려져 있지 않은데 위 사례로 알다시피 사적제재 사건을 여럿 일으켰다. 아래에도 서술하듯이 대한민국에서 이는 엄연한 불법행위에 범죄의 구성요소이다.

4 정의의 집행자인가, 린치 살인범인가?

범행 당시 일반적인 여론은 박기서를 옹호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가 범행을 저지른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사회 각계에서 그를 보호해야 한다는 여론이 뜨겁게 일어났다. '박기서 구명위원회'가 조직되었고 여기에 서명한 시민 수만 무려 9000명이었다. 자발적으로 박기서를 위해 변론하겠다는 변호사가 줄을 섰으며 범행의 동기가 되었다고 밝힌 권중희 저서 '역사의 심판에 시효는 없다.'를 구할 수 있느냐는 사람들의 전화문의가 시내 대형 서점들에 폭주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박기서가 당시 안두희를 처단하고 자수했을 때 그를 담당한 형사는 "정말로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 이라고 말하면서 수갑을 채우지 않고 연행했다 카더라라는 뜬소문도 있다. 박기서 씨 본인이 팟캐스트 고상만의 수사반장 시즌2에 출연했을 때 그러한 말을 들었다고 회고를 했는데 해당 팟캐스트 내용 박기서 씨 본인의 주장일 뿐이라서 진위는 알 수 없다. 만약 실제로 경찰관이 저런 말을 했다면 그 사람은 경찰관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법치국가에서, 제 아무리 민족의 원수라 해도 개인의 보복심으로 저지른 살인인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법 집행을 하며 범죄자를 체포하는 경찰관이 수고했다라는 말을 하는 건 이성적이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인터넷상 카더라 식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일 뿐이며 실제 발언과 그로 인한 처벌이 어떻는지에 대해선 전부 소문만 무성할 뿐이니 사실여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만약, 그러한 취지의 발언이 실제로 나왔다면 경찰조사 과정에서가 아니라 재판 당시 탄원서에 등장했거나 당시 사회 분위기 상 박기서의 선처를 바라는 사람들의 입장이였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안두희를 때려 죽일때 사용한 정의봉은 경찰이 증거물로 압수하였으나 재판 후 되돌려줘서 현재는 박기서씨가 보관하고 있다. 살해에 사용한 흉기를 되돌려줬다는 점에서도 이 사건이 일반적인 살인사건과는 꽤 다른 분위기였음을 알 수 있다.

살해당한 안두희는 김구를 죽이고 나서 형을 선고받았으나, 1년 후 6.25 전쟁이 일어나자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어 1950년 7월 육군 소위로 군에 복귀했고, 정치권 일각에서 석방논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였으나 같은해 9월에 중위로 진급하였고 다음해인 1951년 12월 대위로 진급하였고 1953년 소령으로 예편하였다. 군대에서 제대한 이후 강원도 양구로 건너가 군납업자로 상당수의 재산을 축적하는등 노골적인 봐주기 혜택을 받았다. 따라서 그의 처참한 죽음은 지은 죗값을 뒤늦게 받은 것이라고 평가하는 의견이 많았다.

당시 여론이 박기서의 행동과 이에 대한 법원의 판결에 호의적이었던 건 사실이다. 사고가 일어난 1996년은 혐일과 민족주의 열풍이 뜨겁던 때였고 범죄자의 인권에 대한 인식이 지금에 비해 훨씬 빈약했으며, 상기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루머 또한 당시 박기서의 행동에 통쾌해 하는 사람이 많았기에 확대 재생산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지금도 그와 관련된 기사에는 민족의 의인으로 칭찬하는 글들이 많이 올라오며 '반도의 퍼니셔, 각시탈'이라고 긍정적 희화화를 하는 표현도 있다. 오프라인에서도 국내 김구와 관련한 전시회나 시민단체들의 민족주의 고취 행사에 심심찮게 이 사람이 정의봉을 들고 있는 사진이 등장한다. 분명히 그는 적지 않은 한국인들로부터 '민족정기를 바로 세운 시대의 의인'으로 숭앙받고 있다.

민족감정이나 진영논리로는 박기서의 살인행위를 인과응보로 두둔할 수 있으나 그의 행위는 엄연한 범법인 사적제재다. 현대#s-1 법치주의 국가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민족정기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죽일 수 있는 권한 따위는 절대 없다. 또한 계획적 살인행위에 대해 법적 최저형량보다 낮은 형이 선고되었다는 점은 당연히 비판받아야 할 부분으로 사법기관까지 사적제재를 일정부분 용인한 모습을 보여줬다는 데에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런 사례는 한국사회의 인권 감수성이 아직도 부실한 수준이며 민족주의의 광기와 부작용에 대해 적지 않은 국민들이 둔감함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강력범죄자를 포함한 기타 수많은 범죄자들이 죄질에 비해 경미한 형을 선고 받는 것도 모자라 피해자를 조롱하는 태도까지 보인 사건들이 나오는 등 범죄자#s-1들의 적반하장식 태도에 대해 사회적 반감이 형성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범죄자의 인권을 무시할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종합해보면 재판부에서도 이 사건은 살해의도가 명백한 계획살인이였기에 높은 형량을 선고해야 하는 내용임에도 매우 이례적으로 낮은 형량을 내렸다는 것과 대법원 판결문에서 언급한 점을 보면 민족정기 명분이나 역사단죄 명분을 참작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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