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초롱초롱빛나리 유괴 살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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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0년대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유괴 살인 사건 중 가장 대표적인 사건. 희생 아동의 길고 독특한 이름과 범인의 특이한 상태 때문에 더욱 사회에 깊이 각인된 사건. 언론에서는 거의 '박빛나리' 내지는 '박나리'라고 줄여 불렀다.[1]

1997년 8월 30일, 범인 전현주(당시 27세, 여성)는 서울 잠원동 뉴코아문화센터에서 콜라를 마시며 서성이던 중, 영어학원의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귀가하는 도중이었던 박초롱초롱빛나리(당시 초등학교 2학년, 여아)를 구슬려서 소품제작실 겸 창고로 사용하던 사당동 지하창고로 유인, 유괴하는 데 성공하고 당일 저녁 총 3차례에 걸쳐 박 양의 부모에게 공중전화를 통해 2천만원의 몸값을 요구했다. 전현주는 박 양의 집에 첫 번째 협박전화를 한 뒤 박 양에게 수면제를 먹였으며, 울면서 집에 보내줄 것을 애원하는 박 양을 목 졸라 살해했다.

전현주는 박 양의 유괴 다음날 명동의 한 커피숍에서 박 양의 부모에게 전화 상에서 말한 액수의 금액을 준비해 갖고 나오라는 내용의 전화를 하던 중 발신지 추적으로 들이닥친 경찰의 검문에 걸렸다. 경찰은 전화가 걸려온 지 9분만에 신속하게 전현주를 포위망에 넣는 데 성공했지만, 커피숍에 있던 13명의 사람(여자 12명, 남자 1명)을 허술하게 검문하다 임신 8개월 상태였던 그녀가 설마 범인이겠느냐는 안일한 판단으로 그녀를 놓아주고 만다.

하태신 서장 (서초 경찰서): 임산부라는 말도 듣지 못했고 또, 같이 동행한 사람들이 신원을 확인하면서 항의를 하고 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전부 다 돌려보냈습니다.

그녀는 이미 용의선상에 있었기에 경찰은 그녀의 집 주변을 수사 중이었는데, 이를 지켜보며 의아해한 전 씨의 아버지가 9월 11일 경찰에 자신의 딸(전현주)이 범행 직후인 9월 1일부터 가출 상태임을 알렸다. 결국 통화 내역으로 꼬리를 잡힌 전 씨는 9월 12일 신림동의 한 여관에서 검거되었다.

검거 당시 전현주는 임신 상태였으며 그 해 2월에 결혼식을 올린 상태였다. 그녀는 본래 의사작가를 지망하고 있었으나 본인의 의지와 달리 모 대학 무역학과를 거쳐 응급구조학으로 전공을 바꾼 후 미국행 유학길에 올랐으며 사건 2년 전인 25세 때 당시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입학해서 총학생회 간부를 맡기도 했지만[2] 사치와 낭비벽이 심했던 터라 결혼 후 3천만원의 빚더미에 앉게 되었고, 유괴를 계획한 이유도 바로 2천만원 가량의 빚을 면제하기 위함이었다.

박초롱초롱빛나리 양의 어머니 한영희 씨는 범인의 검거 소식에 딸을 찾을 수 있으리라 굳게 믿으며 경찰서로 달려가 취재진들 앞에서 기도까지 하였지만, 머지 않아 딸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단 소식에 충격에 빠져 넋을 잃은 그 모습이 공중파로 전국에 방영되었다.

유괴 소식에 PC통신을 중심으로 나리 양 찾기 운동이 벌어졌고 공중파 뉴스에서도 범인의 육성을 들려주며 캠페인에 동참했다.

단독 범죄였기에 당연히 남편은 꿈에도 몰랐다고. 그녀가 체포될 때 남편은 망연자실해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고 한다. 나중에 사건 현장인 사당동의 지하창고에서 그녀가 범행 당시의 상황을 재연을 할 때 "현주야! 아니지? 네가 그런 끔찍한 일을 할 리가 없잖아! 아니잖아! 아니라고 말 좀 해줘!"라고 울부짖는 남편의 절규가 공중파를 타기도 했다.

2 그 후

검거 후 범인은 자술서에서 검찰에 검거되기 전 부모가 자신에게 5번이나 자살을 권유했다고 썼다. 속죄하는 길은 자살뿐이며 부모도 곧 따라갈 테니 두려워하지 말라며 약국에서 살충제까지 구입했다고. 경찰 조사 도중 전현주는 그런 부모가 걱정되었는지 동생에게 부모님을 잘 보살펴드리고 자살하지 못하도록 막아달라는 당부의 편지를 쓰기도 했다.

범인은 전문가들에 의해 연극성 성격장애로 진단받았다.[3] 진술 도중에도 증언을 번복하고 성폭행을 당했다거나 공범의 존재를 주장하는 등 동정심에 호소하고 자신의 죄질을 낮추고자 온갖 이유를 동원해 변명하려 애썼다. 이 때 공범이 있다는 진술이 언론을 타면서 뉴스에서 공범에 의한 2차 피해를 경고하기도 했으며 모두 당연히 이런 끔찍한 범죄를 도와준 공범들의 존재를 믿었으나 얼마 후 임산부의 단독범행이라는 게 다시 밝혀지며 사회는 더욱 충격에 빠졌다.

검찰은 진술조차 거짓을 반복하는 그녀의 죄질이 매우 불량하다고 판단해 사형을 구형했지만, 결국 무기징역이 확정되어 현재까지 교도소에 복역 중. 수감된 지 몇 달 안 되어 딸을 낳았으며, 남편이 아이를 데려갔다고 한다.[4]

3 기타

박 양의 이름은 별처럼 빛나는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박 양의 아버지가 직접 지어준 이름이라고 한다. 부친은 33살이라는, 1980년대 기준으로는 꽤나 늦은 나이에 첫 딸인 박 양을 얻었기 때문에 매우 지극히 아꼈다고 한다. 박 양도 부친이 지어준 이름에 어울리는 연예인 같은 직업을 꿈꾸었으나, 잔인한 범죄의 희생양이 되어 끝내 그 꿈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박 양은 유괴 9일 후인 1997년 9월 8일이 만 8세 즉, 9세를 맞이하는 생일이었는데, 이 당시 박 양의 행방이나 생사 여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가족들은 어느 때보다도 슬픈 생일을 맞이해야 했다. 박 양의 가족들은 주인 없는 생일상을 차리고 박 양의 무사 귀환을 기원했지만 나흘 후 범인이 검거되며 박 양은 생일을 맞지도 못하고 유괴 직후 숨을 거두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안타까움을 더했다.

이 사건 이후로 길거나 눈에 잘 띄게 아이의 이름을 짓는 사람들이 줄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 이 사건이 나기 4년 전인 1993년에 이미 성을 제외한 이름을 5글자 이내로 제한하는 규정[5]이 실시되었기 때문에 이 사건과는 관련이 없다. 그리고 한때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 치치카포 사리사리센타 워리워리 세브리깡 무두셀라 구름이 허리케인에 담벼락 담벼락에 서생원 서생원에 고양이 고양이엔 바둑이 바둑이는 돌돌이|이름이 길면 단명한다는 속설]]이 돌기도 했다.

관련 기사

  1. 가끔 '빛나리', '박초롱'이라고 할 때도 있었다.
  2. 위에서 언급했듯 커피숍에서 검문에 걸린 상태에서 그녀의 전화를 받고 달려온 서울예술대학 후배들이 전현주의 본성을 모른 채 경찰에게 임산부를 거칠게 대하지 말라며 항의하는 통에 경찰이 그녀를 풀어줬다고 한다.
  3. 연극성 성격장애와 반사회성 성격장애는 같은 범주에 속한다(B군 성격장애 : 극적이고 감정적이며 변덕스러운 유형).
  4. 범죄자가 임산부일 경우 교도소에서 출산하는데, 가족이 없을 경우 어쩔 수 없이 교도소에서 아이를 키우게 된다. 아이가 뭔 죄냐... 한마디로 교육상 엄청나게 나쁜 환경에서 아이가 자라는 셈. 이 때문에 죄수가 출산하게 되면 다른 가족이 아이를 부양하도록 하며, 가족이 없다고 해도 18개월이 지나면 보육원으로 보내 키운다.
  5. 1993년 2월 25일 제정된 호적예규 제485호 이름의 기재문자와 관련된 호적사무처리지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