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 니폼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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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 톰 톰스크 감독
발레리 쿠지미치 네폼냐시
(Valeri Kuzmyich Nepomniachi)
[1]
생년월일1943년 8월 7일
국적러시아
출신지슬라브고로드
포지션수비수, 공격수
소속팀SKIF 아시가바트 (1961~1965)
스파르타크 사마르칸트 (1965~1967)
지도자스트로이텔 아시가바트 감독 (1982~1983)
카메룬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1988~1990)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 기술고문 (1991)
겐츨레르비를리이 SK 감독 (1992~1993)
앙카라귀쥐 감독 (1993~1994)
유공 코끼리/부천 SK 감독 (1995~1998)
선양 하이시 감독 (2000)
산프레체 히로시마 감독 (2001)
산둥 루넝 감독 (2002~2003)
상하이 선화 감독 (2004~2005)
FC 파흐타코르 타슈켄트 감독 (2006)
우즈베키스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2006)
FC 톰 톰스크 감독 (2008~2011)
PFC CSKA 모스크바 기술고문 (2011~2014)
FC 톰 톰스크 감독 (2014~ )

러시아 출신의 축구 감독. 애칭은 니포. 1943년 8월 7일생.

1 소개

선수 시절은 무명의 수비수였지만,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에서 카메룬의 8강 신화를 이끌면서 주목받았고[2], 이후 중국 대표팀 등의 고문을 맡다가 1994년 K리그유공 코끼리 감독으로 내한해 부천 SK로 팀명을 변경한 1998년까지 감독을 지낸다.

2 K리그에서의 모습

K리그에 패스축구를 전도한 선구자이며, 한국 축구 발전의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던 감독이다.

당시 그가 보여 준 축구는 그동안 대한민국에서는 볼 수 없는 신선함 그 자체였다. 확실한 스트라이커가 없다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플레이 메이커 윤정환을 중심으로 헝가리 출신 조셉, 윤정춘, 김기동, 이을용 등 뛰어난 미드필더들을 중용하여 물수제비 뜨듯 깔끔한 패스로 여러 차례의 득점 기회를 만들었고, 조윤환 수석코치[3], 최윤겸 수비코치에게 직접 스타팅 멤버를 짜게 하면서 후진들 양성에 앞장섰다. 그 때문인지 PC통신 상에서는 '유공의 축구는 져도 표값이 아깝지 않다'는 칭찬이 쏟아졌고, 비슷하게 4-4-2 기반의 패싱축구를 구사하던 수원 삼성 블루윙즈와 붙는 날이면 당시 팬들에겐 '명경기 보증수표'로 통할 지경었다. 지금도 올드 팬들은 이 두 팀의 매치업을 다시 보고 싶어하는 경기로 꼽고 있다.

감독감을 키우는 감독으로도 유명해서 코치생활을 했던 조윤환과 최윤겸은 물론 선수들 중에도 감독이 여럿 배출되었다. 2016년 K리그 클래식에서 활동중인 그의 제자로는 울산의 윤정환, 광주의 남기일, 제주의 조성환이 있고, 챌린지에선 최윤겸 강원 FC 감독과 송선호 부천 FC 감독이 있다. U-23을 맡았던 이광종도(니폼니시 감독 밑에서 선수생활을 한 건 1995년 한 해뿐이지만) 니폼니시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성적은 우승권과는 거리가 멀었다. 1996년 아디다스컵 우승을 제외하고는 매번 우승 문턱에서 주저앉았고, 1997년 정규 시즌에서는 꼴찌의 수모까지 겪었다. 속공을 통해 게임을 풀어가는 유공의 축구 스타일 상 몸싸움을 잘하고 100m를 11~13초 대에 끊을 타깃형 스트라이커가 필요했지만 1996년 베스트 11이었던 세르게이 정도를 제외하고는 좋은 타깃형 스트라이커를 구하지 못했고, 또 구단의 모기업이 스포츠단 운영에 있어서는 막장으로 유명한 이었다.[4][5] 그래서 1997년 최하위를 했을 때도 니폼니시 감독을 비판하기보다는 SK의 수뇌부를 비판하는 네티즌들이 많았다. 그리고 이 당시에는 조직력 축구보다 에이스에게 몰아주는 축구가 주류였기 때문에 국가대표급 선수진을 갖춘 포철, 일화, 대우[6]에 밀리는 경우가 많았다.

여담으로 수원은 1998년과 1999년 2년 연속 리그 우승을 차지하면서, 1993년부터 1995년까지 K리그 3연패를 달성한 동대문 일화, 1997년 리그 전관왕을 달성한 부산 대우와 더불어 1990년대의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 팀으로 남았다.[7]

3 K리그 감독 사임 이후

1998년 퇴임 후 J리그 히로시마를 거쳐 2003년 중국 산둥 루넝의 감독을 맡아 FA컵 우승을 따내며 한국 시절 이루지 못한 우승의 한과 AFC 챔피언스리그 진출의 한을 풀었다. 이후 고향 러시아의 톰스크 팀 감독으로 재임하다가 2011년에 물러나 2014년까지 CSKA 모스크바의 기술고문으로 일하였고, 이후 다시 톰스크의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1. 러시아어로는 Валерий Кузьмич Непомнящий이다.
  2. 카메룬의 경제적 사정은 차치하더라도 선수들과의 커뮤니케이션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대표팀의 통역은 카메룬 주재 소련 영사관에 고용된 운전기사였다고 하니, 말이 필요한지?
  3. 니폼니시 이후 부천의 감독을 지냈고 이후 전북 현대 모터스의 감독을 맡기도 했다.
  4. 당시 드래프트 4라운드는 구단과 자매 결연을 맺은 대학의 에이스를 지명하는 시스템이었는데, SK동아대학교-인천대학교 이런 식으로 자주 자매결연 대학을 옮겼다.
  5. 심지어 야구팀 SK 와이번스막걸리 야구 발언과 똑같은 소리를 축구단도 들었다.
  6. 포항 스틸러스, 성남 FC, 부산 아이파크
  7. 1999년 수원은 K리그 30년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팀을 꼽으라 해도 후보로 명함을 내밀 수 있을만큼 압도적인 위용을 뽑냈다. 이 해 슈퍼컵, 아디다스컵, 대한화재컵, 리그를 모두 제패했으며 2위 부천과 승점차가 12점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