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낙청


白樂晴

1938년 1월 10일 ~

1 개요

대한민국의 문학평론가, 사회운동가. 출판사 창작과비평사의 발간인이다. 1962년부터 2003년까지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영어영문학과 교수였다.

현 대한민국 문학계에서 '원로' 대우를 받는다. 그가 제시한 민족 문학론, 분단 문학론은 지금도 문학계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2 생애

친가는 평안남도 정주군에 있었지만, 1938년 외가가 있는 경상북도 대구부에서 태어나서 대구에서 자랐다. 변호사였던 아버지 백붕제는 6.25 전쟁납북되었다.

1955년 경기고등학교 재학 중 미국 유학을 떠나, 브라운 대학교를 졸업하고 일시 귀국하여 군복무를 마쳤다. 명문가 자손, 미국 아이비리그 출신이라는 남다른 배경 외에도 자진 입대한 것 때문에 지식인 사회에서 주목을 받았다. 유학이 합법적 군 기피수단이었던 시절에 입대를 위해 귀국한 그의 사연은 1960년 한 일간지에 기사화되기도 했다.

군복무를 마친후, 다시 유학을 떠나 1972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2년부터 서울대학교 영문과에 부임하였고, 1966년 1월 당시 27세로 서울대 전임강사이던 때에 공평동 태을다방 옆 문우출판사 한 켠을 빌어 창작과비평 1호를 펴냈다. 130여쪽에 불과한 얇은 잡지에서 “지배계급의 오락과 실리에 이바지”하는 순수문학을 정면 비판하며, 분단 현실을 극복하고 서민의 고통을 대변하며 부조리한 세상을 바꾸는 것이 문학ㆍ지식인의 소명임을 선언했다. 문인이 시대를 이끄는 지식인으로, 문학이 민중의 현실을 보듬는 손길로 호명된 순간이었다.

그 후 '창작과비평' 편집인으로서 진보적 평론활동으로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창비는 당시의 시대적, 정치적 정황과 맞물려 민주화를 열망하던 지식인 사회의 통로 역할을 하였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 아놀트 하우저가 쓴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완역하였다. 이 책이 우리나라 문학계에 행사한 영향력은 정말 지대한 것으로 평가된다.

1974년 10월 유신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여 해직되었다. 그 후 6년 동안 대학 바깥을 떠돌다가 1980년 복직되었다. 이 시기에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결성을 주도하였는데,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1987년 민족문학작가회의로 확대 개편되었다. 백낙청은 이러한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이사장을 맡았고, 그의 지휘 하에 대한민국 문단의 주류는 민중ㆍ민족문학의 색채를 강하게 띠었다. 이문열 같은 작가는 그로 인해 문인들 사이에서 왕따가 되었다는 소문이...

2003년 교수직을 정년퇴임하였다. 이후에도 통일운동의 일선에서 일하며 2005년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 때에는 범여권후보 단일화운동에 나서기도 하였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창비가 고수해온 민중ㆍ민족문학 기조는 거의 무너졌다고 보는 게 대체적 시각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 선거때마다 진보지식인 사회를 대표하여 민주진보진영 후보단일화를 주문한 것에 대해서도, 그로 인해 야권내 친북세력들의 제도권 편입을 방조하였고, 민주진보진영이 중도성향의 국민들로부터 오히려 외면을 받게 만든 것이라는 비난을 들었다. 일부 정치인들은 "선출되지도 않은 권력인 이른바 '진보원로'가 왜 민주적 정당성도 없이 뒤에서 정치인들을 배후조종하느냐"란 이의제기를 하기도 하였다. 특히나 부친과 백부가 납북된 처지라는 것을 생각하면...

특히 2015년에는 신경숙표절사건과 관련하여 많은 문인들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누가 보더라도 명백한 표절인 것에 대해 "의도적 표절로 볼 수 없다"며 무리하게 쉴드를 쳐주다가 역풍을 맞은 것.[1]

2015년 11월 25일 창비 편집인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아직도 창비 지분 31.1%를 보유한 최대주주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데다 새 발행인, 주간, 부주간을 맡게 될 차세대 인사의 상당수가 그와 사제관계 등으로 엮여 있기 때문에, 아직도 창비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3 가족관계

백부가 백병원으로 유명한 의사양반 백인제이다. 형은 인제대학교를 설립한 백낙환이다. 먼친척으로 볼 수 있는 이가 시인 백석이다.

백영경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 교수는 그의 딸인데, 빼어난 미모로도 잘 알려져 있다.사진 참조 백영경 교수는 창비 편집위원직도 맡고 있다.
  1. 이때 백낙청과 창비에 대한 비판의 선봉에 선 사람으로서 숙명여자대학교 국문과 권성우 교수를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