扶芬奴
(? ~ ?)
1 개요
출신지는 미상이며,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대부터 활약한 기록이 있으며, 유리왕대까지도 활동하였으며 이규보의 동명왕편과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그 활약상이 언급된다.
특히 유리왕 대에 꾀를 내어 선비족[1]을 무찌른 활약상이 돋보인다. 비록 기록이 적어 자세한 생애는 알 수 없으나, 부분노가 선비를 무찔렀던 부분에 유난히 많은 비중이 할애되어 있는 것으로 보건데 아마 전략을 짜내는데에 능하여 왕의 총애를 받던 명장으로 추측된다.
2 활약상
2.1 초기 행적
동명성왕이 처음 고구려를 건국했을 때에 비류국의 왕인 송양이 이를 역사가 짧다 하여 업신여기자 부분노가 나서서 비류국 궁궐의 오래된 기둥을 털어와서(...) 동명성왕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2]
기원전 32년(동명성왕 6년), 10월에 오이와 함께 왕명을 받들고 태백산 동남쪽의 행인국(荇人國)을 쳐서 그 땅을 빼앗고 성읍으로 삼았다.
2.2 선비족 토벌
이후 기원전 9년(유리왕 10년)에 선비족이 고구려를 침입해왔으나, 선비족들이 사는 땅이 험하고 거칠어서 이를 정벌하기가 쉽지 않아 유리왕과 신하들이 고심하던 중에 "선비는 험하고 견고한 나라이며 사람들이 용감하지만 어리석으므로 꾀로 굴복시킬 수 있다."라고 하면서 계책을 내었다.
부분노는 선비에게 거짓 배반자를 보내서 고구려의 병사들이 약하고 겁이 많다고 속인 후에 왕이 약한 군사를 끌고 선비족의 성 앞에 나섰다가 달아나면 선비족이 우습게알고 뒤를 쫓을테니 그 틈을 타서 정예 병력으로 기습공격을 하면 승산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후에 유리왕이 선비족의 성 앞에 군대를 끌고가서 부분노가 말한대로 선비족의 군사들을 성문 밖으로 유인하였다. 이때 산림에 숨어있던 부분노가 열린 성문 안으로 진격하여 선비족을 무찔렀다.잠깐, 왕을 미끼로 삼았다는건가(...). 하지만 삼국지연의에도 제갈양의 계책에 따라 유비 자신이 미끼 장수로 나가 조조군을 숲속으로 꾀어내어 화공으로 공격한 일도 있다.
결국 선비족은 고구려에 굴복하여 속국이 되었고,[3] 유리왕은 그 공로로 부분노에게 식읍을 하사하려 하였다. 그러나 부분노가 모든 공을 왕에게 돌리며 받지 않자 유리왕은 부분노에게 식읍 대신에 황금 30근과 좋은 말 10필을 하사하였다.
3 그 외에
사극 주몽에서는 본래 대소왕의 부하로 등장하며, 대소의 밀명을 받고 주몽을 암살하려 다물군에 위장 잠입을 했었다. 원래는 정정당당한 싸움을 원했던 부분노였지만, 가족들을 볼모로 잡힌 탓에 어쩔 수 없이 대소의 명령을 따라 주몽의 군대에 잠입한 것.
그런데 다물군에 머무르면서 주몽의 인품에 감화되어 주몽에게 모든 것을 자백한 다음 죽여달라 한다. 하지만 부분노의 가족이 볼모로 잡힌 사실을 안 주몽은 오히려 이걸 이용해서 대소를 역관광시키기 위해 부분노로 하여금 부여로 돌아가 자신을 죽였다고 거짓보고를 하라 이르고, 죽음을 가장하고 한동안 자취를 감춘다.
이후 부분노는 부여로 돌아가 가족들을 무사히 피신시키고, 대소가 계루를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을 때 부여군으로 참여했다가, 주몽과 약속한 장소에 부여군이 진입했을 때 다물군과 연합해서 부여군을 참패시키는 공을 세웠다.
이후 건국한 고구려 군의 장수로서 마지막회까지 활약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