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

(제갈양에서 넘어옴)

개그콘서트의 코너 감수성의 캐릭터에 대해서는 대갈공명 문서를, 한국 만화 선녀강림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제갈량(선녀강림)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촉한의 승상
신규 책봉제갈량시호 하사
촉서 「제갈량전(諸葛亮傳)」
제갈량
한나라 승상 무향후 제갈량(漢丞相武鄉候諸葛亮)

諸葛亮
(181 ~ 234)[1]

촉한을 얻었고, 을 얻었으며, 를 얻었다. - 세설신어
내가 공명을 얻은 것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다. - 유비관우, 장비에게.

1 개요

중국 후한 말에 태어난, 촉한의 초대 승상, 명재상. 정사 삼국지에 의하면 진수의 평으로 상국(相國)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다고 되어있다. 계한보신찬에는 제갈량이 선제(유비)의 유명을 받아 재상이 되었다고 나오는데 제갈량은 이미 유비 생전에 승상이었으므로 상국은 이때 받은것으로 보인다. 상국은 최고 재상인 승상의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왕보다 높고 황태자와 같은 급이며 황제 바로 밑인 엄청난 벼슬이다. 워낙 엄청나다 보니 제갈량 이전에는 전한소하, 조참, 여산, 후한동탁만이 이 지위에 올랐다. 다만, 여산은 여씨 일족의 빽으로 얻었고, 동탁은 황제를 협박하여 얻은 것이라서 진정성 있는 상국은 사실상 소하, 조참, 제갈량 세 명뿐이다. 더불어, 제갈량 사후에는 촉한에서 상국은 물론이고 승상도 영구 결석이 되면서, 멸망 때까지 승상이 된 자는 아무도 없다.[2]

는 공명(孔明), 시호충무후(忠武侯).

책사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제갈량의 키가 당시 평균이나 평균보다 작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제갈량의 신장은 8척(한대 척으로 따지면 189.6cm)이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한 척이 23.7cm으로 당시로서(물론 지금도) 큰 편이었다. 그러나 이는 중국사람들의 허풍을 좋아하는 습성으로 인해 모두다 믿을 것은 아니고, 적어도 그 당시의 평균 키 보다는 컸었다는 것은 확실한 듯 하다. [3]

또한 제갈량의 외모가 매우 뛰어났다고 정사에 기록되어 있는데, 진수는 제갈량전에서 "제갈량은 어려서 빼어난 재주와 영웅의 그릇이었고 키가 8척에 용모가 매우 뛰어나 그 당시 사람들이 뛰어난 인물로 여겼습니다."라고 서술한 바가 있다. 관우의 트레이드 마크가 수염, 청룡언월도, 적토마, 춘추좌씨전이라면 제갈량의 트레이드 마크는 학창의, 윤건, 백우선, 사륜거.[4]

2 정사

2.1 유비를 따르기 전까지

그의 원래 고향은 서주에 있는 낭야라는 곳인데 동오서성도 이곳 출신이다. 조조서주대학살 즈음에 형주로 이사를 해서 서주대학살 때문에 해를 입은 것이 아닌가 하는 설도 존재.[5] 사서에 따르면 제갈량의 부모가 일찍 죽자 숙부인 제갈현에게 의지하게 된다. 그런데 제갈현이 예장태수로 부임하게 되어 같이 따라갔지만 제갈현이 예장에서 부득이하게 쫓겨나 유표에게 의탁하게 되자 형주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제갈현이 죽자 제갈량은 몸소 밭이랑에서 농사지었으며, 양부음(梁父吟)을 부르기 좋아했다. 늘 자신을 관중, 악의에 비교했으나 당시 사람들은 이를 수긍하지 않았다. 오직 친한 벗으로 지내던 최주평, 서서만이 참으로 그러하다고 인정했다.

젊은 시절 공부한 방법이 당시로선 특이한 편이었다. 당시 선비들은 글자 하나하나를 정독해가며 세세한 구절까지 이해하려고 노력했는데 제갈량은 책 전체의 내용을 파악하는데 더 신경썼다고 한다.[6]

2.2 촉한승상이 되기까지

양양기에 따르면 수경선생 사마휘는 유비를 만난 자리에서 유비가 그에게 현 정세에 대해 질문하자 "이를 아는 건 시무를 아는 준걸 뿐이며 와룡(= 복룡)과 봉추인 제갈량과 방통이 바로 그들이다."라고 대답하며 은근히 제갈량과 방통을 높인다.

유비가 신야에 주둔 중일 때 유비는 서서에게 제갈량을 데려오라고 했으나 서서는 제갈량은 와룡이니 직접 가서 만나라고 말했다. 유비가 직접 제갈량을 방문했으나 세 번 만에 만날 수 있었고 제갈량은 유비에게 형주, 익주를 차지하라는 조언을 한다. 정사에서는 그냥 세 번 만에 만났다고만 기록되었지만 연의에서는 삼고초려로 각색된다. 어쨌든 추처낭중의 꼴로 제갈량은 유비와 인연을 맺게 되고, 정식으로 등용되어 유비의 든든한 심복 중 하나가 된다.

유비와 제갈량과의 정이 날로 깊어져 관우, 장비 등이 불쾌한 기색을 보이자 유비가 “내가 공명을 얻은 것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다. 원컨대, 제군들은 이에 관해 다시 말하지 말라.”라고 다독이자 불평을 멈췄다. 이것이 고사성어 수어지교의 유래다.[7]

유표는 채부인의 말을 받아들여 작은 아들인 유종을 사랑하고 유기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유기는 제갈량에게 겨우겨우 졸라서 계책을 듣게 되었다. 제갈량의 계책은 안에 있지말고 밖에 있는게 안전하다는 것이었고 때마침 황조가 죽자 유기는 밖으로 나가 강하태수가 되었다.

갑자기 유표가 죽고, 유종은 조조에게 항복했다. 유비는 소식을 듣고 군사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왔다. 제갈량은 서서와 함께 뒤따랐는데 조조가 추격해 격파하고 서서의 모친을 붙잡았다. 서서는 모친이 인질로 잡히자 유비에게 인사하고 조조에게 갔다.

제갈량은 동오의 손권을 조조와 맞서야 한다고 설득하여 유비와 손권과의 동맹을 만든다. 이후 조조는 적벽대전에서 패해서 물러가고 유비는 형주,익주를 얻게 된다. 유비가 익주를 공략할 때, 장비, 조운과 더불어 형주에서 원군을 이끌고 와 동쪽에서부터 익주 땅을 평정해 나갔다. 이후 제갈량의 제안으로 유비는 황제에 오르며 제갈량은 승상에 임명된다. 이때 당시부터 녹상서사도 겸했는데, 즉, 제갈량이 내외조를 모두 장악한 형태가 된다.[8]

이릉대전 이후 유비는 병이 깊어지자 성도에 있던 제갈량을 불러 뒷일을 부탁했다. 제갈량에게 말했다, “그대의 재능이 조비의 열 배에 달하니 필시 나라를 안정시키고 끝내 대사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이오. 만약 내 아들이 보좌할 만하면 보좌하시고, 그가 재능 있는 인물이 아니면 그대가 스스로 취하도록 하시오.”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신이 감히 신하로서의 헌신을 다하고 충정의 절에 힘쓸 것이니, 죽기로 계속할 것입니다.” 유비는 또 유선에게 말했다, “너는 승상과 함께 일을 처리하고 승상을 이 아비처럼 섬겨라.”

2.3 남만 정벌

촉한의 정사(政事)는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제갈량에 의해 결정되었다. 남중(南中)의 여러 군(郡)이 아울러 반란을 일으켰는데, 제갈량은 이제 막 대상(大喪)을 당했으므로 곧바로 군사를 일으키지 않았고, 또한 오나라에 사신을 보내 동맹을 성사시켰다. 225년에 제갈량이 군사들을 이끌고 남쪽을 정벌한다. 이 공으로 제갈량은 부월, 호분 60인, 고취(취주악대) 1부, 곡개(曲蓋, 대가 굽은 일산) 하나, 우보(羽葆, 새깃으로 장식된 일산)을 하사받았다.

남만왕 맹획과 관련되어 내려오는 유명한 칠종칠금의 고사만 보더라도 이민족에게 강경책과 회유책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굴복시키고, 이 후 교화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것으로 보여진다. 정사 배송지 주(한진춘추)에도 이름이 기록된 맹획은 정3품 어사중승으로 이는 감찰직 중 가장 높은 자리이며, 맹획의 일가붙이 쯤으로 추정되는 맹염은 호보감(금군 보병사령관, 오늘날로 치면 대통령 경호실 차장 격)이 되어 5차 북벌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당시 삼국 중에서도 제갈량의 이민족 정책은 가장 성공한 정책으로 평가 받는다. 제갈량은 인사를 배치할 때 지방관리는 익주파를 기용했는데, 비슷하게 남중 일대에도 관리는 이회, 맹획과 같이 그 지역에 영향력 있는 사람을 기용해서 불만을 최소한으로 줄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촉한의 이민족 수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이민족 수탈로 알려진 남중의 경우, 완전한 이민족이라고 보긴 어렵다. 애시당초 이 일대는 전-후한시대부터 제국의 화폐를 조달하는 광산이 위치해 있었고, 철과 소금, 비단 산업으로 중원의 부자들조차 버로우할 만큼 갑부들이 창궐했던 곳이다. 한 말엽에 무정부상태가 몇십년 이어지면서 엉망이 된 거지, 무슨 미개척 밀림지대에 우가우가 이민족들이 뛰노는 이런 곳은 아니었다는 것. 당장 이민족이라고 말 나오는 남쪽 인물들은 고정과 유주 정도다. 제갈량 본인도 당시 기준으로는 깨어있는 사람에 해당되었지만, 이민족을 오랑캐라고 보는 건 여전하였다. 물론 당시 사람의 사고방식을 지금 기준으로 판단할 순 없는 일이다. 다만 제갈량은 남만의 이민족들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는 점을 파악하고 있었고 이는 마속과의 대화에서도 드러난다.

또한 남정 이후에도 반란은 일어났는데, 제갈량은 남정에서 다시 반촉 운동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한 게 아니라 대규모의 반촉 무력시위를 억제하는게 목적이라고 보여진다. 이릉대전에서 패배하고 유비가 병상에 누워있는 동안, 대규모의 무력 항쟁이 있었다. 그리고 제갈량의 기대대로 그가 살아있는 동안 대규모의 반촉 움직임은 일어나지 않았다. 제갈량이 남중이 평정되자 모든 곳에 현지 군장들을 임용하고 군사를 물렸을때,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에게 '지금 나는 군사를 남기지 않아 운량할 필요를 없애고, 기강을 대략적으로만 정해 이인과 한인들이 대체로 편안케 하려 하오'라고 말했는데 제갈량은 복종시키거나 회유한 이민족들의 마음을 얻고 촉한의 행정력, 영향력을 넓혀 이를 통해 남만의 풍부한 물자를 얻어 촉한과 남만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정책을 펼쳤다고 할 수 있다.

제갈량 이후 시대에는 마충, 장억, 곽익 등의 인물들이 이런 기조를 이어받아 남만지방을 경영하였다. 이들은 이민족들에게 사후 비까지 세워지는 등 인심을 얻었으며 반란의 규모도 유비 사후 건흥 연간에 있었던 대규모 반란과는 달리 현지 사령관이 진압할 수 있는 수준 정도가 되었다. 제갈량 스스로가 남만정벌 이후 출사표에서 '지금 남쪽을 정벌하여 인마와 무기, 갑옷의 풍족'을 언급하고 있으니 제갈량의 남만 정벌은 여러모로 촉한에 이득을 가져다 주었다고 할 수 있다.

2.4 제갈량의 북벌

제갈량은 출사표를 올리고 북벌에 나선다. 북벌의 동기에 대해서는 그냥 '위를 멸망시키기 위해서'라고 출사표 등에 나오는데 제갈량의 전략/전술이나 진태전의 구절을 볼 때 사실은 옹주/양주를 점령하여 촉을 더 강하게 만드는 것이 제갈량의 목표였다는 설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제갈량의 북벌 항목 참고.

여러 신하들의 의견은 왕경이 도주해버린 후라 성을 굳게 지킬 수 없으므로, 강유가 만일 양주로 가는 길을 끊어 사군의 백성과 만족을 겸병하여 관농의 요충지를 점거한다면 왕경의 군사를 전멸시키고, 농우를 멸망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응당 대군이 사방으로 모이는 것을 기다린 후에 강유를 공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장군 사마문왕이 말했다. "옛날 제갈량은 항상 이런 뜻을 품고 있었지만, 끝까지 실현시킬 수 없었소. 이처럼 큰 사업과 계책은 강유에게 맡길 만한 일이 아니오."

어림에 따르면 제갈무후(제갈량)가 사마선왕(사마의)과 위수 가에서 장차 싸웠는데, 선왕은 융복(戎服)을 입고 일에 임하며, 사람을 보내 무후(제갈량)를 살피게 하였다. 과연 무후는 흰 수레를 타고, 갈건(葛巾)을 쓰며, 백우선(白羽扇)을 쥐고 삼군(三軍)을 지휘하니, 중군(眾軍)이 모두 그에 따라 나아가고 멈추고 하였다. 선왕(사마의)이 듣고 감탄하여 말했다.

가히 명사라 이를만 하도다!

2.5 죽음

제갈량은 오장원에서 사망한다. 다음 당초에 유선에게 올린 유언이다.

“성도에 뽕나무 8백 그루가 있고 메마른 땅 열다섯 경(頃)이 있으니 자제들이 입고 먹기에는 스스로 넉넉합니다. 신이 밖에서 임무를 받들 때는 따로 조달할 것 없이 제 한 몸의 먹고 입는 것은 모두 관부에 의지했으므로 따로 생활의 방도를 차리게하여 적은 양을 보태지는 않았습니다. 신이 죽었을 때 안으로 여분의 비단이나 밖으로 남은 재산이 있어 폐하를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죽은 뒤에 보니 그 말과 같이 가진 재산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제갈량이 엄격한 통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원망한 백성들은 없었으며 오히려 제갈량이 사망했을 때는 백성들이 사당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지만 유선이 듣질 않자 길거리에서 제사를 올리고 융이(즉, 주변 부족들)마저 들판에서 제사를 올려 결국 제갈량의 사당을 짓게 했다는 구절이 양양기에 기록되어있다. 거기다가 남만에도 제갈량을 기린 장소가 많으며 심지어 제갈량이 물을 떴다는 우물도 존재한다.

3 연의

정사에는 엄정한 정치가의 면모가 주로 부각되지만 연의에서는 천재 군략가의 면모가 주로 부각된다. 정사의 제갈량이 원칙에 충실한 청렴한 정치가라면 연의의 제갈량은 남보다 우월한 두뇌로 상대를 농락하는 천재형.

연의에선 이릉대전의 줄 초상 이후 후반을 책임지는 스타 캐릭터다. 사마의는 당시에는 위나라의 장군 중 하나일 뿐이라 혼자 활약하지도 못하고 크게 이곳 저곳에 개입하기 힘든 데 비해, 제갈량은 승상이라는 위치 때문에 엮일 이벤트가 상당히 많다. 삼국지연의에서 유독 제갈량만 심하게 띄워지는 건 후반부를 책임져야 할 주인공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과 관련된 일들은 현재까지도 굉장히 자주 쓰여지는 것들이 많다. 가장 대표적으로 삼고초려읍참마속이다.

삼고초려는 유비가 제갈량을 설득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내용인데, 제갈량은 유비의 정성에 감동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읍참마속원칙을 위하여 자기가 아끼는 사람을 버린다는 뜻이다. 북벌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격전지였던 가정에서 마속이 부장이었던 왕평의 말을 무시하고 산 봉우리 정상에 진채를 세웠다가 대패하여 촉군이 또다시 북벌을 포기하게 된다. 후에 제갈량이 군율을 위해 마속을 참하였다. 이것이 바로 읍참마속의 유래다. 과거에 유비가 제갈량에게 마속을 중하게 쓰지 말라고 충고한 적이 있기도 하였다.

연의의 후반부의 주인공은 사마의제갈량이다. 정사에서는 사마의의 우주방어로 인해 재미없는 부분을 제갈량과 사마의의 두뇌 싸움대결로 꾸며 놓았다. 사마의제갈량에게 대부분의 작전 대결에서 패하지만 이후로는 계속 우주방어.

제갈량은 장기전으로 끌고가던 사마의를 밖으로 나오게 하기 위해 호로곡에 농사를 짓는 것처럼 위장한다. 이후 계속해서 호로곡에서의 무력한 모습을 보여준 후, 사마의가 호로곡을 점령하러 올 것을 예측한 공명은 호로곡에 화약을 설치한다. 이후 자신에게 불만을 품는 위연을 미끼로, 사마의를 호로곡에 유인하는 데 성공, 바로 바위를 굴려 골짜기의 입구를 막아버리고 화약을 작동시켜 사마의는 공명의 함정에 걸려든다. 하지만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는 바람에 화약들이 다 터지지 못하고, 결국 사마의는 무사히 호로곡에서 벗어나게 된다. 실제로 사마의가 아주 극적으로 탈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공명은 처음에는 드디어 사마의를 잡은 줄 알고 기뻐했으나, 골짜기 위로 비가 내리는 것을 보고 침울해하더니, 결국 사마의가 탈출했다는 보고를 듣고 "일을 꾸미는것은 사람이되, 이루는 것은 하늘이다."라는 말을 한다. 공명 입장에서는 무심하기 그지 없는 하늘이었을듯.

호로곡 패배 이후 사마의는 정말 진채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에 공명은 사신을 시켜 여자 옷이나 장신구 등을 사마의에게 보내 도발하지만, 사마의는 참아내고 사신과 태연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사마의가 공명은 어떻게 지내냐는 질문에 사신은 "잠을 적게 자고 식사를 잘 하지 않으시며 작은 형벌까지도 직접 살피신다"정직하게 말해주고, 이를 들은 사마의먹는 것은 적은데 그렇게 과로해가지고 오래 살겠느냐라고 말한다. 여기서 나온 사자성어가 식소사번. 결국 머지않아 그의 예측대로 제갈량은 위독해진다.

갈수록 건강이 악화되자 어느날, 강유10일동안 촛불이 꺼지지 않고, 하늘에 기도하면 천명을 늘일 수 있는 주술이 있는데 써보는게 어떻습니까라고 제안해 제갈량은 10일 동안 기도 의식에 들어간다. 그러나 9일째, 우연히 밤 하늘을 보고있던 사마의가 제갈량의 별이 흔들리는것을 보고 야습을 하게 된다. 위연이 적의 기습에 강유의 제지를 뿌리치고 제갈량의 침소에 들어가다 촛불을 떨어뜨려 제갈량의 생명연장은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제갈량은 이후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 되었고 하늘을 보면서 너르고 너른 하늘아, 너에게도 끝간데가 있더냐?라는 슬픈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후 제갈량은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온 지식들을 모아만든 책을 강유에게 물려주고, 자신이 죽은 후에 후계자로 장완비의를 지명하며, 위연이 반란을 일으킬 경우 제압할 계책까지 알려준 후, 숨을 거둔다.

제갈량이 죽자, 제갈량의 장성이 떨어치고 이를 보고 제갈량의 사망을 눈치챈 사마의는 바로 추격해오지만, 제갈량이 미리 만들어놓은 목상을 세우고 강유가 공세로 나오자 사마의는 공명이 주술을 써서 별을 떨궈 자기를 나오게 한 줄 알고 그대로 도주, 몇 십리 동안 겁먹은 채로 도망간다.
여기서 나온 말이 사공명주생중달,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도망치게 하다'이다.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마의는 탄식하고 다시 추격해보지만 이미 촉군은 멀리 퇴각한 상태. 이후 사마의는 돌아오며 제갈량의 진채를 보며 "공명은 참으로 기재였다!"라는 말을 한다. 이후 제갈량이 일찍 죽게되면서 사마의는 역사의 주인공이 되기도한다.

요시카와 에이지 삼국지에서는 제갈량이 죽자 유선이 제갈량의 관 위에 엎드려 '하늘이 나를 멸망케 하려 한다.'며 엉엉 울었다고 한다. 이문열 삼국지에도 차용된다. 제갈량이 있었던 기간은 11년, 사후 유선의 통치기간은 29년으로 훨씬 더 길어서 제갈량의 죽음이 촉한의 멸망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는 해석도 있지만, 제갈량이 세상을 떠난 후 이전처럼 견실한 국가를 이루며 공세를 펼치기 어렵게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4 인간 관계

4.1 가족 관계

  • 황부인 : 제갈량의 부인이자 양양의 명사인 황승언의 딸. 머리는 누렇고 얼굴은 검어 갸루 외모는 그리 볼품 없으나 총기와 재주는 탁월했다고 한다. 이 결혼을 통해 제갈량은 양양의 상류 귀족층에 진입하였다. 황승언은 황부인의 외모를 폄하하면서도 그 재기만큼은 제갈량에게 어울릴 것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딸에 대한 자랑이기도 하지만 공명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기도 하다. 황부인이 추녀였지만 제갈량은 첩도 두지 않았다고 한다.
  • 제갈근 :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제갈량의 친형. 제갈량보다 7살이 많다. 제갈 형제의 숙부인 제갈현이 제갈량과 제갈균, 그리고 제갈량의 큰 누이와 작은 누이를 데리고 남하할 당시, 고향의 전원과 묘지를 돌볼 사람이 필요했기에 관례를 치를 나이가 된 제갈근이 계모를 모시고 영도에 남아 이들은 13여 년 동안 생이별을 하게 된다. 젊어서 낙양에서 유학했으며 결국 자신도 전란을 피해 계모를 모시고 강동으로 들어가 노숙의 인맥에 편입되어 손권의 막하에 들게 된다. 겸허하고 고아한 인품의 소유자로 장소와 함께 군주 손권의 불 같은 성격을 제어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군사, 외교적으로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으며 오나라의 신하로써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할 만큼 높은 자리에까지 올라갔다.[9] 동생인 제갈량과는 적벽대전을 앞두고 한번 만났고이산가족상봉, 근이 오의 중신, 량이 촉한의 승상이 되어서도 만났는데 사적인 얘기는 일체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혈연이 혈연인지라 손권에 의해서 대촉 외교에 많이 애용되었다. 그 형에 그 동생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케이스. 두명 다 충신 중의 충신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제갈균 : 제갈량 삼형제의 막내. 형이 유비에게 출사한 뒤 유비를 따랐으며, 장수교위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형인 제갈량을 위해 약혼을 했다하는데 정치적인 정략결혼을 한 모양이다. 부인은 임씨로, 둘 사이에서 망이라는 아들을 낳았으나 제갈망의 후사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 제갈량의 큰누이 : 괴월, 괴량 등으로 유명한 양양의 명문가인 괴씨 가문의 자제 괴기와 결혼. 제갈량이 융중에서 밭을 갈며 공부를 할 당시 경제적 부분 등 이방인인 그가 양양에 정착하는데 있어서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제갈량의 작은누이 : 양양의 명문귀족이자 명성 높은 선비인 방덕공의 아들인 방산민결혼. 마찬가지로 제갈량이 양양에 정착하고 공부하는데 있어서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 제갈첨 : 제갈량과 황부인 사이에서 난 장남.[10] 촉나라에서 벼슬을 하여 상서부사의 지위에까지 올랐으나, 263년 면죽에서 위나라 장군 등애에게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 제갈상 : 제갈첨의 장남으로 아버지와 함께 싸우다가 전사한다.
  • 제갈경 : 제갈첨의 차남으로 촉 멸망 때는 나이가 어려서 아버지, 형과 달리 참전하지 않았다. 촉이 멸망한 뒤 하동으로 이주했으며 서진 아래에서 강주 자사를 지냈다.
  • 제갈교 : 제갈근의 차남. 제갈량의 양자로 들어가 부마도위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 제갈반은 익무장군을 역임했다. 제갈첨이 태어난 다음 해에 요절했지만 아들 제갈반을 남겼다.
  • 제갈반 : 제갈교의 아들. 제갈량에게 있어선 양손자에 해당되는데, 제갈근의 장남인 제갈각과 그 가족이 오나라에서 죽임을 당해 제갈근의 대가 끊겼다. 훗날 손침이 주살되고 제갈각이 복권되자 오나라로 돌아가 제갈근의 후사를 이었다.
  • 제갈각 : 제갈근의 장남인 관계로 제갈량에게는 조카. 제갈근 사후 손준과 더불어 오나라의 실세가 되었지만 오에 막대한 손실을 초래하게 했고, 전횡을 일삼은 것을 계기로 살해당하고 만다. 이 때문에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제갈씨 능력자 3인방(제갈량, 제갈근, 제갈각) 중 혼자만 매력이 유난히 낮다.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는 둘 다 90대를 호가하는 매력이지만 제갈각 혼자만 50~60대의 매력이다. 매력 이외의 능력은 작은아버지와 거의 흡사할 정도의 귀재.
  • 제갈과 : 가상인물. 설화에서 제갈량의 딸로 등장한다. 신선술을 좋아하였으며, 선과를 얻고싶어하여 이름을 과로 바꾸었다. 성도에는 현재 유성모선사승연갈녀지사라는 사당이 있으며 여기에 모셔져 있는데, 물론 제갈량에게 딸이 있다는 역사적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 제갈규 : 제갈근, 제갈량, 제갈균의 친부. 자는 근공. 제갈풍의 자손이나 몇 대 자손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중국 학계에서는 제갈풍과 제갈규 사이의 공백기를 따져 약 7-8대손 정도로 추정하는 모양. 태산군의 군증을 역임했으며 부인 장씨 사이에서 3남과 2녀를 출산. 순서대로 장남 제갈근, 장녀, 차녀, 차남 제갈량, 막내 제갈균이 태어난 모양. 제갈량이 3, 4세 때 장씨가 사망하자 후처를 들였고 제갈량이 8세 전후가 되었을 때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제갈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 제갈현 : 제갈규의 동생. 제갈규 사망 후 제갈규의 가족을 수습했으며, 조조로 인해 전란이 서주까지 미치자 제갈량, 제갈균, 그리고 두 명의 질녀를 데리고 남하한다. 이때 원술의 요청으로 예장 태수를 역임. 예장은 양주 자사 관할로 원술에게는 권한이 없었으며 조정의 비준도 받지 않은 모양으로, 자칭 황제원술은 한실을 무시하고 있었고 또한 군벌로써 세력을 확장하려하고 있었기에 벌어진 일이다. 이후 조정에서 예장 태수 주호가 파견되자 순순히 물러나고[11] 형주목 유표를 찾아가 정착한다. 이후 제갈현의 두 질녀가 양양의 명문귀족인 괴씨 가문과 방씨 가문에 시집을 간 것으로 볼 때, 유표가 제갈현을 후하게 대한 것으로 보인다. 그 뒤 제갈량이 17세가 되었을 때 병으로 사망한다.

4.2 친인척 관계

  • 황승언 : 제갈량의 장인. 양양의 명문귀족이며 채풍[12]의 장녀와 결혼하였다. 유표가 채풍의 차녀를 후처로 들였기에 황승언은 유표와 처형제가 되는 셈. 고로 제갈량은 유표와 장인에 해당되는 인척관계를 맺게 된다. 제갈량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제갈량에게 자신의 딸을 추천했으며, 이로써 제갈량은 양양의 명문귀족인 유씨, 채씨, 황씨, 괴씨와 인척관계를 맺게 된다.
  • 방덕공 : 양양의 이름 높은 선비. 제갈량의 작은 누이가 그의 며느리가 되기에 제갈량과는 친인척 관계가 된다. 벼슬길에 한 번도 나서지 않았으나, 유표는 그가 벼슬길에 나서 자신을 도와주기를 원해 찾아가곤 했었다. 유표가 그에게 물었다, "그대가 벼슬에 나아가질 않으니 후손에게 무얼 남겨줄 수 있겠소?" 방덕공이 답하기를, "벼슬에 나아가질 않으니 후손에게 안전을 물려줄 수 있지요." 유표는 그저 탄식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사마휘보다 10살이 많아 사마휘가 형으로 모셨으며, 제갈량의 재능을 높이 평가해 그를 자주 지도했다. 와룡이라는 별호는 방덕공의 입에서부터 퍼진 것이라 한다.
  • 방통 : 자는 사원. 양양의 명문귀족인 방씨 가문의 자제로 방덕공의 조카. 제갈량의 작은 누이가 방덕공의 며느리이기 때문에 방통과는 또 친인척에 해당된다. 사마휘로부터 봉추라 평가받았으며 촉의 참모로 일하였으나, 애석하게도 유비가 익주에 입성하기 위하여 출전할 때 일군을 이끌다 전사하였다.
  • 방산민 : 양양의 명문귀족인 방씨 가문의 자제. 제갈량의 작은 누이와 결혼하였다.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여 황문이부랑에 올랐으나 요절. 그와 제갈량의 작은 누이의 아들로 추정되는 환이 진나라에서 태수직을 얻었다.
  • 제갈탄 : 제갈근, 제갈량의 먼 친척. 같은 사예교위 제갈풍의 후손으로 고향도 같다.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였으며 진동대장군이라는 높은 지위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후에 수춘성을 근거로 기병했다가 사마 가문에 주살당한다. 때문에 당대의 사람들은 제갈량, 제갈근, 제갈탄을 빗대어 촉나라는 (제갈량)을 얻었고 오나라는 (제갈근)을 얻었으나, 위나라는 (제갈탄)를 얻었다고 평하기도 했다. 하지만 보면 알 수 있듯이 진동대장군에 오를 만큼의 인재였으며 당대 선비들에게 흠모를 받기도 한 인재인지라 용과 범은 아니었어도 준걸은 분명 준걸이었다. 그러니까 이 정도의 인재가 "개" 취급을 받았을 정도로 제갈량과 제갈근이 대단했다는 말도 된다. 먼치킨 제갈가문.
  • 괴기 : 양양의 명문귀족인 괴씨 가문의 자제. 제갈량의 큰누이와 결혼하였으며 평판이 좋은 인물이었다. 상기했다시피 위나라에서 방릉 태수를 지냈으나, 맹달이 방릉을 공격했을 때 살해당했다. 괴씨 가문의 자제인 그가 자형이라는 것만으로도 제갈량이 양양에 입지를 얻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며, 제갈량과도 교우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유표 : 형주의 주목. 한실의 먼 친척으로 유비와도 친척에 해당된다. 제갈량의 장인인 황승언이 유표와 처형처남 사이이기 때문에 또한 친인척에 해당된다.결국 유비는 자기의 머나먼 친척을 책사로 들인 것
  • 채모 : 유표의 신하로 형주의 2인자. 채모의 누나들이 둘째누나는 유표, 큰누나는 황승언의 부인이다. 즉, 제갈량에게 채모는 처외삼촌인 셈.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표의 후계자 문제 때문에 채모와는 사이가 매우 나빴다.

4.3 교우 관계[13]

북벌 때 옛 친구인 서서석도가 위에서 하급 벼슬아치에 머무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위에는 선비가 너무 많구나. 어찌 저 두 사람이 저렇게 쓰인단 말인가!" 하고 탄식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서서는 어사중승(정3품, 감사원장 격)까지 올라갔고 석도는 전농교위, 역시 동문수학한 사이인 맹건은 양주자사(도지사 급)를 거쳐 정동장군까지 해먹었다. 결코 낮은 직책이 아니다. 게다가 촉에는 구품관인법이 없었기 때문에 제갈량이 위나라의 시스템을 잘 이해 못한 점도 감안해야 한다. 특히 조비 때에는 주로 호족 등의 배경있는 인물들이 윗자리에 올랐는데 아무래도 그들보다 능력이 낫다고 보기 어려운 왕충 같은 인물들도 고위직에 앉을 걸 보면 더욱 그렇다.

  • 사마휘 : 수경이라는 별명이 붙은 인물. 인물평이 실로 정확했으며, 방덕공과 형님아우하는 사이였다. 제갈량의 스승으로써 그를 지도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재능을 높이 사 여남에 사는 풍구라는 이를 스승으로 모셔와 제갈량을 지도했다. 후에 제갈량을 유비에게 천거하였다.
  • 최주평 : 박릉 출신.[14] 아버지는 한 영제 때 사도, 태위 벼슬을 지낸 최열로 동취(銅臭)라는 고사를 남긴 사람이다. 부패 관료인 아버지와는 달리 건실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갈량이 출사하기 전 스스로를 관중악의에 비유했을 때 다른 이들은 수긍하지 않았으나 최주평과 서서만은 그 재주를 인정하고 변호해 주었다. 또한 제갈량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단점을 수시로 지적해줬는데 제갈량은 이 일을 들어 훗날 신료들에게 자신의 단점을 지적하는데 주저하지 말 것을 권했다.
  • 서서 : 자는 원직. 본명은 복. 양양에 모여있던 인재들 중의 한 명으로서, 그 재능을 인정받아 유비의 밑에서 벼슬을 하나 어머니가 조조군에 사로잡혀 위로 귀순한다. 제갈량과는 형주에서 유학하던 시기에 교우를 맺게 되었다. 제갈량이 자신을 관중과 악의에 비교할 때 진지하게 그 말을 인정했던 몇 안 되는 사람으로서 제갈량과는 유별나게 친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보인다. 제갈량보다 먼저 유비를 섬기던 중, 조조에게 넘어가게 되었고 그대로 출세했다.
  • 석도 : 자 광원. 제갈량과 형주에서 함께 유학을 했던 인물. 제갈량과 우의가 상당히 깊었다. 조조가 형주로 남하할때 임관해 군수, 전농교위 등의 관직을 거친다.
  • 맹건 : 자 공위. 역시 제갈량과 형주에서 함께 유학했던 인물. 향수병을 이기지 못해 고향에 돌아가 조조 밑에서 벼슬살이 했다. 친구들 중에선 가장 먼저 출사한 인물. 이때 제갈량은 "중국에는 사대부가 많은데 왜 하필 고향에서 노니려 하시오." 하며 몹시 안타까워 했다. 제갈량이 기산에서 사마의와 대치할때 사마의의 편지에 답하면서 자신의 안부를 맹건에게 전해줄 것을 부탁한 걸로 보아 둘의 우정은 그때까지도 변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 마량 : 양양의 명문귀족인 마씨 가문의 아들. 백미(흰 눈썹을 가진 기재)라는 고사의 주인공이기도 하며, 제갈량보다 나이가 어려 제갈량을 존형이라 불렀다. 제갈량과 의형제를 맺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로 친분이 깊었던 인물로 그를 따라 촉에서 벼슬을 하나 이릉대전 때 사망.
  • 마속 : 마량의 동생. 제갈량이 남정북벌을 준비하는 동안 자주 군략을 의논했던 상대. 마량의 동생이었기 때문에 제갈량이 더더욱 총애했던 것으로 보이나 결국 제1차 북벌 때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고 제갈량은 울면서 마속을 베었다.(읍참마속)
  • 장완 : 제갈량의 후임자. 일찍이 근무태만 혐의로 유비가 죽이려 했으나 그 능력을 알아본 제갈량에 의해 목숨을 건지고위의 사례와 역관계 제갈량 시대에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북벌기간 동안 촉군의 후방을 지원했고 제갈량의 뒤를 이어 사실상의 제1인자로 촉한의 국정을 책임졌다.
  • 조운 : 제갈량과 뜻이 잘 맞아 사실상의 교우.[15] 조운이 죽자 가장 슬퍼한 이 역시 제갈량이였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두사람이 각각 문과 무에서 정점을 찍고 있다. 제갈량의 인간관계에 속하는 모든 이들 중 최강자. 실제로도 제갈량은 조운에게 많이 의지했는데, 그 이유 역시 조운의 노련한 무력과 풍부한 실전 경험 때문이었다. 덕분에 제갈량이 여자가 된 창작물(삼국전투기, 여자 제갈량 등)에선 조운이 남편이다... 황부인은?
  • 강유 : 제갈량이 북벌 중에 발굴한 젊은 인재. 기성 출신으로 일찍부터 정현의 학문(훈고학)을 익히며 한실 부흥에 뜻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1차 북벌 당시 촉한에 귀순했고 그 재능을 알아본 제갈량이 중앙에 그를 추천하여 군사 경험을 쌓게했다. 이후 촉한의 핵심 지휘관으로 성장했으며 장완과 비의 사후 현상유지에 급급한 유선 때문에 망국루트를 타는 촉한의 마지막 보루가 된다. 연의에서는 제갈량이 평생동안 병법을 연구하여 만들어낸 심서를 강유에게 물려준다. 그걸 바탕으로 북벌을 계승하였으나, 제갈량만한 기반이 없는데다(위나라 출신의 항장이니까) 정치력이 모자라(싸우는 것 말고는 염두에 두지 않은 듯그게 아니라도 내부에서 힘을 갉아먹는 사람이 넘쳐났다.) 스승의 나라를 지키지 못하였으며, 촉을 점령한 위군 상대로 반간계를 쓰다가 실수로 패사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최후는 연의에서는 자결이지만 정사에서는 마지막까지 분투하다가 죽었다.
  • 엄준 : 손권이 황제가 되자 위위로 임명되어 촉한에 사자로 갔는데, 제갈량이 그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삼국지연의에서의 그의 장면을 알고 있다면 참 눈물이 나는 장면. 호구 왔능가?

5 주요 정책

  • 법 제도 정비 : 촉과의 제정, 촉과는 어떤 내용을 갖고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전해지지 않지만, 제갈량 사후 상파라는 말단 관리의 일화를 보면, 군 단위의 횡령 사건을 2년에 걸쳐 수사했고, 무죄가 드러나자 관련 인물들을 방면하고 승진시켰다고 한다. 의심만 받아도 목이 날아가던 위나 오에 비하면 체계적인 재판수사가 이루어 졌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 비단 산업 육성 : 촉의 비단은 이미 한대부터 유명했는데 제갈량은 여기에 최신 직조기술을 도입하고, 비단을 물에 세척해 빛을 선명하게 하는 방법을 개발하여 색과 무늬가 있는 비단을 유명하게 하였음은 물론, 아예 대단위 직조공업단지를 조성해서 비단 산업을 국가사업으로 육성한다. 이 덕분에 삼국시대 들어 그 명성이 더욱 높아져 거의 유일한 경쟁 대상이던 중원의 양읍이 순견 산업으로 전환해버릴 정도였다. 촉 멸망 당시에도 국고에 무려 80만 필이 있을 정도. 위의 조비조예도 촉의 비단을 애용했다고 하는데, 조예는 일본국 여왕 비미호가 조공하자, 그 답례로 촉의 비단을 내렸다고 한다. 후의 일이지만 당 왕조 대에 이르면 1년에 10만 필에 달하는 비단을 조정에 진상할 정도. 진상품이 이 정도면 교역량은 말할 것도 없다.
  • 도강언 정비 : 도강언은 이 때도 넘사벽급의 수리시설이었지만, 제갈량은 1천 2백명의 수리공정 전담부대를 조직해서 2교대제로 도강언의 상태를 점검하게 하고, 9리에 달하는 제방을 구축해서 도강언의 기능을 강화한다. 초주 같은 사람조차 '익주에는 다른 동네에서 일어나는 가뭄 같은 건 있을 수 없고, 천하가 우리를 하늘의 곳간이라 한다.'고 말할 정도.
  • 군사 제도 : 팔진을 정립했다. 이릉대전 때의 묘사[16]를 보고 이문열은 이걸 깠지만. 사실 팔진은 무슨 트랩 같은 게 아니라 군의 포진법이다. 팔진을 훈련했다는 건 후대의 원앙진 이나 서양의 팔랑스, 테르시오같은 당대 기준으로 최적화된 전투 진형이다. 실제로 제갈량이 정립한 군사 제도는 매우 우수해서 사마소가 촉나라를 멸망시킨 뒤 가장 먼저 제갈량의 군사제도를 배워오게 했다고 하며, 과장은 있겠지만 한참 뒤인 송대에 이르기까지 제갈량이 개량한 팔진법이 전래되었다고 한다. 당태종 이세민도 신하들과 군사를 논하며 제갈량의 이름을 거론했다고 한다.
  • 소금 산업 : 촉의 소금은 지하에 흐르는 염수를 끓여 소금을 정제하는 방식으로 얻었는데, 순도가 높고 알갱이가 커서 고가로 거래되었다고 한다. 제갈량은 남부 일대에서 일종의 비법처럼 전해지던 천연가스(화정)를 사용하는 방법을 개량해서 소금의 순도를 한층 높였다.
  • 무기 개량 : 촉에는 철광 또한 풍부했는데, 제갈량은 철광 개발을 독려하고 그 무렵 개발되던 백련강(두드려서 잡다한 성분을 제거하는 방법)과 쉬화법 등의 최신 제련기술을 도입, 갑옷-투구와 무기류를 개량했다. 촉의 전설적인 대장장이 포원이 만든 칼은 쇠구슬을 가득 채운 대나무를 일격에 절단했고, 촉의 투구는 25석 쇠뇌의 일격을 버텨냈다고. 또한 쇠가시를 많이 만들어서 주요 통로에 뿌려 일종의 지뢰처럼 사용했는데, 사마의는 제갈량 사후 그를 추격할 때 병사들에게 밑에 나무를 덧댄 신을 신겨 이를 막으려 했다고 한다.
  • 화폐제도 재건 : 광무제가 도입한 오수전은 동탁의 난정으로 악화가 되는데, 촉은 일단 유파의 화폐발행으로 전시통화를 운용했고, 제갈량은 남중 정벌 후 남중의 구리광산에서 얻은 구리로 일정한 품질의 통화를 발행해 오수전 체제를 재건했다. 크기와 가치가 일정하고 공급도 안정적이어서 형주와 서북 일대에서도 신용되는 통화였다. 한말 동탁 이후로 예전 화폐는 가치를 잃었었다. 그리고 오나라도 화폐를 발행했었지만...화폐를 발행하는 것과 그 화폐가 생명력을 얻는 것의 차이는 매우 크다. 오나라도 촉이 발행한 화폐를 썼다.

제갈량의 이러한 노력 덕분에 촉한이 조위나 손오에 비해서 인구와 자원수그리고 군주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매우 체계적이 효율적으로 돌아갔으며(한마디로 최적화가 매우 잘 되었다.) 이는 촉한이 지속적인 북벌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유지되는 기틀이 된다.#

6 발명&이용품

정사 삼국지에 따르면 제갈량은 교묘한 구상에 능하여 여러 기계를 만들었는데 이 때문인지 전승에 의하면 여러 가지를 발명하거나 이용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c0000936_4a256516463df.jpg
c0000936_4a25651dcc8dc.jpg

물론 현대라면 모를까, 옛날에 만들어진 어떤 물건이나 개념의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다. 물론 여기엔 제갈량이 실제로 만든 물건들도 있지만 대충 유명한 인물에게 끼워 맞추기 마련이라 픽션인 부분도 많다보면 된다. 다르게 보면 이런 물건들을 발명했다고 여겨질 정도로 사람들이 제갈량의 지성을 높게 보았다고도 볼 수 있다.

  • (槍) - 이전에도 (矛)나 (戟)이 있었지만, 창은 제갈량의 발명이라고 전해진다.[17]
  • 신도(神刀) - 촉 지방의 포원을 비롯한 뛰어난 대장장이들을 모아 노력한 끝에 대단히 뛰어난 강도와 날카로움을 지닌 신도를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전해지는 일화로는 대나무 안에 쇠구슬을 넣고 칼로 내리쳤는데 일격에 안에 있는 쇠구슬은 가루가 되어버리고 내리친 곳 반대편까지 말끔하게 베어졌다는듯.
  • 원융(元戎) - 정사에서는 "연노(連弩)를 개량해 이를 원융(元戎)이라 했다. 쇠로 화살을 만들고 화살 길이는 8촌이었고, 한번 노(弩)를 쏘면 10개의 화살이 함께 발사되었다"라고 기록되었다. 연의에서는 '연노'라 불리는 연속 발사가 가능한 특수한 노(弩). 촉군이 북벌을 할 때, 비장의 무기로 사용했다. 유명한 장합이 원융에 맞아 죽었다.(…) 남송(南宋)의 학자 왕응린(王應麟)이 원융노를 들어 평한 바 있는데, "서촉의 노弩는 그 이름도 무척 많았는데, 크기로는 연노만한 것이 없었다. 십시(十矢)를 군아(群雅)라 불렀으며, 시(矢)를 비창(飛槍) 또는 통칭 최산노(摧山弩, 산을 무너뜨리는 쇠뇌)라 불렀는데, 바로 공명(孔明)이 만든 원융이다."하였다.게임에서 이거 하나면 개꿀빤다
  • 명광개(明光鎧) - 이후의 갑옷인 명광개와 유사한 것을 제갈량이 발명하여 촉군에서 사용했다고 한다. 이후에 발전하여 명광개가 되어 중국에서 널리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 수전(手箭) - 용수철이 설치된 통 안에 화살을 넣고, 용수철의 탄력을 이용하여 작은 화살을 쏘아보내는 호신무기. 무당파의 문헌에 의하면 제갈량의 비전서(…)에서 구조를 알았다고 한다.
  • 목우유마(木牛流馬) - 연의 등의 민간전승에서는 로봇(…)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역사고증적으로는 아마도 산악의 험한 도로로 물자를 쉽게 운반하기 위한 특별한 구조를 가진 외바퀴 수레였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정사에도 이를 제갈량이 고안한 것으로 나온다.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에서는 목우유마 수레 설을 따른다.
  • 풍등-중국에는 얇은 종으로 만든 뒤 안에 작은 촛불 등을 넣어 하늘로 띄우는 소형 열기구인 풍등(風灯, 천등(天灯)이라고도 한다.)이 있는데, 이를 제갈량이 만들었다고 해서(혹은 제갈량의 모자와 비슷하다고) 공명등(孔明灯)이라고도 부른다.
  • 만두(饅頭) - 제갈량이 남만 정벌을 갔을때, 강이 갑자기 거칠어저 건널 수 없게 되었다. 이 때, 제물로 사람의 머리를 바쳐야 강을 건널수 있다는 전설을 알자 사람의 머리를 대신하기 위해 밀가루로 머리 형상을 빗어 만들어 제사를 지낸 것이 만두의 시작이라고 한다. 제갈량이 발명했다는 여러 물건들 중 정사에도 실린 확실한 물건 가운데 하나로, 삼국지 속 인물들이 이뤄낸 업적 중에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중국에서나 세계적으로나 중화 요리에서 만두가 차지하는 위상을 생각해보면 딱히 틀린 말은 아닐지도.
  • 화석연료 - 진나라 초에 쓰여진 당시의 백과사전 격인 서적인 박물지에 의하면 제갈량은 촉 지방에서 땅속에서 불길이 솟아나오는 화정(火井)이라는 곳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불을 꺼내어 암염(巖鹽)을 정제하는데 사용하도록 했다고 한다. 현대에는 지표의 화석연료를 꺼내서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로 축융은 중국 신화의 불의 신이다. 그리고 촉 지방은 천연가스가 나온다. 고대 중국인들이 그 불을 보고 축융이 사는 땅이라고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 불은 제갈량으로 인해 소금 생산과 화폐 발행의 수단으로 이용된다.(당시 소금은 귀했다. 특히 내륙지방에서는) 양나라 사람 유소(劉昭)는 화정과 소금 생산의 관계에 관해 화정의 불을 통해 끓인 염정의 물에서는 1곡斛에 4~5두斗의 소금을 얻을 수 있는 반면, 일반적인 불로는 그만큼 소금을 얻을 수 없다 하였다. 제갈량은 화정이 사용되는 방식을 검토한 뒤 천연가스의 배출구를 좁게 하여 화력을 강하게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를 실제 화정에 적용했다. 흩어지지 않고 집중된 가스는 당연히 지속적이고 강한 화력을 얻어내는 결과를 낳았다. 화정의 개발과 보수가 성공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촉한은 품질 좋은 소금을 대량으로 생산하여 유통할 수 있었다.
  • 수박 - 옛 촉 지방에서 재배되는 수박은 크고 당도가 높은데, 제갈량이 품종개량 했다는 말이 내려온다.
  • 전병 - 남은 밀가루와 고기를 이용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 보이차 - 의 한 종류로, 제갈량이 남만 원정 당시 풍토병에 괴로워하던 병사들을 치료하기 위해 발명(?)했다고 한다. 제갈량이 남니산이라는 곳에 올라가 지팡이를 꽂았더니 거기서 차나무가 솟았다고(...) 그 후 운남은 보이차 명산지가 되었고 지역주민들은 승상님 하악하악하면서 남니산의 이름을 공명산으로 바꿔 불렀다고 한다. 물론 이는 과장으로, 이미 기원전부터 사천지역과 운남지역은 차가 생산되고 있었다.
  • 백우선(白羽扇) - 제갈량의 심볼이기도 한 깃털부채. 전설에 따르면 제갈량은 수백 살 먹은 영험한 새 대붕응자조(大鵬鷹子鳥)를 멸종잡아 그 깃털로 백우선을 만들었고, 이 부채는 과거 300년, 미래 300년을 보는 신비한 힘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후대의 막장꼴 안보려고 과로사 할 때까지 북벌을 했나?
  • 팔진도 - 발명품보다는 전략에 좀 더 가깝지만 연의에서는 이것 덕분에 유비가 백제성으로 무사히 퇴각할 수 있었고, 육손은 멋모르고 들어갔다가 황승언이 구해줄 때까지 헤매고 다녔다. 삼국전투기에서는 팔각형 모양의 방진으로 해석하고 있다. 진나라 사람 이흥(李興)은 "그대의 팔진(八陳)을 미루어보면 손자와 오자 때에도 없던 것이고, 목우(木牛)의 기이함은 쉽게 본뜰 수 없도다. 신노(神弩)의 공은 또한 기묘하구나! 천정(千井)을 가지런히 쌓으니 또한 얼마나 훌륭한가!"라고 평가했다.

7 설전

제갈량은 삼국지연의 한정으로 다른 나라 사람들과의 설전에서 항상 이긴다. 참고로 그 설전에서 진 사람들 대부분은 오나라 출신이다(...).

7.1 VS 오나라

가장 격렬했던 설전은 역시 적벽대전을 앞두고 오나라에 가서 손권과 동맹을 맺으려다 오나라의 신하들과 주전론/항복론을 얘기하는 장면.[18] 여기에 대해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김홍신 평역판 기준).

  • VS 장소
장소 : 당신은 스스로를 관중악의에 비유했다. 그런데 당신이 유비군에 들어간 이후로 유비는 연패하여 한 구석에 처박히더니 이제 우리한테 손을 빌린다. 관중과 악의가 주군을 그렇게 섬겼나?
공명 : 그것은 우리 주군(유비)이 도량이 넓어서 벌어진 참사일 뿐이다. 게다가 우리가 수만 명의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게 아니라 모두 데리고 피난을 갔다. 오는 군대도 많은데 왜 항복을 하는가?
  • VS 우번
우번 : 조조의 군대가 백만이라는데, 대책은?
공명 : 그 대부분이 항복한 원소와 유표의 부하들이다. 즉 조조 자신도 못 믿는 병졸이 대부분이다. 게다가 흡수된 유표군을 제외하면 전부 북방 출신이다. 이렇 듯 제하고, 제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두려워 할 것 없다.
우번 : 그렇게 자신 있는 사람이 신야를 넘겨주고, 당양에서 대패를 하는가?
공명 : 그 수가 소수여서 비록 패했으나, 우리 그 누구도 조조를 상대로 두려워 하지 않는다. 싸울 군대가 있으면서도 항복을 생각하며, 나라를 팔아먹을 생각부터 하는 당신이 어찌 우리의 심정을 알겠는가?
  • VS 보즐(혹은 보질)
보즐 : 그대는 소진장의를 본받아 세객이 되어 우리 오나라를 농락하러 왔는가?[19]
공명 : 소진과 장의는 언변만 좋은 게 아니라 실제로 그것으로 여러 성을 탈환했다. 당신네들은 싸움도 안 하고 숨으려면서 어떻게 소진과 장의를 비웃는 거냐.
  • VS 설종
설종 : 조조를 어떤 사람으로 보는가?
공명 : 한실의 역적이다.
설종 : 조조는 이미 한나라의 삼분의 이를 차지했다. 이것은 조조가 한나라를 배반한 게 아니라 하늘의 순리가 그를 따라가는 것이다. 망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공명 : 조조는 할아버지 때부터 한실의 은혜를 입었다. 그러고도 난세를 틈타 세상을 훔치는 게 순리라면, 그대도 주군이 쇠퇴한다면 조조처럼 주군을 얕잡아 볼 것인가? 부모도 주군도 없는 패륜의 논리이니 더 이상 입 열지 마라.
  • VS 육적
육적 : 조조는 현재 한의 승상이고 그 조상으로는 한의 건국공신이었던 조참, 하후영이 있다. 반면 유비는 스스로 황손이라고 하지만 확실하지도 않고 기껏해야 돗자리나 짜던 촌부였다. 어찌 상대가 되나?
공명 : 지금의 천자께서 우리 주공을 만났을때 여러 기록을 대조하여 황손임을 확인했고, 천자뿐만 아니라 온 천하가 우리 주공을 황숙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한나라 고조께서는 똥지게나 지는 등 전형적인 농부였지만 결국엔 항우를 이기고 한나라를 세우셨다. 그럴진대 출신이나 지금의 관직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 VS 엄준
엄준 : 어떤 학문을 배우셨는가?
공명 : 학문이 뭐가 중요한가? 선비도 쓸모있는 선비가 있고 쓸모없는 선비가 있으니, 쓸모없는 선비는 고작 문장 하나하나에 심혈을 기울인다. 난 그렇게 책이나 읽고 허송세월하진 않았다.
  • VS 정덕추(혹은 정병)
정덕추 : 그대는 뻗대기만 할 뿐 배운 바가 없는 것 같다. 세상 사람들이 그대를 욕할 것 같다.
공명 : 배운 선비라고 해도 쓸모없다. 양웅은 대학자였지만 왕망을 도왔다가 급기야는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끊었다. 이러한데 어찌 학문만을 배운다고 쓸모가 있겠나?

이러한 사실을 삼국지 시리즈를 이용해 연출한 장면이 컬트적인 인지도를 갖고 있다.

그런데 저 사람들 대부분이 서주에 살던 토박이라는 점이 인상깊다.서주의 풍습은 입심 대결

서주 출신

  • 장소 (팽성)
  • 장굉 (광릉)
  • 보질 (임회)
  • 엄준 (팽성)
  • 제갈근 (낭야)

기타

  • 정병 (여남)
  • 설종 (패군)
  • 우번 (회계)[20]

7.2 VS 위나라

제갈량의 북벌 당시에는 조진의 참모격으로 따라온 왕랑과 설전을 벌였는데, 설전으로 왕랑을 죽여버리는 실로 괴랄한 모습을 보여준다.

  • VS 왕랑
왕랑 : 와룡이라 불리는 선생께서 어찌 하늘의 뜻을 모르고 전쟁하러 나오셨나?
공명 : 난 한나라의 승상으로서 역적을 토벌하러 왔는데 어찌 하늘의 뜻을 모른다는 말인가?
왕랑 : 우리 무황제께서는 원소 등과 같은 버러지들을 쳐서 나라를 평안하게 만들고, 문황제께서는 망해가는 한나라의 제위를 물려받아서 신위를 떨치셨다. 게다가 오나라도 우리에게 숙이고 들어오려는 판국이니, 항복하는 수밖에 없지 않냐!
공명 : 어찌 그런 썩은 말만 하는가? 이제 잘 들어보아라. 조조와 조비가 세운 공이 많다 한들 조조는 한실을 유명무실하게 만들고 조비는 제위를 찬탈하는 역적질을 저질렀다. 왕 사도, 그대는 효렴[21]에 뽑혀서 한나라를 섬겼는데 위나라의 벼슬을 받더니 조비의 역적질을 돕지 않았나. (여기서부터 김홍신 평역판 원문 그대로) 이 머리 허연 하찮은 것아, 늙은 수염의 도적이여! 그러고서 죽은 뒤에 어찌 한나라의 스물 네 황제를 뵙겠는가. 늙은 도적은 썩 물러가고 역적이나 불러내서 나와 승부를 가리게 하라.

촉 진영은 찬탄을 금치 못하는 반면, 위 진영은 침묵만이 가득했고, 당사자인 왕랑은 울분을 참지 못하다 그대로 사망했다.

이에 대해서 김홍신 평역판에서는 "본래 설전의 주제는 '어느 쪽이 한나라의 정통 후계자인가'인데, 이렇게 되면 위나라에는 위나라의 주장이, 촉나라엔 촉나라의 논거가 있어서 장군하면 멍군하는 의미없는 싸움이 되었다. 이에 공명은 이념의 싸움을 피하고 뭇 사람의 정서에 호소한 것이었다."라고 설명한다. 당시 설전을 보고 있던 관중들은 대부분 일반 병사들이었으므로 어려운 한실의 정통성 얘기를 꺼내기보다는 모욕감을 줘서 분사하게 한 것. 하지만 조조도 유비도 죽은지 한참 지났기 때문에 위군 쪽에서 이 문제로 난리가 날 일도 아니었고, 정작 왕랑은 편히 살다 죽었다.

이것 역시 연의에 한정된 이야기이나, 정사의 주석 제갈량집에 비슷한 일화가 있다. 화흠, 왕랑, 진군 등등의 위나라 대신들과 명사들이 제갈량에게 촉나라는 거짓 황제놀음은 그만두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위나라에 항복을 하라는 서신을 보냈다고 한다. 그에 제갈량은 답장은 보내지 않고 정의(正議)라는 반론의 글을 써, 역사의 사례를 열거하여 항복, 그런 거는 촉나라한테는 있을 수 없고, 되려 약으로 강을 제압해 통일을 하겠다고 결의를 다졌다고 한다.

조식과도 서신을 통하여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8 사상

제갈량의 사상에 대해서 유가라든가 법가라든가 하는 등의 다양한 평론이 현대에 많이 있는데, 제갈량이 제자백가를 논한 글은 제갈량집의 집본에 남아있어서 제자백가에 대한 관점에 대해서는 확실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다만 이는 제갈량 본인이 제자백가를 보는 관점이고, 현대인이 제갈량의 사상을 평가하는 관점은 이와 다를 수 있다.

는 양생에는 뛰어났으나 위험과 재난에 대처하지 못했다. 상앙은 법치에 능했으나 백성을 교화하지 못했다. 소진장의는 말재간이 뛰어났으나 쌍방이 동맹을 맺도록 하지 못했다. 백기는 성을 치고 점령하는데는 능했으나 대중을 너그럽게 포섭하지 못했다. 오자서는 적을 막는 계책을 꾸미는데는 뛰어났지만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지 못했다. 미생은 신용을 지켰으나 변화에 부응할 줄 몰랐다. 왕가는 성군을 받들어 모시는데는 능했으나 어리석은 황제를 위해 처사할 줄은 몰랐다. 허자는 명망 있는 인사들의 우열을 평가하는데는 능했으나 인재를 양성하지는 못했다. 여기에 사람들의 좋은 점을 활용하는 방법이 있다.

9 평가

승상의 사당이 어딘지 찾으니
금관성 밖의 잣나무 숲이라네.
계단에 드리운 풀은 봄기운이 완연하고
나뭇잎 사이로는 꾀꼬리 울음 울리네.
세 번 찾아준 은혜천하삼분의 계책을 내고
를 정성껏 섬긴 늙은 신하의 마음이여.
출사하여 이기기 전에 몸이 먼저 가니
후세의 영웅들은 옷깃을 적시네.
- 두보의 촉상(蜀相)

워낙에 인기인이라 이미 오래전부터 제갈량에 대한 평가는 매우 높았으며 비록 제갈량에 대한 비판 역시 없지 않았으나 고금의 쟁쟁한 인사들이 그를 높게 평가했음에는 틀림없다.

<청나라 철학자 왕부지(王夫之)>

"군사를 잘 통솔할 수 없을 때 오직 그만이 이를 통솔했고,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없을 때에도 오직 그만이 이를 다스렸다. 정치가 편안하지 못할 때 오직 그만이 이를 편안케 했고, 나라의 살림살이가 어려울 때 오직 그만이 이를 풍족하게 했다."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
"제갈량은 촉에 웅거했으되, 그의 큰 뜻은 장안까지 덮었구나."

<정사 삼국지中 진수>
제갈량은 승상이 되어 백성을 어루만지고 예법 규칙을 나타냈으며, 관직을 간략하게 하고 권부의 제도를 느슨하게 하였으며 성실한 마음을 열고 공정한 정치를 실행했다. 충의를 다하고 시대에 이익을 준 자에게는 비록 원수라도 반드시 상을 주었고, 법을 범하고 태만한 자에게는 비록 가벼운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사형에 처했다. 죄를 인정하고 반성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자에게는 무서운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석방했으며, 진실을 말하지 않고 말을 교묘하게 꾸미는 자에게는 비록 가벼운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반드시 사형에 처했다. 선행을 하면 작은 일이라도 상을 주지 않은 적이 없으며, 사악한 행동을 하면 섬세한 것이라도 처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각종 사무에 정통하였고, 사물은 그 근원을 이해하였으며, 사람의 말에 근거하여 그의 행위를 관찰하고 허위로 가득한 사람과는 함께 있지 않았다. 그 결과, 촉나라 경내의 사람들은 모두 그를 존경하고 아꼈으며, 형법과 정치가 비록 엄격하였으나 원망하는 자가 없었다. 이것은 마음을 공평하게 쓰고 상주고 벌주는 것을 분명하게 했기 때문이다. 제갈량은 세상을 다스리는 이치를 터득한 걸출한 인재로서 관중[22], 소하[23]와 비교할만하다 할 수 있다.항상 자신을 관중과 악의에 비견했으니 절반은 성공한셈

<배송지, 제갈량전中 최주평에게 제갈량이 위나라엔 뛰어난 선비가 많으니 가지말라고 말한 부분에 주석을 달며>
"만약 중화(中華)를 거닐며 그 뛰어난 재주을 펼쳤다면, 중화에 선비가 많다고 하여 어찌 가리고 막혔겠는가! 위나라에 몸을 맡겨 그 기량과 재능을 펼쳤다면 실로 진장문(진군)이나 사마중달(사마의)도 능히 서로 대등하게 겨루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그 나머지 무리들이겠는가!"

<사마의, 제갈량전中>
"천하의 기재로다!"

<북위의 재상 최호,『 위서 』 모수지전中>
"조씨와 천하를 다투지 못하고, 형주를 버리고 물러나 파촉에 들어가서 유장을 유탈하고 손씨와 거짓으로 맺어 험한 땅에 몰려, 근처의 이족에게 참람하게 고하였다. 이에 책략을 내려 조타와 짝을 이루었으니, 관소(관중과 소하)의 아필이란 말은 또한 지나치지 않았는가."

<당태종 이세민과 잠문본의 대화, 신당서中>
당태종 : 위징과 제갈량 중 누가 더 훌륭하다 보오?

잠문본 : 제갈량의 재주는 재상과 장수를 겸하니 위징이 견줄 수 있는바가 아닙니다.
당태종 : 위징이 인의를 이행해 짐을 보필하여 요순에 이르도록 하고자 했으니 비록 제갈량이라고 할 지라도 대등하지 못할 것이오.


< 당태종 이세민, 정관정요中>
"제갈량은 촉나라를 10년간 다스리면서 사면하는 일이 없었으나 촉나라는 잘 다스려졌소. 양무제는 해마다 여러 차례 대사면을 단행하였지만, 결국 나라는 멸망했소. 작은 은혜를 베푸는 사람은 큰 덕을 상하게 하오."

"제갈량은 본 받을만 하오, 나도 역대 제왕을 본 받으려 하고 있소, 그대들도 옛 재상들을 본 받으시오."


<당나라 시인 두보>
"이윤과 여상(태공망)에 백중하고 천하가 그 지휘에 따른다면 소하나 조참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습착치, 양양기中>
"파촉에서는 이후에도 오랫동안 그 통치를 연모하고 그리워했다. 사후, 묘의 건립을 요구하는 소리가 곳곳에 울려 특별히 의논하여 면양에 세워졌다."

<손초, 각무후비음(刻武侯碑陰)中>
"무후(공명)가 죽은지 거의 500년이 된다고 하지만 지금에 이르기까지 양한梁漢(촉)의 백성들은 그 공적을 노래하며, 사당에 모시는 자가 있다. 그 백성들에게 사랑받음이 이 같이 오래였다."

<서포 김만중>
"제갈공명의 학문은 그 궁극에 이른 경지를 고찰할 수 없지만 행동으로 드러난 것을 가지고 논한다면 계로의 용맹과 염구의 재예와 자공의 변설, 중궁의 천자가 될 만한 덕을 참으로 이미 겸했다. 지금 공자의 사당(문묘)에 배향 되는 사람 중 산동의 얼치기 학자나 문사나 일삼는 소인은 모두 들어갔는데도 제갈공명의 경우에는 거론하는 이가 있는 것을 듣지 못했으니 참으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강희제>
"제갈량(諸葛亮)이 이르기를, ‘몸과 마음을 다하여 나라에 이바지하되 죽은 뒤에 그친다.’고 하였으니, 인신(人臣)이 된 자는 오직 제갈량과 같이 할 수 있어야 한다."

<정도전>
촉한의 선주(先主)는 한나라의 후손으로, 공명 같은 왕좌지재를 만나 군사를 출동하여 역적을 토벌하되 삼대(三代: 하夏·은殷·주周)처럼 군사를 동원함에 있어 도(道)가 있어 거의 한나라 왕실을 회복할 듯 하였다. 비록 하늘이 돌보지 않아 선주가 죽고 무후도 죽어 비록 공업은 끝을 맺지 못하였으나, 그 성취한 바는 참으로 컸었다.

<권근>
제갈공명은 남양 땅에서 용처럼 누웠다가, 선주의 삼고를 기다린 후에 일어났으니, 이는 곧 이윤(伊尹)이 밭이랑에서 갑자기 깨달은 것과 같다. 두 차례의 출사표는 의론이 정대하여 이훈(伊訓)ㆍ열명(說命)과 함께 참고하여 볼 것이다. 그러므로 나아가고 처하는 큰 절개와 충성ㆍ대의가 삼대(三代) 이후로 유일한 사람이었으니, 그 성심을 열어 공도(公道)를 편 것은 실로 재상의 법이 될 만하였다. 비록 운수가 옮겨가 몸이 죽어서 공업을 이룩하지는 못하였으나, 그렇다고 어찌 이것 때문에 저것을 버리겠는가.

<신숙주>
"불 꺼질 듯 한나라 지킬 수 없었는데

위기에 직면하여 명 받들어 자기 한 몸 잊었네
사람을 논함에 꼭 성패를 따질 것이 아니노라
천고에 아직도 팔진도가 전해지고 있으니"


<이산해>
군신의 지우에 소융이 움직였으나 君臣知遇動昭融

유가의 운수가 다했음을 어이하리요 其柰劉家運已窮
두 표문의 충성이 천고에 비추나니 兩表忠誠照千古
성패를 가지고 영웅을 폄하하지 말라 莫將成敗少英雄


<이순신>
恢復思諸葛 중원을 회복하던 제갈량이 생각나고

長驅郭子儀 위기를 막아내던 곽자의가 그립구나


<이순신 - 이충무공전서 진린과의 대화에서>
"내 지난번 천문을 보니 대장별이 떨어지던데, 공이 이를 모르지 않을것인즉, 어찌 무후의 기도법을 쓰지 않는 것이오?"

"내 충성이 무후만 못하고, 내 덕망이 무후만 못하고, 내 재주가 무후만 못하여 세 가지 다 무후만 못하매 무후의 기도법을 쓴다고 해도 하늘이 능히 들어주시겠소?"


<안정복>
그러나 와룡(臥龍)을 위해서는 언젠가 한번 변무(辨誣)하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문로(門路)와 연원(淵源)은 비록 우리 유학의 정통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백세를 두고 사표가 될 만한 인물임에는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세상에서 그를 논하는 이들이 허다히 근본은 버리고 지말(枝末)만 따지고 정상적인 것은 소홀히 봐 버리고 괴이한 것만 믿는 통에, 그의 정대광명한 사업이 결국 풍운이나 일으키고 팔진도(八陣圖)나 쳤던 일에 가리워져 버리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통한스러운 일입니까. 그의 계자서(戒子書) 한 편과 출사표(出師表) 두 편만 보더라도 그의 심학(心學)의 올바름과 조수(操守)의 신밀(愼密)함, 그리고 충직한 절의와 식견의 고상함이 과연 어떠합니까. 노재(魯齋)는 공명(孔明)의 초려 장소(草廬長嘯)를 칭찬했는데, 담박(澹泊)과 영정(寧靜)의 교훈[24] 은 빠뜨려 버리고 도리어 이것만을 취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송나라 왕안석(王安石)>
" 사이의 얽히고설킨 험준한 길, 그 길을 통해 제갈량은 때때로 많지 않은 군사를 이끌고 강적에 대항했다. 그 빛남이 마치 새벽녘의 샛별과 같으니, 오직 제갈량만이 촉을 밝게 비추었구나."

<오나라 장엄(張儼) 묵기黙記 술좌편述佐篇>
공명은 파촉에서 일어나 하나의 주(州)를 차지하고 라는 엄청난 대국과 겨루었는데 군사와 백성들이라곤 위나라의 1/9밖에 되지 않았다. 공명은 농업과 군사 일, 그리고 형법 등을 잘 정비했기 때문에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파죽지세로 기산까지 쳐 들어가 황하와 낙수의 물로 말의 목을 축일 뜻을 품을 수 있었다. 중달은 10배나 되는 땅과 거기 있는 수많은 군졸을 기반으로 견고한 성지와 강대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자기 자신의 보전에만 급급할 뿐 적을 깨뜨리지 못하고 제갈량이 제멋대로 날뛰도록 내버려 두었다.

<원자>
어떤 이가 제갈량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원자가 말하였다.

"장비, 관우유비와 함께 일어나 조아 복심의 신하로 모두 무인이었고, 뒤늦게 제갈량을 얻어 이로써 좌상(보좌하는 재상)으로 삼았소.
이에 뭇 신하들이 기뻐하고 탄복했는데, 유비는 족히 믿을만하고 제갈량은 족히 중시할 만했기 때문이오.
그러다 6척의 고아(유선)을 맡아 한 나라의 정무를 총괄하고, 범용한 군주를 섬기며 전권했으나 예를 잃지 않았고, 군주의 사무를 대행했으나 국인들이 의심하지 않았으니, 이와 같은 즉 군신 백성들이 마음으로 흔쾌히 봉대했음을 알 수 있소.
법을 행함이 엄격한데도 국인들이 기쁘게 복종하고 백성을 부려 그 힘을 다하게 해도 아랫사람들이 원망하지 않았소.
그 군사들이 출입할 때는 빈객처럼 하니 행군할 때 도적질하지 않고, 꼴과 땔나무를 베는 자들은 사냥하지 않으니 마치 중국에 있는 듯 헀소.
그가 용병함에는 산처럼 머물며 바람처럼 진퇴하고 군사가 출동하면 천하가 진동하니 인심이 근심하지 않았소,
제갈량이 죽은 뒤 지금까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 국인들이 노래하며 그리워하여 마치 주나라 사람들이 소공을 그리워하는 듯 하오. 공자가 이르길 '웅은 가히 임금노릇할 만하다'고 헀으니 제갈량에도 이러한 점이 있었소."
또 물었다.
"제갈량이 처음 농우로 출병했을 때 남안, 천수, 안정의 세 군 사람들이 배반하여 제갈량에 호응했습니다. 만약 제갈량이 급히 진격했다면 이 세 군은 중국의 소유가 아니었을 것이나 제갈량은 천천히 행군하며 진격하지 않았습니다. 얼마 뒤 관병이 농에 올라 3군을 회복하고, 제갈량은 척촌의 공도 세우지 못하고 이 기회를 잃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원자가 말했다.
"촉병이 가볍고 날랜 군사로 좋은 장수가 적었고 제갈량이 처음 출병했을 때는 중국의 강약을 알지 못했으니 이 때문에 의심을 품고 모험하지 않았던 것이오. 게다가 대거 모인 자들이 가까운 공을 탐하지 않아 진격하지 않았소."
그(물어본 자)가 말했다.
"그가 의심했다는 것을 어찌 아십니까?"
원자가 말했다.
"처음 나와 천천히 움직이고 둔영을 중복하고 그 뒤 항복한 뒤에도 진병하여 싸우려 하지 않았소. 제갈량은 용맹하고 싸움에 능헀으나 세 군이 배반해도 속히 이에 응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그가 의심했다는 징표요."
그(물어본 자)가 말했다.
"그가 용맹하고 싸움에 능했다는 것은 어찌 아십니까?"
원자가 말헀다.
"제갈량이 가정에 있고 전군(前軍)이 대파되었을 때 제갈량의 둔영이 수리 떨어져 있엇으나 구원하지 않았소. 관병과 서로 접전했으나 또한 천천히 행보하니 이는 그가 용맹했다는 것이오. 제갈량이 행군(=용병)할 때 안정하고 견중했는데, 안정하면 쉽게 움직일 수 있고 견중하면 가히 진퇴할 수 있소. 제갈량의 법령이 밝고 상벌에 신의가 있어 사졸들이 명을 받으면 험지에 뛰어들면서 몸을 돌보지 않으니, 이는 그가 싸움에 능헀다는 것이오."
그(물어본 자)가 말했다.
"제갈량이 수만 군사를 이끌며 일으키고 세운 것이 수십만의 공력과 같으니 기이한 점입니다. 이르는 곳마다 영루, 우물과 부엌, 축간, 울타리, 장새를 세워 이를 법도로 삼고, 한 달을 행군해도 떠날 때는 처음 도착했을 때처럼 해놓으니 노고와 비용이 들며 꾸미기를 좋아합니다. 이는 어떻습니까?(다시 말해 너무 지나치게 진지를 차린다는 말)"
원자가 말했다.
"촉인들이 경박하니 이때문에 견고히 하며 부린 것이오."
그(물어본 자)가 말했다.
"그랬다는 걸 어찌 아십니까?"
원자가 말했다.
"제갈량은 실질로 다스리고 명의에 의하지 않았으며 뜻이 크고 원대해 가까운 공을 급히 취하는 것을 구하진 않았소."
그(물어본 자)가 말했다.
"제갈량은 관부, 차사, 교량, 도로를 짓기 좋아했으나 이는 급무(급한 업무)가 아닙니다. 어떻습니까?"
원자가 말했다.
"소국에 현명한 인재가 적으니 이 때문에 그 존엄을 높이고자 함이오. 제갈량이 촉을 다스릴 때 경작지가 개간되고 창고는 충실해지고 기계는 날카로워지고 축적된 곡식이 넉넉해졌으나 조회는 화려하지 않고 도로 위에 술취한 사람이 없었소. 무릇 본이 세워지면 말이 다스려지고, 여력이 남은 후에야 작은 일에 미치는 것이니, 이는 그 공을 권하려 했기 때문이오."
그(물어본 자)가 말했다.
"그대가 제갈량을 논하는 데는 증험이 있습니다. 제갈량의 재주로 보면 그 공이 적다고 하는데 이는 어떻습니까?"
원자가 말했다.
"제갈량은 지본(근본을 중시)하는 자로 응변은 그의 장점이 아니니 이 때문에 감히 그 단점을 쓰지 않는 것이오."
그(물어본 자)가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가 그를 칭찬하는 건 왜입니까?"
원자가 말했다.
"본래 현자란 심원한 것이니 어찌 완비함을 기준으로 책망하겠소? 무릇 능히 단점을 알고 쓰지 않는다면 이는 현자의 위대함이오. 단점을 알면 즉 장점도 아는 것이오. 무릇 전식(원래 생각)이라도 더불어 말해보고 맞지 않으면 제갈량은 쓰지 않았으니 이로써 내가 (현자로 칭하기에) 가하다고 한 것이오.


10 관련 논란

정사 삼국지가 한국에 보급된 이래 많은 삼국지의 인물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제갈량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제갈량에게 군의 통솔과 전쟁 준비에는 능했으나 기책이 부족하여 이기지 못했다라는 평을 하였다. 정확히 말하면 이렇다. 진무제에게 올린 표문에서는 '이 때문에 용병을 멈추지 않고 여러 차례 그의 무력을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제갈량의 재능은 군대를 통치하는 데는 뛰어났지만, 기책은 (그보다) 떨어졌으며, 백성들을 다스리는 재간이 장군으로서의 재략보다 뛰어났습니다.'라고 했고 제갈량 전 말미에서는 '해마다 군사를 움직여 나갔으나 끝내 공을 이루지 못했으니 응변의 장략은 다스리는 재주에 미치지 못하였던 것 같다.'고 했다.[25]

예를 들어 정사를 보면 연의에서 제갈량의 최초의 전공인 박망파 전투도 실은 제갈량이 관여한 바 없으며 화용도 매복은 아예 창조된 내용이며 또한 한중전 때 거의 모든 계책에 관여하고 유비는 응응 하며 고개만 끄덕인 것이 아닌 제갈량이 후방에 머물며 군량을 조달하는 임무를 맡았었다. 따라서 제갈량의 북벌에서 그의 군사적 능력에 대한 논란은 상당히 좋은 떡밥 중 하나다.

정사의 저자 진수가 제갈량의 약점으로 임기응변에 능하지 못하다고 했는데, 이는 부대를 운용하는 전술적 능력은 뛰어났으나, 변칙을 쓰는 것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손자병법 병세편에 "凡戰者, 以正合, 以奇勝. 故善出奇者, 無窮如天地, 不竭如江河.(전쟁을 하는 자는 정병으로 맞서서 기병으로 이긴다. 기책을 잘 운용하는 자는 천지처럼 작전이 궁색해지지 않고 강물처럼 고갈되지 않는다.)"라는 구절이 있듯 중국에서는 정석과 기책의 조합을 병법의 극의로 보았다. 군을 다스리고 통제하는 부분은 훌륭했으나 강력해진 군대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면모가 떨어진다는 것. 다만 가뜩이나 부족했고 이릉대전 이후 더욱 줄어든 촉의 국력을 고려히면, 먼치킨인 위를 상대로 먼 구석에서 기책을 사용하는 것은 무리였다.형주라도 가지고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도와주려던 맹달도 죽어버렸다 그래서 이문열 판에서는 위연이 '제가 기병을 끌고 샛길로 나가 적을 치겠다'고 하자, 제갈량이 '사실상 이게 전부인 우리 전력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거절하는 장면이 나온다.

제갈량의 '군사적 무능력'을 지적하는 사람들은 그가 '임기응변', 즉, 모략에 능숙하지 못했다는 점을 근거로 삼는다. 하지만, 거시적 계획을 수립하는 전략이나 각개 부대를 효과적으로 운용하는 전술의 측면에서는 당대에 이미 높은 평가를 받았다. 당장 제갈량전의 평가만 해도 "진영이 잘 정돈되고 상벌이 분명하고 호령이 엄숙하다." 되어 있고 진양추(晉陽秋)에 "제갈량은 군사를 교묘하게 통솔하였고, 군령도 엄명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세설신어(世說新語)에는 "제갈량이 위수(渭水) 변경에 진을 치자 관중(關中)이 발칵 뒤집혔다."라고 적고 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제갈량의 군사적 능력을 높이 평가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적장이던 사마의가 공명 사후 그가 죽은 오장원(의 곽씨오)의 진지를 둘러보고 "천하의 기재(奇才)로다!" 했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 원자에는 제갈량의 군대가 무장과 무기를 최고상태로 유지했으며 군대에서 쓰이는 물건들 모두 멋있고 정교하게 꾸몄다고 하는데 이는 그가 부대관리를 잘했고 군대에서 쓰이는 물건들을 통해 부대의 사기진작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 제갈량은 연의에서 보여준것과 같은 화공계나 반간계 같은것은 정사에서 잘 쓰지 않았지만 부대 기동을 통한 기만이나 기습, 복병을 이용한 매복전술을 상당히 잘 사용하였다. 1차북벌, 3차북벌은 기습이었고 1,5차 북벌에서도 위나라의 허를 짜르는 기만전술을 사용하였다. 분명 부대운영과 정공법에도 능한 인물이었으나 이런 전략적인 면을 보건대 책략를 쓰는것에서도 일가견이 있었다.

사실, 진수의 평을 정확한 해석에 기반하여 다시 읽는다면 제갈량이 "군사적으로 재능이 없다"라든지 "군략이 약했다"는 것이 전혀 아님을 알 수 있다. "정치가로서 출중하였으나 장군의 재능은 그정도까지는 미치지 못했다"는 뉘앙스가 강함을 알 수 있다. 정치가로서는 초일류이지만 장군으로서는 이치에 맞는 전략을 짜고 특히 질서정연하게 운영할 수는 있었으나 (예를 들어) 백기한신과 같은 급수의 초일류 장군은 되지 못했다는 정도. 보통 중국에서 군사적 재능에 대한 찬사를 할 때 '기책', '책략'등이 기준이 되기 때문에 평에 있어서 '임기응변이 부족했다'는 표현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특히, 삼국시대까지만 해도 "명장"으로 거론되는 인물 중 원톱이 (한고조에 대한 반란혐의로 숙청당한 이래 공공연히 거론된 것은 아니지만) 한신인데, 당대 사람의 인식에서 한식은 그야말로 "기책의 달인" 급수가 되니 뭐...

제갈량은 권력욕이 많은 인물이라고 평가도 있다. 우선 소설 삼국지 속 제갈량은 이문열 평역 삼국지에서 '불타는 적벽' 화용도 이야기에서 작가 설명에서도 제갈량이 권력욕심이 있다고 주장하였고, 김경한 작가가 쓴 평설 인물 삼국지에서도 제갈량이 관우와 유봉을 죽게 놔둘 정도로 소극적이며 유비 사후 제갈량이 권력은 이미 2대 황제인 후주인 유선보다 높다고 하였다. 하지만, 화용도의 전개는 삼국지연의에 나온 픽션이고, 유봉의 죽음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사실과 부합하지만 관우를 죽게 내버려뒀다는 것은 고우영 삼국지에서 나온 픽션이다. 따라서 이것은 '픽션의 소설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량에 대한 평가일 뿐이다. 정작 정사에서는 제갈량이 "확실히" 권력욕을 가졌다는 기록이 제대로 없다.[26] 게다가 서진의 시조인 사마염이 제갈량 같은 인재를 갈망했을 정도고, 당시 사마염이 제갈량을 높이 평가했던 점을 보면, 당대에는 권신의 이미지가 그다지 짙지는 않은 듯하다.

유선이 제갈량 사후에 촉나라 백성들과 신하들이 제갈량을 모시는 사당을 짓다고 건의를 했는데 유선은 당장 짓지는 않고 몇 년뒤에 사당을 지었다. 이를 근거로 유선은 제갈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일부러 사당 건설을 몇년간 질질 끌었다는 주장이 일각에서 있기는 하지만, 제갈량 사후 그를 욕하는 이를 유선이 화를 내며 처단한 바도 있으니 제갈량과 유선이 대립했다고 하기에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런 점을 벌때, 일각에서는 유선이 제갈량을 좋아했지만, 사당이 지어져서 제갈량이 신격화되는 행위를 싫어하지 않았냐는 의견들이 있다.

제갈량은 유비가 유장을 뒤통수치게 만들고,[27] 유비와 함께 멀쩡히 살아있던 헌제에게 시호를 올려 죽은 사람으로 만들았다는 점에서 도덕적 비판이 존재한다.[28] 유비가 칭제하게 한 행위가 한의 충신이라는 이미지를 가지던 유비를 기회주의자라는 이미지로 바뀌게 만들었다는 논란이 존재하나, 유비가 끝까지 거절하지 않고 결국에는 황제에 즉위했다는 행위, 아니 스스로 한중왕을 자칭한 그 시점부터 유비는 이미 칭제할 마음이 있어다는 얘기니 제갈량을 욕할수는 없다. 그리고 유비가 한의 충신이라는 이미지는 연의에서나 있는 내용이지, 정사에서는 유비가 서주를 먹은 시점부터 유비를 기회주의자로 보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기록이 있다는 점에서, 제갈량이 유비의 이미지를 먹칠했다고 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제갈량은 유비 칭제의 총대를 맨거지, 앞서서 유비가 칭제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연의나 정사를 보면 다른 이들이 칭제를 계속 주장했고, 제갈량이 총대를 맸었다고 나와있다.

그 외, 제갈량이 받은 무향후는 현후인가, 향후인가도 논쟁거리 중 하나다. 이향후 마초와 서향후 장비에게서도 나타나는 논쟁.

11 기타

역대제왕묘 배향자 중 한명이다.

시호가 충무여서인지 한국에선 이순신을 제갈량에 비하기도 한다. 조선시대 선비들부터 그러하였는데 선조실록에는 노량 해전을 두고 죽은 순신이 산 왜군을 물리쳤다는 표현도 있다. 다만 위를 정벌하기 위해 수차례 북벌을 벌여 쳐들어갔던 제갈량을 조선을 침략해 들어온 왜군을 수차례 막아낸 이순신과 비교하는 것은 맞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물론 제갈량의 북벌이 예방전쟁이었다는 시각을 대입한다면 싱크로가 맞는 편.

살아 생전 활발히 집필 활동을 했다고 알려졌으며, 그의 병법을 수집해 274년에 진수가 편찬한 《병법 24편》, 혹은 《제갈량집》이라 불리는 저서도 있었으나 애석하게도 대부분이 소실되어 현재 전하고 있는 것은 명문으로 칭송받은 전후 출사표[29], 제갈량의 저서로 알려져 있으나 위진남북조 시대에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다 하여 진위 여부에 논란이 많은 장원, 병법 24편에 속하거나 혹은 그 외의 병법이라고도 여겨지지만 장원과 마찬가지로 제갈량이 저술했는지에 대한 진위가 불분명한 《편의십육책》, 그리고 태평어람등에 남은 일부 문집과 그가 지인들과 나누었던 편지 정도이다.

후출사표에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瘁 死而後已)라는 말이 나오는데,[30][31] 사실 후출사표가 위작이라는 설도 있긴 하지만(이 문제에 대해서는 출사표 참고) 제갈량 본인이 이 말대로 살다간 사람인 것은 부정할 수 없을 듯. 이 말대로 촉을 위해 노력했으며 그 말에 걸맞는 말년을 보냈고, 그 행보를 보면 여러모로 그의 죽음의 원인이 과로사 혹은 과로로 인한 병사라는 점에 동의할 수 밖에 없다. 승상이란 사람이 이러니 아랫 사람들도 지나치게 일을 많이해 촉나라의 관리들은 과로사의 비율이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농담조로 제갈량이 누군가를 일처리 좋다고 칭찬하면 이른 죽음을 맞이한다라고 할 정도.

제갈량 인생에 가장 큰 암운을 드리운 것은 암군인 유선도,[32] 라이벌인 사마의도 아닌 손권. 일단은 동맹관계였지만 손권의 뒷치기를 늘 염두에 두고 그것을 기초로 하여 북벌을 계획하였기에 늘 고생이었다.

흔히들 초주가 제갈량에게 많이 딴지를 건 네거티브한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제갈량의 북벌을 반대하지도 않았고, 제갈량이 죽었을 시에는 오히려 가장 먼저 달려간 인물이기도 하다. 삼국지연의의 피해자 참고.

현대에 와서는 주군인 유비보다 더 인기인. 성도의 사당들을 가봐도 유비의 사당보단 제갈량의 사당에 사람들이 더 바글바글하다. 쓰촨에서 지진이 났을 때도 "승상님이 다 해주실 거야"라며 무후묘에 피난 간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소오강호에서는 당시 사천성 사람들이 제갈량을 기리기 위해 천 년이 넘도록 머리에 흰 띠를 둘렀기에 다른 지방 사람들과 구분이 되었다고 나와 있다.

한국의 제갈씨는 신라 때 들어왔으며 고려 현종때 후손 형제가 제씨와 갈씨로 성씨를 하사받아 제씨와 갈씨로 갈라섰다가 구한말에 일부가 다시 제갈씨로 합쳐졌다. 그리고 2002년 법원 판결에 의해 제씨와 갈씨가 제갈씨로 합해졌다. 실제 복성 소송을 한 이유는 갈정웅 한국 M&A협회 회장 집안의 개인소송 때문으로 이 이후 이 사람은 제갈정웅이 되었다. 흔히 제씨 갈씨 두 성씨가 제갈씨로 복성을 한 것을 아는 사람들이 복성이유를 갈갈이 패밀리 때문으로 오해하고 인터넷에 퍼뜨리는데 복성은 구한말 복성 운동으로 시행되던 것으로 구한말 이후 제씨, 갈씨, 제갈씨 3성이 존재하였고 이후 제씨, 갈씨는 복성을 하고자 하면서 개인소를 제기하여 복성이 된 것이다.

원나라 때의 연극에서의 제갈량은 자신의 야망(나라가 다시 의로운 이의 통치를 받는 것)을 위해 유비를 따르고[33] 분노와 뿌듯함을 표현하는 등 인간적인 모습이었지만 명나라때의 연극에서는 이상주의자적인 면이 더 강조되었다.

후촉의 왕소원(王昭遠)이라는 인물은 스스로 제갈량으로 자칭했는데, 병서를 좋아하고 황제의 신임을 받았으나 모략이 부족했다. 송나라 군대가 후촉을 멸망시키려 할때 싸웠으나 패배하여 울면서 탄식하다 눈이 붉어진 채로 잡혀버렸다. 사람들은 즙 눈물을 흘리는 제갈량이라며 비웃었다고.

청나라 옹정제의 시절, 옹정제는 권신인 융과다를 숙청하기 위해 온갖 죄목을 가져다 붙혔는데, 게중에는 스스로를 제갈량에 비유한 오만함.이라는 항목도 있었다.

image_readtop_2012_180218_1332372819.jpg
여담으로 이 사진의 왼쪽의 여성이 제갈량의 63대손 제갈재기(諸葛梓岐)[34]이다. 1979년에 출생했고. 남편은 홍콩의 이름난 재벌 2세이다. 조상님을 닮아서인지 제갈재기도 173cm로 장신이다. 캐나다 출신 화교로 홍콩에서 모델로 활동했다. 남편이 금수저 끝판왕인 재벌 2세답게 결혼식에 무려 11억원 정도를 들여 초호화 결혼식을 했다고 한다.

이름 '량()'은 당대에 다른 사람들의 이름으로도 쓰였는데 사마의의 3남인 사마량과 손오의 2대 황제 손량의 이름에 이 '亮'이 들어간다는 것이 특이하다.

12 미디어 믹스

제갈량/기타 창작물 항목 참조.

13 관련 항목

  1. 후한의 헌제 유협과 동갑이다. 그런데 사망한 해 역시 동일하다. 둘 다 181년에 태어나서 234년에 죽었다. 이 해에 반장도 죽었으니 뭔가 괴상한 우연의 일치다. 신기하게도 같은 시호를 받은 충무공 이순신과 사망시 나이가 똑같다.
  2. 다만 제갈량 같은 경우에는 유비가 상국의 지위를 내렸다는 부분 이외에는 기록에서 거의 승상으로 불리기 때문에, 군주의 신뢰를 얻었다는 일종의 명예직일 가능성도 있다.
  3. 당시의 말들이 당시 사람들의 체격에 맞았다면, 정말로 키가 커서 수레를 타고 다녔을수도 있다. 말의 체격이 작으면 덩치 큰 사람이 타기 힘들뿐더러, 말도 탄 사람의 덩치 때문에 잘 가지 못한다.
  4. 이런 이미지는 이미 동진 시기부터 있었던 듯하다, 동진시기의 지인소설인 어림에는 사마의가 제갈량과 위수에 대치하면서 사람을 보내 제갈량을 살펴봤는데 제갈량은 흰수레를 타고 갈건을 쓰고 학우선을 든 채 삼군을 지휘하여 중군이 그에 따르니 사마의가 감탄하여 '가히 명사라 이를만하다'라고 한 기록이 있다. 제갈량의 이런 이미지가 연의보다 이른 시점에 완성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5. 삼국지 공명전 등에서는 이런 견해를 따르고 있다. 단, 공명전의 장면처럼 부모가 죽은 것도, 제갈량의 혈육 가운데 피해를 입은 것도 아니다.
  6. 이 구절은 이문열판 삼국지를 포함해 자주 나오는 내용이지만 특이하다는 논조로 해석하기 보다는 앞날을 길게 내다보고 장구한 계책을 준비하는 제갈량의 거시적 안목에 대한 칭찬의 논조로 봐야할 것이다.
  7. 불평을 멈췄지만 불만은 그대로 내재해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 유비와 관우·장비의 사이는 일반적인 군신관계를 넘어선 것이었고 이러한 끈끈한 커넥션에 아무런 실적 없이 쑥 밀고 들어온 제갈량에 대한 관·장의 감정은 한바탕 웃음으로 날려버릴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고 보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래서인지 제갈량이 이들을 교류할 때 조심했다는 흔적이 보이는데 마초가 어떤 사람인지 묻는 관우의 서신에 '마초는 관공만 못하다'라고 답신을 한다던지 황충을 사방장군으로 삼을때 마초, 장비는 공을 봤지만 관우는 보지 못했으니 납득하지 못할것이라고 진언하기도 한다. 장비는 본디 사대부를 공경했으므로 제갈량에 대한 불만은 금방 풀렸을것으로 보이지만 관우는 성정이 그렇지 않았으므로 제갈량이 특별히 신경썼다고 봐야 할 것이다.
  8. 유선 대에 이렇게 되는 것은 유선의 나이가 어리고, 유비의 유훈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이해할 만하나, 건국 군주의 시대에 이렇게 한 것은 자칫하면 건국과 동시에 권신이 나타나고 황제의 위치가 위태로워지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기 때문에 상당히 위험한 행보로 볼 수 있다. 즉위 석 달만에 친정한 것으로 보아, 온전히 전시를 상정한 행보였던 것으로 풀이된다.
  9. 최종 직위는 대장군이다. 그리고 제갈근이 죽었을 때, 손권이 정말 슬프게 울었다고 한다.
  10. 유일한 친자식으로 제갈량이 40대 후반에 접어들어서 얻은 아들이다. 제갈량이 제갈근에게 보낸 편지 중 '(제갈)첨도 이제 8세, 영리하고 귀여운 녀석이지만 너무 조숙해서 큰 인물이 되지 못할까 염려된다'는 구절을 남긴 것을 보면 매우 영특했던 모양. 제갈량에게 팔불출의 끼가...
  11. 다만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와 헌제춘추에서는 주호와 제갈현이 싸웠다고 기술되어 있다.
  12. 채모의 아버지
  13. 유비가 제갈량을 등용하면서 득을 본 것 중에 하나가 제갈량의 인적 네트워크란 시각도 있다. 그전까지 유비는 그를 보좌해 줄 인재들이 그리 많지 못했지만 제갈량을 등용함으로서 제갈량이 알고 지낸 형주의 인사들을 추천받거나 하여 상당 수의 인재들을 얻을 수 있었다.
  14. 박릉 최씨는 남북조, 수당시기 태원 왕씨 등과 함께 산동귀족의 대표가문이다.
  15. 유비가 이릉대전을 일으키려 했을 때 이 두 사람이 뜻을 같이하여 반대하기도 했다.
  16. 안개 속에 돌무더기가 놓여 있고, 발을 잘못 들이면 헤매게 된다. 그리고 제갈량의 장인이 (자기 사위의 군주를 몰아세우던) 적장을 풀어준다.
  17. 모(矛)가 문명 초기부터 존재했던 상형자인 반면 창(槍)은 이후에 만들어진 형성자이기 때문에 외래어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가만보면 창 자에는 창의 형상이나 뾰족한 끝날을 나타내는 글자가 없다. 저 글자에 부수가 붙기 전의 것은 무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창고(倉)를 일컫는 글자.
  18. 다만 어이없는 것이, 실제로 얘기된 내용은 주전/항복보다는 공명의 인간상에 대해 깠는데 역관광을 당하는 게 대부분이다.(…)
  19. 종횡가 항목 참고. 춘추전국시대의 국가들이 고작 두 사람의 말빨에 넘어가서 전쟁을 벌였다고 생각하여 그 점을 비꼰 것.
  20. 본래 회계태수 왕랑의 신하였다가 동오의 덕왕 엄백호 건으로 인해 도망쳤다가 손권의 부하가 되었다.
  21. 추천을 받아 관직에 나아가는 것.
  22. 항목참조, 제 환공을 춘추오패의 첫 타자로 올린 인물
  23. 항목참조, 한고조 유방 밑에서 승상을 역임, 한고조가 항우를 패배시킨 후에는 어느 주연에서 신하들이 개국의 공을 묻자 천하통일에 한신, 장량보다도 공이 크다고 한 인물. 공명은 결국 천하통일엔 실패하지만...
  24. 소학 가언小學 嘉言》에 이르길 제갈량이 제갈첨에게 남긴 말로 "담박이 아니면 뜻을 밝힐 수 없고, 영정(寧靜)이 아니면 멀리 이를 수 없다."라고 일렀다.
  25. 진수가 제갈량을 이렇게 비판적으로 평해놓고는 사마의를 욕보인 것으로 여길까봐 사마염에게 계속 용서를 구한 점을 보아 사마의의 공적을 드높이기 위해 제갈량을 의도적으로 깎아내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26. 일각에서는 이엄의 실각을 권력욕을 위해 자행했다고 하는데, 이엄은 촉한 대부분의 대신들의 탄핵연명장을 올리고, 이것을 통해 실각하게 된 거라서, 제갈량이 권력욕 때문에 이엄을 실각시켰다고 할 수 없다.
  27. 그러나 이 상황은 유장의 부하들이던 장송, 법정, 맹달 등이 먼저 와서 유비에게 익주를 갖다 바치는 상황이었다.
  28. 그런데 헌제가 조비에게 살해당했다는 유언비어는 꽤 퍼져 나간 듯 하다. 오나라 쪽에서도 헌제를 죽은 사람 취급하는 기록이 있을 정도. 헌제 존재감 안습 그러니까 알면서도 죽은 사람 취급했는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쨌든 헌제가 조비에게 살해당했다는 풍문 자체는 유비 세력에게는 아주 좋은 명분이 될 수 있었다.
  29. 다만 후출사표는 다른 사람이 쓴 위작이란 설이 있다.
  30. 온 마음의 정성 몸이 부숴질 때까지 노력하고, 죽음에 이르도록 정성을 다하겠다는 뜻. 정사 삼국지자치통감에는 국궁진력(鞠躬盡力)이라 표기되어 있다.
  31. 이 말은 뒷날 강희제저우언라이도 좌우명으로 삼았던 표현으로 알려져 있다.
  32. 제갈량 생전에는 철저하게 제갈량의 말을 따랐다.
  33. 정확히는 유비가 황제가 돼서 3년밖에 못산다는 걸 알고(과거 연극의 제갈량은 도사로도 표현되었다) 망설이지만, 유비의 아들이 있다는걸 알고 따라나서기로 한다. 근데 그 놈이 자기 발목 잡을 줄은 몰랐겠지
  34. 원래 이름은 제갈일소(諸葛一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