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시마 섬

1 소개

対馬(つしま). 한글로는 쓰시마라고 표기한다. 한국식 이름은 한자 對馬島(つしまじま[1])를 그대로 읽어서 대마도. 우리말 "두 섬"이 변하여 쓰시마가 되었다는 설이 나돌지만, 원래는 가는 지형을 통해 이어진 하나의 섬이었고 둘로 나누어진 것은 근대에 운하를 팠기 때문이다.[2][3]

일본의 여러 섬들 중에서 면적으로 따지면 10위권에 들고 대한민국의 섬들 사이에 넣어 비교해도 제주도 바로 다음 2위가 되는 작지 않은 섬이지만, 대부분이 해발고도 400m 이상의 산지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가용할 수 있는 토지가 많은 건 아니다. 이렇게 생산력이 낮은 땅이라는 특성은 역사에서 해적의 준동했던 것이나 한일 간 교역거점을 맡았던 요인이 된다.

쓰시마는 면적에 비해서 일본 내에서의 존재감은 높지 않은데, 어느 정도냐면 본토인에게 '쓰시마 출신입니다'라고 말하면 위치는커녕 이름조차 모르는 경우도 있다. 규슈야마구치 등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름은 알아도 위치는 모르는 경우가 태반. 심지어 면적으로는 훨씬 작은 이키 섬 보다도 존재감이 없다. 여러모로 안습한 동네.

마을은 해안 지대를 둘러가며 띄엄띄엄 자리잡고 있다. 원래 하나의 큰 섬이었던 것으로 보이나 1672년 오후나코시 운하, 1900년 만제키 운하가 인공적으로 만들어지며 3개의 섬으로 나뉘어졌다.

쓰시마는 아소 만과 만제키 운하로 섬이 양분되는 지형을 보이기 때문에, 크게 북쪽을 가미지마(上島), 남쪽을 시모지마(下島)로 부른다. 이즈하라, 미쓰시마, 도요타마, 미네, 가미아가타, 가미쓰시마 등 6개의 정(町)이 있었는데 2004년 모두 합병하여 통합 쓰시마 시로 개편되었다. 6개 정이 통합되었고, 지형이 복잡하기 때문에 좁은 시가지가 분산되어 있는 것이 특징인데, 한국인 관광객들이 주로 가는 곳은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에서 직항편이 있는 이즈하라와 가미쓰시마의 히타카츠이다. 그 외에 6개의 유인도를 포함해 100여개의 부속도서가 있다.

한국과 가장 가까운 섬은 미쓰시마 섬이며 그 다음은 우니 섬이다.

면적은 총 695.9㎢로 제주도의 1/3 정도이며, 거제도의 2배 정도이다. 인구는 약 3만 2,500명. 크기는 큰 주제에 인구수는 진도군과 같다(...).[4] 참고로 저출산+젊은 층의 유출 크리로 1970년대 이래로 계속 감소중이다. 연 평균 500명 정도씩 줄고있다. 이쪽도 사정은 마찬가지일텐데

거리상으로는 후쿠오카와 더 가깝고 교통 등을 감안하면 실제 생활권도 후쿠오카에 더 가까운 편이지만 행정구역상 나가사키 현 쓰시마 시에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방송도 나가사키의 방송이 나오며, 만약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면 후쿠오카가 아닌 나가사키의 최저 시급을 적용받는다.[5]

쓰시마 공항이 있으며 여기서 후쿠오카 공항나가사키 공항으로 가는 항공편도 존재한다. 오리엔탈 에어 브릿지 항공에서 운행하는 나가사키행 항공편과 전일본공수의 후쿠오카 노선이 있다.

2 특징

한반도(부산광역시)와의 최단거리는 약 49.5km, 일본에서 가장 가까운 이키 섬과의 거리는 약 47.5km, 일본 본토 중 하나인 큐슈(사가현 가라쓰 시 하도 곶)까지의 최단거리는 82km로 본토에서 거리는 한반도와 더 가깝다. 한반도 본토에서도 보이지만 반대로 일본 본토에서도 보이는 섬이다. [1] 북한을 제외하면 대한민국 내에서 보이는 유일한 외국 영토로 부산광역시[6] 거제도 등에서는 날씨가 좋은 날 육안으로 확인 가능하다. 물론 반대로 쓰시마 섬에서도 부산이 잘 보인다.[7] 부산불꽃축제 시즌에는 광안대교까지 육안으로 보인다.

한반도에서는 육안으로 보이지만 일본 열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들어 고대에는 가 아닌 신라의 영토였을 것이라 여기는 주장도 있으나 실제로는 일본 본토에서도 보이는데다가 고대 국가들 중에서는 일본이 해상 진출이 빨랐던 탓에 삼국시대부터 이미 왜인들의 거점이었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아래 참조).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에서 대아고속해운과 미래고속, JR 큐슈고속선의 여객선을 이용해서 갈 수 있다. 코리아익스프레스에어에서 잠깐 운영했던 PUS-TSJ 노선의 운항 거리는 66마일로, 한국에서 운행하는 모든 항공노선 중 최단거리 노선이다. 무안국제공항-제주국제공항 노선이나 여수공항-제주국제공항 노선도 110마일은 나온다. 또한 이렇게 짧은 거리로 인해 한국 휴대폰이 터지거나 성능이 좋은 라디오의 경우 KNN까지도 잡히는 외국영토이기도 하다. (일부지역만) 때문에 현지인이 한국과 가까운 한국 전망대에서 한국 통신사 신호가 잡혀버리는 바람에 로밍이 되어버리는 해프닝도 심심찮게 발생한다.

인구는 적지만 그래도 교육기관은 꽤 많이 있다. 유치원 5개(시립 4개, 사립 1개), 보육소 24개, 소학교(한국의 초등학교) 23개(전부 시립), 중학교 13개(전부 시립), 고등학교 3개(전부 현립). 심지어 신체가 불편한 학생을 위한 특별수업학교도 1개나 있다. 쓰시마 학교와 한국 부산지역 학교는 교류가 잦으며 자매결연도 맺는다. 쓰시마 고등학교는 산중턱에 있는데 산기슭을 깎아 만든 학교지만 운동장도 있고 있을 건 다 있다. 그러나 학교로 올라가는 길이 관악산 등산로 수준이라서 한번 올라가면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시골 학교라서 그런지 학생들 붙임성이 꽤나 좋은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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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의 입구 격으로 대한해협(Korea Strait) 한가운데에 있다.[8] 북쪽으로는 부산 해협(서수로西水路, Western Strait, 조선해협) 남쪽으로는 쓰시마 해협(현해탄/玄界灘/겐카이나다)이 지난다. 일본에서는 남북 해협을 통틀어 쓰시마 해협이 정식 이름이고 부산해협(서수로)를 조선해협으로 부르고 있다. 아이고 복잡해

구분해협 전역부산-쓰시마 사이쓰시마-규슈 사이
국제적 명칭Korea Strait
(대한해협)
Korea Strait Western Channel
(대한해협 서수로)
Tsushima Strait
(쓰시마 해협)
한국대한해협부산 해협쓰시마 해협
북한조선해협부산 해협쯔시마 해협
일본쓰시마 해협조선 해협쓰시마 해협(이중 대부분이 현해탄)

우리 쪽(부산-쓰시마)은 부산 해협, 일본 편(쓰시마-규슈)은 쓰시마 해협(현해탄), 전체를 부르거나 그냥 양국간의 해협을 편하게 부를 때는 대한해협이라고 쓰고 현해탄이란 표현은 일본 입장의 북쪽을 의미하므로 지양하는게 좋다.

3 역사

온갖 풍파에 휘말린 역사는 간단하게 쓰기에도 벅찰 정도. 그렇지만 세계사적으로 보면 양국 사이에 있는 국경지 치고는 굉장히 평온하게 지낸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최근 있었던 제2차 세계대전6.25 전쟁에서도 무사하게 벗어난 편으로 적어도 한국사의 입장에선 허구한 날 여진족이 덮친 북방에 비해 평온했다. 물론 일본사의 관점에선 다르다. 백제가 멸망하고 일본 조정이 신라당나라 연합군의 일본 열도 역습을 대비해[9] 서쪽 각지에 쌓은 이른바 조선식 산성 가운데 하나인 가네다 성(金田城)이 이곳에 위치해 있기도 하다.[10] 신라구가 활발하던 시절에 규슈와 함께 털리기도 했다. 전진기지에 가까운 지리적 특성 탓이다. 나중에 가면 여진족 해적들까지 쓰시마를 공격한다(도이의 입구). 안습. 고려 시대 원나라가 주도한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때는 일본 본토를 공격하기 전에 먼저 친 곳이 여기다. 쓰시마의 어휘 가운데 간고(ガンゴー)란 말이 있는데 간은 원나라를 뜻하고 고는 고마, 즉 고려를 뜻한다. 이는 옛날에 어린 아이가 울면 호랑이가 잡아간다 식으로 쓰던 말이다.

일단 기본적으로 쓰시마는 산이 너무 많아 농업 시대에는 별로 가치가 없는 땅이었기 때문에 전근대에는 어느 나라에서도 욕심을 내지 않았다. 때문에 일본에서 드물게 전란에 휘말리지 않고 평온하게 지낼 수 있었다. 센코쿠 시대에 영주가 된 쓰시마 소(宗) 씨가 메이지 시대까지 별 문제 없이 집권하고 있었을 정도로 사실상 조선 시대 초기 이후로는 쓰시마가 직접적으로 군사 공격을 받은 일은 전혀 없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일부 환빠스러운 인물들은 한국의 기록 가운데 대마도주인 소(宗)씨가 사실은 한국 부산의 송(宋)씨가 건너가 된 것이란 기록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 기록은 1740년 동래부지라고 부산을 다룬 책에 처음 나오는 것이다. 아마 宗과 宋이 글자가 비슷한 것 때문에 이런 주장이 나온듯 한데 부산에 살던 송씨가 건너가 대마도에서 아비로(阿比留)를 물리치고 대마도주가 됐다는 것이다. 근거는 딱히 없다. 이 책 이전엔 딱히 관련 기록도 없고 말이다. 조선 후기에도 환빠스러운 책은 굉장히 많았고 재야의 양반들은 독자연구를 행했다. 부산에 이들 조상의 무덤이 있다는 게 주장인데 울산에도 비슷한 전설이 내려오는 걸로 볼 때 한반도와 가까운 지리적 특성 탓에 나온 전설인 것으로 보인다.

소씨의 기원은 고레무네(惟宗)이거가슴[11]이다. 한국에도 종(宗) 씨가 있긴 한데 항왜 출신이다.

헤이안 시대 중기에 쓰시마의 카미(守, 태수)로 부임해 있던 미나모토노 요시치카(源義親)가 쓰시마 현지에서 관물을 횡령하고 백성들을 약탈하고 다닌다는 고발을 받았는데, 이 요시치카의 아버지가 바로 당시 무사들의 신망을 한몸에 받으며[12] 하치만타로(八幡太郞)[13]라고 불리던 가와치 겐지의 수장 미나모토노 요시이에(源義家)였다. 요시치카는 요시이에의 둘째 아들로써 아버지 못지 않은 무력으로 명성이 자자했고, 조정에서는 요시치카 회유를 위해 요시이에의 가신이었던 후지와라노 스케미치(藤原資道)를 보냈지만 스케미치는 그대로 눌러앉아 요시치카와 함께 관리를 죽이는 등의 범죄를 저지른다. 결국 요시치카는 소환 및 오키(隠岐) 유배라는 처벌을 당했는데, 유배지로 가지도 않고 이즈모(出雲)로 건너가서는 현지 지방관을 죽이고 관물을 약탈하는 등의 악행을 일삼았다. 결국 일본 조정은 이세 헤이시의 다이라노 마사모리(平正盛)를 시켜 요시치카를 토벌하게 했는데, 이 마사모리가 바로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할아버지. 무사들의 신망을 얻고 있던 하치만타로 요시이에의 아들이자 천하 제일의 무용을 가진 것으로 이름높던 요시치카가 조정의 명을 따르지 않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벌당한 것은 가와치 겐지의 체면을 구기는 것이었고 세력이 꺾인 겐지를 제치고 헤이시가 무사 가문으로써 대두하는 계기가 되었다.

3.1 초기 역사와 왜구의 활동

… (전략) … 왜의 북안(北岸)에 있는 구야한국(狗邪韓国)에 도착한다. (대방군에서) 여기까지 7,000여 리이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바다를 건너 1,000여 리에 대마국(對馬國)에 이른다. 그 대관(大官)을 비구(卑拘)라고 하고 부관(副官)을 비노모리(卑奴母離)라고 한다. 이 나라는 홀로 있는 섬으로 사방 400여 리쯤 된다. 땅과 산이 험하고 못과 숲이 많다. 도로는 짐승과 사슴이 다니는 길과 같다. 1,000여 호 정도가 있으나 좋은 밭은 없다. 해산물을 먹고 스스로 생활(自活)하고 있으며, 배를 타고 남북으로 쌀을 사온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인조

은 왜인이 대마도(對馬島)에 병영을 설치하고 무기와 군량을 쌓아 두고서 우리를 습격하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서 그들이 일을 일으키기 전에 우리가 먼저 정예군사를 뽑아 적의 진영을 격파하고자 하였다.

- 삼국사기 실성 마립간

기록상으로 등장하는 것은 3세기부터의 일이다. 쓰시마 섬은 산이 많고 농토가 적어 이곳의 주민들은 주위에서 식량을 사와 생활했다. 일본이 성장하고 신라와 대립이 심해진 5세기 초에는 위에서 보듯 아예 군사적인 전진 기지 역할을 한 적도 있었으나, 이 실성 마립간 시기에 풍도 해전에서 왜군이 박살나면서 소강 상태에 들어간 듯하다.

고려시대에는 진봉무역으로 고려와 교역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는데, 무역량이 감소하면서 먹고 살 식량이 없었다. 그래서 호구지책으로 삼은게 노략질.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왜구의 선봉 역할을 했다. 왜구가 가장 들끓었던 시기는 여몽연합군이 대마도를 침공했었던 때 이후로 여몽연합군의 대마도 침공은 대마도의 농토를 초토화 시켰다. 그리고 전쟁이 실패로 끝나자 고려 정부는 일방적으로 대마도에 대한 곡물 수출을 끊어 버렸다. 식량이 부족하게 되자 왜구가 더욱 극성을 부리게 되었다.

아무튼 여몽연합군에게 호되게 당했는지 어린 아이들을 어를 때 간고(ガンゴー)란 말이 있는데 간은 원나라(元)를 뜻하고 고는 고려를 뜻한다. 영국에서 보나파르트란 말의 어감과 비슷하다.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면 "자꾸 울면 호랑이가 잡아간다."와 비슷한 느낌으로 사용되는 말.

왜구들 때문에 대외 원정에 소극적이었던 한반도 국가들도 바다를 건너 원정길에 나서기도 했었다. 일본을 공격한다 그것도 3차례나. 1차는 고려말 1389년(창왕 2년), 2차는 조선개국 직후 1396년(태조 5년), 3차는 1419년(세종원년)의 토벌작전. 3차의 경우 간지(干支)를 따서 기해동정(己亥東征)이라 한다. 대마도 원정은 조선의 군사력을 보여주어 왜구의 재발을 방지하려는 것이 제 1 목적이었다.

또한 명나라 역시 왜구의 피해가 막심해 일본에 대한 원정을 감행하려 했는데, 이 경우 자연스레 조선이 선봉장 역할을 하게 될 수 밖에 없고 이는 원이 고려를 이용해 일본을 공격한것과 같은 꼴이 되어 조선은 내정간섭을 받을 위험이 컸다. 따라서 명에게서 무슨 말이 나오기에 앞서 대마도를 공격한 것이다. 이를 통해 대마도에 잡혀 있는 중국인 포로를 명에 귀환시켜 명의 환심을 사는 한편 왜구에 대한 경계는 조선이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대마도 원정은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막판에 좌군절제사 박실(朴實)이 대마도주의 군대, 즉 정규군과 조우해서 180명 사상이라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전투, 비전투병력 모두 합쳐 2만에 달하는 전체적인 병력 규모로 보면 참패라고 하기는 어려운 피해지만 그 전까지는 줄곧 압도적인 승리만 거뒀기에 상당한 피해로 볼 수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는데, 상륙 후 줄곧 왜구를 상대하면서 승승장구하면서 방심했던 것, 그리고 줄곧 패배하던 대마도왜구는 사실상 정규군이나 다름 없었지만, 대마도주와 무사들이 개입하면서 태세를 재정비하고 지리에 익숙한 장점을 살려 방어전을 전개한 것에 패인을 찾을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패전이 조선군의 퇴각에 결정적인 원인이 된 것이 아니다. 방어에 주력하는 적을 상대하면 자연스럽게 장기전이 될 수 밖에 없는데, 그 때는 태풍이 올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사상자가 제법 발생한 상태에서 자칫하면 지원군, 보급, 퇴로가 전부 끊길 수가 있으니 퇴각한 것이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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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때 대마도 정벌은 사실상 원정 이라고 쓰고 약탈 나간 왜구들의 빈집털이가 되었다. 이 왜구들은 충청도에 있는 수군 진영을 기습, 각종 물자와 함선을 약탈하고 귀환하는 것을 당시 상왕이었던 태종은 왜구들이 대마도에 도달하기 전에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군은 임무를 완수하고 이미 거제에 도착한 상태였다. 그런데 군사들이 지쳐 있었고, 마침 태풍이 오는 듯한 날씨여서 신하들은 일단 군사를 재정비 할 것을 요청했다. 태종의 새로운 명령을 받은 사자가 거제에 도착했을 때 마침 군사들이 대마도로 출발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날 밤에 풍랑이 몰아쳐 전함이 일부 파손되고 유실되었으며 군사 일부가 사망했다.

그러자 상왕 태종은 병조판서를 시켜 다음과 같은 글을 지어 항복한 왜인들에게 들려서 대마도로 보낸다. 전체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대마도주에게 회유책을 쓴 것이다.

“본조가 계하여 선지(宣旨)를 받들어 이르노니, 거기에 이르기를, ‘하늘이 이 백성을 내실 때에 기운으로 형체를 이룩하고, 이치도 또한 품부하여 주었으니, 착한 일을 하면, 백 가지 상서를 내리고, 불선한 일을 하면, 백 가지 재앙을 내리나니, 옛적 제왕이 천도(天道)를 받들어 백성에게 곡식을 심고 거두는 것을 가르쳐서, 오곡을 길러서 그 몸을 기르는 것이다. 그 고유한 의리를 좇아 깨쳐서 인도하여, 그 마음을 착하게 하는 것이니, 만일 굳세게 버티어 굽히지 않고 사람을 재물로써 죽이고 짓밟아서 민망하게도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작으면 형벌하여 죽이고, 크면 정벌하여 없애는 것이 요(堯)·순(舜)과 삼왕의 사람의 임금 노릇하는 법이 이와 같을 뿐이다.

대마도라는 섬은 경상도의 계림(鷄林)에 예속했으니, 본디 우리 나라 땅이란 것이 문적에 실려 있어, 분명히 상고할 수가 있다. 다만 그 땅이 심히 작고, 또 바다 가운데 있어서, 왕래함이 막혀 백성이 살지 않는지라, 이러므로 왜인으로서 그 나라에서 쫓겨나서 갈 곳이 없는 자들이 다 와서, 함께 모여 살아 굴혈을 삼은 것이며, 때로는 도적질로 나서서 평민을 위협하고 노략질하여, 전곡(錢穀)을 약탈하고, 마음대로 고아와 과부, 사람들의 처자를 학살하며, 사람이 사는 집을 불사르니, 흉악 무도함이 여러 해가 되었으나, 우리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獻大王)께서는 지극히 어질고 신무(神武)하시므로, 하늘 뜻에 응하여, 혁명을 일으켜 비로소 집으로 이루어진 나라를 창조하매, 저자와 전포도 변함이 없이 큰 기업(基業)이 정하였졌으니, 이것이 비록 탕임금과 무왕의 성덕이라 할지라도, 어찌 여기에서 더하겠는가.

국세가 크게 확장되고 병력이 뛰어나게 충실하니, 산과 바다를 뚫어서 통하게 할 수도 있고, 천지를 뒤흔들게 할 수도 있으니, 높고도 높으며 성하고도 성함이여, 대저 혈기있는 자 두려워서 굴복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때를 당하여, 한 편장(褊將)을 명하여, 대마도의 작은 추한 놈들을 섬멸하게 하니, 마치 태산이 까마귀 알을 누르는 것과도 같고, 맹분(孟賁)·하육(夏育) 같은 용사가 어린아이를 움키는 것과도 같으나,

우리 태조께서는 도리어 문덕을 펴고, 무위(武威)를 거두시고, 은혜와 신의와 사랑과 편안케 하는 도리를 보이시니, 내가 대통을 이어 나라에 임한 이래로 능히 전왕의 뜻을 이어서, 더욱 백성을 측은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비록 조그마한 공손하지 못한 일이 간혹 있어도, 오히려 도도웅와의 아비 종정무(宗貞茂)의 의를 사모하고 정성을 다한 것을 생각해서, 범하여도 교계(較計)하지 않았으며, 통신하는 사신을 접할 때마다 사관(使館)을 정하여 머물게 하고, 예조에 명하여 후하게 위로하고, 또 그 생활의 어려움을 생각하여, 이(利)를 꾀하는 상선(商船)의 교통도 허락하였으며, 경상도의 미곡을 대마도로 운수한 것이 해마다 대개 수만 석이 넘었으니, 그것으로 거의 그 몸을 길러 주림을 면하고 그 양심을 확충하여, 도적질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천지 사이에 삶을 같이할까 하였노라.

나의 용심(用心)함도 또한 부지런히 하였더니, 뜻밖에도 요사이 와서 배은 망덕하고 스스로 화근을 지으며, 망함을 스스로 취하고 있으나, 그 평일에 귀화한 자와 이(利)를 얻으려고 무역하거나 통신 관계로 온 자와, 또 이제 우리의 위풍(威風)에 따라 항복한 자는 아울러 다 죽이지 아니하고, 여러 고을에 나누어 두고서 먹을 것 입을 것을 주어서 그 생활을 하게 한 것이며, 또 변방 장수에게 명하여, 병선을 영솔하고 나아가서 그 섬을 포위하고 모두 휩쓸어와 항복하기를 기다렸더니, 지금까지도 그 섬 사람들은 오히려 이럴까 저럴까 하며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내 심히 민망히 여긴다.

섬 가운데 사람들은 수천에 불과하나, 그 생활을 생각하면, 참으로 측은하다. 섬 가운데 땅이 거의 다 돌산이고 비옥한 토지는 없다. 농사하여 곡식과 나무를 가꾸어서 거두는 것으로 공(功)을 시험할 곳이 없으므로, 장차 틈만 있으면, 남몰래 도적질하거나, 남의 재물과 곡식을 훔치려 하는 것이 대개 그 평시에 저지른 죄악이며, 그 죄악이 벌써부터 가득차 있는지라, 어두운 곳에서는 천지와 산천의 신이 묵묵히 앙화를 내리고, 밝은 곳에서는 날랜 말과 큰 배며, 날카로운 병기와 날쌘 군사로써 수륙의 방비가 심히 엄하니, 어디가서 주륙(誅戮)의 환을 만나지 아니할 것인가.

다만 고기 잡고, 미역 따고 하여 매매하는 일은 이에 생활의 자료가 되는 바인데, 이제 와서는 이미 배은하고 의를 버려 스스로 끊는 것이며, 내가 먼저 끊을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세 가지를 잃은 자는 기아를 면치 못할 것이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릴 뿐이니, 이에 대하여 계책하기도 또한 어려운 일이다.

만약 능히 번연(飜然)히 깨닫고 다 휩쓸어 와서 항복하면, 도도웅와는 좋은 벼슬을 줄 것이며, 두터운 녹도 나누어 줄 것이요, 나머지 대관들은 평도전(平道全)의 예와 같이 할 것이며, 그 나머지 여러 군소(群小)들도 또한 다 옷과 양식을 넉넉히 주어서, 비옥한 땅에 살게 하고, 다 같이 갈고 심는 일을 얻게 하여, 우리 백성과 꼭 같이 보고 같이 사랑하게 하여, 도적이 되는 것이 부끄러운 것임과 의리를 지키는 것이 기쁜 일임을 다 알게 하여, 이것이 스스로 새롭게 하는 길이며, 생활하여 갈 도리가 있게 되는 것이라,

이 계책에서 나가지 아니한다면, 차라리 무리를 다 휩쓸어서 이끌고 본국에 돌아가는 것도 그 또한 옳을 일이어늘, 만일 본국에 돌아가지도 아니하고 우리에게 항복도 아니하고, 아직도 도적질할 마음만 품고 섬에 머물러 있으면, 마땅히 병선을 크게 갖추어 군량을 많이 싣고 섬을 에워싸고 쳐서 오랜 시일이 지나게 되면, 반드시 장차 스스로 다 죽고 말 것이며, 또 만일 용사 10여 만명을 뽑아서 방방곡곡으로 들어가 치면, 주머니 속에 든 물건과 같이 오도가도 못하여, 반드시 어린이와 부녀자까지도 하나도 남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육지에서는 까마귀와 소리개의 밥이 되고, 물에서는 물고기와 자라의 배를 채우게 될 것이 의심 없으니, 아, 어찌 깊이 불쌍히 여길 바 아니겠는가,

이것은 화복의 소재가 소소하게 밝은 일이어서, 망매(茫昧)하여 분명치 못하거나 궁구하여도 끝까지 모를 일이 아니다. 옛 사람의 말에, 「화와 복은 자기 스스로가 구하지 않는 것이 없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열 집만이 사는 고을에도 반드시 충신(忠信) 한 사람은 있다.」 하였으니, 이제 대마도 한 섬 사람에도 역시 다 하늘에서 내린 윤리와 도덕의 성품이 있을 것이니, 어찌 시세(時勢)를 알고 의리에 통하여 깨닫는 사람이 없겠는가.

병조는 글을 대마도에 보내어, 나의 지극한 생각을 알려서, 그 자신(自新)할 길을 열어 멸망의 화를 면하게 하고, 나의 생민(生民)을 사랑하는 뜻에 맞도록 하라.’ 하였다. 이제 선지(宣旨)로써 일의 마땅함을 자세히 알게 하노니, 오직 족하(足下)는 잘 생각하라.”

자세한 내용은 세종실록 4권 세종 1년 7월 3일부터 7월 17일까지의 기사 참조. 조선왕조실록

한편 일본어 위키백과에는 일본 측의 기록에 비추어 보면 조선군 사상자가 2,500명 이상이라고 적혀있다고 한다. # 이를 들어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대놓고 자기들이 승리했다고 적고 있지만, 일본인들이 말하듯이 조선의 참패 운운할 수준은 절대 아니었고, 주력함선과 병사들을 거의 보존한 상태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조선이 원했던 왜구 소탕이라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이 원정의 성공과 일본 무로마치 막부의 안정으로 왜구의 수는 이전에 비해 격감 하여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조선의 물질적 양보 하에 왜와 조선간의 평화적 교류가 활발해졌다. 당장 조선왕조실록을 뒤져봐도, 세종실록 이후로는 성종때까지 왜구관련 기사가 씨가 마른다. 모두가 대마도 정벌의 효과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크게 영향을 끼쳤을 건 분명하다.

유럽의 역사와 비교해보면, 르네상스 시기 지중해를 횡행했던 바르바리 해적을 토벌하기 위해 유럽 각 나라들은 몇 차례고 토벌을 했지만 오스만 제국에서 은근히 밀어주는 통에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심지어 본거지였던 튀니스나 알제 같은 곳을 일시적으로 점령하긴 했지만 오히려 비용만 막대하게 들 뿐, 약탈 자체는 계속되었다. 덕분에 모로코의 술탄 같은 경우 수십만의 유럽인 노예들을 거느리고 베르샤유 궁전 못지 않은 호화로운 궁전을 건립하며 오스만 제국 못지 않은 하렘을 거느렸다고 한다. 이 해적들이 겨우 토벌된 게 산업혁명기였던 19세기 초였다.

게다가 남중국해의 베트남/중국계 해적 같은 경우 중국 황제들이 해적 두목들에게 벼슬 주는 식으로 무마한 경우도 상당히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정일수. 이와 비교하면 조선은 나름대로 왜구 소탕에 성공한 셈이었다.

3.2 변경으로서의 역사

어쨌건 그 이후 대마도의 영주는 조선 왕의 신하(예조참의 급[15]이었다고 한다)이면서 동시에 막부다이묘라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투잡을 뛰게 된다. 교과서적인 변방사라 할 수 있다. 어쨌거나 이 원정 이후에도 왜구가 근절되지 않자 조선에서는 강경책 대신 회유책을 써서 무역을 허가했다. 대마도가 일본과 대마도, 조선과 대마도를 무역하면서 조일무역의 중개지가 되었고 그때문에 많은 대마도인들이 조선에 들어와서 살기 시작했는데, 외국인이 조선땅에 들어와서 사는걸 조선 정부가 곱게 볼리가 없었고, 이에 경상도 해안 인근에 삼포를 신설하여 무역량을 줄였다. 그러나 16세기까지 대마도는 조선의 목면과 곡물 등을 수입하고 , , 물소 , 후추 등을 제공하면서 중개인으로서의 지위를 누렸다. 곡물생산량이 1만 석 정도[16]에 불과하던 쓰시마는 조선과의 무역(밀무역이 다수였지만)으로 수입을 2배 이상 뻥튀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닌의 난 이후 무로마치 막부의 통제가 무너지고, 일본 상인들은 무역의 확장을 요구하며 중종5년(1510년) 부산포, 내이포, 염포의 삼포에 사는 왜인들이 대마도주의 지원을 받아 폭동을 일으켰다(삼포왜란). 삼포왜란은 15일 만에 진압되었고 외교는 단절되었다. 이에 일본에서 직접 중개를 하여서 2년 만에 관계를 회복하는데, 이것이 임신약조다. 그러나 이럴 때마다 무역에 대한 통제는 강화되었고 이에 대마도인들은 다시 반발하는 구조가 반복되어 30차례 정도의 왜변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비변사가 설치되기도 했다.

실록을 보면 꾸준히 대마도를 간사하고 교활하다고 평가하는데 이러한 경험으로 주요했을 거라 생각된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단순한 노략질 차원을 넘어 정규군의 전면적 침략전쟁에서 선봉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막부의 압박으로 인해 대마도가 떠밀려 들어간 것인데,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였으며, 만약 대마도가 원정 참가를 거부하면 대마도부터 결단난다.

실제로 쓰시마 영주의 입장에서 두 나라가 전쟁나서 좋을 이유가 하나도 없기 때문에 전쟁을 막으려고 나름대로 노력을 하기도 했다. 1590년에는 일본을 경계하라는 의미에서 대마도 영주가 선조에게 조총 몇 점을 진상하였다. 그러나 이미 화포 무기를 지닌 조선은 총통에 비해 위력이 약한 조총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본격 대포 있다고 소총 쌩까는 군대 전쟁이 일어난 이후에야 조총의 장점을 인식하게 된다. 임진왜란 이전에 조선에 통신사를 요청하기도 했는데, 이 통신사가 바로 황윤길김성일의 통신사다.

또 그 유명한 '명으로 가고자 하니 길을 빌려 달라(假道入明)'라는 문구도 대마도가 조작한 것으로, 원래 문구는 '명을 정벌하려 하니 길을 안내하라(征明嚮導)'였다. 대마도주가 택도 없는 무례한 요구를 조선이 받아들일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다소 완화된 표현으로 조작했는데, 역시 조선의 반응은 ㅗ였지. 현대라면 전쟁특수라도 누렸겠지만 그딴 건 없고 뱃길 안내를 위해 끌려가서 다시 돌아오지 못한 일도 비일비재. 거기다 식량부족으로 기아에 시달리면서 대마도는 임란 동안 상당한 고생을 한다. 그래서인지 당시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는 일본이 조선을 완전히 점령할 경우 농사가 가능한 거제도를 받기로 했다고 한다.

아무튼 강항 선생의 《간양록》에 보면 저 투잡을 뛰면서 그 사이에서 이익을 취하는 대마도의 어쩔 수 없는 삶이 한일 양국 모두에게는 안 좋게 보였는지, 대마도 관련된 부분에서는 결코 좋은 소리가 안 나온다. 간양록에 실린 일본 승려의 증언에 따르면, 평시에 조선에 오는 일본 사절들 상당수는 실제로는 대마도주 개인이 보낸 것이고, 왜국의 국서(倭國書)란 것도 다 대마도주의 거짓 수작이라고 한다. 심지어 임란 이전 김성일 일행이 일본에 갔을 때, 일본 승려가 조선 통역에게 사정을 듣고 대마도주의 속임수를 다 알려 주려다 대마도 통역에게 제지당한 일도 있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수도의 각 지역별 영주들이 상경해 묵는 수도의 집마저도 대마도주는 없어, 당시 소 요시토시는 장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집 근처 여관에서 잠시 유숙하고, "일본 본토인은 악착스럽지만 교활하지는 않은데, 대마도인은 악착스럽기는 덜 하나 간사스러운 꾀는 이루 말할 수 없다"는 등의 안 좋은 대우와 시선에 대한 기록들이 넘친다. 하지만 대마도인들 입장에서는 저렇게 하지 못하면 살 수가 없는 것이 현실.

위에서 말한 국서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자면 임란 이후 먹고 살기 위해 조선에 무역 재개를 요청하는데, 조선의 반응은 당연 'ㅗ'. 그렇지만 북방의 여진족이 흥하고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을 쇄환해야 했기 때문에, 국고 재개에 의지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츤데레처럼 불구대천의 원수들이라 욕하면서도 '대마도만은 허락해줄지도...?'라고 말을 흘리면서 대마도를 설레게 했다. 대마도가 포로 일부를 석방하면서 징징대니까 조선은 일단 조선은 사명당 대사를 '탐적사(探賊使)'라는 명분으로 일본에 파견하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접견한다.

조선에서는 명나라조공책봉체제에 편입시키려고 쇼군의 칭호를 '국왕'으로 해야 한다고 했고, 당시에는 목마른 자가 우물 판다고, 먼저 굽히고 들어가는 쪽이 아쉬운 쪽, 즉 국서를 먼저 보내는 쪽이 지고 들어간다는 의미가 있으므로 "니들이 먼저 국서 보내렴" 하는 입장을 취했다. 일본은 당연히 거부하고, "국고 재개하려면 니네가 먼저 국서 보내라"라고 요구. 서로 기싸움을 하는데, 이 과정에서 속 타는 건 대마도. 그래서 국서를 위조하게 된다.

일본이 먼저 국서를 보낸 것처럼 문서를 쓰고 조선의 요구사항 중에 "왕릉 도굴한 자를 잡아서 보내라"는 항목을 만족시키려고 다른 죄를 지은 죄인을 보내서 '얘가 바로 조선 왕릉 도굴한 놈임여'라고 하니, 조선은 일본이 먼저 보낸 줄 알고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 : 국서에 답하고 포로를 데려오는 사신)을 파견. 이들이 가져온 국서에 '국서에 답한다'는 표현이 있자 대마도주는 이 국서마저 국서를 보낸다는 문장으로 조작. 결국 국교가 회복되고 무역도 제한되긴 했지만 재개된다.

그런데 1635년 이 국서 위조가 밝혀지면서 대마도주가 털릴 위기에 처하지만 에도 막부는 이를 묵인해줬고[17] 다른 다이묘들과 로쥬가 합의하여 대신 감독관을 파견하면서 양속적 성격이 강했던 대마도는 일본에 편입되어 대조선외교의 창구같은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최근 16~18세기 동아시아 은 교역에 대한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반까지 쇠퇴했던 중국 - 일본의 은 교역을 대체하는 창구로서 대마도의 은 무역에 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대체로 17세기부터 18세기 초반까지 조선은 중국의 생사, 비단, 약재 등을 중개하고 인삼 등을 판매하며 수익을 누렸다. 특히 인삼은 일본인들의 수요가 매우 높아 1695년 일본이 수출용 은화의 은 함량을 80%에서 64%로 깎았을 때도 유일하게 80% 은을 줘가면서 사갔던 물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18세기 초반 인삼의 일본 내 국산화가 진행되고, 북아메리카산 백삼이 유입되면서 인삼 교역은 쇠퇴하고 중개 무역은 18세기 후반 경에 거의 단절된다. 하지만 교역이 단절되었다는 것은 아니고, 해삼 등 해산물이나 쇠가죽 등의 판매가 대마도를 경유해서 활발히 이루어졌다. 조선은 반면에 꾸준히 은, 동 등 귀금속과 유황 등을 수입하는 경로로 대마도 무역을 이용했다.

이 시기에 조선 훈민정음의 영향을 받은 아비루 문자가 만들어졌다. 약간 변형된 한글일본어 오십음도를 표현하는 체계로, 실상 널리 쓰이는 단계까지 가진 못했다.

3.3 근현대

면암 최익현을사조약에 반대하는 의병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유배된 곳이기도 하다. 최익현은 1906년 음력 7월 9일에 유배되어 음력 11월 17일에 병사했다. 최익현이 단식 투쟁을 하던 끝에 사망했다고 널리 알려져 있으나 최익현의 제자 임병찬이 쓴 《대마도일기》에 따르면, 최익현은 일본군 장교가 "일본이 주는 밥을 먹었으니 머리카락을 깎으라"고 요구하자 이에 단식 투쟁을 선언하고 고종에게 상소문을 올리려 했으나, 다음날 그 일본군 장교가 다시 찾아와 통역에 잘못이 있었으며 사죄한다고 말하자 그날 저녁 죽을 입에 댔다고 한다. 최익현이 단식을 한 기간은 이틀이었으며, 그로부터 3개월 뒤 병을 얻었고 이로 인해 병사했다. 일본에서 의병 기념비를 세웠는데 당연히 관광객 유치용이다.

대마도주에서 화족으로 편입한 소씨 가문의 소 다케유키덕혜옹주의 남편이기도 했다.

대한민국 수립 직후 이승만 대통령이 대마도 영유권 주장 및 반환요구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포츠담 선언에서 일본이 불법적으로 점령한 영토는 반환하기로 했으므로, 불법적으로 점령된 대마도도 반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후 간접 지배 형태를 직접 지배 형태로 전환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역사적인 근거가 미약한 주장이다. 그러나 그 당시 일본 열도는 이 말을 듣고 불안해했으며 언론에서는 대마도의 위기라는 식으로 대서특필했다.

사실 대마도 반환 주장은 독도 영유권이 불확실했던 상황에서 협상력 유지를 위한 카드의 하나로 사용했을 가능성을 고려해 볼 수 있다. 독도에 대한민국의 정식 경찰 병력이 입도한 것은 1954년이 되어서였기 때문. 협상 카드로서의 대마도 영유권 선언을 넘어 실제로도 이승만이 대마도 영유권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있었는지 여부는 진실은 저 너머에. 대한민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쓰시마가 일본령이라고 적극적으로 인정하지는 않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부 차원에서 쓰시마 영유권을 주장하지도 않는다.

일본 시마네 현이 우리땅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 우기며 다케시마의 날을 선포하자, 이에 대응하여 경남 마산(현 창원시)는 2005년 6월 19일을 대마도의 날로 선포한다. 마산시가 앞장선 건 그곳에서 기해동정의 우리 원정군이 출항했기 때문이요, 6월 19일이 작전개시 D-데이였던데 기인한다. 대마도의 날 제정 자체는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에 대한 항의 차원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이 항목에서 길게 설명했듯이 명확한 증거에 기반한 행동은 아니다. 어찌되었든 덕분에 대마도 주민들이 한국인들을 곱게 보지 않게 되었다.

3.4 대마도는 한국땅(?)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러한 주장은 일본이 다케시마는 일본 땅이라 하는 것과 같다.

3.4.1 역사

대마도 영유권 주장은 대한민국 정부 차원에서 처음으로 제기한 것은 1949년이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대마도는 원래 우리나라 땅이다. 1870년 일본이 점령했다.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으로 점령한 영토를 반환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무조건 돌려줘야 한다"고 일본에 반환 요구를 했다.

지난 2005년에 확인된 미국 국무부 외교문서에 따르면 1951년 4월 27일 한국 정부는 대마도에 관해 다음과 같이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은 일본이 대마도에 대한 모든 권리, 호치, 청구를 분명히 포기하고 그것을 한국에 돌려줄 것을 요청한다. (In view of this fact the Republic of Korea request that Japan specifically renounce all right, title and claim to the Island of Tsushima and return it to the Republic of Korea)

그러나 1951년 7월 9일 미국은 "대마도는 일본이 오랫동안 통제하고 있고 이번 평화조약은 대마도의 현재 지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며 한국의 요구를 거부했다.반대로 독도는?? 이후 한국 정부도 대마도 반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2012년에 지방자치단체를 중심으로 '대마도 되찾기 운동'이 계속되자 김황식 국무총리는 "대마도를 우리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며 "국제사회가 대마도를 일본 땅으로 인식하는 상황에서 우리 땅이라는 역사적 근거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주장은 어렵다)"고 설명했다.

2015년 현재 대마도 실지(失地) 회복운동을 추진하는 지방단체의 촉구 결의안도 나오는 등 대마도의 영유권 주장은 은근히 넓게 퍼지는 움직임인 듯하다. 공식적으로 정부 차원에서 대마도 영유권을 주장하지는 않지만, 지방자치단체를 비롯해 # 민간 차원에서는 대마도 영유권에 대한 주장이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 그러나 학계, 특히 일본사 연구자들은 대마도 영유권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다.

3.4.2 비판

한일 간의 영토문제가 다시 시끄러워질 때마다 괜히 끌려나오는 이야기이다.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라는 것은 정설이지만, 쓰시마 섬이 대한민국의 영토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소수설이자 비주류로 취급된다.

대마도는 적어도 3세기부터 대마도는 에 귀속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대마도는 한국 역사상 단 한 번도 정식 군현으로 편입된 적이 없다. 철저한 중앙집권제인 조선에서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 땅이라 부를 만한 근거가 약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대표적인 지역이 제주도. 고려 대까지만 해도 제주는 탐라성주가 별도로 다스리는 반독립지역이었지만, 조선은 개국하자마자 쿨하게 탐라성주직을 폐지해버리고 제주목사를 파견했다. 대마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조선이 대마도에 왜 정식으로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답을 하지 못한다.

나의 부덕(不德)한 소치로 백성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여, 마침내 경내 백성들이 대국의 변경을 침범하였으니, 이는 대국이 용사(容赦)할 수 없는 바이라, 비록 죽음을 당한다 할지라도 실로 내가 원하던 바이니, 어찌 추호라도 마음에 거리끼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고을 사람으로서, 혹은 사명을 띠고, 혹은 무역을 종사한 자들로, 당시 대국 경내에 있던 자 3백 여 명이 모두 관련되어 구류당하고 있으니, 그 부모와 처자들이 안타까워하고 그리워하는 정을 견디지 못하여, 밤낮으로 울며 정신을 잃은 자가 10에 8, 9에 달합니다. 백성 한 사람이 제대로 살지 못할지라도, 인자한 사람은 이를 걱정하는데, 하물며 3백여 명에 달하지 않습니까. 대국에는 다행히 지금 위로는 훌륭한 임금이 계시고, 아래에는 어진 신하가 있사오니, 어찌 이를 위하여 측은히 여기지 않겠습니까. 내가 옛 역사에서 이를 본다면, 요(堯)와 같은 어진 이가 아버지인데도 단주(丹朱) 같은 못난 이들이 있으며, 순(舜)도 큰 성인이지만 고수(瞽叟) 같은 모진 아버지와 상균(商均) 같은 어리석은 아들이 있었으니, 성품의 선악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라도 서로 닮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다스리는 자는, 그 자신에만 국한하고, 그 친족에까지 연루시키지 않는 것인데, 더구나 다른 사람이야 더욱 그렇지 않겠습니까. 지금 형을 받고 죽음을 당한 자들과 구류를 당한 자들은 서로 골육의 친족도 아니며, 그들이 한 짓도 서로 관련이 없어, 월(越)나라 사람이 진(秦)나라 사람의 비대하고 수척한 것을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대국에서는 옥과 돌을 구별하지 않고 곤륜산(崐崙山) 불 속에 섞어 버리며 죄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노여움을 옮겼으니, 어진 임금이 먼 곳의 사람을 애휼하는 도리가 과연 이러합니까. 만일 대국에서 은혜를 베풀어 일일이 옛 고장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면, 다만 내가 감사히 여길 뿐 만아니라, 죽은 아비 정무(貞茂)의 영혼도 지하에서 응당 은혜를 갚을 것입니다.

또한 최공(崔公)이 금년 정월에 보낸 서계(書契)를 받자오니, ‘대마도가 경상도에 예속되었다.’ 했는데, 역사 서적을 조사하여 보고 노인들에게 물어보아도 사실 근거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대왕께서 훌륭한 덕을 닦고 두터운 은혜를 베푸신다면, 누가 감히 귀의하지 않겠습니까. 옛날 주(紂)가 무도한 까닭에, 억조의 무리가 모두 창을 거꾸로 잡고 대항하였으며, 주공(周公)이 정치를 잘한 까닭에, 월상씨(越裳氏)가 아홉 번이나 통역을 거쳐서 이르렀으니, 반드시 옛날대로 〈일본 소속으로〉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 덕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바라옵건대, 여러분들께서는 나의 작은 정성을 임금님께 전달하여 주옵소서. 앞서 주신 전자(篆字)로 새긴 나의 이름을 지금 찍어서 신빙할 수 있는 표적으로 삼습니다. 현하 혹독한 추위에 모두들 나라 위하여 건강에 유의하옵소서."[18][19]

단순히 그냥 '맞불 질러보자'는 식으로 '대마도는 한국 땅'이라고 외치는 경향이 있는데, 실질적으로는 괜히 연관되어 있는 독도 문제를 왜곡시킬 뿐, 한일 외교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대마도가 한국 땅이라는 근거는 대개 이 기사에 정리되어 있지만, 기사 내용을 엄밀히 고찰하면 당시 일본 중앙에서 대마도를 조선과의 접경지, 혹은 반독립적인 외지로 파악했다는 증거일 뿐 한국이 역사적으로 대마도를 점유했다는 증거는 될 수 없다라고 봐야 한다. 지도에서 쓰시마가 조선령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은 프랑스어판 지도와 영어판 지도에서 발생하는 문제일 뿐이고, 신문 기사에서 일본의 날조라고 주장한 일본 국내 고지도에서는 대마도를 일본 땅으로 기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한다.

그리고 포츠담에서 대한제국 영토라고 인정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거짓말이다. 애시당초 포츠담 회담에서 일본의 영토는 주요 의제도 아니었고, 일본 제국의 영토 문제는 연합국의 점령지 분할 문제 때문에 상세하게 다뤄진데다 해당 문서들은 기밀이 해제되어 다 공개된지 이미 20년이 넘는다. 무엇보다 미국이 대마도를 한국의 고유 영토로 인정했으면 처음부터 대마도는 GHQ가 아니라 주한미군정청이 관할했어야 했다.

이승만이 포츠담 선언에 의거하여 대마도를 반환할 것을 요청한 게 와전된 것으로 보이나, 미국은 일관되게 대마도를 1905년 이전의 영토인 "혼슈, 시코쿠, 큐슈, 홋카이도와 부속 열도"의 범위 안에 대마도를 포함시켰다. 또 산맥이 대마도까지 이어진다는 것도 산줄기의 의미에서 주장한 것이지, 이걸 두고 영유권을 주장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2013년에 대마도가 본래 조선 영토였다는 고지도가 발견되었다는 기사도 떴지만 당대에 대마도주가 조선의 신하를 자청함과 동시에 일본 지방영주이기도 했다는 이중적인 입장을 지니고 있었던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사실상 대마도는 유사 이래로 한반도 세력의 지배를 제대로 받은 적이 거의 없다.

어떤 고지도에서의 한반도와 대마도의 표기색이 같다는 이유로 대마도는 한국의 영토라는 주장을 하는 세력도 있다. 이에 대한 반론은 여기를 참조할 것. 반론의 주요 근거는 그 지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도들은 대마도를 일본령으로 표기하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대마도와 한반도가 같은 색으로 칠해져있는 지도에서는 만주대만도 조선과 같은 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들고 있다.

3.4.3 경계하는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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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출입이 잦다보니 자위대 기지 부근에 펜션하려고 집을 사자 산케이 신문에서 군사 기밀이 새어나갈 수 있다고 경고하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이 문제 때문에 2000년대 이후 일본 우익에서는 맥아더 통치시기 무효화된 법인 안보상 긴요한 접경지역의 토지를 외국인이 구매할 수 없도록 한 1925년의 외국인토지법을 재시행하라는 요구를 해오고 있다. 마침내 2010년 10월 15일, 간 나오토 일본 총리도 그에 대해 필요성을 검토해 보겠다고 발언하였다.

한편 이를 오도하여 땅을 사서 대마도가 한국 땅이 될 수 있다 같은 식으로 독해하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지만 당연히 민간에서 영토 주권을 살 수 있다는 개념 자체가 말도 안 된다. 오히려 한국인이 산 대마도 땅이 한국인 소유라는 것을 보장해주는 것이 일본의 주권에 의해 적용되는 일본 소유권법이니, 이런 생각은 주객이 전도된 것.

오자와 이치로 같은 정치인도 "일본인제주도에 땅을 산다고 해서 제주도가 일본 땅이 됩니까?"라고 일갈했으나, 한국 언론들이 이 발언의 앞뒤 맥락을 전부 자르고 보도하는 바람에 제주도 망언으로 까였다. 불쌍한 오자와...[20] 한편 웃긴 것은 일본인도 똑같은 드립을 했다는 것. 즉 센가쿠 열도를 사버리자고 했다. 부동산의 취득과 주권의 이양은 별개의 일이라는 것을 망각한 예.

여담으로 혐한 세력에서는 이승만이 대마도를 침공하려고 국군을 남쪽에 집중시켰다가 6.25 전쟁으로 참패를 당했다고 역사왜곡을 하기도 한다.

3.4.4 언어가 비슷하다?

한일 양국에 끼인 지리적 특성상, 한국어 어휘를 쓰시마 섬 사투리로 쓰는 경우가 있으며 이는 스펀지에 소개되기도 했다. 친구(칭구), 바지(바치), 팠다(팟다) 등. 하지만 현재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고 한다. 한때는 쓰시마 방언이 한국어와 일본어 사이의 연관성을 풀어줄 열쇠로 기대되기도 했지만, 일본 언어학자들의 연구 결과 단순히 어휘를 주고받는 정도 이상의 연관성은 없다고 판명되었다.

4 산업

산림으로 둘러싸여 평지가 적은 지형 특성 때문에 농업은 전반적으로 발전하지 않았다. 메이지 시대까지 화전에 , , 등을 재배했지만, 현재는 , , 감자, 고구마 등이 주로 재배된다. 임업은 땔감이나 펄프용으로 이용되어 왔지만 오늘날에는 삼나무편백나무의 중요성이 늘어났다. 편백나무는 '쓰시마 히노키'라는 브랜드로 판매되고 있다. 줄참나무 자원이 풍부하여 표고버섯 재배도 왕성하다.

어업은 쓰시마의 기간 산업 중 하나이다. 전통적으로 쓰시마 근해와 동해에서는 오징어가 특산품이었다. 그래서 이즈하라에는 오징어를 넣은 수제 햄버거를 파는 가게도 있다. 또한 다이쇼 시대 이후에는 아소 만을 중심으로 진주 양식이 활발하다. 한일어업협정이 체결되고 공동규제수역이 설정되면서 어획량은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 그 외에도 전복은 밀획으로 피해를 입고 있다.

경제적으로 쓰시마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산업은 바로 관광업, 특히 한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관광 산업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관광지로서의 쓰시마' 항목을 참조할 것.

과거 쓰시마가 조선과의 무역과 조선에서 지원해 주는 식량이 쓰시마 섬의 주 수입원이었고 현재는 한국 관광객들이 쓰시마섬의 주 수입원으로 임진왜란처럼 한일관계가 악화되면 가장 피해를 많이 보는 지역이 쓰시마다. 그래서인지 일부 한국인들이 쓰시마에서 벌이는 추태로 인해 한국인을 싫어하는 쓰시마 주민들도 있으나, 이들도 지역경제에는 하나도 도움 안 되고 깽판을 치는 일본 극우세력을 더 싫어한다. 일본 정부에 혐한단체들이 쓰시마에 활동하는 것을 막아달라는 민원이 올 정도다.

5 군사

조선군과 충돌한 사례가 있다. 이종무대마도 정벌 등.

21세기 현재 쓰시마의 방위를 담당하는 집단은 쓰시마경비대를 참고할 것.

한국과 일본의 전쟁을 그린 창작물에서는 거의 100%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1순위로 한국에게 털리는 동네이다. 보통 수십기의 탄도 미사일이나 전투기로 융단폭격을 가한후 공수부대를 투입해서 점령하는 식(...). 실제에서나 가상에서나 이래저래 취급이 안습인 동네.

쓰시마의 위치상 전략적, 전술적 가치는 대단히 높지만 우리나라와 가까운 만큼 전력 집중 시 무력도발로 비추어질 수 있기 때문에 쓰시마의 실질적인 방위를 위한 병력은 거의 배치하지 않고 있다. 쓰시마 경비를 맡고 있는 쓰시마 경비대 자체는 나름대로 레인저 훈련 등을 받은 정예 대원들이지만, 부대의 성격 자체는 경무장을 갖춘 경보병 부대에 가까우며 실질적인 병력 규모도 잘해야 대대급이라서 대규모 병력의 상륙전에 대응할 능력은 가지지 못한다. 자위대 내에선 연대급의 독립부대로 대우하는 편이나 실질 병력은 해상/항공자위대 병력을 합쳐도 700여명 수준이다.

대신 자위대 측은 헬리콥터와 LCAC 등을 동원하는 도서 탈환 훈련을 비교적 중시하는 편인데, 한국 측에서는 이것이 독도 침공의 일환이라며 경계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론 쓰시마 섬에 대한 탈환 훈련에 가깝다. 한국군과 자위대는 독도분쟁시 일본은 해상자위대로 독도를 점령한다는 시나리오를 구상하고 있는 중이며 한국은 독도를 점령당할 시 부산에 자주포를 전개시켜 쓰시마를 포격하고 해병1사단과 제7기동전단이 쓰시마를 점령한다는 시나리오를 구상하는 중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과의 국지전, 혹은 전면전이 발생할 경우 자위대의 전략은 일단 쓰시마 섬의 일선 방위는 사실상 포기하고 이후 전황의 판도를 고려해서 쓰시마 섬을 재탈환하는 방향으로 세워져 있다는 것. 한국은 쓰시마를 점령해서 독도와 교환하기 위한 카드로서 사용하는 방향으로 세워져 있다.[21]

항공자위대는 중국과 북한의 미사일 탐지를 위해[22] 맑은 날이면 부산과 마주볼 수 있는 매우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대마도의 부속도서인 우니 섬에 서부방면대 제 19 경계대 소속으로 지상 고정식 장거리 조기경보레이더를 설치해 운용 중이며, 2016년에는 탐지능력이 더욱 향상된 신형 J/FPS-7 레이더로 교체했다.

6 관광지로서의 쓰시마

대마도는 대한민국 영토에서 제일 가까운 일본 땅이다. 부산광역시와 쓰시마의 거리는 50km밖에 안 되는데, 정작 후쿠오카와 쓰시마의 거리는 130km나 된다. 이러다 보니 쓰시마 섬은 한국과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위치이다. 쓰시마 섬은 페리 개통과 관광객 유치 노력으로 주로 항로가 있는 부산 및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국 관광객을 많이 유치하고 있다. 페리 가격도 저렴하고 2박 3일 정도로 어르신들이 경치 구경하기는 좋다고 한다. 게다가 워낙에 한국인 관광객들이 이 섬의 지역경제의 중추가 되고있는지라 한국어가 통하는 현지인이 매우 많으며 간판, 메뉴판들도 친절하게 한국어 안내를 해주고있는 곳이 많다!

그 밖에도 바다낚시하러 가는 사람이나 자전거 하이킹 코스가 좋다고 해서 많이들 간다고 한다. 한국 자본이 많이 들어오고, 쓰시마 경제가 한국 경제에 종속되었다고 할 정도로 한국 관광객에 많이 의존하게 되었다. 인구 4만 정도의 시골 섬동네에서 서울과 부산 2군데에 관광 유치 사무국을 운영할 정도.[23]

한국인 관광객 덕분에 돈을 버는 쓰시마 지역 기업들 중에서도 대표적인 곳이 이곳의 대중교통을 책임지는 쓰시마 교통(対馬交通). 그 전에는 텅텅 빈 버스만 굴리다 보니 경영난이 가중되어 일부 버스 기사들을 해고하려고까지 했으나, 한국인들의 쓰시마 관광 활성화 이후 전세버스 대절로 쏠쏠한 이득을 얻게 되자 구조조정 계획을 철회하게 된다.

쓰시마 주민들만을 대상으로 한 노선버스 영업만으로는 회사를 지탱해 나가기가 빠듯할 지경인 데다가, 이날 영업을 마친 빈 버스들을 그냥 놀려 두는 것보다야 차라리 한국인 관광객들에게 전세버스로 제공하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는 것. 텅텅 비어 적막감만이 흐르는 노선버스를 운전하는 것보다 한국인 승객들 소리로 시끌벅적한 전세버스를 운전하는 게 더 보람 있다고 쓰시마 교통 소속 운전수들이 말할 정도니, 이 지역의 고용을 유지케 하는 한국인 관광객들의 힘이 결코 무시할 게 못 됨을 알 수 있다. 쓰시마에서의 한국인 대상 관광업을 다룬 일본인 기고가의 글(일본어)

한국에서 볼 때는 '가장 가까운 외국'이라는 막강한 메리트가 있지만, 일본 입장에서는 변경에 있는 외딴 섬에 불과한 것이 쓰시마이다.[24] 실제로 쓰시마 섬의 일본인 관광객은 한국인 관광객의 1/5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어업 외에 먹고 살 길이 없는 쓰시마는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관광업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과거 일제강점기 때도 대마도는 후쿠오카가 아닌 부산과 같은 경제권이었고, 대마도 주민들이 주말에 영화 보러 가거나 육지로 쇼핑하러 간다고 하면 배 타고 부산에 가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사쿠라이 마코토를 비롯한 일본 우익 세력들은 쓰시마가 한국에 종속된다며 한국인 관광객을 쫓아내는 등의 추태를 부리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쓰시마에 도움이 될 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당장 쓰시마 항구에서 한국 관광객들을 향해 욕설을 퍼부은 재특회 단원들은 그 날 당일치기로 돌아갔다. 더구나 밥조차 쓰시마에서 안 사먹고 전원 본토에서 가져온 도시락컵라면으로 해결했다고. 그리고 쓰레기는 쓰시마에 버렸겠지 한마디로 쓰시마에서 지갑 한 번 연 적이 없단 의미이다.

재특회에서는 '쓰시마 관광 홍보 영상' 같은 걸 만들어서 인터넷에 올리고 있지만, 당장 한국인 관광객으로 인해 생기는 이득을 대신할 정도는 못 된다. 쓰시마 주민들 입장에선 어떻게 봐도 영업방해 및 생계위협 행위이므로 이들을 사실상 블랙리스트로 낙인찍었다.[25] 그리고 관동 지역에서 쓰시마로 놀러 가자고 독려해봤자 차라리 상하이나 제주도로 놀러가는 게 가깝겠다면서 비웃는다.[26]

2011년 일본 도호쿠 대지진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인해 일본을 여행지로 삼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줄었다. 그러자 다카라베 야스나리 당시 쓰시마 시장이 부산을 방문하여 여객선의 조속한 운항 재개를 요청하였다.[27] 방사성 물질의 영향도를 따져봤을 때 쓰시마 섬의 위험도는 부산의 위험도와 크게 차이가 없는데 일본 영토라는 이유만으로 관광객이 줄어들었으니 쓰시마 시민들은 억울했을 것이다. 결국 같은 해 6월부터 주말 운항이 시작되고 7월부터는 매일 운항으로 바뀌었다.

지진과 원전 사고 여파로 2011년에 6만 명까지 줄어든 쓰시마의 한국인 관광객이 이듬해인 2012년에 무려 5배인 29만 3,200명으로 폭증하였다. 그 이유는 부산-쓰시마 노선 취급사가 3개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1997년부터 쓰시마 노선을 독점하던 대아고속해운 외에도, 2011년 10월 미래고속과 JR 큐슈고속이 각각 코비와 비틀을 투입하면서 선편이 늘어난 것.[28] 2013년 들어서는 아베 신조 정권의 경제 정책으로 인해 엔저 현상이 계속되면서 쓰시마 관광객이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2014년 들어서 한일관계 악화와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로 인해 관광객 수가 다시 줄었다.

반대로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이후 부산의 대형마트로 물건을 사러 가는 현지인도 있는 모양. 장 보러 가는데 여권이 필요하네 여권뿐이겠냐? 환전도 해야지 아니 그냥 JCB 카드만 있어도 된다.[29]

6.1 어두운 면

쓰시마로 관광을 간 일부 한국인들의 무례한 행동, 대마도의 대표적인 신사한국어로 '일본침몰' 또는 '대마도는 우리땅' 등의 소원을 걸거나 고기잡이가 금지된 곳에서 불법으로 낚시를 즐기는 등의 반달리즘 행동 등이 방송을 탄 바 있다. 의도는 둘째치고 일단은 인간 대 인간으로 지켜야 할 예의에서 벗어난 이런 행동 때문에 쓰시마 시민들 중에도 한국인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현지 업소들에는 한국어로 '한국인 출입금지' 팻말을 내건 업소도 있을 정도.[30]

쓰시마 섬과 한국의 교류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일본어 위키백과쓰시마 섬 문서에 너무나 잘 드러난다. '한나라당에서 교과서에 쓰시마 섬 영유권 관련 내용을 기술하려 한다' 같은 외교적 문제에서 '한국에서 쓰레기가 많이 밀려온다' 같은 내용까지, 한국에 대한 부정적 서술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쓰시마 관광은 대부분 먹거리 관광이나 쇼핑 위주로만 진행되어서, 쓰시마 섬에 남아 있는 역사적인 흔적을 되새기는 의미의 여행은 그다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지만 쓰시마 섬의 역사적 유물이 그렇게 양이 많거나 질적으로 뛰어난 것도 아닌 것이 현실.

또한 관광이 목적이 아니라 파칭코를 하려고 가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31] 기사 참조

그것이 알고싶다에 따르면 한국인의 불상절도사건 이후 한국인의 대마도 내의 에 출입하는 행위를 거부하고 있다고 한다.

6.2 관광 정보

부산국제여객터미널에서는 쓰시마로 가는 2가지 노선을 취급하고 있다. 하나는 섬 북쪽의 히타카쓰(比田勝)로 가는 노선이고 다른 하나는 섬 남쪽의 이즈하라(厳原)로 가는 노선이다. 히타카쓰 노선은 1시간 10분 정도, 이즈하라 노선은 1시간 40분 정도 걸린다. 항공편으로는 김포-쓰시마 간 코리아익스프레스에어가 운항했지만, 단항되었다.[32]

히타카쓰에는 미우다 해수욕장, 와타즈미 신사 등이 있으며, 박제상 순국비나 만제키바시처럼 한국인으로서 역사를 되새길 수 있는 유적지도 있다. 한편 이즈하라는 쓰시마 섬의 중심가로 모스버거, 티아라 쇼핑센터처럼 당일치기 쇼핑 여행을 즐기기에 좋은 곳이다. 이즈하라에도 최익현 순국비, 덕혜옹주비, 조선통신사비 등 우리 역사에 관한 유적지가 많으며, 그 외에 나가사키 현에서 설립한 대마역사자료관도 있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싼 맛에 당일치기 여행을 즐기지만, 1박을 하더라도 히타카쓰에서 이즈하라로 자전거 여행을 즐기는 경우도 있다. 쓰시마는 위에서도 말했지만 거제도의 2배 정도 되는 섬이고 고갯길이 아주 많아서 섬 전체를 둘러보려면 꽤 많은 시간이 든다. 히타카쓰와 이즈하라를 오가는 버스 편은 하루 4편 정도가 운행되고 있다. 소요 시간은 약 2시간 30분. 페리의 출발/도착 시간과 맞물릴 때에는 한국인 관광객들로 미어터지곤 하며, 재수가 없으면 히타카쓰에서 이즈하라로(혹은 그 반대로) 가는 2시간여 내내 서 있어야 할 수도 있다.

이즈하라 티아라 쇼핑센터의 대마교통 사무소, 혹은 히타카쓰의 버스 터미널에서는 '1일 버스 프리패스권'을 구입할 수 있다. 가격은 1천엔. 히타카쓰에서 이즈하라까지 가는 버스 요금이 3천엔이나 한다는 걸 생각하면 상당한 이득이다. 1달 정기권을 5,000엔에 판매하고 있지만 장기출장이 아닌 이상[33] 거주(...)는 불가능하니 왠만하면 1일 패스권을 사도록 하자. (그러나 사람수가 많으면 렌트가 더 쌀 수도 있다는 점)

한국인 관광객으로 먹고 사는(…) 쓰시마답게, 쓰시마 시 측에서 부산사무소를 개설, 한국어로 된 쓰시마 홍보 웹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 한국어로 된 이즈하라와 히타카쓰의 시가지 지도, 버스편 등 여행에 도움이 될 정보가 많으니 참고하자.

여기도 가깝지만 나름 일본이니 가봐야 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듯한데, 덕질 여행을 목적으로 간다면 적절하지 않다.극장도 없고 음반 판매점도 하나밖에 없다. 게오[34] 매장이 게치에 있기는 하지만, 게치는 한국인이 주로 찾는 이즈하라에서 거리가 조금 떨어진 동네다. 뭐 당일치기 코스에서도 꼭 가려면 못 갈건 없는 정도의 위치이기는 하지만... 게오 쓰시마점 위치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제대로 된 오락실도 없다.[35] 프라모델이나 장난감, 피규어의 경우 티아라 쇼핑센터나 티아라 쇼핑센터로 가는 길목에 요시다 완구점이 있었지만 현재는 폐업한 상태다.[36] 티아라 쇼핑센터의 경우 국내에서도 이미 수입된 제품들뿐이고 종류가 많지 않다. 특히 레어 아이템을 찾으러 가는 거라면... 그런거 없다. 메이드 카페 같은 것도 당연히 없다. 그러니까 덕질 여행을 위해서는 최소한 경비를 더 모아서 돗토리 내지는 나고야, 후쿠오카오사카에 가는 것을 추천.

일본이지만 조용한 어촌마을이기에 딱히 일본에 왔다는 느낌은 덜하다. 그냥 한국의 조그마한 시골 읍내에 온 느낌?? 히타카츠가 특히 그렇고 시청이 있는 이즈하라는 쪼금 더 도회적이다. 조용한 시골의 느낌을 좋아한다면 이즈하라보다는 히타카츠를 추천한다.

한 가지 더 안습인 건 일본의 3대 편의점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37] 대신 코코스토어라는 지역 편의점이 이즈하라에 있긴 한데 영업시간이 24시간이 아니라 06:00~01:30까지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대마도만 짧게 여행하고 싶어서 온 사람들 중에 먹는 데에 딱히 돈을 쓰기 싫은 사람들이라면 적당량의 먹을거리를 부산에서 준비해 갖고 올 수도 있다.[38]

대신 쓰시마는 바다낚시터로 명성이 자자하다. 낚시꾼 역시 일본인보다는 한국인들이 많은 편. 대략 90년대 중반부터 소문이 나기 시작해서 요새는 겨울철 벵에돔 낚시터로 정말 유명해졌다. 쿠로시오 난류를 직접 받는 곳이라 온갖 어종들이 다 나온다. 에메랄드빛 맑은 물 속에 헤엄치는 물고기들을 직접 보면 물 반 고기 반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 국내에서는 구경하기 힘든 40~50cm짜리 대물들이 쑥쑥 낚이니 낚시꾼이라면 눈 뒤집히지 않을 사람이 없다. 2014년 경부턴 각종 낚시 방송에서도 출조 프로그램을 여럿 방송 중. 벵에돔 외에도 무늬오징어, 참돔 등 여러 어종들을 다양하게 나오고 거리도 가까운 데다 일본의 낚시 문화나 기술 등이 한국보다 앞서다 보니 많이 찾는 것 같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낚시 전문 민박도 있다.

쓰시마 그 자체 관광보다는 면세쇼핑을 위해 당일치기하는 경우도 많다. 2~3만원 당일치기 티켓으로 몇 십만 원어치 면세쇼핑하고 오는 경우도 허다하다. 대마도 갔다 오는 티켓 자체가 해외여행 치고는 매우 저렴하기 때문에 굉장히 이익이다. 물론 이 사람들이 대마도에 머무르는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하니 있다가 오는 건 아니고 면세점이 주에 겸사겸사 구경도 하고 온다는 식이다.[39]

다만 싼맛에 당일치기를 즐길 수 있는건 부울경권, 잘해봐야 대구권[40]까지만 한정된 얘기이다. 타 지역일 경우 부산항까지 이동하는 교통비, 숙박비[41] 등이 소요되며 유류할증료까지 모두 합하면 저가항공 왕복권을 구매해서 일본의 타 지역을 다녀올 돈이 되므로 타지역 사람들에겐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격이 돼버리기 때문에 사실 타지역 사람들에겐 별다른 메리트는 없다. 부산 여행과 겸행하는 것이 아니라면 비추천 한다.[42]

와이파이를 찾는 여행자를 위해 대마도 거의 전 지역에 'tsushima city wifi' 라는 공용 와이파이가 가설되어 있다. 무료이지만 30분마다 자동으로 연결되는 등록 페이지에서 등록을 눌러줘야 사용할 수 있다. 이메일과 이름은 첫 1회만 입력하면 된다. 다만 전파의 세기가 강하지 않고 속도도 느리니.. 웬만하면 포켓 와이파이를 대여해 오거나 미리 데이터 로밍 요금제를 가입해서 오는 것을 권장한다. 웬만한 숙소들에도 와이파이가 있긴 하나 이 역시 속도가 매우 느리다..

포켓몬 GO 일본 출시 이후 플레이 가능 지역이기도 하다.

7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1419년으로 타임 슬립하여 대마도에 있는 왜구들을 최첨단 현대화기로 무장한 유저들이 도륙하는 내용의 어설트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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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엇 게임즈는 대마도를 대한민국 영토라 생각한다? 그런데 울릉도와 독도는 어디 갔나요 본격 영토 트레이드[43]

이 섬이 통째로(!) 가라앉으면서 부산메가 쓰나미가 밀어닥친다.

8 출신 인물

9 관련 문서

  1. 일본어로 '섬'을 '시마' · '지마'로 읽기에 '쓰시마'만 보고는 이를 직역하여 '쓰 섬'이라고 착각할 법하나, 실제로 '대마도'는 '쓰시마지마'로 읽는다. 한마디로 '쓰시마'의 '시마'는 '섬'을 뜻하는 단어가 아니라는 얘기... 참고로 우리나라의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일본(정확히 말하면 한자 사용 지역)의 산 · 강 · 섬의 경우 원어의 山(산, 야마) · 川(카와) · 島(시마, 지마)는 제외해서 표기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를 살려서 표기할 경우 원어와 우리말이 합쳐져서 '산산/강강/섬섬'이 되기 때문... 굳이 원어의 山 · 川 · 島를 살리고 싶다면, 지명 뒤에 우리말로 산 · 강 · 섬을 붙이지 말아야 한다. 예를 들어 태평양 전쟁의 격전지로 유명한 '硫黄島'는 외래어 표기법상 '이오지마 섬(= 이오 섬섬)'이 아닌 '이오 섬' 또는 단순히 '이오지마'로 표기된다. 마찬가지로 '対馬島'도 '쓰시마지마 섬'이 아닌 '쓰시마 섬' 또는 '쓰시마지마'로 표기되고... 단 예외가 있는데, 원어의 山 · 川 · 島를 제외한 부분의 글자가 한 글자뿐이면 원어의 山 · 川 · 島과 우리말의 산 · 강 · 섬을 모두 살린 채로 표기한다. 일례로 '예술의 섬'으로 유명한 카가와 현의 '直島'는 島 앞의 글자가 '直' 하나뿐이므로 '나오 섬'이 아닌 '나오시마 섬'으로 표기되는데, 이를 직역하면 '나오 섬섬'이라는 이상한 표기가 되나 외래어 표기법상 인정된다. 외래어 표기법 제4장 제3절 참고.
  2. "두섬"이 Tusŏm > Tushima > Tsushima ; ㄷ/ㅌ -> ㅊ/ㅊ/ㅆ 로 변한 건 파찰음화로 해석한 것이지만, 애초에 해동제국기에 나온 지도에서 보듯이 조선에서도 대마도를 ⊃형태로 이루어진 하나의 섬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3. 이전 버전의 문서에서는 앞 주석을 구개음화라고 했는데 일본어에서 쓰이는 ts 음은 구개음이 아니기 때문에 일본어 고어의 tu가 현대어에서 tsu로 바뀐 경우는 구개음화라고 부르면 안 된다. 그래서 조음 위치가 아닌 조음 방법에 따라 파찰음화라고 정정했다. 참고로 チ가 ti에서 tɕi로 발음이 바뀐 현상은 구개음화이면서 동시에 파찰음화라고 할 수 있다.
  4. 참고로 진도군 면적은 쓰시마 시의 5/8배 정도 된다.
  5. 일본은 지역마다 최저 시급이 다르다. 2015년을 기준으로, 후쿠오카는 743엔, 나가사키는 694엔.
  6. 특히 용두산타워에서 더 잘 보인다. 참고로 용두산공원 주변은 조선 시대 초량왜관이 있었던 부지이기도 하다.
  7. 대마도는 인구밀도가 희박한 시골이기 때문에 부산에서는 대마도를 사실상 낮에만 볼 수 있지만, 부산은 밤에도 불빛으로 환한 대도시이기 때문에 날씨만 괜찮다면 낮뿐만 아니라 밤에도 얼마든지 대마도 쪽에서 부산 쪽이 보인다.
  8. "일본해"가 그렇듯 대한해협도 국제적으로 정식 표기이다. 물론 일본에서는 쓰시마 해협 고수.
  9. 덤으로 그러한 위협에 대한 공포를 들어 국내 정치에 써먹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10. 가네다 성이 세워지고 1년 뒤에 고구려가 멸망한다.
  11. 일본의 성씨로 여기서 소 씨랑 시마즈 씨 등이 갈라졌다. 본인들은 다이라노 토모모리의 후손이라고 자처했다.
  12. 간토에서 호족 데와 기요하라 씨가 일으킨 후3년의 역을 진압할 당시에 조정에서 후3년의 역 진압에 대해 조정에서 인정하지 않은 전투였다며 은상을 주지 않자 요시이에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서 자신을 따라 종군한 무사들에게 은상을 주었는데, 이게 간토에서 요시이에의 지지를 크게 높이는 계기가 되는 바람에 훗날 간토에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헤이케 타도를 외치며 거병할 때도 요리토모가 무사들을 모으는 데 요시이에의 명성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13. 군신(하치만 신)의 맏아들이라는 뜻. 교토 이와시미즈 하치만구에서 관례를 올렸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얻게 되었다.
  14. 출처: 브렌다 랠프 루이스(Brenda Ralph Lewis)의 해적 코드(The Pirate Code).
  15. 현재로 치면 공무원 2급, 즉 이사관(국장)급이다.
  16. 그조차 실제로는 1만석에 한참 못 미쳤으나 조선과의 교역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대마도주인 소 가문에 다이묘 지위를 주기 위하여 인정한 석고이다.
  17. 야사에서는 묵인 안하고 개역(改易)된다면 중국(명이나 청)과 조선이 공격하여 대마도는 몰론이고 큐슈전쟁터가 될 가능성 높았기 때문에 다른 다이묘죠슈 번 모리 가문, 사츠마 번시마즈, 구마모토 번호소카와 가문 뿐만 아니라 바쿠후의 로쥬 또한 중재, 간언했다고 한다.
  18. 출처: 세종실록 세종 3년(1421년) 4월 6일 무술 3번째 기사
  19. 다만 이 글은 조선 정부측에서 내용이 공손하지 않다는 이유로 각하되었고, 사절이 가져온 예물도 반송시켰다고.
  20. 2016년 현재 중국인들의 제주도 땅 러시가 진행되면서 이같은 망상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주위에서 "제주도 중국 땅 되는거 아니야?"라고 하는 친구가 있으면 비웃어주자.
  21. 사실상 양국 모두 이 시나리오 대로 진행된다면 일본은 본토에 대한 심각한 위협기지가 생기게 되는 것이고, 한국은 동해의 자원을 포기하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 연출된다. 물론 이 상황이 도래한다면 천조국이 가만히 계실 리가 없다(...) 맥도날드 1호점은 2호점 아이스크림 기계를 망가뜨리고 2호점은 1호점 감자튀김 기계를 망가뜨리네 맥도날드 회장 피꺼솟
  22. 우리나라 공역 역시 탐색범위에 들어가기 때문에 사실상 한반도 상공 전체를 감시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23. 매년 20만 명 가까운 한국인들이 쓰시마 섬을 방문하고 있다.
  24. 과거 일본에서는 혼슈, 규슈, 시코쿠, 사도, 아와지, 오키, 이키, 쓰시마의 8개의 섬을 묶어 일본을 야시마(八洲)라고 칭하기도 했는데, 현재 이 섬들 중에 제일 존재감이 없는 것이 쓰시마.
  25. 실제로 위키러가 목격한 사례로, 아침 7시경에 티아라몰 앞에 욱일기 머리띠를 한 우익으로 보이는 노인이 혼자 웬 깃발을 들고 앉아 있었는데 티아라몰 개점시간인 9시 이후에 다시 가 보자 없어졌다.. 경비원이나 상인들이 쫓아낸 모양.
  26. 실제로 도쿄 도를 위시한 관동 지역에서 쓰시마로 여행가려고 해도 교통편이 굉장히 애매하다. 환승하느라 시간을 다 잡아먹기 때문.
  27. 日 쓰시마 시장 "한일 여객선 운항 재개해달라" - 연합뉴스.
  28. default 요즘 뜨는 '당일치기 7만원 해외여행' 가보니 - 중앙일보.
  29. 현재 대한민국 내에서 JCB 카드로 결제시 비씨카드가 매입하며, 비씨카드 결제가 안되는 곳은 코스트코 등의 일부 특수 가맹점밖에 없다.
  30. 그러나 한국인 출입금지 업소들도 한국인들보다 더 장사에 도움이 안되는 재특회같은 혐한 단체들을 더욱 싫어한다. 한국인이야 정중하게 거절하지만 재특회가 오면 칼부림 직전까지 갈 정도다.
  31. 사쿠라이 마코토 같은 혐한세력들이 한국인들이 많이 다니는 파칭코 업소에 혐한시위하려고 하다가 파칭코 사업에 관여하고 있는 야쿠자들이 협박하여 접근도 하지 못하고 쫓겨났다고 한다.
  32. 2015년12월 양양 부산은 재운항 예정이다.
  33. 일본에서 관광/출장의 목적으로 비자없이 체류할 수 있는 기간은 90일이다.
  34. 일본 최대의 DVD/만화책 등 렌탈 체인점이다. 몇몇 지역에서는 오락실도 인수/경영하는 등 사업분야는 렌탈샵 이상.
  35. 이즈하라 티아라몰에 가면 스티커 사진기나 태고의 달인 정도는 있다. 근데 그게 전부다(...) 태고의 달인 12와 마리오 카트 아케이드 그랑프리 DX가 여기 있는 게임의 전부..
  36. 면세점에 소수의 PG, MG, HG 건프라가 있긴 하지만 국내에서도 구입할 수 있는 것들이다.
  37. 2016년 현재 이즈하라에 훼미리마트 1개가 있는 것이 목격되었다. 그 외 지역은 보이는 대로 추가 바람.
  38. 편의점이 거의 없다고 해도 레드캐비지 같은 대형 슈퍼마켓을 들여다보면 편의점보다 훨씬 다양한 즉석식품이 잔뜩 있다. 도시락이라든가, 빵이라든가, 전혀 문제가 안 될 수준. 그러나 가게 하나 없는 후미진 곳을 지날 때는.. 그래도 누가 자판기 천국 아니랄까봐 가게가 없어도 자판기는 어디에나 있다. 특히 대마도 전역의 어지간한 관광 스폿에는 다 놓여 있는 아이스크림 자판기라든가..
  39.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의 면세점의 규모가 인천국제공항이나 김해국제공항 면세점에 비해서 그리 크지는 않기 때문에 인터넷 면세점을 적극 이용하는 것이 좋다.
  40. 부산항까지 약 1시간~1시간 30분, 교통비는 7천원 안팎 정도 추가된다고 보면 된다. 왕복이니까 당연히 곱으로 계산하면, 2~3시간과 1만 5천원 추가.
  41. 이동거리가 멀 경우 출발 날짜에 항구로 출발하게 되면 출항 시간을 맞출 수 없어 하루 전에는 가야 한다. 물론 전날 저녁에 출발해서 출항일 새벽까지 기다리는 방법도 있긴 하다.
  42. 특히 서울쪽일 경우 대마도 여행경비를 쥐어 짜내면 2박 3일로 오사카나 후쿠오카, 심지어는 도쿄에도 충분히 다녀올 수 있다.
  43. 저 비율에서 울릉도와 독도는 안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