傅嘏
(209 ~ 255)
1 개요
삼국시대 위나라의 문관으로 자는 난석(蘭石). 부개자(傅介子)[1]의 후손으로 백부는 부손.
북지군 이양현 출신으로 약관의 나이일 때 이름을 널리 알렸으며, 진군의 추천으로 사공연이 된다. 산기상시 유소라는 사람이 관리평가제도를 만들자 그의 주장을 비난하여 논술을 하였고 240년에 상서랑, 황문시랑이 된다. 골수 친사마씨 인사로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조상과 하안을 마뜩찮게보고 조상의 동생 조희에게 하안을 쓰면 결국 망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 일이 하안의 귀에 들어가는 바람에 그와 사이가 나빠졌고 얼마후 사소한 잘못으로 파면되고 만다. 후에 형양태수로 임명되었으나 사임했고 태부 사마의가 청하여 종사중랑이 되었다.
249년에 조상이 척살된 후 하남윤, 상서로 승진했으며, 252년에 손권이 죽자 사마사는 이를 틈타 오나라를 칠 계획을 세우는데 부하가 말렸으나 사마사는 듣지 않았고, 결국 위나라의 군대는 패퇴하게 된다. 254년에는 관내후가 되고 얼마 있어 조모가 즉위하자 무향정후로 승진한다.
255년에 관구검과 문흠이 반란을 일으키자 사람들이 모두 사마부만을 보내도 충분하다고 할 때 왕숙과 부하만이 사마사가 직접 가서 반란을 진압해야 된다고 했으며, 이에 사마사는 그에 계책을 좇아 그를 상서복야로 임명해 같이 반란을 진압한다.다만 부하 말듣고 무리하게 출정을 나갔다가 눈의 혹이 악화되어 죽어버렸다 부하 때문에 개고생 사마사가 죽자 사마소와 함께 낙양으로 돌아가 그의 정치를 보좌하면서 종회한테 오만함을 경계하라고 핀잔을 줬다.
부하는 그의 공적으로 승진해 양향후에 봉해지면서 식읍이 6백 호 증가해 이전 것과 합쳐 1천 2백 호가 되었지만 이해에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47세였다. 태상(太常)으로 추증하고, 시호를 원후(元侯)라 했다.
부자에 따르면 정치에 숙달되고 올바름을 좋아했으며, 이치에 밝아 그 요체를 체득했다. 재, 성을 논한 것을 보면 그 근원에 대한 탐구가 정미해 그를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고 하며, 종회가 부하와 친구로 사귀었다고 한다.
그의 아들 부지(傅祗)가 뒤를 이었으며, 그의 손자 부창(傅暢)은 서진에서 하음현령을 지냈다.
2 미디어 믹스
삼국지 9,10,11 |
삼국지 13 |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내정형 문관으로 나온다. 최근작에서 정치만은 당대 탑급을 자랑. 나오는 시나리오가 적고 그나마 수명도 길지 않다는게 아쉬울 뿐.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46/36/82/88. 정란, 혼란을 가지고 있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44/36/85/92/69에 명사 특기가 있다. PK전용 고전분투 시나리오까지 가면 부하보다 정치가 높은 인물은 하후현(94)밖에 없다.
코에이가 삼국지 10에서의 부하의 정치력이 너무 높다고 생각했는지, 삼국지 11에서는 정치력이 뭉텅 깎여서 능력치가 44/35/81/82/70에 그쳤다. 그전에 하후현이 너무 높다는 생각은 안하나보다. 쓸데없는 자존심.[2] 그래도 지력 중반에 불구한 하후현에 비하면 지력이 높아 계략 방어용으로 쓸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