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일반적인 의미
- 進軍 : 적과 맞서 싸울 목적으로 군대가 나아가는 것을 뜻하는 단어. 어떤 일을 여러 사람이 활기차게 행하러 가는 모양새를 빗대는 말로도 쓰인다.
2 삼국지의 인물
『위서』 「환이진서위노전(桓二陳徐衛盧傳)」 | |||||
환계 | 진군 | 진교 | 서선 | 위진 | 노육 |
陳羣
(? ~ 236)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정치가. 자는 장문(長文). 예주 영천(허창) 사람.
대학자 진식의 손자, 진기의 아들, 진심의 조카, 순욱의 사위, 진태의 아버지.
2.1 생애
2.1.1 초기 생애
대대로 청류파로 이름높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진군이 어렸을 때, 조부인 진식은 항상 그의 재능을 특별하게 생각하고는 종족의 장로들에게 "이 아이는 반드시 우리 종족을 일으킬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세설신어에 따르면 진원방(진기)의 아들 진장문(진군)과 진원방의 동생 진계방(진심)의 아들 진효선(진충)이, 서로 자기 아버지의 공덕이 더 훌륭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결말이 나지 않아서 할아버지인 진식에게 판정을 내려주라고 호소하였다. 그러자 진식은 "형이 낫다고 하기도 어렵고 동생이 낫다고 하기도 어렵구나."라고 대답한 데서 난형난제 고사성어가 유래했다.
노나라 사람 공융은 뛰어난 재능이 있었으나 오만했다. 나이는 진기와 진군의 중간이라서 먼저 진기와 교우를 맺었고 후에 진군과 사귀었고 진기를 위해 절까지 하자 이로부터 진군의 명성도 올라갔다.
2.1.2 유비 휘하에서
처음에는 예주자사로 있던 유비에게 앞서 출사했었다. 별가 자리에서 일했는데, 194년에 서주목 도겸이 죽어 서주가 혼란해지자 유비가 서주를 아우르려 할 때 '서주는 사방으로 트인 땅이라 남으로는 원술, 서쪽에는 여포의 침입을 받을 수 있으니 위험합니다.'라고 간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후에 정말로 여포가 쳐들어와 유비는 진군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달아났다. 진군은 아버지와 함께 야인으로 물러나 피난살이를 했으며, 문재로 천거되어 현령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2.1.3 조조 휘하에서
198년에 조조가 여포를 멸하자 조조의 밑에 들어가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어떤 사람이 왕모와 주규를 천거했을 때 진군은 이들이 악하다고 반대했지만 조조는 진군의 말을 듣지 않고 이들을 등용했다. 후에 왕모와 주규는 잘못을 저질러 처형되었고 조조는 진군에게 사과했다.
진군은 진교와 대건을 조조에게 천거했는데, 진교는 명신이 되어 상서령까지 올랐고, 대건은 오나라 사람이 모반하자 충의를 다하여 위험 속에서 죽었다. 당시 사람들은 진군이 사람을 보는 안목이 뛰어나다고 칭찬했다. 214년에 어사중승의 자리까지 올랐다.
조조가 육형(肉刑)[1]을 부활시키려고 하였을 때, 부적절한 사형을 줄일 수 있다는 관점에서 종요와 함께 찬성했다. 그러나, 왕랑(王朗) 등의 반대로 인해 무산되었다.
곽가전에 따르면 진군은 법을 적용함에 있어서 대단히 엄정하였는데 조조의 최측근 모사인 곽가의 행실이 바르지 못한 것을 지적하여 여러차례 고발했다. 조조는 곽가를 감싸주었지만, 진군의 엄정함도 높이 평가했다.
유이는 동생이 위풍과 반역을 도모한 것에 연루되어 사형당하게 될 위기에 처했다. 진군이 조조에게 청하자 조조는 유이를 사면해주고 유이의 관직을 회복시켰다. 유이가 진군에게 감사해하자 진군은
"대체로 형벌에 대한 논의는 국가를 위한 것이지 사사로운 정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이것은 성명한 군주의 의향으로부터 나온 것이지, 내가 어찌 할 수 있었겠습니까?"
라고 답했다.
2.1.4 조비 휘하에서
조비가 태자가 되었을 때, 진군을 매우 존경하여 예의바르게 대했고 항상 감탄하며
"나에게 안회가 있은 후부터 문인들은 날마다 나를 가까이 하는구나."
라고 말했다.
조조가 죽고 조비가 위나라를 세울 때에도 전심으로 협력해 조비의 깊은 신임을 받았다. 220년에는 구품관인법을 제정하였으며 상서령의 자리에 진군대장군의 자리까지 올라, 손권과 싸울 때는 수군을 지휘하는 직책에 있었다. 조비가 탁고하는 자리에서 조진 그리고 사마의 등과 함께 뒷일을 부탁 받았다.
2.1.5 조예 휘하에서
조예의 대에도 중신으로 대우받아 사공의 자리까지 올랐다.
조진이 황제에게 표를 올려 촉을 토벌해야 한다고 몇 차례 진언하고 사곡으로부터 공격해 들어가려고 했다. 진군은 식량이 준비되지 않았고 사곡의 지세가 험난하다는 이유로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조예는 진군의 의견을 들었다.
이번엔 조진이 표를 올려 자오도로부터 촉을 공격하려고 했는데, 진군이 다시 표를 올려 시행하기가 불편하다고 말하고, 아울러 군사를 다루는 계책을 말했다. 조예는 조서를 내려 진군의 건의를 조진에게 주었고, 조진은 그의 건의에 따라 시행했다. 마침 며칠 간 장마가 내렸고, 진군은 조서를 내려 조진에게 돌아오도록 해야만 된다고 주장했으며, 조예는 진군의 의견을 따랐다.
조예의 딸 조숙이 병으로 죽자 시호를 평원의공주로 추증했다. 진군은 조예에게 여덟 살 이하의 어린애가 죽었을 뿐인데 어찌 한 달이나 장례를 치르면서 조정의 사람들에게 흰 옷을 입히고 아침 저녁으로 통곡하게 하냐고 상소를 올렸다. 조예는 듣지 않았다.
조예가 궁궐을 건축하여 백성들이 힘들어하자 진군이 상소를 올렸다. 조예가 소하의 예를 들며 반박했으나 진군이 그것과는 경우가 다르다고 또 반박하자 조예는 궁전의 건축을 감소시켰다.
236년에 세상을 떠나자, 조예는 그의 공덕을 추모하고, 식읍을 분할하여 한 아들을 열후로 봉했다.
위서에 따르면 진군이 황제에게 상소할 때마다 그 초고를 없애버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군이 그렇게 간언하는지 모르고 진군은 침묵만 하고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진군 사후, 정시 연간(240년 ~ 249년)에 신하들이 올린 상서 중에서 명작(?)들을 뽑아서 공개했는데, 이때서야 신하들이 진군의 간언 내용을 볼 수 있었고, 모두들 경탄해 했다고 한다.
2.2 구품관인법
진군이 중국 제도사에 남긴 중요한 업적으로 221년 위 성립과 함께 제정한 구품관인법이 있는데 구품중정제라고도 한다. 제 아무리 삼국지가 '교과서의 몇 줄 분량을 열 권 분량으로 늘린 것'이라지만 이건 세계사 교과서에도 나올 정도로 중요하다. 게임 삼국지에서 관직을 구품관에서 일품관 이런 식으로 구별한 것은 바로 이 구품관인법을 반영한 것을 들 수 있는데, 그간 호족의 추천이나 채용관의 의사가 개입되기 쉬웠던 인재 등용 절차를 체계적으로 정비한 것으로 각 지방에 중정관을 설치해(중정) 사관 희망자의 재능과 덕행을 심사하여 9등급(구품)으로 나눠 내신서를 작성하고 매긴 등급보다 몇 단계 낮춰 초임시키는 형식을 골자로 삼고 있다.
본래 목적은 객관적으로 개인차에 따른 인재를 선발하려는 것이었지만 갈수록 변질되어 세력 있는 자가 높은 등급, 그렇지 못한 자가 낮은 등급으로 고정되고 높은 등급에 임용될 목적으로 돈을 푸는 등 매관매직의 폐단을 재차 초래하게 되었다. 이 제도는 남북조 시대에 가장 융성했으며, 중정을 통한 관리 선발 제도는 수가 전국을 통일한 뒤 과거 제도로 대체되었으나 관품제도는 남아서 청나라 말기까지 실행되었다.
실제로는 중국 전체 역사로 보면 별달리 중요하지 않은 시기인 위진시대에서 후대에 까지 남을 업적을 남긴 3명의 인물 중 한명. 나머지 둘은 조조, 사마의.
2.3 미디어 믹스
2.3.1 삼국지 시리즈
삼국지 11 |
삼국지 12,13 |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위나라의 장소라 해도 좋을 만큼 정치력이 두드러지는 인물로 등장.[2] 삼국지 4나 삼국지 5 시절에는 지력이 높아 군사로 활약하던 때도 있었다. 이후 정치는 그대로 놔두고 지력은 점점 칼질되어 근래 작에선 지력은 70대에 그친다. 삼국지 5 이후로는 유비에게 잠시 출사했던 것을 근거로 군웅할거 시나리오(194년 무렵 시나리오) 때 유비의 부하로 설정되어 있다. 이 시나리오가 아니면 보통 허창에서 재야로 있거나 이미 조조의 부하가 되어 있다. 군웅할거 즈음 시나리오에서 유비의 부하로는 기껏해야 유비 3형제와 간옹 뿐이라서 진군은 정말 소중한 인재가 된다.
삼국지 5에서는 장소와 더불어 정치 최고치(98)를 기록했다. 아마 구품관인법을 반영한 듯. 지력도 93이나 되며 조조의 대두(194년) 시나리오에선 유비의 부하로 있기 때문에 소패, 하비 2개의 땅을 가지고 있는 유비는 이 시나리오에서 엄청 할 만하다. 단 초기 충성도가 86에 유비랑 궁합이 안 맞기 때문에 재수없으면 첫 턴이 오기도 전에 타세력에 뺏기는 수가 있다. 보통 금 600정도를 쓰면 무난하게 충성도를 100으로 만들 수 있다. 또한 하비가 거점인 유비완 다르게 진군은 소패 소속으로 있으니 참모로 임명하고 바로 하비로 불러오는건 필수. 안 그러면 유비군의 참모는 초기 설정대로 관우가 된다.
삼국지 7에서는 이상하게 장양의 부하가 되는 일이 잦으며, 장양이 죽은 후 장양의 후계자 1순위라 진군군이라는 괴랄한 세력이 자주 만들어진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21/무력 7/지력 72/정치력 95. 능력치도 능력치지만 다른 A급 내정용 문관과는 달리 그 흔한 모략계 병법 하나 없어 도저히 전장에서는 못 써먹는다. 매도는 혼란보다 한 수 아래고 병법 숙련도도 0이다. 내정용으로나 굴리자.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28/무력 14/지력 78/정치력 97/매력 77에 특기는 6개지만 농업, 상업, 기술을 모두 가지고 있는 내정계의 스페셜리스트. 나머지 특기는 보수, 명사, 항변. 후방에 태수로 놓는다면 물자,병력을 쉽게 불려놓는지라 든든하다.
삼국지 11에서는 정치력은 높으나 무특기인 것까지 장소와 흡사하다. 곽가를 탄핵한 건 반영되지 않아서 곽가와 혐오무장 관계는 아니다.
삼국지 12에서는 그의 가장 큰 업적인 구품관인법을 황제에게 상주하는 모습이 일러스트로 나왔다. 그러나 정치가 장소보다 낮은 96이다. 다만 지력이 75인데 정치가 96이라 적당히 잘 굴릴 수가 있고 전법이 파괴력약화라서 수성의 달인이다. 그렇지만 통솔과 무력이 너무 낮은데 전투에 쓸까?
삼국지 13에서는 통무지정 순 32/14/75/96 으로 삼국지 13에 등장하는 인물중 정치가 3번째로 높다. (1위는 순욱, 2위는 장소) 중신특성은 합리철저이고 정치도 90도 넘어서 조조군이든 유비군이든 필시 내정중신으로 활용하게 된다. 전법은 후방지원으로 못 쓸 정도는 아닌 전법이나 진군의 병과적성은 모두 C이며 전투 능력치도 저렇고 특기도 없으니 내정관으로나 쓰자. 특기는 농업3, 문화8, 교섭7, 언변7 이다.
2.3.2 반삼국지
반삼국지에서도 짤막하게 등장한다. 촉군이 낙양을 함락한 이후, 위의 중신들이 대거 잡히게 되는데, 이때 진군도 끼여 있다. 그리고 자결을 명받게 되어 자결한다. 이게 등장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