夏侯玄
(209년 ~ 254년)
1 개요
자는 태초(太初/泰初)[1]이며 위나라의 장군 하후상의 아들[2]이자 조상의 사촌 형제이며 사마사의 처남(사마사의 첫 아내가 하후현의 여동생인 하후휘)이었다.
2 정사
어려서부터 세상에 이름을 날렸고 20살이 되자 산기황문시랑이 된다. 당시 유행하던 현학에 있어서도 명성을 떨쳤다. 하안은 사마사와 함께 하후현을 천하의 기재라며 칭송했다[3].
조예를 알현할 때 황후의 동생인 모증과 나란히 앉게 되었는데 하후현이 이를 치욕스럽게 여겨 불쾌한 표정을 얼굴에 나타낼 정도였다[4]. 이를 본 조예는 하후현을 우림감으로 좌천시킨다.
조방이 즉위하자 조상이 조방의 정치를 보좌했는데 이 조상이 하후현의 사촌이기도 했고, 조상이 사마의와 대립하게 되면서 하후현을 끌어들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리하여 승진해 산기상시 중호군까지 오른다. 중호군으로 있으며 많은 인재들을 발탁했는데 모두가 천하의 준걸로 지방관으로 나가 훌룡한 업적을 남겼다. 출사 과정이 비슷했던 사마사가 일부러 공이 없는 인물들을 기용한것과는 정반대의 정책인데 후술할 구품관인법 논쟁과 연관지어 호족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구품증정제에 반대하고 조조대의 유재시거를 이어가려한 노력으로 보기도 한다.
이 무렵 사마의와 이야기할 때 구품관인법[5]의 폐단과 당시의 사치풍조를 비판하고 그에 대한 보완책을 건의하였다. 인재선발의 기준이 모호하고, 선발된 인재에 대해 선발관이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파벌 양성의 부작용이 심하다는 것.[6] 또한 정부 권력의 지방 분산에 대해서 건의하기도 하였지만, 사마의의 대답은 지금은 그럴 시기가 아니오.
당연한 것이, 사마의를 비롯한 사마씨 정권 자체가 중앙군과 중앙권력을 장악한 뒤, 구품중정제의 주대중정 신설을 통한 호족 포섭을 통해 호족들을 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후한 말부터 쌓여온 이런 사회적 모순들을 해결하지 않은 채 건국된 서진은 국초부터 나라가 뒤숭숭하다가 50여 년만에 강남으로 쫒겨난다.
이후 정서장군, 가절도독옹양주제군사가 되어 서방의 군사권을 쥐었고 사마의를 비롯한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조상과 함께 낙곡으로 가 촉과 싸우는 것에 찬성한 후 종군했다가 결국 낙곡대전에서 비의한테 패하여 웃음거리가 된다.
위씨춘추에 따르면 사공 조엄이 죽었을 때 사마사, 사마소 형제는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이때 하후현이 나중에 도착하자 수백 명의 조문객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고,이 일로 사마씨 형제는 하후현을 미워하게 되었다. 하후현이 얼마나 당대의 명망가였는지 보여주는 일화[7]
249년 고평릉 사변으로 조상이 사마의에 의해 제거된 후 정서장군에서 해임되어 군권을 잃고 수도로 소환되어 대홍려, 태상에 임명되었다. 관직은 올랐지만 실권을 박탈하고 삼엄한 감시하에 놓여져 사마씨가 마음만 먹으면 제거될 상황이었다. 정촉호군 하후패는 하후현이 소환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촉한으로 망명을 택했으며 하후현에게 함께 귀순하자고 권했지만 하후현은 잠자코 명령에 따랐다. 남아있는 기록이 부실해 정치적 스탠스를 확실히 알 수 없는 하후패와 달리 사마의와 정책적으로 부딪친 바 있고,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확실한 조상의 사람이었던 하후현은 중앙으로 갔다간 당장은 아니더라도 제거될 것이 명약관화했다. 그럼에도 소환에 응한 것이나 뒷날의 행적을 보면 적어도 조씨 사직에 대한 충심만큼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나마 사마의는 그의 아버지인 하후상과 사적으로 교분이 있었고 수많은 군사적 업적으로 획득한 엄청난 권위가 있었기에 실권을 내놓은 상황에서 굳이 목숨까지 빼았을 필요가 없었지만, 원만한 관계도 아니었고 사마의만한 권위가 없는[8] 사마사나 사마소가 직위에 오르면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 이라 예상했다.[9]
254년 황제 조방, 장황후, 황제의 장인 장집, 소삭, 악돈, 유보현, 이풍이 사마씨 제거를 모의하고 하후현을 끌어들인다. 하후현은 이 거사 계획을 전달받고 치밀하지 못하다고 지적했고 아니나 다를까 모의가 발각된다. 그나마 남아있던 위 황실 친위세력은 소멸한다. 하후현은 삼족을 멸하는 형벌을 받고 나머지 친족은 낙랑군으로 쫓겨나게 된다. 이후 황제 조방마저 폐위되고, 고귀향공으로 중앙과 연고가 없던 연소한 고귀향공 조모가 즉위하면서 사마씨의 권력이 더욱 굳어지게 된다.
이 일의 처리는 당연히 관청으로 옮겨졌다. 세어에 따르면 하후현은 정위의 관서로 인도되었으나 결코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위 종육(鍾毓)이 직접 나서서 하후현을 심문하자, 하후현이 정색하며 말하길 "나에게 무슨 말을 하란 말이오? 이제는 영사가 되어 사람을 다그치려 하시오? 그러면 당신이 내 대신 진술서를 작성하시오" 라고 했다. 종육은 하후현이 명사로서 그 높은 절조를 꺾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옥사는 어떻게 해서든지 끝내야 했으므로, 밤에 사실과 서로 부합하도록 진술서를 작성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하후현에게 보여주었더니, 하후현이 그것을 보고 끄덕일 뿐이었다. 종육의 동생 종회(鍾會)는 하후현보다 어렸기 때문에 그와 교제할 기회가 없었다. 그날 종육은 종회를 만나보라고 했으나 하후현은 거절했다.
잡어에 따르면 이때 당시 종회는 옥에 갖힌 하후현을 희롱했다고 한다. 원래 하후현과 아무 교분도 없고 16세나 연하였던 종회가,이제 사형을 눈 앞에 둔 그를 상대로 갑자기 오랜 친구마냥 껄적댔다는 이야기. 이에 하후현은 "종군 어찌하여 이러는가?" 라고 거절했다는데 이때 형이자 진짜 하후현과 친분이 있던 종육이 눈물 범벅으로 조서 쓰고 있었다.(...)
위씨춘추에 따르면 하후패는 같이 촉한으로 도주하자고 했으나 하후현은 구차하게 적의 빈객이 될 수 없다고 거절했다. 하후패가 촉한으로 도주했을때 받은 대우를 생각하면 하후현도 도주했다면 후한 대접을 받았겠지만 그는 그리하지 않았다. 촉한으로 도망쳐서라도 살아남으려 한 하후패와 달리 하후현은 조상이 실각한 후 만사를 체념하여 생존에 대한 욕구까지 내려놓았고 결국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하후현은 저자에서 참형을 당하면서도 안색을 바꾸지 않았고 행동거지가 아무 일도 없던 듯이 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마흔여섯이었다.
일찍이 수재로 이름났고 정치가로서 능력이 없진 않았다. 중호군 시절 그가 천거한 인사들이 모두 준걸로 인정받으며 상당수가 고위직에 올랐으며 정국에 주어진 문제점을 정확히 집어내고 대안을 제시하는 식견도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 정책을 실행에 옮기는데 필요한 권력정치적인 면모(정쟁이든 군사적 역량이든)가 모자랐다는 것이 아쉽다. 만약 그와 함께 했던 조상 일파 가운데 하후현의 이런점을 보충할 인물이 있었다면 하후현도 자신의 뜻을 널리 펼 수 있었겠지만 불행히도 조상 일파엔 그런 사람이 부족하였다.
저작으로 시사의(時事議), 악의론(樂毅論)[10], 황윤부(皇胤賦) 등을 남겼다.
3 야사
하후현은 당대의 명사이자 인품과 학식, 외모가 뛰어난 인물이였던 만큼 그와 같은 편이 아닌 정적들 가운데서도 그를 흠모한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많은 일화나 그에 대한 야사가 전하고 있다.
이원에는 하후현의 죽음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하후현이 사마사에게 죽은 후 친척들이 제사를 지내주었다. 제사 도중 하후현이 나타나 제사상 머리에 앉아 잘려진 머리를 옆에 놓고 목구멍으로 음식을 집어 넣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방금 옥황상제에게 청하여 임금에게 후손이 없게 했다고 말했는데 그후 정말로 왕실에 후손이 없었다고 한다.
어림에 의하면 하후현이 위나라 황제를 따라 어릉에 참배하러 가 소나무와 측백나무 아래 배열해 서 있을 때,폭우가 쏟아져 나무가 벼락에 맞는 바람에 관이 그을려 망가졌다. 좌우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모두 놀라 엎드렸지만 하후현은 안색조차 변하지 않았다.
어람에는 명제 조예가 하후현과 자신의 처남 모증을 함께 앉게 했더니 사람들이 갈대(모증)이 옥수(하후현)가 기대었다고 하였다.
속담조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사마사가 하후현을 주살하려고 할때 뜻을 정하지 못해 숙부 사마부에게 하후현에 대해서 "나의 재주로 족히 (하후현을) 제압할수 있겠습니까?' 라고 물었다. 사마부가 조엄이 자식의 장례를 치룰때를 언급하며 "네가 거기에 왔을때 좌중의 절반만 일어섰지만 하후현이 왔을때는 전부 일어섰다, 너는 하후현보다 못한거 같다" 사마사가 이를 듣고 하후현을 주살했다.
4 연의
삼국지연의에서 또한 사마사가 조방을 우습게 보니 조방이 서러워서 장집, 이풍, 하후현에게 혈서를 주나 궁궐을 나가자마자 사마사에게 들켜 하후현은 주먹으로 저항하다 체포된다. 후에 저잣거리에 처형하기 위해서 끌려나갈 동안 계속 사마사의 욕을 하니 얻어터져서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이빨이 다 나간 뒤라고 하며 그 뒤 장면이 장황후를 죽이는 장면이라 조조가 복황후를 죽일 때의 장면과 오버랩시키는 시가 나온다.
5 미디어 믹스
삼국지 11 |
삼국지 12,13 |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다른 능력들은 죄다 그저 그런데 오직 정치력 하나만은 독보적으로 뛰어나다. 오히려 확실한 활약을 한 양습, 두기, 유복 보다 훨씬 높은 정치 90대 초중반을 지키고 있다. 심지어 촉한사상 중에서도 제갈량만 하후현보다 확실히 뛰어날 뿐 장완, 비의와는 엎치락뒤치락하고 동윤은 확실히 하후현보다 뒤떨어진다. 후기 장수들 평가가 박한 코에이임을 생각해보면 이례적인 능력치. 하후상을 등용하는 이유는 하후현을 얻기 위해서라는 말이 나올 정도. 문앙이 후반 시나리오의 무력 본좌라 한다면 하후현은 후반부의 정치력 본좌라 할 수 있겠다.
삼국지 3에서는 범용얼굴을 달고 나오는 주제에 단 둘뿐인 90대 능력치 보유자이다.(다른 하나는 육항.) 육지 31 수지 15 무력 43 지력 79 정치 92 매력 72에 야망3 운6 냉정11 용맹8을 달고 등장하며 253년에 하후상의 아들로 출생한다. 하후상이 별볼일 없는 잡장이어도 하후현을 얻기 위해서 갖고 있으면 좋다. 근데 하후현은 209생인데 이 게임에서는 출생년도가 226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59/무력 44/지력 80/정치력 94. 제사, 고무를 가지고 있다. 정치 떼고 봐도 시대가 시대인지라 나쁘지 않은 모사다. 모략계 병법이 없는 게 문제.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53/무력 39/지력 77/정치력 94/매력 64인데 특기는 농업, 기술 꼴랑 2개다. 그나마 정치는 처음 등장하는 출사표 시나리오에서도 고옹, 비의와 함께 공동 7위이므로 후방에서 내정요원으로 굴리다가 5품관이상이면 태수로 임명하는 것이 좋다.[11]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54/무력 39/지력 75/정치력 92/매력 66로 비의와 함께 정치 공동 9위다. 특기는 명성으로, 다른 명성 보유자들이 최소 매력 85를 찍는 것을 생각해보면 굉장히 낮은 매력치라 할 수 있다. 기본 능력으로는 특기를 잘 살릴 수 없으므로 PK라면 능력연구로 매력을 좀 올려주도록 하자.
삼국지 12의 능력치는 지력이 1 상승하고 매력이 없어진 것 이외에는 전작과 동일하다. 여전히 비의와 함께 정치 공동 9위다. 전장에 내보낼 일이 없던 전작과 달리 전법이 총맹사(궁군병격)로 바뀌어서 일단 전장에 나갈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일러스트는 사마사에게 들키자 주먹으로 저항하기 위해 준비하는 포즈.
삼국지 13에서는 드디어 90대를 찍던 정치가 86으로 하향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높은 편이고, 문화 7이 있어서 내정에서는 정치력을 충분히 살릴 수 있으며, 설파 5, 교섭 3, 언변 6이 있어 군락포섭에도 쓸 수 있다.
여담이지만 삼국지 시리즈로 하후현의 존재를 처음 접한[12] 사람들은 뭐야? 왜 이렇게 정치가 높아? 하면서 위키를 찾아보는 경우가 왕왕 있다고 한다. 아마 장완, 비의, 동윤 급 정치력이라 그 만한 재사라고 생각한 모양. 전법은 아군의 방어와 사기를 올려주는 수비지휘로 나름 괜찮은 전법이나 하후현의 전투 능력치가 안습하고, 특기마저 하나도 없기에 전장에 나갈 일이 없다.
삼국전투기에서는 마블 코믹스의 불스아이로 패러디 되었다. 삼국전투기는 다른 모든 창작물에서 전형적인 문관인 하후현을 최훈 혼자만 무관으로 묘사해 놓았다. 낙곡 전투에 참전하고 촉 방면 군사를 총괄하는 정서장군에 올랐다는 점을 감안한 캐릭터 선정. 최훈은 삼국지 만화를 그린다면서 이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다.
- ↑ 하안이 나오는 위씨춘추에는 '泰初'이다.
- ↑ 삼국지연의에 하후연의 아들만 다섯(패, 위, 혜, 화, 무)이 나와 하후현도 하후연의 아들이라 착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하후현은 하후상의 아들이다.
- ↑ 다만 그 글은 보기에 따라 하안이 가장 잘났다고 해석될 여지도 있다.
- ↑ 조예의 첫 황후였던 명도황후 모씨의 집안은 한미안 집안으로, 조예가 처음 조비 밑에서 불우했던 시기에 연애를 통해 혼인했던 사이였다. 집안 좋은 다른 여인이 있었으나 결국 헤어지고 결혼을 이룬지라 사이가 각별했었다. 다만 나중에 조예가 명원황후 곽씨를 맞은 후 모씨는 사형당한다.
- ↑ 진군이 만든 그것으로 구품중정제라고도 한다.
- ↑ 후에 서진의 중신이 되는 위관이나 두예의 비판도 거의 이와 같다.
- ↑ 배송지의 경우 "당시에 하후현은 10년 동안이나 관중의 도독으로 있었습니다. 하후상은 조상이 죽자마자 낙양으로 돌아왔습니다. <소제기少帝紀>에 따르면 사공 조엄은 정시 6년에 죽었으므로 하후현이 조엄의 장례식에 갔을 리가 없습니다. 하후현이 당시에 조정으로 들어왔다는 기록은 기(紀)나 전(傳)에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록은 사실이 아닙니다."라고 부정했다.
- ↑ 사마사와 하후현이 나이는 1살 차이에 명망은 하후현이 사마사보다 높았으면 높았지 낮진 않았다. 게다가 이렇다 할 군사적 실적도 없어서 아버지처럼 반대파를 권위로 내리누르는건 불가능했다.
- ↑ 아이러니하게도 하후현을 마지막까지 구해주려 한것은 다름아닌 사마소였다.
- ↑ 전국시대의 연나라 명장 악의에 대해 논한 글이다. 왕희지가 이 글을 옮겨 적었는데 그 서본은 서예사에 매우 중대하게 여겨지는 자료다.
- ↑ 삼국지10에서 태수를 위임으로 놓았을 경우 정치력이 높을수록 태수가 부지런히 일을 하기 때문에 하후현은 적 침략이 없는 후방도시의 태수로 적격이다.
- ↑ 그도 그럴 것이 판본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 연의에서 제갈량 사후, 특히 위나라의 정세같은 건 생략될 때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