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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佐賀女性7人連続殺人事件. 1975년부터 1989년까지 일본 사가현 일대에서 벌어진 여성 연쇄 살인 사건.
밝혀진 희생자는 최연소 11세부터 최연장자인 50세 피해자까지 총 7명이다. 순박한 인심에 물 맑고 공기 좋은 사가현의 이미지를 한큐에 막장으로 때려 박은 사건으로, 일본판 화성연쇄살인사건이라 볼 수 있을 정도로 여러 가지 흡사한 점이 많다.
2 사건의 특징
피해자 7명 중 6명이 수요일에 실종되어 수요일의 교살마(水曜日の絞殺魔事件)라는 명칭이 붙었다. 납치 추정 시간대는 일몰 후, 시신이 백골화하여 사인을 검증할 수 없는 2명을 제외한 5명의 사인은 교살이었다. 네 번째 희생자를 제외한 희생자 모두 부패 정도가 심각하거나 백골화되어 성폭행 여부는 불명, 또한 시체 유기현장에서 발견된 유류품에는 현금 등 금품이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중요한 건 7명이나 희생됐음에도 불구하고, 미궁에 빠진 미해결사건이다.
3 사건일지
실종신고가 접수된 순서에 따라 나열.
- 첫 번째 희생자
1975년 8월 27일 수요일, 키타카타쵸에서 1학년 여중생 야마자키 토미코(山崎十三子 당시 12세)가 혼자서 집을 보고 있는 도중 실종. 1980년 6월 27일에 시라이시쵸의 스코 초등학교 수영장 옆 화장실의 정화조 안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특이한 것은 집안에서 실종됐음에도 불구하고, 일체의 반항 흔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경찰은 단순가출로 보고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다.
- 두 번째 희생자
1980년 4월 12일 토요일, 시라이시쵸에 사는 여성 하쿠타케 리츠코(百武律子 당시 20세)가 혼자서 집을 보고 있다가, 앞서 사건과 마찬가지로 일체의 반항흔적이 없이 집에서 실종. 약 2개월 후의 6월 24일, 스코 초등학교의 북쪽 교사 화장실 정화조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첫 번째 사건의 희생자가 발견된 그 학교다)
첫 번째 희생자의 발견 시기를 보면 알겠지만, 두 번째 사건의 희생자를 먼저 발견하고 전 학교를 수색, 첫 번째 사건의 희생자도 찾아낸 것이다. 두 시신 모두 정화조 안에 있었지만, 오물수거차량이 오물을 빨아올리다가 걸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는지, 구석진 곳에 유기된 상태였다.
- 세 번째 희생자
1981년 10월 7일 수요일, 시라이시쵸 인근 공장에서 조업 후 귀가하던 종업원 이케가미 치즈코(池上千鶴子 당시 27세)가 실종. 1981년 10월 21일에 나카하라쵸의 공터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이때까지도 사가현경, 즉 사가현의 경찰은 별개의 사건으로 취급했다.
- 네 번째 희생자
1982년 2월 17일 수요일, 키타시게야스쵸의 초등학교 5학년 A양(본명 : 니시야마 쿠미(西山久美) 당시 11세)이 하교 도중 실종. 2월 18일에 인근 귤 밭에서 교살된 시체로 발견되었다. 이 시점에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경찰들도 있었지만, 여전히 사가현경의 공식입장은 별개의 사건 취급.
- 다섯 번째 희생자
1987년 7월 8일 수요일, 타케오 시의 음식점 종업원 후지세 스미코(藤瀬澄子 당시 48세)가 귀가 도중 실종.
- 여섯 번째 희생자
1988년 12월 7일 수요일, 키타카타쵸의 주부 나카지마 키요미(中島清美 당시 50세)가 실종.
- 일곱 번째 희생자
1989년 1월 25일(수), 키타카타쵸의 회사원 요시노 타츠요(吉野タツ代 당시 37세)가 실종.
이렇게 각기 다른 장소에서 실종된 5~7번째 희생자들은 한꺼번에 한 장소에서 발견된다.
피해자들의 나이를 보면 굉장히 중구난방인데 소아성애자인가 싶으면, 청년, 장년을 가리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4 의문스러운 괴전화
두번째 실종자가 나온 직후였던 4월 16일 피해자 부모 앞으로 '딸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너도 고통을 맛봐라(娘ハ帰ラナイダロウ、オ前モ苦シメ)[1]'라는 발송인 불명의 편지가 도착. 또한 남성의 목소리로 "실종자 찾기 프로그램에 나오지마라', '리츠코씨의 사진을 띄우지마라'라는 내용의 수상한 전화가 수차례 걸려왔다.
그 후 여섯 번째 실종자가 나오고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피해자의 집으로 중년 남성에게 전화가 걸려온 것을 남편이 받았는데 이 전화가 대단히 기분이 나쁘다.
남편: 여보세요, 나카지마입니다.
남자: 부인을 찾으신 것 같네요.
남편: 네?
남자: 다행이네요
남편: 대체 어디서 찾았다는 거죠?
남자: 햅쌀(焼米)이 있는 장소에요
(잠시 침묵)
남편: 당신 누구시죠?
남자: 네가 아는 인간이다.
끝으로 전화는 끊겼으며, 피해자 자택의 집 전화에 녹음 시설을 설치하고 조사원도 같이 있었지만 범인의 단서는 찾지 못했다.
5 무더기로 발견된 시체
1989년 1월 27일, 중년 부부가 자가용을 몰고 귀가 도중 키타가타쵸에서 큰 고개라고 불리는 산 옆 도로[2]에 이르렀을 때 부인이 들꽃이 우거진 장소를 발견한다. 부모의 불단에 올리기 좋은 꽃이라고 생각한 부인은 남편에게 잠시 차를 세워줄 것을 부탁한다. 그리고 꽃을 꺾으려고 수풀에 들어갔는데, 그 곳에 3구의 시신이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5, 6, 7번째 희생자들의 시신이 전부 거기에 유기되어 있던 것이다. 더 놀라운 점은 근처에 범인이 만든 것으로 보이는 표지판 같은 표식까지 있었다는 점.
이 시점에서야 사가현경은 겨우 이게 연쇄 살인사건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된다. 아 ! 얼마나 멍청한가!
6 키타가타 사건
키타가타쵸에서 시체가 발견된 89년 11월, 다른 건으로 구속되있던 당시 26세의 남성을 임의 조사하여 범행을 인정하는 상신서를 썼으나 곧바로 부인하였는데, 2002년이 되어서야 사가현경은 형무소에 수감중이던 해당 남성을 살해 용의자로 체포하였다. 그 후 공판이 열려 사형을 구형받았으나 2005년 4월 10일, 사가 지법에서 열린 공판에서 물증이 없음과 상신서가 해당 사건의 담당자에 의한 과도한 조사와 유도로 작성된 점을 인정하여 무죄가 선고되었고 2007년 3월 16일 후쿠오카 고등 법원에서 남성에게 무죄를 확정했다.
범인으로 몰려 사형까지 당할 뻔 했던 이 남성이 받은 보상금은 고작 580만엔이었다. 약 5년가량 시달리고 인생도 거의 망가졌을 게 뻔한 사람에게 주는 보상금이 겨우 한화 8,000만원 정도라니.
7 그리고 미궁 속으로
연쇄살인범 그딴 거 없어요라고 일관하던 사가현경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된다. 어찌나 이 사건의 여파가 컸는지, 웬만하면 현경이 맡는 광역사건에는 관여하지 않는 일본 경찰청, 즉 본청에서 수사 1과 형사과장까지 내려온다. 한마디로 늬들 못 믿겠다 라는 의미. 현경에 있어서 이보다 굴욕은 없다. 그리고...
전 일본의 이목이 집중되면서 이 물 맑고 공기 좋은 시골도시가 사실은 미해결 사건 투성이의 막장 치안임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다. 현지 주민들 사이에서도 오래전부터 경찰을 신뢰하지 않는 분위기가 팽배한 상태였다. 그러나 사가현이 이렇게 미해결 사건이 많은 원인에는, 경찰의 탐문조사에 좀처럼 입을 열려고 하지 않는 지역 주민들의 폐쇄적인 태도도 큰 부분을 차지한다. 서로 다 알고 지내는 시골이다 보니 함부로 지역 주민에 대해서 입을 열지 않는 것이다.
초동수사 실패, 주민들의 비협조, 만성화된 무능력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면서 지속된 사가현경의 병크로 인해 네 번째 사건까지는 공소시효가 만료된 상태이며 3건은 시효가 유효하지만 무죄가 확정되었기때문에 영영 미해결 사건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