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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의 역대 황제 | |||||
3대 회황제 사마치 | ← | 4대 민황제 사마업 | → | 동진 5대 원황제 사마예 |
시호 | 효민황제(孝愍皇帝) |
연호 | 건흥 (建興, 313년 4월 ~ 317년 3월) |
성 | 사마(司馬) |
휘 | 업(業) |
자 | 언기(彦旗) |
생몰기간 | 300년 ~ 318년 2월 7일 |
재위기간 | 313년 6월 7일 ~ 316년 12월 11일 |
1 개요
司馬鄴 혹은 司馬業.
사마업은 서진의 마지막 황제로 시호는 민제(愍帝)다. 자는 언기, 무제 사마염의 15남인 오왕 사마안(晏)의 아들로 숙부 사마간(柬)의 양자가 되어, 그가 요절한 뒤에 사마간의 뒤를 이어 진왕(秦王)이 되었다.
서진의 마지막 황제이긴 하지만 서진은 이미 낙양 함락과 회제의 죽음으로 사실상 멸망한 상태였고, 민제의 통치범위는 장안과 그 주변에 불과하여 사실상 지방정권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최후의 발버둥을 쳤지만 멸망은 피할길이 없었으며 멀리 양자강 너머 강남에 있어 안전을 보장받은 사마예가 동진을 수립해서 대를 이었다.
2 즉위
313년 영가의 난으로 인해 낙양이 떨어지자 숙부 사마치가 사로잡혔고 아버지 사마안도 죽었다. 당시 13살이었던 사마업은 312년에 밀현으로 이동했고 거기서 만난 친척이자 서진 관리들인 순번, 순조에 의해 군주로 추대되었다. 이듬해 중앙정부를 다시 세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염정이 사마업을 관중에 모시려고 시도했으나 그 과정에서 친척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지지자들이 사마업을 떠났다. 그래도 염정과 사마업은 결국 관중에 도착했고 안정태수이었던 가필 장군의 지원을 받았다. 장안은 그 전에 유총이 점령했지만 잠시 흉노의 내분을 이용해 312년에 가필이 장안을 탈환했기 때문에 사마업은 그 곳에 본거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312년 가을 염정과 가필은 사마업을 황태자로 추대하고 임시정부를 조직했다.
313년 봄 전조의 유총에 의해 사마치가 처형되었고 이 소식이 장안까지 닿는 데에 3개월이 걸렸다. 이 후 숙부 사마치의 상을 치르고 결국 황위에 올랐다. 하지만 오랜 전란으로 장안은 총 가구 수가 100호도 되지 않았고 사용 가능한 마차 역시 넉 대밖에 없었다. 또 관리들이 사용할 도장과 피복까지 부족한 상황이었고 병권은 국윤과 삭침이 쥐고 있었다.
3 마지막 발버둥
사마업은 이미 죽은 동해왕 사마월의 조카인 사마보가 진주에 상당한 세력을 가진 것을 알고 남양왕에 봉하고 사마의의 5남 사마주의 손자인 사마예가 양쯔강 유역 및 남쪽에 상당한 영토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낭야왕에 봉했다. 이것은 그들에게서 도움을 얻기 위한 것이었지만 사마보와 사마예는 특별한 충성심을 보여주지 않았다. 314년경 전조는 장안을 급습했고 그 공격 자체는 실패하기는 했지만 이는 민제 정권하의 서진이 자기 자신을 방어하는 데에도 힘이 부족했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나마 양주 자사였으며 나중에 세워진 전량의 태조로 추증된 인물인 장궤가 약간의 군사를 파견하여 장안을 잠시 도와주어서 수비가 가능했다. 315년 사마보는 사마업을 돕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렇게 하지는 않았고 삭침 역시 황제가 사마보에게 이용을 당할까 우려되어 황제를 사마보에게 보내지 않았다.
4 장안 함락과 폐위
316년 가을 전조의 장군이자 유총의 친척이었던 유요가 민제의 영토에 대규모 침공을 해왔고 북지의 비밀기지가 함락되면서 관중에 있었던 다른 도시들도 붕괴된다. 구원군이 두 곳에서 도착했지만 막상 유요군과 맞서기를 주저했고, 유요는 장안의 외성을 포위했다. 외성이 떨어지고 장안의 식량이 거의 바닥나 쌀 한 말이 금과 같은 가격으로 거래되었고 내성도 떨어질 위기에 처했다. 이 때 죽으로 연명하던 사마업은 항복을 결심해 윗도리를 벗고 전국 옥새를 차고 입에는 구슬을 물고 양을 끌고 가는 고대 중국의 항복 의식을 수행하면서 투항했다. 그는 이후 유요에 의해 전조의 수도 평양으로 압송되었다.
5 종말
유총은 포로로 데려온 사마업을 회평후에 봉했다. 318년 초 유총은 그를 거기장군에 임명했지만 연회에서 죽은 사마치처럼 사마업에게도 하인 노릇을 시키고 사냥갈 때는 맨 앞에서 창을 들고 걸어가게 하는 굴욕을 주었다. 당시 전조에 대한 여러 봉기가 있었는데 그의 태자 유찬을 대신해 진 황제를 다시 옹립하려는 목적이었으므로 유찬은 사마업의 처형을 건의하였고 유총은 이를 받아들여 사마업을 죽였다. 나중에 유총의 아들 유찬을 죽인 근준의 난을 틈타 동진의 원제 사마예가 태상 한윤(韓胤) 등을 보내 사마치와 사마업의 영구를 강남으로 가져와 안장했다.
한편 남양왕 사마보의 아버지 남양왕 사마모는 형제인 사마월을 배신하고 관중에서 독자적으로 세력을 키웠으나 311년 살해되고 아들인 사마보가 남양왕의 자리를 계승했다. 하지만 사마업이 사로잡힐 때까지 구원해 주지 않고 결국 사마보는 319년 4월에 독자적으로 진왕이라 칭했다. 하지만 다음해 3월 사마보는 부장이었던 장춘, 양차 등에 의해 살해 당하고 그 세력은 장궤의 아들 장식과 유찬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이로서 서진은 멸망하였으며 사마예가 동진을 건립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