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요(전조)

오호십육국시대 전조의 역대 황제
4대 은황제 유찬5대 유요6대 유희
묘호-
시호-
연호광초(光初, 318년 10월 ~ 328년 12월)
유(劉)
요(曜)
영명(永明)
생몰기간? ~ 329년
재위기간318년 ~ 329년

1 생애

생몰년은 ? ~ 328년, 재위 기간은 318년 ~ 328년이다. 전조의 창건자 유연의 족자[1]는 영명(永明)이다. 그의 다음 대에서 나라가 멸망해 묘호시호는 일체 없다.

유요는 어려서 고아를 해 친척 아저씨였던 유연이 양자로 삼아 길렀다. 유연이 한(漢)나라를 세운 뒤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유연 사후에는 유총의 명을 받아 311년 낙양을 공략하는 작전에서 총사령관 급의 임무를 하였다. 석륵, 왕미, 호연안 등과 함께 낙양을 함락시키고 회제 사마치를 포로로 잡았다. 그런데 유요의 군사들은 무기 창고를 점령한 다음 역대 황릉을 도굴하다가 종묘을 불태우고 끝내 낙양까지 태워 버렸다. 그 뒤에 유요는 장안까지 진출했지만 전량(前涼)과 안정 태수 가필의 지원을 받은 서진 민제 사마업의 세력에게 다시 장안을 빼앗겼다. 이후 주로 진양(현재 산시성 타이위안 시)을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고, 316년에 다시 장안을 포위하여 외성을 완전히 포위했다. 끝내 사마업의 항복을 받아내어 사로잡았으며 관중을 평정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렇게 유요의 군대는 관중 일대에서 사실상 군벌화했다. 318년 유총이 죽고 유찬이 뒤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외척 근준이 반란을 일으켜 유찬을 죽이고 평양의 유씨 일족을 몰살시켰으며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이에 유요는 수도를 폐허였던 평양에서 장안으로 옮겼다. 이 때 유연과 유총의 자손들이 모두 죽어 자신이 황제에 즉위하고 석륵을 조공(趙公)으로 임명하여 근준을 협공했다. 근준은 석륵에게 패배한 뒤 내분으로 죽었고 근준의 잔존세력은 평양성과 함께 유요에게 항복하였다.

이에 석륵은 분노하여 평양을 공격하였으며 근준의 잔당은 평양을 버리고 유요에게 도망쳤다. 석륵은 평양 함락 이후에 유요와 화친을 제의하였으나, 유요는 간신들의 말만 듣고 석륵의 사신을 처형하여 석륵과 유요는 이 때부터 적대 관계를 했다. 유요는 319년에 국호를 조(趙)로 고치고 흉노의 후예임을 공식화했다. 같은 시기 석륵이 양국에서 또다른 조나라를 세웠기에 유요의 조나라를 전조, 석륵의 조나라를 후조로 구별한다. 유요는 또 한나라 역대 황제[2]의 제사를 금해 관계를 완전히 차단했다. 그 뒤 저족과 강족을 복속시키고 전량, 구지를 공격해 복속받았다. 325년, 후조의 병주가 유요에게 항복하였으며 동진의 사주도 유요에게 투항하자 유요의 군대는 낙양을 지키는 후조의 석생을 포위하였다.

이에 석륵의 조카 석호가 구원군으로 와 유요군을 격파하고 오히려 역포위하였다. 유요는 장안에서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여 석호를 격파하였으나, 군중에서 이유없이 일어난 혼란으로 패주하였으며 병주, 사주 일대를 모두 잃었다. 325년의 이 패전으로 전조의 국력은 쇠퇴하여 잠시 굴복했던 전량이 다시 독립하고 구지의 저항이 커졌다. 328년 후조의 석호가 전조를 공격하니 유요가 군대를 이끌고 반격하여 크게 이겨, 낙양을 포위하고 사주 일대를 탈환했다. 그러나 낙양 포위가 장기화해 유요는 군기가 빠져긴장이 해이해지고 지루해지자 술을 마시고 도박에 빠졌다. 이 때 석륵이 반격하니 낙양성 북서쪽 금용성에서 난 전투에서 유요는 술에 취한 채 전투에 임하였다가 크게 패배하고 도주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포로로 잡혔다. 석륵은 일단 유요를 수도 양국으로 압송해서 유요에게 유요의 장남 유희에게 항복 편지를 쓰게 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에 석륵은 분노한 나머지 유요를 죽였다.

이전에 유요는 낙양을 함락하고 서진 혜제 사마충의 황후였던 양헌용을 자신의 부인으로 삼았는데 이 때 일화가 유명하다. '사마씨 녀석들과 나를 비교하면 어떤가?'라고 물으니 양헌용은 '사마충은 암군으로 나라를 말아먹어 이 꼴로 만들었는데 비교할께 있나요? 공(유요)을 보자 진짜 남자가 어떤지 알게 되었죠.'라면서 사마충을 깠다. 유요는 양헌용을 총애해서 나중에 황제를 하자 황후로 삼았고 그와의 사이에서 장남 유희를 비롯한 세 아들을 낳았다. 322년에 양황후가 죽었는데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장인 양현지를 위해 영원릉(永垣陵)을 만들어 이장시키고 그녀는 현평릉(顯平陵)에 장사지냈다. 유요는 그녀를 기리고자 엄청난 돈을 들여 그녀와 그 부친을 위해 능묘를 만든 것이다. 엄청난 수의 백성들이 동원되어 밤낮을 쉬지 않고 건설했는데 이 때문에 백성들의 희생이 많아지자 원망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특히 무덤 건설 공사를 위해 그 부지에 있던 오래된 무덤을 밀어버리고 시체들은 황야에 버렸는데 그 시체들에서는 악취가 나고 전염병이 돌아 이에 대신들은 상소를 올려 그 부당함을 호소했다.

두 묘는 만드는 비용이 어마어마하여 하루 6만 명의 백성들이 동원되어 지금까지 6백만 명의 공력이 들어갔습니다. 벌써 3개의 연못을 만들었고 높이가 백 척이나 되는 산만한 언덕이 생겼습니다. 뼈들이 온 땅에 널려 있고 인부들의 탄식소리가 하늘에 닿고 있습니다. 또한 나라와 폐하와 황후에게도 아무런 이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요는 복지부동이었고 끝내 두 개의 능을 완성시켰다. 특히 현평릉은 황후가 이미 묻혔지만 나중에 자신이 합장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다. 하지만 훗날 유요가 석륵에게 죽고 전조가 멸망할 무렵 그녀가 묻혔던 현평릉은 표적이 되어 도굴되고 철저하게 파괴당했다.

유요의 아들들과 일족들은 모두 전조가 망할 때 처형을 겪지만 유요의 딸 안정공주는 살아남았다. 안정공주는 석호의 첩이 되어 나중에 석호가 황제를 즉위하자 귀인 유씨에 올랐다. 유씨는 석호의 아들이자 그의 후계자 석세를 낳았다. 하지만 유요의 외손자인 석세는 얼마 황제에 있지도 못하고 석준에게 쫓겨났으며 그 어머니 유씨와 함께 죽었다.

2 가족 관계

2.1 아내

  • 원도황후(元悼皇后) 복씨(卜氏) - 유요의 첫 부인으로 유요가 즉위하기 전에 사망했고 즉위 후 원도황후로 추존했다.
  • 헌문황후(獻文皇后) 양씨(羊氏) - 이름은 양헌용(羊献容). 원래는 서진의 혜제 사마충의 황후였으며 영가의 난 때 사로잡힌 후 유요의 부인이 되었다. 복씨가 사망하고 유요가 황제가 되자 황후가 되었으며 322년 사망했다.
  • 헌열황후(献烈皇后) 유씨(劉氏) - 헌문황후 사망 후 맞아들인 황후로 326년 사망했다.
  • 황후(皇后) 유씨(劉氏) - 이름은 유방(劉芳). 물론 한고조와는 무관하다. 헌열황후의 사촌 여동생으로 헌열황후 사망 후 맞아들인 황후다. 유요가 석륵과 싸우다 패사한 후로는 기록이 없다.

2.2 자녀

  • 태자(太子) 유희(劉熙) - 헌문황후 소생, 유요가 석륵에게 처형당한 후 뒤를 이었다. 하지만 별다른 대항을 하지 않고 수도 장안을 버리고 달아났으며 나중에 황족, 고관대작 등과 함께 사로잡혀 석륵에 의해 처형되었다.
  • 임해왕(臨海王) 유검(劉儉) - 원도황후 소생
  • 남양왕(南陽王) 유윤(劉胤) - 원도황후 소생
  • 장락왕(長樂王) 유습(劉襲) - 헌문황후 소생
  • 태원왕(太原王) 유천(劉闡) - 헌문황후 소생
  • 회남왕(淮南王) 유충(劉沖) - 생모 미상
  • 제왕(齊王) 유창(劉敞) - 생모 미상
  • 노왕(魯王) 유고(劉高) - 생모 미상
  • 초왕(楚王) 유휘(劉徽) - 생모 미상
  • 안정공주(安定公主) - 후조 석호의 부인이 되어 그의 아들 석세를 낳았으나, 내란이 휘말려 아들과 함께 석준에게 피살되었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유요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div></div>
  1. 친척 조카
  2. 한고조(유방), 광무제(유수), 소열제(유비), 효회제(유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