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인물의 이름을 딴 경기장에 대해서는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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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예스테(Santiago Bernabéu Yeste)
생몰 연도1893년 6월 8일~1978년 6월 2일
국적스페인(Spain)
출신지알만사(Almansa)
포지션공격수
선수 경력레알 마드리드 CF(1911~1927)
지도자 경력레알 마드리드 CF 감독(1926~1927)
프런트 경력레알 마드리드 CF 단장(1927~1933)
레알 마드리드 회장(1943~1978)
레알 마드리드 CF 역대 감독
페드로 요렌테
(1926)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1926~1927)
호세 베라론도
(1927~1929)
레알 마드리드 CF 역대 회장
안토니오 산토스 페랄바
(1940~1943)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1943~1978)
루이스 데 카를로스
(1978~1985)

1 개요

67년 동안 레알 마드리드에 헌신한, 레알 마드리드의 수호성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스포츠 회장 중 한 명.

레알 마드리드 CF의 전 선수, 임원. 레알 마드리드에서 일생 대부분을 보냈으며, 역대 최장 기간인 35년 동안 회장을 역임했다. 축구단 회장계의 전설이자 레알 마드리드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

2 생애

1893년 스페인의 알만사에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나 이내 마드리드로 이주하였고, 1911년에 레알 마드리드 유소년 팀에 입단한 뒤 이듬해에 선수로 데뷔했다.

선수 생활 15년 동안 총 78경기를 뛰며 69골을 기록하며 준수한 활약을 펼치다가, 1927년에 변호사 자격을 얻기 위해 팀에서 은퇴하고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이후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과 디렉터를 거치다가 1936년 스페인 내전이 터지자 프랑스로 피신해 변호사 일을 하다가, 내전이 끝난 뒤인 1943년에 회장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스페인 내전 동안 파괴된 차마르틴 구장과 시우다드 데포르티바 훈련장을 재건하고, 1952년부터 자신의 영원한 오른팔이 될 라이문도 사포르타(1926~1997)를 단장으로 불러낸 뒤 페렌츠 푸스카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레이몽 코파, 미겔 무뇨스, 프란시스코 헨토, 호세 산타마리아, 엑토르 리알 등 유수의 선수들을 영입하여 훗날 플로렌티노 페레스 회장이 만들어낼 갈락티코스 시대 못지않게 지구방위대 라인업을 구축했다. 이 세대가 저문 이후에도 아만시오 아마로, 피리, 귄터 네처, 산티야나, 후아니토, 비센테 델 보스케,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 등을 구단으로 불러들였다.

레알 마드리드의 경기장 이름이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가 된 것도 이 시기이다. 1955년 1월에 새로 지어진 차마르틴 경기장의 개명을 위해 레알 마드리드 회원 총회가 소집되었다. 전술했듯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는 회장으로서 경기장 건설을 주도했었고, 이 회의에서 새 이름으로 '누에보 차마르틴'과 '카스테야나'라는 무난한 이름을 제안했다. 누에보 차마르틴은 '새로운 차마르틴'이라는 뜻이고, 카스테야나는 경기장이 위치한 거리의 이름이었다. 그런데 이때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앞에서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라는 이름이 제안되었고, 투표 결과 만장일치로 이름이 확정되어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베르나베우 회장 재임 기간 동안 마드리드는 현 레알 마드리드 프리미엄의 중추가 되는 전성기를 누린다. 그의 임기 33년 동안 마드리드의 주요 우승 경력은 인터컨티넨탈 컵 우승 1번(1960, 클럽 월드컵의 전신인 도요타 컵의 모체), 유러피언 컵(현 UEFA 챔피언스 리그) 6번 우승(1955/1956~1959/1960, 1965/1966, 1966년 우승으로 트로피 영구 소장권 획득), 라 리가 16번 우승, 코파 델 레이 6번 우승 등이다.

그는 1978년 사망할 때까지 무려 35년 동안 회장직을 역임했다. 충성심이 남달라 병세로 쓰러져 있는 와중에도 '창단 75주년 기념 경기에 참석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을 서포터들에게 전하게 했으며, 회장 임기는 그가 숨을 거두고 나서야 종료되었다.

3 업적과 평가

흔히 레알 마드리드의 최전성기를 상징하는 인물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를 꼽지만, 회장으로서 디 스테파노를 포함한 최정상급 선수들과 계약한 사람이 베르나베우이다. 게다가 유럽 최고 명문 농구단인 레알 마드리드 발론세스토도 베르나베우가 창단시켰다. 사실상 레알 마드리드 프랜차이즈의 황금기와 현재 명성을 설계한 인물. 베르나베우 회장 재임기 동안 레알 마드리드가 들어올린 트로피는 축구 부문 33개, 농구 부문 47개로 자그마치 80개에 달한다. 때문에 성과 면에서 역사상 최고의 스포츠 회장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다. 구단이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재임기 동안 달성한 공식 대회 우승 기록은 다음과 같다.

성과를 떠나 충성도 면에서도 전설적이다. 10대부터 죽을 때까지 레알 마드리드 외 다른 팀에 소속된 적이 없다. 축구계에 원 클럽 맨은 여럿 있지만, 그 중 유소년기와 은퇴 이후 경력까지 통틀어 오직 한 팀에만 속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회장이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이러한 공로를 기리기 위해 레알 마드리드는 홈 경기장 이름을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로 반 세기 넘게 유지하고, '트로페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라는 친선 대회를 매년 프리시즌에 개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