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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중기의 명기, 시인
박연폭포, 서경덕과 함께 송도 3절로 불렸다. 정확한 출생이나 사망 연도는 알길이 없지만 서경덕과의 일화, 그리고 백호 임제가 황진이의 묘를 보고 시조를 읊었다는[1]등의 이야기등으로 감안해본다면 중종시기의 인물인듯 하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전해져 내려오는 것들이 많아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내려오는 이야기에는 황 진사의 서녀로 태어났다고는 하지만, 기록을 계속 더듬어 올라가면 과연 사실인지 아닌지 의심스럽다. 가장 오래된 기록인 허균의 성소부부고(1613)에서는 황진이를 맹인의 딸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이후 10~20년 뒤의 기록에서는 어머니 '현금'이 빨래를 하다가 지나가던 남자에게 물을 건네 줬는데, 다시 받아 마신 물이 술로 변해 있었고 곧 사랑에 빠져 진이를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뒤 100년이 지난 기록에서는 한 소년이 진현금을 희롱하자 태기가 있어 아이를 낳았는데 그게 진이고, 그때 3일 동안 향내가 가시지 않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황 진사 얘기는 19세기 후반에서야 기록된 얘기다. 초기 기록인 17세기 기록만 확인해도 황씨라는 성은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어린 시절에 이미 사서삼경을 독파하고 시와 서예, 음악에도 재능을 보였으며 빼어난 미모를 지녔다고 한다.
그러다가 15살 때, 동네 총각이 황진이를 보고 한눈에 반해 상사병에 걸렸고 중매를 넣었지만 황진이의 어머니가 거절했다고 한다. 결국 동네 총각은 죽고 말았고 장지로 상여를 옮기는데 상여가 황진이의 집 앞에서 절대 꿈쩍도 하지 않았다.오...온달이냐?! 황진이가 나와서 관을 어루만져 주고 위로하고 나서야[2] 상여가 움직이게 되었다고. 이 사건 이후 황진이는 자신은 평범한 여자의 인생을 살기는 어렵다고 하며 기생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해 기생에 투신했다는 얘기가 전해져 오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기생이었고. 종모법에 따라 그녀도 기생이 되었다.
명월이라는 이름으로 기생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시, 서, 화에 모두 능통한 초특급 기생[3]으로 명성을 날리며 저명한 문인, 학자들과 교류했고 어느 정도 사회와 남자들에 대한 반항적인 사고가 있었던 듯, 10년 동안 면벽수행을 하며 생불이라 불리던 천마산의 지족선사를 유혹해 파계시켜 버리고, 왕족 벽계수[4]가 한양으로 돌아가려 하자 단장을 한 뒤 말을 타고 벽계수의 가는 길 앞에 나타나서 "청산리 벽계수야~"라고 시작되는 시조를 읊자 벽계수가 놀라서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벽계수와 지족선사를 모두 무너뜨린뒤, 송도에서 저명한 학자였던 서경덕에게 찾아가 서경덕도 유혹하려 했지만 보통 내공이 아닌 서경덕은 황진이의 유혹에도 덤덤했고, 서경덕에게 감탄한 황진이는 서경덕을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배웠다고 한다.
황진이의 유혹에 겉으로는 덤덤했다지만 사실 서경덕도 황진이를 내심으로는 좋아했다는 설이 나도는데, 황진이에 대한 연민을 나타냈다는 그 시조가 서경덕 문집이 아니라 가집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후세 가객들의 희작일 가능성이 크다. 17세기 이전의 시조들은 사대부들의 문집이나 재가본에 수록된 것을 제외하고는 위작의 가능성이 있다. 시조가 구술 전승에서 벗어나 문헌에 본격적으로 수록된 시기는 김천택, 김수장의 활동 이후인 18세기 중엽이다. 즉 야사이므로 애초에 둘은 만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 조선시대때 부터 동인지가 있었다니
여튼 그러다가 서경덕이 죽자, 기생일을 접고 은둔하다가 병에 걸려 결국 죽고 말았다고 한다. 그녀가 자신이 죽은뒤에는 곡을 하지 말고, 상여가 나갈때는 풍악을 울릴 것이며, 살아생전에 세상을 어지럽히고 남자들을 애태우게한 죄가 있으니 관을 쓰지말고 자신을 송도 밖의 사천모래밭에 그냥 던져서 까마귀밥이 되게 해 방탕한 여자들에게 경계로 삼으라[5]고 했다는 유언이 있다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설"일 뿐 명확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전설이든 실제든 황진이가 까마귀밥이 되는것이 안타까웠던 송도 사람들이 그녀를 고이 안장했다고 하며 현재 북한 장단 남정현 고개에 황진이의 묘가 있다고 한다. 야사에는 묘 앞에 조그마한 샘이 하나 생겨났는데, 작은 바위 두 개 사이로 물이 조금씩 솟아나왔다고 한다. 목이 마른 과객이 물을 마시려면, 우선 무릎을 꿇어야 했을 것이고, 그가 물을 마시는 모습이 흡사 여인의 허벅지 사이에 머리를 파묻고 있는 것과 같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흠좀무
선조 때의 문인 임제(1549~1587)는 황진이의 무덤이 초라하게 있던 걸 보고 안타까워하며 시를 썼는데 결국은 세월가면 아무리 먼치킨도 초라하게 남을 뿐이라는...허무한 시.일설에 의하면 임제는 이 시를 짓고 말한 것 때문에 벼슬에서 잘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북한에서 부수상 까지 지낸 국문학자 김두봉은 과거에 개성에 갔을 때 황진이의 무덤에 헌화하고 술을 부은 뒤에 절을 했다고 한다. 국문학자로서 황진이에 대한 존경빠심을 표현한 행동이었지만...... 후에 김두봉이 연안파로 몰려 숙청 당할때 이 일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일국의 부수상이라는 자가 기생년의 무덤에 꽃다발을 놓고 술을 따르고 절까지 했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였다나??? 사실 북한에서 '존경','동경'은 오직 김일성, 김정일 부자에게만 할 수 있는 표현이다. 많은 예술인들이 김 부자가 아닌 자신들의 스승이나 좋아하는 예술인들에 대한 존경의 표현을 꼬투리 잡혀 숙청당했다. 문예봉도 과거 나운규에 대한 추억과 존경심을 담은 글을 썼다가 숙청당한 바 있다.
뛰어난 시의 재능으로 여러 걸작 시와 시조들을 남겼는데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라는 시조라던지 "동지달 기나긴 밤을 한허리를 베어내어~" 같은 시조들이 유명[6]해 문학교과서에도 실려있고 수능에도 출제된바가 있다. 그외에 "만월대 회고시", "박연폭포시"같은 시들을 남기기도 했다.
재능과 미모를 겸비하고 드라마틱하게 산 그녀의 이야기 탓인지 남한과 북한에서 모두 그녀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들이 나왔고 단골로 사극 영화,드라마의 소재가 되었다. 북한의 홍석중, 남한의 전경린,최인호, 김탁환이 황진이를 소재로한 소설을 쓴 대표적 남북한의 작가들이고 도금봉, 김지미, 장미희, 이미숙, 하지원, 송혜교 등의 내로라하는 여배우들이 황진이 역을 한바 있다.
1.1 황진이 일화가 기록된 문서
중종 시대(1488~1544)의 인물이라고 하지만 최초의 기록은 1611년 허균의 성소부부고에서부터 나타난다. 때문에 구전되다가 각색되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고 한다. 즉 황진이의 실체 자체는 분명하지만 그 활약에 대해선 의심할 여지가 많다는 것.
- 허균의 《성소부부고》 〈성옹지소록〉 (1611)
- 유몽인의 《어우야담》(1621)
- 이덕형의 《송도기이》(1631)
- 임방의 《수촌만록》(1724?)
- 김이재의 《중경지》(1824)
- 서유영의 《금계필담》(1871)
- 김택영의 《송도인물지》(1896)
2 황진이(드라마)
황진이(드라마) 문서로.
3 황진이(영화)
황진이(영화) 문서로.
4 황진이(웹툰)
네이버 웹툰 야! 오이의 등장인물.
5 황진이(노래)
6 트랙시티의 등장 캐릭터
트랙시티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 중후반부에 등장하며 파란바람의 자매품 빨간바람을 조종한다.
지니처럼 롬 프레임을 가지고 있고 지니를 삼식이라 부르며 서로 으르렁대기 바쁘다. 원래 캐피맨이 데려와야 했던 트랙시티 게임 랭커 1위, '진이'가 바로 이 캐릭터다.
직선으로 달리면서 차체를 좌우로 빠르게 움직여 상대가 오버테이크 하기가 매우 어렵게 하는 신기루 주행이 특기. 레이싱 데이터 분석결과 랭커 1위 다운 흠집하나 없는 완벽한 주행을 자랑하지만 유일한 약점으로 카 책킹에 약한 모습을 보인다.
작중에서는 지니와의 첫 대결에서 승리했지만, 18화에서 다크어벤져까지 끼어든 3파전에서 2위로 통과하여 패배, 이후 미켈란젤로에게 졌을 때 자기 RC카마저 완전히 개박살났다. 박살이 날 때 보면 지니의 파란바람이 다비스에게 발려서 공중분해 될 때랑 똑같이 박살났다.(...)
7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의 꼭지 중 하나
황당한 진실 이야기의 준말.- ↑ "청초 우거진 골에~"로 시작하는 시조. 이 시조를 읊은것 때문에 임제는 조정에서 탄핵을 받을 정도였다
- ↑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속치마를 벗어서 관 위에 덮어주었다고 한다.
- ↑ 하지만 황진이는 이패기생(은근짜)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지맘에 드는 남자들이랑 그렇고 그런것을 했는데 뭐.기생은 급에 따라 매춘이나 혼인 유무, 천민 여부만 달랐던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예술이 아예 정해져 있었다. 상대하는 계급이나 생활도 각각 달랐다. 즉, 황진이가 아무리 명성을 날렸다 한들 결국은 일패기생보다 아래였다. 또한 기방에 모여 술을 팔며 돈 많은 평민을 상대하는 것은 대부분 창기인 삼패기생이다. 양반들은 기방에 가지 않았다. 자기 집 후원이나 경치 좋은 교외에 일패나 이패를 따로 불렀다. - ↑ 본명은 이혼원(李渾源)으로, 사림의 아버지격인 김종직의 제자기도 했다. 이혼원의 호는 벽계(碧溪)였는데, 여기에 정4품의 종친에게 주는 벼슬인 수(守)를 붙여 흔히들 벽계수라고 불렀다고 한다. 황진이의 시조에 나오는 벽계수(碧溪水)는 그걸 노리고 일종의 중의적 표현을 쓴 것.
- ↑ 일부 여성학자들 중에는 황진이가 정말 이런 소리를 했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뭐 진실은 모를일이다
- ↑ 그녀가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사실 그녀의 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시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예로 든 시 중에도 그런 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