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편제(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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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3년 대한민국에서 제작되어 개봉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소설가 이청준의 연작 소설을 영화로 각색한 작품이기도 하다. 김명곤, 오정해, 김규철 등이 주연하였으며 김명곤이 영화 시나리오 각색을 겸임하였다. 1993년 청룡영화제 최우수작품상, 남우주연상 수상.

1993년 서울특별시 종로구 묘동(종로3가)에 있는 고풍 영화관이었던 '단성사(現 CINUS 단성사)'에서 개봉하였으며 서울 관객 103만명을 동원하였다. 이는 한국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서울관객 100만을 넘겼으며 그 해 개봉작으로서도 쥬라기 공원에 이어 흥행 2위이다! 당시의 젊은층 풍습상 지나친 서구 문화에 찌들고 대한민국의 전통 문화를 케케묵었다느니 고리타분하다느니 무시하는 사고방식을 가진 젊은이들에게도 한국 전통문화의 소중함과 위대함을 널리 알리기도 하였던 영화이기도 하다.

이 흐름은 이후로도 쭉 이어져 대한민국 영화는 중박 이상의 작품들을 계속 만들어내며 존재감을 어필하다가, 쉬리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헐리우드 대작영화들과의 국내경쟁에서 전혀 밀리지 않을 정도로 발전하였다.

참고하자면, 현재의 멀티플렉스와 달리 당시는 단관뿐이었고, 관객 집계도 수작업으로 되었다. 그나마 서울은 배급사에서 직접 집계히지만 지방은 집계도 하지 못했다. 현재와는 직접비교는 어렵지만 요즘 시대에 멀티플렉스로 개봉했다면 천만 정도는 됐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자료가 있다는데.....과연?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관람하는 등 각종 단체/학교에서 단체관람이 많았으므로 개봉관 공식 집계만 했던 당시 관객수를 몇배로 해야하는지는 각자 판단바람. 쉬리와 친구의 경우와 비교해보면 총 관객수는 서울관객수의 3배 정도이고, 이 영화의 추정통계(공식통계도, 확정통계도 아니므로 이 정도였을 듯 하고 짐작만 하는 선에서 끝낼 것.)도 290만 정도이다. 이게 얼마나 엄청나냐면, 당시 어지간한 블럭버스터급 외화도 서울관객 100만명정도면 뉴스에 나올 대흥행이었다. 참고로 사랑과 영혼이 서울 152만, 전국 350만 정도 관객이 보았다고 집계될 당시 영화지나 신문에서는 충격적인 반응이었다. 오죽하면 이문세별이 빛나는 밤에에서 이에 대하여 경악을 금치못했을 정도. 그러니 300만에 가까운 걸로 추정되는 서편제 흥행은 설명이 필요할까? 추정치가 아닌 서울관객만 따져도 1991년 개봉하여 그해 개봉 흥행 1위였으며 초대박을 거뒀다는 늑대와 춤을이 서울관객 98만을 기록했고 터미네이터 2조차도 서울 92만 관객을 기록했다는 걸 생각하면 엄청난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같은 해인 1993년 개봉작 흥행 1위이던 쥬라기 공원이 서울관객 106만(재개봉까지 합치면 110만)이었으니 세계적인 초대박작인 쥬라기 공원과 흥행 1,2위를 다투었던 거였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청와대 춘추관에서 서편제를 관람하기도 했다. 이전에도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특정 영화를 홍보한 사례가 있으면 추가바람. 대통령선거 출마 전에 정계에서 잠시 물러나 있었던 김대중 前 대통령도 단성사에서 관람했으며, 이 때 오정해를 알게 된 김대중오정해의 결혼식 때 주례를 맡기도 했다.

이 영화의 개봉으로 인해 당시 판소리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기도 했었으며 동시에 오랫동안 외면받아왔던 대한민국의 전통문화에 대해 다시 생각해 주기도 했던 영화이기도 하다.

한때 단성사 바깥에 걸려있던 서편제 영화 포스터 간판 중 '송화(오정해)' 가 입었던 갈색 한복 상의 부분이 장기간 햇볕의 자외선에 노출된 탓에 색깔이 바래져서 영화관측이 이 부분을 새로 덧칠했던 에피소드도 있었다.

사실 서편제는 흥행에 큰 기대를 안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만든 작품이었다고 한다. 장군의 아들 시리즈로 태흥영화사에 큰 수익을 안겨준 임권택 감독은 오랫동안 연출을 준비해왔던 작품인 태백산맥을 드디어 영화화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그땐 아직 노태우 군사정권 시절이라 좌우익의 대립을 주제로 다룬 태백산맥을 개봉하기에는 여전히 꺼림칙한 시대분위기가 남아있었다. 그때가 1992년 경이었는데, 어차피 그 해 연말 대선에서 누가 당선되든지간에 민간정권이 들어설 테니 조금만 기다렸다가 정권이 바뀌면 그때 태백산맥을 제작하자는 쪽으로 영화사 측과 합의를 보게 된다. 그렇게 해서 1년 정도 시간이 붕 뜨게 되는데, 평생 영화만 100편 가까이 만들어온 임감독이 그냥 놀고 있을 캐릭터는 아니었고(...)[1] 어차피 노느니 간단한 거 하나 만들어보자 하는 생각으로 흥행 신경 안 쓰고 만든 게 바로 서편제라고 한다.[2] 그런데 그 결과는 초대박... 하지만 어이없게도 그 이듬해 정작 잔뜩 신경써서 막대한 비용을 들여 제작한 태백산맥의 흥행 성적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영화 장면마다 '진도 아리랑', '춘향가', '심청가' 등 판소리 노래들이 등장했으며 판소리에 대한 구절 대목도 등장한다. 참고로 맨 마지막 대목 송화가 심청가를 부르는 대목은 나이 든 명창의 소리가 필요했기에 대사도 성우의 목소리였고, 소리 또한 안숙선 명창의 소리로 대신했다 한다. 이것만 그렇고 나머지 판소리는 오정해의 실제 목소리다.

중국 상해국제영화제에서 작품상 및 감독상을 수상했는데 심사위원으로 온 올리버 스톤이 오정해에게 추파를 던졌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리고 이 영화제에 출품작 일로 참석해 이 영화를 본 북한 영화인들이 저질이라고(...)홀로 깠는데 정작 북한 출품작 영화들은 듣보잡 악평으로 사라졌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유튜브에 이 영화를 공개했다. 보러가기

  • 참고할만한 자료
정은임&정성일라디오 소개 및 해설

2 등장인물

이 작품의 주인공이자 정처없이 이곳저곳을 방랑하는 소릿꾼. 한때 아내와 아들을 두었던 가장(家長)이자 농사꾼으로도 있었지만 아내가 산후병으로 사망한 후 부모를 일찍 여의게 된 송화를 수양딸로 삼아 동호와 함께 판소리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판소리에 대해서라면 황금보다도 더 귀중히 여길 정도로 아끼고 있으며 이후 판소리 방랑에 불만을 품은 동호가 도중에 이탈하게 되면서 송화마저 이탈할 것을 우려하여 눈을 멀게 하는 약(藥)[3]을 달여서 송화에게 먹여서 사실상 장님으로 만들기도 했다. 딸의 득음을 위해서 이기도 했다.

후에 한 폐가에 들렸을 당시 기운이 없어보이는 송화를 위해 남의 집에서 기르던 씨암탉을 서리하여 닭백숙으로 삶아먹이게 하고 결국 땅에 묻은 닭털을 오리털이라며 닭주인을 속였다가[4] 결국 닭주인에게 심한 매질을 당하게 되어 건강악화로 세상을 떠난다.

세상을 떠나기 전 송화 앞에서 눈을 멀게 한 장본인은 바로 자신이라고 고백했다. 배우는 김명곤[5].

  • 송화
이 작품의 여주인공이자 유봉의 수양딸. 어린시절 부모를 여의게 된 후 유봉이 수양딸로 삼게 되었으며 이후로부터 유봉으로부터 판소리를 교육받게 되었고 성장하게 된 후에도 판소리에 대한 애정을 가지며 생활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복 남동생인 동호가 방랑에 불만을 품으며 가출하게 된 후로 소리하는 것을 중단하고 식음전폐까지 하였다가 결국에는 유봉이 눈을 멀게 하는 약을 몸보신 약이라 속이며 먹으라고 하자 앞이 안 보이게 되어 완전한 장님이 되고 만다.

유봉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한(恨)을 넘어서는 소리를 하라는 유봉의 유언에 따라 판소리를 계속하였으며 이후 이복 남동생인 동호와 판소리를 통해서 무언(無言)의 재회를 하게 되었지만 곧바로 다시 떨어지게 되었다.

영화 맨 마지막에 보면 송화의 길잡이 노릇을 하는 어린 여자아이가 잠깐 등장하기도 하였는데, 송화의 딸로 추측하는 시각도 있으나 확정된 설정은 아니다.[6] 배우는 오정해.

  • 동호
이 작품의 남주인공이자 유봉의 아들. 현재 파트에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화자 역할을 한다.

어린시절 아버지 밑에서 이복(異腹) 누나인 송화와 함께 판소리를 배우기도 하였지만 서투른 근성으로 인해 판소리를 하는 대신 등에 판소리 북을 직접 치고 북을 짊어져야 하는 보조역할만 맡았다.

지겨운 방랑과 가난 등에 불만을 품으며 아버지 유봉과 실랑이를 벌이게 된 끝에 결국 가출을 하게 된다. 이후 서울에서 큰 한약방의 직원으로 일하고, 결혼도 하여 아이도 얻지만, 누나를 그리워한 나머지 약재를 모은다는 핑계로 전라도로 내려와 송화를 찾아나선다. 맨 처음 도달했던 곳은 자신이 가출했을 때 맨 마지막으로 있었던 집이었는데, 그곳은 이미 소릿재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고 어떤 아낙이 주막을 하고 있었다. 이후 송화가 남긴 흔적을 따라 전라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지만, 송화가 오랫동안 떠돌이 생활을 한 터라 계속해서 헛걸음만 하게 된다. 그나마 마지막 단서가 있던 술집도 망하여 흔적이 없어졌고, 반 포기 상태로 발길을 돌리려는 때에 낙산거사를 만난다. 낙산거사는 몇 해 전에 송화를 보성읍의 주막에서 보았다는 최신 정보를 알려주고, 동호는 다시 송화를 추적한다. 마지막에는 영광군의 한 주막에서 송화와 재회하고, 소리로 모든 한을 풀어낸 뒤 다시 헤어지게 된다.배우는 김규철.

  • 낙산거사
유봉의 친구이자 길거리 화공. 그림으로 생계를 잇는 사람이며 유봉과는 절친한 친구 사이이기도 하다. 특이하게도 한자와 그림을 혼용한 그림(혁필)을 그리는 편이라 보는 사람들을 주목하게 만들었고 한국인 한자이름 세 자(字)까지도 그림으로 표현하는 재주를 지녔다[7]. 배우는 안병경.
  • 세월네
영화 초기에 등장하는 여인으로 동호가 처음 등장했을 때 '소릿재' 라 불리우는 고개에서 '소릿재 주막' 을 지키는 아낙이다. 한때 송화로부터 판소리를 익혔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동호가 치는 북장단에 맞춰서 판소리를 하였다. 그리고 동호 앞에서 송화가 눈이 멀게 된 사연을 알려주기도 하였다. 배우는 강선숙.
  • 금산댁
유봉의 아내이자 동호의 친어머니 그리고 송화의 수양 어머니로 마을 대가집에서 떠돌이 소릿꾼으로 있던 유봉을 처음보고 나서 그와 인연을 맺게 되었지만 전쟁 때 임신을 하게 되었으나 산통으로 아이를 유산한 채 세상을 떠났다. 배우는 신새길.
  • 송도상
유봉의 친구로 유봉과 술자리를 같이하였던 적이 있다. 유봉이 나머지 친구들과 다툼을 벌이게 되어서 토라지게 되자 유일하게 남아서 유봉의 술 대접을 하였으며 나중에 노년이 되어서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배우는 최동준.
  • 천가
영화 말미에 등장하는 술집 남자로 한때 송화를 보살펴주었으며 동호가 자신의 술집에 찾아오게 되자 처음부터 그가 송화의 남동생이라는 것을 눈치챈듯 하였다. 배우는 최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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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임권택 감독의 필모그라피를 보면 알겠지만, 1960년대에는 한 해에 서너편씩 연출하는 건 예삿일이었다.(...)
  2. 사실 서편제의 구상은 10여 년 전부터 하고 있었다고는 한다. 그렇지만 외모와 판소리가 동시에 가능한 여배우를 찾기가 어려워서 그냥 보류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TV에서 오정해를 발견하고는 드디어 서편제에 어울리는 배우를 찾을 수 있었다고.
  3. 유봉은 당시 그 약을 '몸을 보호하는 약(藥)' 이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4. 유봉에 의해 땅에 씨암탉의 털을 묻어서 지푸라기로 가렸고 닭주인이 나타나 지푸라기를 치우고 털을 확인해보니 오리털이 아닌 유봉이 서리했던 씨암탉의 갈색털로 확인되었다.
  5. 연기 외에도 이 작품에서 각색 담당도 하였다.
  6. 영화 평론가 정성일과의 인터뷰집인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 2권 308페이지에서 인용하면, 임권택 감독이 의도한 바는 이렇다. "그거를 송화가 낳은 씨냐, 아니면 동네 누구가 안내하냐 하는 것인데, 근데 나는 그런 관심에 대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을 하는 게, 그것은 송화의 애여도 상관없고, 동네 애여도 상관없다고. 왜 그러냐면 이 장님을 그 눈길에, 먼 데 어디까지 보내는데 혼자 보낼 리 없다고, 주막집 주인 저도 살 붙이고 산 년인데, 그러면 누구라도 붙였을 것이고, 혹시 씨라면 씨인 대로 같이 가고. 요컨대 그것이 겨울이지만, 판소리가 완전히 시들어버린 세상을 가고 있지만 언젠가 저런 어린 생명력처럼 불씨로 남아서 살아낼 것이다라는 쪽으로 봐주기를 원하는 거요. 판소리의 생명력 같은 것을, 물려주어도 그거는 그 삶 속에서 발전할는지는 몰라도 그런 어린 생명을 딸려 보냄으로써 판소리가 살아날 수 있는 생명의 씨앗처럼 보이게끔 찍어낸 거요. 애의 빨간색 코트가 인상적이지 않았어요?"
  7. 나중에는 송화의 '松花' 도 마찬가지로 그려주었다. 하지만 이 당시 송화는 이미 앞을 못 보는 장님이었기 때문에 그림을 직접 볼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