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자점

金自點
1588년 ~ 1652년 1월 27일, 음력 1651년 12월 17일

조선의 역대 영의정
김류김자점이경석

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희대의 간신이자 17세기판 이완용. 무능의 끝판왕. 비슷한 년도에 활약(!)했던 명나라를 망하게 한 간신 위충현과 동급이라고 볼수 있다. 본관은 구 안동 김씨. 잘 나가던 안동 김씨가 김자점 본인 때문에 순식간에 추락했다는 말도 있다. 실제로 이때를 기점으로 구 안동 김씨는 처참하게 몰락했다. 그야말로 구 안동김씨의 흑역사.

사실 신 안동 김씨[1]는 구 안동김씨[2]랑은 아주 다른 씨족이다. 참고로 이때 크게 몰락한 구 안동김씨와 달리[3] 신 안동김씨는 척화파의 거두 김상헌 이래로 조선 후기 최대의 명문가 중 하나였다. 김상헌의 후손에서 부자 영의정·형제 영의정·부자 대제학 등 12명의 정승과 3명의 왕비가 배출되었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로 유명한 가문이 바로 이 신 안동 김씨고, 김자점의 집안인 구 안동 김씨는 이 집안과 관련이 없다.

2 인조반정의 공신

성혼의 밑에서 학문을 배웠고, 그의 조상을 찾아가면 성삼문단종복위운동을 고변한 김질이 나온다(…).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거늘... 이런 집안에서 용케도 이런 분들이 나왔다 (똥물)개천에서 용났다고 하자 그런데 김양 전 보훈처장 같은 자손을 보면 좀 덕분인지는 몰라도 음서로 벼슬길에 나가 광해군 때에는 병조좌랑에 이르렀다.

그러나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서인하면서 정국이 혼란해지자 벼슬을 때려치고 이귀, 최명길 등과 함께 인조반정에 가담했다. 인조반정이 성공하고 1등공신이 되었는데 사실 그다지 크게 한일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1등공신이 된 이유는 광해군 때 실세였던 김상궁(김개시)에게 뇌물을 많이 주어 광해군의 총기를 흐린 덕이었다고. 루트는 사돈인 이귀의 딸이 김상궁의 총애를 받는 무수리였다는 것에서 기인했다. 만약 김자점이 김상궁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면, 광해군의 늦장대처도 없었을것이고 이미 발각된 상태이던 인조반정은 실패로 끝났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어쩌면 "능양군의 난"이나 "이귀의 난"이 되었을지도(...)[4] 그래도 끼리끼리 모인다고 능양군과 김자점의 의기투합이 잘되었다고 한다.

3 무능한 관료

어쨌든 이후 인조 치세에서 출세가도를 달렸다. 원래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이었던 탓에 순검사나 한성판윤 같은 직책을 맡으면서 강직하고 능력있다는 조정의 평가를 받았지만, 인조는 김자점을 맘에 들어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인조가 윤의립의 딸을 세자빈으로 간택하려고 하자 김자점은 윤의립의 조카 윤인발이 역적인데 어찌 윤의립의 딸을 들이겠느냐며 반대했다.[5] 결국 인조는 윤의립의 딸을 세자빈으로 간택하는 것을 포기했지만 김자점을 귀양보내버렸다(…).

그러나 곧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군사 적임자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김자점을 다시 등용했고, 정묘호란 때는 왕을 호종한 공으로 도원수의 자리에 올라 서북방의 방어 책임자가 되었다.

운빨 하나는 죽였지만 능력은 하류인지라 어전 회의에서 전쟁이 나면 경기도 지방 백성들의 희생이 클 것이라는 얘기에 불쑥 "그럼 강화도로 옮기면 되지 않나염?"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상찌질이 인조한테 "그럼 그 좁아터진 강화도에 몰아넣어 굶겨 죽일 일 있니?"라고 타박당했으며 그러자 "목장을 전부 농토로 바꾸면 식량 확보에 용이할 것"이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결국 "전쟁 판에 말없음 기병들 뭘로 싸우남?"이란 말로 쳐발렸다.[6]

4 권력의 정점에 서다

병자호란 때 그의 막장은 절정에 달해 자신의 임무를 저버리고 청군의 급속한 남하를 강건너 불구경하듯이 쳐다만 보고 있었다.[7] 완전히 그의 탓은 아니지만, 하찮은 정보력으로 인하여 청군은 의주에 도착한 다음날 평양에 나타나고 이틀 뒤 황해도 한복판에 나타나는 괴물 군대가 되었다. 더욱이 도성 근처에 모인 수만명의 근왕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한 청군의 배후를 치자고 주장했으나 병력이 적다며 거부, 방관하여 인조에게 삼전도의 굴욕을 안긴 장본인중 한명이 돼버렸다(...).[8]김자점이 아예 안싸운 것은 아니고 황해도군을 이끌고 전투를 벌이긴 했다. 다만 전투 시작과 함께 개발렸으며 김자점 휘하에 있던 어영군 군사들이 분전한 덕분에 간신히 부대를 보전했다. 이후엔 그냥 처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때문에 군율로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 위리안치의 중벌을 받았지만 그나마도 1년만에 풀려 조정에 복귀했다.(...) 여러모로 경망스러웠던 인물이였다.

병자호란 이후, 조정은 친청과 반청으로 나뉘어 격렬한 정쟁 속에 빠져있었다. 이게 다 귀찮았던 인조는 그간 껄끄러웠던 김자점을 중용해서 시끄러운 것을 잠재워보고자 했다. 강화유수와 호위대장을 역임하면서 인조의 신임을 얻기 시작했고 조정에서는 김자점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지만 인조는 이를 묵살하고 김자점을 계속 중용했다.

이후 김자점의 반대편에 있던 당시 실세인 최명길의 라인에 있던 심기원의 모반사건[9]이 일어나면서 최명길이 물러나고 김자점이 권력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김자점은 거침없는 행보를 보이는데 청에서 돌아온 소현세자가 죽은후, 민회빈 강씨가 인조독살 누명을 쓰고 역모혐의를 받게 되자 앞장서서 민회빈 강씨의 사사를 주장해 결국 관철시켰다. 또한 자신의 손자인 세룡을 인조와 소용 조씨의 딸인 효명옹주와 혼인시켜 인조와 더욱 밀착하여 권세를 누리게 된다. 인조가 죽기 전에 "김자점과 이시백은 나와 같이 대하라"라고 유언을 남겼을 정도.

5 비참한 몰락

친청파의 중심으로서 청나라에 빌붙어 권력을 누렸지만, 반청적인 성향을 보이던 봉림대군(효종)이 인조를 뒤이어 왕위에 오르자 김자점은 권력을 잃고 나락으로 굴러떨어지기 시작했다.[10] 인조가 죽은지 6일만에 대간들의 격렬한 탄핵과 더불어 효종이 자점은 아바마마가 승하하실때 눈물을 흘리지 않고 멀뚱히 있었다. 충성심이 부족할 따름이다라는 논리로 광양으로 귀양을 가게되자 이에 이판사판이라고 생각한 김자점은 효종이 김상헌등과 함께 북벌을 모의하고 있고, 인조의 능지문에 청나라 연호가 아닌 명나라 연호를 썼다는 사실을 청나라에 몰래 알렸다. 이에 청나라는 조선 국경쪽으로 군대를 배치하고 조선에 이 사실을 추궁했다. 영의정 이경석이 목숨을 걸고 이 문제를 해결하여 조선은 청의 침공을 면할 수 있었다.

김자점의 목표는 아마도 청이 침공하여 혼란한 틈을 타서 효종과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한 뒤에 적당한 왕족을 내세워 다시 권력을 잡는 것이었던걸로 보이지만 1651년, 진사 신호(申壕)와 해원부령 이영(李暎)이 효종에게 김자점과 그 아들이 모반을 꾀했다는 사실을 고변하여 끝장나고 말았다.(...) 이때 김자점은 이후 자신의 아들 김련(金鍊), 김식(金鉽), 손자 김세룡(金世龍), 김세창(金世昌) 등과 역모를 꾀하였고. 이들은 귀인 조씨의 장자인 숭선군을 임금으로 추대하려다 계획이 틀어지자 의빈인 김세룡을 옹립하려 하였다고 한다.

효종이 김자점의 아들 김식을 친국하여 공모자들을 밝혀내 여러 무장들이 희생되었고, 소용 조씨가 장렬왕후와 장렬왕후의 조카이자 자신의 며느리기도 한 숭선군부인 신씨를 저주한 사건이 들통나 김자점은 결국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11] 다만 김자점의 아들과는 별도로 김자점의 역모는 조작이라는 지적도 일부 있다. 하지만 정황이 그럴듯한데다 아들이 역모를 꾀했기 때문에 연좌제로 걸렸을 수도 있다.

야사에 의하면, 김자점의 시신은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갈기갈기 찢어서 항아리에 나눠 담아(...) 조선팔도에 항아리 하나씩을 보냈다고 한다.김자점은 온 조선에 있습니다[12] 그래서 '자점이 점점이(한조각 한조각;;)'(...)이란 말이 나오기도 했다고.

참고로 이 김자점의 후손이 김구다.[13] 그나마 중국과 달리 당사자 및 16세 이상 남성만 사형에 처하는 조선의 연좌제에 따라 직계는 노비, 나머지는 그냥 서민으로 강등하는 선에서 끝났다. 물론 역적의 일가가 한성에서 사는 것은 불가능했으므로 김자점의 남은 일가는 해주로 이주했는데 김구가 태어날 때쯤엔 완전 몰락해 있었다.

결론은 개인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운빨은 뛰어났으나 그 운빨이 국가와 자기 후손의 미래를 망치는데 일조한 인물이었다.

6 야사에서의 김자점

다만, 자질구래한 일화들을 모아놓은 청성잡기의 일화에는 여관을 정비하고, 온돌의 보급을 촉진시킨게 김자점이라고 쓰여있다. 완전히 신뢰하기는 어렵고, 이로 인한 물가 상승과 땔감의 소모로 김자점을 비판하는 논조로 쓰여있긴 하지만 정사의 묘사처럼 완벽하게 무능한 인물은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다.[14][15][16] 사실 온돌의 보급으로 인한 산림 황폐화는 이미 조선 후기부터 심각한 문제로 지적[17]되고 있었으니 어떻게 봐도 꼭 좋은 정책이라고만은 볼 수 없는게 사실이기도 하고.

물론 야사 역시 김자점에게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심기원을 잔인하게 죽이기 위해 김자점이 처음 능지처참을 시행하게 하자 심기원이 김자점에게 너도 그렇게 죽을 것이다라고 했으며, 결국 김자점이 그렇게 되었다는 야사가 있다. 이 역시 청성잡기에 등장하는 이야기.[18]

7 소고기 매니아

김자점은 고기를 매우 좋아하였고, 특히 소고기가 없으면 을 먹지 않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소고기를 매우 사랑하였다. 문제는 지금과 달리 소는 농번기에는 귀중한 농기계 역할과 물자운송 등 아주 귀중한 자원이었기에 고대부터 농경국가 대부분이 소를 함부로 잡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였고 이는 조선도 마찬가지로 소를 함부로 도살하거나 소고기를 섭취하면 처벌할 정도로 소 도축을 금하였으나 그런데 정작 먹을 사람은 다 먹었고 우시장에 소고기유통업자까지 있었다. 지금 개고기를 국가가 은근히 금하나 잘만 먹는 것과 비슷? 소고기를 너무 좋아하는 김자점은 이를 어기고 소 도축을 자주 해서 유생들의 상소가 끊이지 않았고, 결국 사헌부가 김자점집을 압수 수색했더니 소고기가 무려 큰 상자 6개가 꽉 찰 정도로 나왔다고 한다. 냉장고도 없던 시대에 생고기가 그만큼!

8 각종 창작물에서

권력을 위해서는 자기 나라까지도 전쟁의 불길에 휩싸이게 하려 할 정도로 막장이었던 인간인 탓에 사극에서는 그의 모습을 보기가 무척 힘들다.(...) 간혹 나오더라도 당연하게도 악역이다.

추노이경식은 김자점을 모델로 한 것으로 보이며(다만 스탠스는 반청) 일지매에서도 등장하는데 주인공 일지매의 원수. 최강칠우에서는 '김자선'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이 역시 김자점이 모델이다. 아니, 하는 행적을 보면 사실상 이름만 바꾼 본인 맞다.(...) 어쩐 일인지 인조 시대는 정통사극보다는 퓨전사극으로 많이 나타나는데 여기서 본인이 직접 나오거나 본인을 모델로 한 캐릭터가 꼭 흑막이나 악역 기믹으로 등장하곤 한다.

하긴 따지고보면 박씨전 같은 고전소설 때부터 즐겁게 까여왔다. 아예 임경업을 모함해 죽인 직후 이시백의 상소로 인조에게 사사되는 것으로 나오는 등, 수명도 단축되었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이시백의 동생 이시방은 김자점의 측근이었고, 이시백의 경우 김자점의 아우 김자겸이 매제였다[19]. 이시백은 사건이 마무리 될때까지 몇달간 은거했으나, 다시 정승으로 발탁되었다. 이것은 당파성에 구애되지 않은 그의 중립적 처신 때문이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어리숙한 얼굴을 한 뚱보 캐릭터로 묘사하였다.

윤승운 화백의 맹꽁이 서당에선 임경업 장군을 죽게 할때 딱 1컷 나오는데 찢어진 눈을 한, 척 보기에도 간사한 자체로 그렸다.

80년대 KBS의 전 사극 대명에서는 고 김순철씨가 역할을 맡았다. 박시백의 캐릭터가 사실 고 김순철의 캐릭터, 물론 천하의 개쌍놈임에는 변함이 없다.(...)

2013년작인 JTBC궁중잔혹사에서는 정성모씨가 역할을 맡았다. 배우가 배우다 보니 버프가 장난 아닌데 찌질함과 악독함이 바탕이 된 가운데 간지까지 갖춘 캐릭터가 되어 포스가 굉장하다. 역대 최강의 포스를 가진 김자점으로 일국의 도원수가 되어 나라가 전란에 빠졌는데도 기생이나 끼고 자면서 왕을 구원하지 않고 있다가 전쟁이 끝나고 왕에게 친히 두들겨 맞은 다음 무인도로 귀양을 가 거지꼴로 하루하루 고생하는 처지가 되자 죽을 결심을 하나 곧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낭떠러지에서 억눌려 왔던 분노를 표출함과 동시에 인조에 대한 복수를 다지며 '내가 죽긴 왜 죽느냐? 내가 임금이 되면 되는 것이 아니냐? 이씨는 왕씨(고려)에게서 나라를 훔쳤고, 세조는 어린 조카(단종)에게서, 중종은 연산군에게서, 지금의 너(인조)는 광해군에게 보위를 훔친 게 아니냐?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더냐! 내가 만든 임금의 손에 죽느니 내가 살아서 임금이 된 후에 네 놈의 숨통을 조일 것이다. 내가 임금이다. 내가 임금이란 말이다!' 라고 부르짖으며 역성혁명을 꿈꾸며 봉산탈춤을 추는 장면은 전율까지 일 정도. 좀 미화되는 느낌도 있지만[20] 그래도 간지 악역으로 나온다는 것이지 절대 착한놈은 아니며, 천하의 개쌍놈 취급 받는 건 마찬가지다.
다시 궁으로 돌아온 뒤, 얌전(소용 조씨)을 자신의 양녀로 삼아 인조의 후궁으로 들이는 등 궁에서 주도권을 잡으려 한다. 계획 자체는 성공해서 상당한 권력을 얻었지만, 문제는 김자점의 생각과 달리 얌전은 꼭두각시에서 만족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나중에는 개털렸고 최후는 역모를 꾀하려다 실패하여 사지가 절단된 이후에 능지처참...

2015년 MBC화정에서는 배우 조민기가 배역을 맡았다. 먼저 다른드라마 처럼 악독한 면모는 변하지 않았고 화정에서는 유달리 냉철하면서도 머리가 좋고 개인의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며 누구와도 손잡을 수 있는 캐릭터이다. 본래는 정의롭고 정의로운사람을 좋아한다지만 정의는 늘 지기때문에 지는걸 싫어하고 이기는걸 좋아하기때문에 나쁜쪽 편에 섰고 나쁜일을 하였다.

  1. 왕건을 구했던 안동 일대 호족 삼태사 중 한 사람의 자손으로 안동 호족의 자손이다.
  2. 경순왕의 방계 자손으로 고려 중기 장군 김방경의 집안이다.
  3. 김구선생이 유배된 김자점 일족의 자손이다.
  4. 하지만 이 시기의 광해군은 역모에 대해 매우 무뎌진 상태였다.
  5. 윤인발은 이괄의 난에 연루되었기 때문에 이 점을 이용했다.
  6. 이 말은 약간 참작의 여지가 있는데, 임진왜란 이후인 당시는 전후 개발붐(?)이 일던 시기로써 대부분 목장으로 쓰이던 서해, 남해 연안의 섬들은 땅이 기름져 농토로 개간할 필요성이 충분히 있었다. 실제로 조선 말기에는 도서 지역에 유생들까지 몰려들어 오늘날보다도 많은 인구를 자랑했다. 하지만, 이후 행보를 보건대 이 작자가 그런 것을 예견하고 그런 발언을 했을 리는 없다(...).
  7. 이 때에는 조정의 분위기가 강화도로 가서 뻐기면 되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에 빠져있었다.
  8. 일부 근왕군이 남한산성에 닥돌하여 발린 것을 생각하면 현실적인 판단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있으나 그런 식이면 북방에 있을때 산성을 무시하고 평지로 진격하는 청군을 방어하며 시간을 끌라는 조정의 명을을 듣지 않다가 늦장출병한 것은 설명이 안된다. 더구나 근왕군들이 총수가 수만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로 뭉치지 않고 각기 따로 싸우다가 발린 것에서 김자점의 책임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 각 도의 군사들을 총지휘할 권한이 있는 도원수가 아무것도 안하고 앉아만 있으니 지휘권 통일이 될수가...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청군도 전쟁을 오래 끌 수 없고 병력을 별 피해 없이 온존시켜야만 하는 상황에서 수만의 대규모 병력이 집결해 위협만 해도 훨씬 좋은 조건에서 강화가 이루어질 수도 있었다.
  9. 왕족인 회은군 덕인을 추대하자는 모의를 했다는게 고변의 내용이지만 정말 그랬는지는 확실치 않다. 대체적 견해는 김자점이 심기원에게 누명을 씌웠다는것.
  10. 효종은 산당에게 지지를 받기 위해서 북벌론을 피력했을 뿐,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시각을 보이는 쪽에서는 산당의 세력이 이미 막강해 소현세자 대신 자신을 지지해준 김자점을 팽할 수 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왕권에 부담이 되기도 했고.
  11. 일부에서 사지를 먼저 잘랐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는데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에 나온 걸 보고 적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기록상으로는 규정대로 처형되었다고 적혀 있다.
  12. 하지만 정작 당시 실록에서는 팔도에 전시하는 건 너무 잔혹하다며 기각되었다고 쓰여져 있다.
  13. 정확히는 먼 일가의 후손이다.
  14. 점(여관)과 온돌의 폐해 : 옛날에 여행자는 원에서 묵었다. 원에는 각각 주관하는 자가 있었지만 그저 땔감과 물이나 갖추고 있을 뿐이어서 양식이나 그릇, 솥 등을 모두 짊어지고 가야했므로 여행자들에게는 괴로운 일이었다. 김자점이 처음으로 떠도는 거지(꼭지딴)들을 모아 점을 설치하니, 여행자들이 편하게 여겼다. 그러나 지금은 점의 이익이 너무 많아 물가가 하루가 다르게 뛰고 상인들의 이문이 모두 점으로 들어가니, 점이 백성의 큰 폐해가 되고 있다.
  15. 온돌이 유행하게 된 것도 김자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옛날에는 방이 모두 마루여서 큰 병풍과 두꺼운 깔개로 한기와 습기를 막고 방 한두 칸만 온돌을 설치해서 노인이나 병자를 거처하게 하였다. 인조 때 도성의 사산에 솔잎이 너무 쌓여 여러 차례 산불이 나자, 상이 이를 근심하였다. 김자점이 이에 오부의 집들에 명해 온돌을 설치하게 하자고 청하였으니, 이는 오로지 솔잎을 처치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따뜻한 걸 좋아하여 너 나 할 것 없이 이 명령을 따라 얼마 안 가서 온 나라가 이를 설치하게 되었다.
  16. 지금은 이 온돌의 폐해가 심하니, 젊은 사람들이 따뜻한 데 거처하면 근육도 뼈대도 약해지며, 습지나 산이 모두 민머리가 되어 버려 장작과 숯이 날이 갈수록 부족해지는데도 해결책이 없다. 그러나 내가 일본에 가 보니 일본에는 온돌이 없어 노약자들도 모두 마루에서 거처하였다. 나도 겨울을 나고 돌아왔지만 일행 중에 아무도 병이 난 자가 없었으니 억지로 습관 들이는 데 달려 있을 뿐이다. 이를 전국에 시행하면 처음에는 비록 약간 문제가 있겠지만 결국은 큰 이익을 가져올 것이니, 백성들이 틀림없이 기꺼이 따를 것이다. 다만 점의 경우에는 대체할 방법이 없다. 대체로 역신이 만든 법들이 현재 많이 시행되고 있으니, 점과 온돌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 청성잡기 4권 -
  17. 대표적인 사례로 황폐화되어 씻겨져 내려간 토사가 한강 하류에 퇴적되는 문제등이 거론되기도 했다.
  18. 심기원이 김자점과 권력을 다투어 서로 원수가 되었는데, 심기원이 역적으로 몰려 주벌될 때에 김자점이 수상으로 있었다. 이에 김자점은 심기원에게 산 채로 능지처참하는 법을 시행할 것을 다음과 같이 청하였다. "이 역적은 상률로 단죄해서는 안 되니, 먼저 팔과 다리를 자른 뒤에 죽여 반역자들을 징계하소서." 심기원이 형을 받을 때에 집행하는 자가 먼저 그 다리를 자르려 하자, 심기원이 형틀에 엎드려 있다가 놀라며 말했다. "이것이 무슨 형벌이냐?" 그러자 집행하는 자가 "김 상공이 명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심기원은 탄식하며 말했다. "나를 대신해 김자점에게 말해 주시오. 당신도 반드시 이런 형벌을 당할 것이라고." 그런데 김자점이 주벌될 때에 과연 산 채로 능지처참하는 형벌을 받았고, 그 후 이 법은 폐지되었다.
  19. 단, 김자겸은 효종이 김자점을 사사 할 때는 이미 사망(광해군 때 죽었으며, 전술한 '김상궁(김개시)에게 총애를 받았다는 무수리' 여순이 바로 이시백의 여동생이자 김자겸의 부인이다.)한 상태였다.
  20. 인조반정 때 망설이는 인조를 데려오면서 혈서로 忠자를 쓴다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