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현왕후

조선의 추존왕 원종의 왕비에 대해서는 인헌왕후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조선의 역대 왕비
숙종
인경왕후 
숙종
인현왕후
숙종
옥산부대빈
숙종
옥산부대빈 
숙종
인현왕후
(복위)
숙종
인원왕후
호칭인현왕후(仁顯王后)
시호효경숙성장순원화의열정목인현왕후
(孝敬淑聖莊純元化懿烈貞穆仁顯王后)
출생지반송동 사저
사망지창경궁 경춘전
본관여흥(驪興)
배우자숙종(肅宗)
아버지여양부원군 민유중
어머니해풍부부인 이씨
은성부부인 송씨
풍창부부인 조씨
생몰
기간
음력1667년 4월 23일 ~ 1701년 8월 14일
양력1667년 5월 15일 ~ 1701년 9월 16일
재위
기간
1681년 ~ 1689년
1689년 ~ 1694년(폐비)
1694년 ~ 1701년(복위)

1 개요

조선 19대 왕 숙종의 계비. 여흥 민씨 여양부원군 민유중과 은성부부인 은진 송씨[1]의 딸이다. 숙종의 첫 왕비였던 인경왕후 김씨가 천연두로 승하한 이후, 서인 측에서 세력을 잡기 위해 추대했다. 이로 인해 남인 측과 손을 잡은 희빈 장씨와 서로 견제관계에 있었다.

장희빈 관련 매체에서 중요 인물로 자주 등장했기 때문인지 한국 역사 속 왕비 중 가장 유명한 왕비 중 한 명이다.

2 생애

예의 바르고 정숙했으며 출생 시에는 향기가 났다든지 인현왕후전이나 사씨남정기에서 매우 현숙하고 부덕이 높은 여군자로 묘사하기도 하나, 사실 이건 서인측 기록에서의 이야기. 특히 사씨남정기같은 경우는 작자 김만중이 인현왕후의 가까운 친척으로 그녀의 폐비와 관련해서 귀양살이도 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걸 근거로 그녀가 정말 인품이 뛰어났다고 말하기는 어렵다.[2] 차라리 다른 기록을 근거로 이야기하는 게 더 신빙성 있다.[3]

2.1 질투?

인현왕후도 사람이었는지라 질투심이 있었다. 사실 숙종의 사랑을 받는 희빈 장씨를 견제하기 위해 영빈 김씨를 들이도록 하기도 했고, 희빈의 버릇을 고친다며 아랫사람을 시켜 희빈에게 매를 내린 적도 있었다. 사실 이건 장희빈의 잘못도 있었다. 궁에 복귀한지 얼마 되지 않아 숙종나 잡아봐라 놀이 희롱을 하다가 내전 앞으로 뛰어나 '저를 살려주십시오' 운운했다는 기록이 있다. 실록에는 내전의 기색을 살피기 위함이었다는데 사실이라면 굉장히 무례한 행동이었다는 것.
그렇다해도 인현왕후가 희빈과 감정싸움을 한다던지 질투가 없진않은듯.

또 숙종에게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가 꿈에서 계시를 내리길, '장씨가 원한을 품고 환생한 짐승의 화신이며 불순한 무리(남인)의 사주를 받고 입궁했으니 쫓아내야 한다고 발언했던 기록[4]이 숙종실록에 실려 있다.

어느 날 나에게 말하기를, "꿈에 선왕선후를 만났는데 두 분이 나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내전과 귀인은 선묘(宣廟) 때처럼 복록(福祿)이 두텁고 자손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숙원은 아들이 없을 뿐만 아니라 복도 없으니, 오랫동안 궁궐에 있게 되면 경신년에 실각한 사람들에게 당부(黨付)하게 되어 국가에 이롭지 못할 것이다.' 했습니다." 하였다. 부인의 투기는 옛날에도 있었지만 어찌 선왕과 선후의 말을 꾸며내어 모함할 계책을 세운 것이 이토록 극심한 지경에 이를 수가 있겠는가? - 《조선왕조실록》숙종 20권, 1689년 4월 21일
투기하는 것 외에도 간특한 계획을 꾸며, 스스로 선왕·선후의 하교를 지어내어서 공공연히 나에게 큰소리로 떠들기를, "숙원은 전생에 짐승의 몸이었는데, 주상께서 쏘아 죽이셨으므로, 묵은 원한을 갚고자 하여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경신년 역옥(逆獄) 후에 불령(不逞)한 무리와 서로 결탁하였던 것이며, 화(禍)는 장차 헤아리지 못할 것입니다. 또 팔자에 본디 아들이 없으니, 주상이 하셔도 노고(勞苦)하셔도 공이 없을 것이며, 내전에는 자손이 많을 것이니, 장차 선묘(宣廟) 때와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으니, 이는 비록 삼척 동자라도 반드시 듣고 믿지 아니할 것이다. - 《조선왕조실록》숙종 21권, 1689년 5월 1일

이쯤되면 투기를 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을지도. 또 궁궐로 환궁한 이후에도 공공연히 "희빈의 저주로 몸이 좋지 않은 것 같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했다. 어쨌든 숙종이 신하들이 있는 자리에서 대뜸 인현왕후를 두고 이런 이야기를 하자 신하들이 당황해서 인현왕후를 옹호한다. 부인이 질투하는 일은 여염집에서도 흔히 있는 일인데 인현왕후도 여염집에서 자랐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지난 10년을 국모로 있었으니 그런 부분은 적당히 넘어가라는 옹호였다. 흔히들 서인만 옹호하고, 남인은 숙종을 부추겼을 거라고 오해하지만 이때 서인이든 남인이든 한 마음이었다. 남인 신하들도 오히려 잘못한 점은 덮어주고 부부지간에 화목하게 지내라고 말했다.[5] 숙종이 오히려 신하들의 그런 충고를 듣지 않았다.

폐출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숙종 15년의 탄일문안 사건[6] 당시 숙종에게 했다는 "진실로 나의 죄이다. 어찌 할 것인가? 폐출시키려거든 폐출시키라" 말을 보면 사실 욱하는 성질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탄일문안 사건에 영의정 권대운, 좌의정 목내선, 우의정 김덕원, 그리고 병조판서 민암과 이조판서 심재, 예조판서 민종도 등등의 신하들이 모여서 인현왕후의 탄일문안은 당연한 예법인데 화내는 이유가 뭐냐고 상소를 올렸다. 참고로 권대운, 목내선, 김덕원, 민암, 심재, 민종도 등등은 죄다 남인이다.

물론 마음에 안 들면 죽여버리는 일도 빈번한 왕실[7]에서 이 정도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정도의 질투라 볼 수 있다.[8] 내명부를 관장하는 왕비의 입장으로서도 희빈 장씨에게만 지나친 애정이 쏠리는 것이 그리 탐탁치 않았을 것이다. 왕조 역사에 이미 수많은 선례가 있었기 때문. 더군다나 숙종의 성격이 워낙 더러웠.....불같았던 지라... 자신이 대비가 되고 희빈 장씨의 아들이 다음 왕위에 올랐을 때의 마찰 역시도 고려할 수 밖에 없다. 희빈 장씨 역시 왕비의 자리에 올랐던 적이 있기 때문에 누구를 대비로 대접하고 누구를 친모로 여기느냐 하는 것으로 제2의 예송논쟁이 불거질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게다가 중전이 희빈보다 엄연히 더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은 맞으니 아랫사람인 희빈의 방자한 행동을 훈계할 의무 겸 권리 또한 있는 법이다. 위의 사례처럼 희빈이 내전 앞에서 행패를 부리는데 윗사람이 되어 그걸 질책하지 않는 것 또한 조선시대 예법상 옳지 못한 일이다.

2.2 폐비가 되다

아이를 낳지 못했으며, 이로 인해 희빈이 낳은 숙종의 첫 왕자 의 원자정호 문제가 불거졌다. 집권 서인측은 전례가 없는 급한 행동에 당황하여 아주 온건한 반대 의견을 개진했으나 숙종에 의해 무시되었고 조선 최강의 파이터 송시열이 일이 다 정해진 후에도 매우 강경하게 반대하는 소를 올려 숙종을 폭발하게 만들었다. 숙종은 이를 빌미로 1689년 기사환국을 일으켰다. 서인이 밀려나자 인현왕후 역시 폐비가 되어 안국동에 있는 사가로 내쳐진다. 노론, 소론은 물론 남인들조차도 반대했는데도 말이다!

인현왕후 민씨에게 물어진 죄는 죽은 시부모의 계시를 빙자하여 왕에게 거짓을 고한 죄, 왕의 육체를 조롱한 죄[9], 투기로 내전의 일을 조정으로 확대시켜 국정을 어지럽힌 죄, 내전에서 궁인의 당파를 나누어 붕당을 일으킨 죄였다. 꽤나 정치적인 이유로서 폐서인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어쨌거나 숙종은 폐서인 민씨의 남겨진 물건을 모두 불태워버리도록 명하였으며 그녀가 가례를 올릴 때 입었던 장복은 대내에서 공개적으로 태우도록 했다. 심지어 숙종은 인현왕후와 가례를 올리는 날에 지진이 있어서 어쩐지 불길했다고까지 했다.[10]

2.3 복귀하다

이후 숙종이 다시 남인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1694년에 갑술환국이 일어났고, 인현왕후는 일단 덕수궁에 들었다가 숙종과의 밀당 끝에(...)[11] 당일로 왕비로 복위되었다. 그러나 끝까지 아이는 낳지 못했으며 왕세자 윤이 인현왕후 아래로 입적된다. 따지고 보면 원수의 자식이건만 친아들 못지 않게 귀여워했으며 세자도 인현왕후를 매우 따랐다고 한다.[12] 이는 경종에 국한된 게 아니라 숙빈 최씨의 소생인 연잉군 역시 인현왕후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폐서인으로 6년간 지내면서 몸이 약해졌는지 복위 8년 후인 1701년 8월 14일 새벽 2시경 창경궁 경춘전에서 요절하였다.

2.4 저주인가 병인가

사극에서는 어느 날 쓰러져 약간 앓다가 깔끔하게(...) 유언 남기고 대낮에 승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게 보통이지만, 실제로는 1년 6개월 이상의 처절한 투병으로 갖은 합병증까지 앓아가며 고통받다가 어느날 새벽 한밤중에 호흡곤란으로 사망했다. 사인(死因)은 종기부종의 합병증으로 추정된다. 이걸 한의학에서는 '옹저'라고 부르는데 악성 종기로 생각하면 된다. 인현왕후는 이런 종기가 고관절 부위에 생긴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인현왕후는 양쪽 다리가 붓고 통증이 심해서 참기 어려웠으며, 밤이 되면 통증이 더 심해져서 손으로 만지기만 해도 고통을 호소했다고 한다. 뒤이어 경련 증세가 나타났는데, 처음에는 다리에 경련이 일다가 전신으로 확대되어 의료진까지 놀라게 하는 것이 1달가량 이어졌다.

내전이 다리 부위가 붓고 아픈 증상이 있었는데, 오른편이 더욱 심하여 환도 뼈 위 요척(腰脊) 근처에 현저한 부기가 있으므로 약방에서 침을 놓을 것을 계청하고, 제조가 의관을 거느리고 입직(入直)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숙종 34권, 1700년 3월 26일

환도혈의 종기를 따고도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져서 허리 밑이 곪아서 침으로 종기를 땄는데, 이때 이미 손으로 만져보면 근육과 피부가 분리되는 것이 만져지는 상태였다. 정상적으로 회복하는 환자라면 종기를 딴 후 고름이 다 빠지고 새 살이 돋아야 하는데, 인현왕후는 회복기로 접어들지 못했고, 1년 가량 각종 합병증에 시달리는 나날이 이어졌다. 오심[13], 구토, 복통, 설사, 발열이 끊임없이 교대로 나타났고 당연히 먹는 것도 힘들어서 밥을 줄이고 기껏 먹은 것도 게워냈다는 기록이 이어진다. 그러다 1701년 7월부터 기력이 쇠해지고, 가슴이 답답해지고 숨 쉬는 게 힘들어지며 밤중에 손발이 차디차게 식는 등의 말기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소변이 막히고 구강에 부스럼이 생기는 등 악화되어 갔다.

1701년 8월 13일에는 친정 오빠인 민진후 형제를 숙종이 궁궐로 불러들인다. 이날 밤에는 아예 의식을 잃고 부정맥과 유사한 증상을 보이더니, 결국 그 다음날 호흡곤란으로 인현왕후가 사망한다. 그런데 인현왕후는 자신의 병을 두고 민진후 형제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원래 궁중의 법도에 따르면 후궁에 속한 궁녀들이 내전에 드나들 수가 없는데, 장희빈의 궁녀들이 내전을 수시로 출입하고 창에 구멍을 내서 동태를 엿보는 등의 잘못을 많이 했다. 인현왕후 입장에서는 돌아가는 상황이 한심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고, 지금 이렇게 몸이 아프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반드시 빌미가 있다'고 하는데 자신도 의심스럽다고 말했다는 것. 즉 인현왕후가 지내는 처소에 장희빈의 궁녀들이 다녀갔고, 자신의 병이 혹시 장희빈이 술수를 부린게 아닌지 사람들이 말하는데 그런 말이 진짜같다는 소리다. 인현왕후가 한 말을 다르게 해석하면 그녀가 궁궐 안에서 입지가 얼마나 좁았는지를 증명할 수도 있다. 후궁을 모시는 궁녀가 왕비가 머무르는 처소 창문에 구멍까지 내면서 염탐하는게 다른 시절 같으면 허용될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한의학에서는 옹저를 "억울한 일을 당하여 마음이 상하거나 소갈병이 오래 되면 반드시 옹저나 정창이 생긴다", "분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자기의 뜻을 이루지 못하면 흔히 이런 옹저가 생긴다"(동의보감)고 설명한다. 현대의학에서도 종기는 스트레스 등으로 인한 면역력 저하와 관계가 있다고 보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화농을 2개 다 땄는데도 고름이 멈추지 않고 새살이 돋지 않았다는 점에서, 신체의 면역력과 회복력이 극도로 떨어져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듯. 현대의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고관절 부위에서 화농성 관절염이 생겼고, 이것이 뇌수막염으로 번져 경련 증상이 생겼으며, 점차 복부로 퍼져 복통, 구토, 설사 등을 동반하는 복막염이 되고, 끝내 심장으로 퍼져 심내막염이 되어 호흡곤란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한다.[14]

2.5 무덤

후일 숙종은 인현왕후 곁에 묻히길 희망했으며 실제로 승하한 다음 그녀의 곁에 묻혔다. 이후 3번째 비인 인원왕후 김씨도 같이 묻혔는데 이를 명릉이라고 하여 고양시에 있는 서오릉 가운데 하나이다. 숙종도 그로 인해 고생만 하다 죽은 왕비에 대해 최소한의 미안한 감정은 가지고 있었던 듯. 이 능은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이 쌍릉으로 나란히 놓여 있고, 인원왕후의 능은 다른 쪽 언덕에 단릉으로 모셔져 있는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형식이다.

3 그녀와 관련된 여러가지들

3.1 소설의 주인공

인현왕후를 주인공으로 한 궁중소설 '인현왕후전'[15]에는 희빈이 왕후의 초상화에 화살을 쏘아 저주했으며, 이로 인해서 인현왕후가 젊은 나이에 죽었다는 내용이 존재한다. 실록에서는 희빈이 처소 뒷편에 신당을 차려놓고 왕후를 저주한 사실이 발각되어 사약을 받았다고 한다.

3.2 온화한 성품?

과거에는 나름 정설로 받아들여졌으며 장희빈의 죽음의 원인이 되기도 한 이야기이지만, 실제로 저주한지는 둘째치더라도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저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 리가 없다. 폐비가 되었을 때 한 몸고생 맘고생의 후유증이라고 하는 편이 훨씬 설득력 있을 듯하다. 실제로 인현왕후는 사가 시절에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자책하면서 식사를 거르는 등 건강을 챙기지 않은 편이었다. 사실 폐서인이 되었다는 것 자체로도 사실상 죽은 것만도 못한 사람 취급이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폐비는 중죄인 취급이라 사사로이 재물을 축적하기는 커녕 밖을 나다니는 일조차 조심해야 했으며, 궐에서 간혹 의복과 음식을 보내주기도 하였으나 임금의 미움을 받은 폐서인에게 온정을 베푸는 일을 다들 꺼려했음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투기나 분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항상 온후했다고 하지만, 이는 바꿔 말하면 제대로 감정 표현을 하지 않아 스트레스가 쌓이기 쉽다는 것과 같다. 부종과 등창으로 고생했다고 실록에 쓰여있는데, 대체로 제대로 식사를 하지 않고 늘 누워있거나 하여 악화된 듯 하다. 왕비로 복위한 뒤에도 희빈 장씨와의 대립이라든가 환국이라든가 하는 문제들이 산적하여 있었으니 몸도 마음도 편했을 리는 없다.

3.3 상징적인 존재

서인, 특히 노론 측에서 장희빈을 천하의 악녀로, 인현왕후를 궁극의 성녀로 만드는 작업을 하기도 했지만 그와 별개로 현숙한 국모로 당대에도 백성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장씨 남매와 남인들이 권세가 하늘을 찌를 때 그에 대항하는 상징이 되기도 했기에 야사에 의하면 그녀가 궐에서 내쳐질 때 백성들이 모두 슬퍼하며 울었다고 하며, 그 유명한 '미나리는 사철, 장다리는 한철'이라는 민요가 그녀가 폐출되었던 시기에 불려지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미나리는 민씨, 장다리는 장희빈. 그래서 그녀가 폐서인 되어 머물던 사가를 지나갈 때 눈물을 흘리지 않은 백성이 없었다고 한다. 사실 여기엔 숙종이 희빈의 총애에 과한 면이 있었다는 점도 있다. 사례로 희빈을 위한 전각을 지을 때 나라사정이 좋지 못하여 신하들이 반대했는데도 호화스럽게 지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백성들 사이에서 '여자 때문에 왕이 우리를 돌보지 않는다'는 얘기가 나올만도 했다.

이 때문에 역대 장희빈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에선 항상 궁극의 천사표 캐릭터로 나왔지만, 현대엔 대중들에게 식상해져서 보다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캐릭터로 묘사되고 있다. 심지어 장희빈이 주인공인 어떤 연극에서는 궁극의 흑막, 지독한 위선자로 나오기까지 한다.

3.4 놀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보드게임을 고안한 왕비다. 인현왕후가 고안한 보드게임은 규문수지여행지도(閨問須知女行之圖). 줄여서 '여행도 놀이'라고도 부른다. 이 게임은 인현왕후가 폐출되어 사가에 있을 때 만든 놀이라고 하는데, 승경도를 여성 버전으로 컨버전한 게임이라고 보면 된다. 승경도가 조선시대판 인생게임으로 조선조의 관직들을 대상으로 한 게임이라면, 이 게임의 말판에는 당시 여성들의 덕목이나 조선과 중국 역사에 남은 열녀, 효녀, 악녀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승경도가 사약이 되면 게임 오버인 것에 반해, 이 게임에서는 말이 정난정에 이르면 '금수(짐승)' 칸으로 빠지게 되고 게임 오버.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16]에 이르면 승리한다.

3.5 친정

그의 오빠 민진원은 훗날 노론 중에서도 최고 강경파가 되어 삼수의 옥으로 사대신이 모두 처형되어 무주공산이 된 노론의 수장자리를 차지한다. 민진원은 한때 여동생이 폐위되고 집안이 몰락한것에 소론에게 한이 맺혔는지, 영조 초반까지 매우 정력적으로 활동하며 소론과 개싸움을(...) 벌인다. 영조는 민진원을 불러 소론 수장 이광좌와 손까지 잡게 하게 화해를 중재했으나 민진원은 왕의 간곡한 부탁을 그냥 씹었다.(...) 결국 영조도 설득에 실패했고 영조 10년에 역시나 노론 강경파이자 공동 수장이었던 정호와 같이 세상을 떠났다.

4 드라마에서의 인현왕후

사극에서 장희빈이 팜므파탈의 이미지의 여배우를 캐스팅한다면, 인현왕후는 대체적으로 단아하고 청순한 이미지의 여배우들이 맡았다.

고전적 매력의 인현왕후를 훌륭히 소화하며 대중의 큰 박수갈채를 받았다. 조미령이 연기한 인현왕후는 훗날 만들어지는 수많은 인현왕후 캐릭터의 교과서적 표본이 되어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기품 있고 인내심 강한 외유내강 캐릭터로 표현하며 조미령의 인현왕후와 차별화를 꾀했다.
당시 장희빈 역의 윤여정은 광고 모델에서 하차하는 등 길거리를 돌아다니지 못할 정도로 욕을 먹은 반면, 인현왕후 역의 김민정은 지방 각지에서 올라오는 격려품들 덕분에 행복한 비명을 질러야 했다고 한다. 인현왕후의 죽음이 방송된 날에는 이에 항의하는 시청자들의 전화가 빗발쳐 방송사 업무가 마비되기도 했다고.
팜므파탈인 이미숙의 장희빈에 맞서는 고고한 이미지의 인현왕후를 소화해냈다.
버라이어티에서 왈가닥스러운 이미지 때문에 오해를 많이 사지만 그녀의 본직은 엄연히 배우다. 하지만 본인에게 인현왕후를 연기했을 시절을 얘기하면 매우 부끄러워한다. 아무래도 과거와 현재 이미지의 갭 때문인 듯. 당시 김원희는 까무잡잡한 피부에 귀여운 말투를 쓰는 서울의 달 호순이 캐릭터로 인기를 누리고 있었던 탓에 드라마 초반에는 미스 캐스팅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날이 갈수록 안정적인 연기력을 선보이며 기대 이상의 인기를 누렸다.
후에 왕의 여자에서 김개시 역을 맡았던것에서 알 수 있듯이 단아하고 온후한 면보다는 내명부의 수장으로서 후궁들을 강단있고 카리스마 있게 제어하려는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 하지만 중반부의 노선 변경 등의 여파로 기존의 이미지로 돌아간 면도 없지않아 있다.
배우도 사극 연기가 뛰어난 홍수현이 캐스팅되었고, 이제까지의 장희빈 드라마의 인현왕후와는 차별화된 캐릭터를 가지고 있었다. 야심이 강하고 나름대로 옥정(희빈 장씨)의 삶을 동경하고 질투하기도 하는 인물로, 그녀 자신은 그렇게 살 수 없었으며 왕의 사랑도 받지 못했기에 현숙한 국모로서 이미지 메이킹을 한다는 설정. 그런 설정답게 대비와 대화 중 옥정의 어머니가 천출이고 구설이 많다 언급해 모욕을 주게 하거나, 대비가 옥정의 하례연을 망치는걸 방조하는 등 은근히 복흑인 면도 있다. 그녀와 숙종의 합방일에 옥정이 숙종을 유혹해 소박을 맞자 여치와 척부인의 고사를 인용해 인간돼지로 겁박하기도 한다. 그러나 장옥정이 슬슬 흑화하여 자작나무를 태우는 등 활동에 들어가자 본래의 스탠다드한 타입의 인현왕후, 즉 그냥 앉아서 당하는 모습이 주로 나왔다. 중전이 되기 전엔 숙종과 정치적인 거래를 할 정도로 지능적인 캐릭터였으나… 그러다가 또 원자를 뺏으며 야망을 품다가 다시 눈물을 쏟아내는 등 후반으로 갈수록 형편없는 대본 때문에 캐릭터가 널뛰기를 탔다. 폐출당한 이후에는 복위를 위해 김만기와 모의해서 사씨남정기를 저자에 뿌려 언플을 하고, 돈으로 백성을 매수해 중전 장씨에게 망신을 주며 숙종이 민심이 인현왕후의 복위를 원하는 것으로 알게 만들어 복위에 성공한다. 막판에는 장옥정이 다시 정신을 차려 착해지고 인현왕후도 세자 윤을 통해 장옥정에 대한 앙금을 풀게 되어 화해하게 되었다.[17] 결국 완성도가 떨어지는 대본과 작가의 안티질에 이도 저도 아니게 희생된 캐릭터. 홍수현은 이 역을 연기하기 위해 조선왕조실록을 읽고 연기에 임했지만 작가와 감독이 둘 다 답이 없어서(…) 그런 노력도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ㆍ
  1. 송준길의 딸이다. 은성부부인은 민유중의 2번째 정실부인이다. 민유중의 첫째부인은 해풍부부인 덕수 이씨이고, 그 다음이 은성부부인이며, 은성부부인이 죽자 다시 풍창부부인 풍양 조씨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인현왕후의 계모인 풍창부부인은 인현왕후보다 8살 연상으로 장희빈과 동갑이었는데, 각종 사극에서 중후한 어머니뻘로 배우를 캐스팅하는 것은 맞지 않다.
  2. 오히려 사씨에 가까운 사람은 바로 연산군의 정실부인이었던 폐비 신씨. 이쪽은 실록의 사관들마저 "중전이 너무 답답하다."라고 한숨을 내지을 정도다. 게다가 이쪽은 존댓말이 더 편했는지, 후궁들이나 나인들에게도 존댓말로 말했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3. 특히 사씨남정기를 보면 장희빈에 빗댄 등장인물 교채란을 아주 인격모독에 가깝게, 그리고 인현왕후=사정옥은 아주 현숙한데도 부당하게 박해받는 인물로 묘사했다. 작가의 출신과 정파를 감안하면 정치적인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4. 이것이 폐출될 때 시부모의 계시를 방자한 죄에 들어갔다
  5. 목창명, 이식, 조식, 이시만, 이만원, 강선 등이 이 자리에 있었다. 남인인 조식도 빨리 화해해서 잘 지내라고 할 정도.
  6. 숙종이 인현왕후의 탄일 문안을 생략하라고 지시했는데도 문안을 받은 사건.
  7. 다만 조선은 성리학적 질서로 억누르기 때문에 저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성종 대에 흔한 암투를 하다가 폐비당한 폐비 윤씨도 있고....
  8. 그러나 이건 현대의 관점이고, 조선시대의 관점에서는 어떤 이유가 있건 어떤 형태를 취하건 '투기'를 하는 것은 그 자체로 정숙한 반가의 여인으로서 실격 사유였다. 그래도 심하지 않으면 봐주긴 한다. 사실 조선시대에 여자가 투기하는것을 금기시여기지만 너무 하지않아도 남편을 사랑하지않는다고 여기기도 했다. 그럼 뭐 어쩌자는거야중종도 딸 효정옹주에게 "부녀로서 질투가 없다는 건 있을 수 없다"고 하기도 했고. 혜경궁 홍씨의 경우에는 사도세자가 후궁 수칙 박씨(훗날의 경빈 박씨)를 임신시키자, 사도세자는 영조에게 혼날까봐 나몰라라 하고, 영조는 당연히 무슨 일이 있는지도 모르니까 신경도 안 쓰고, 세자의 생모 선희궁(영빈 이씨)마저도 "세자가 하는 짓이 어이가 없구나"라고 팽개쳐놓자, 임신한 몸으로 혼자 고생하는 것이 너무 가엾어서 옆에서 간호하고 도와주었는데 나중에 그걸 안 시아버지 영조가 "넌 여자가 되어서 투기도 안하냐?"라고 혜경궁을 혹독하게 꾸중했다. "네가 남편의 편을 들어 불충을 저지르는구나."라고 엄교를 내려 혜경궁은 벌벌 떨어야 했다. 이게 영조가 혜경궁을 꾸짖은 거의 유일한 사례다.
  9. 희빈의 팔자에는 아들이 없으므로 왕이 가까이 해도 소용없다는 얘기.
  10. 1689년 5월 2일에 숙종이 내린 비망기에서 언급된다.
  11. 진짜다. 숙종실록에 그녀가 덕수궁에 입궁하기 전날부터 복위될 때까지 밀당이 상세하게 나와있다. 숙종이 내리는 옷도 분에 넘친다고 사양하다가(한 옷이 참람하다고까지 한 것을 보면 왕비의 복식이 아니었나 추측할 수 있다) 안 입고 오면 상궁에게 중죄를 내린다고 하자 겨우 입고 왔고, 백관들이나 세자의 문안도 사양하고 끊임없이 죄를 청했으며, 숙종과 같이 환궁하는 것도 거절하자 숙종이 상궁에게 다시 '중전이랑 같이 안 오면 니네 다 죽는다'고 하자 그제서야 입궁했다. 하지만 어떤 책에서는 한 술 더 떠서 숙종이 모든 대신들에게 "사흘간 시간 줄테니깐 설득을 하든, 머리끄댕이를 잡아끌어서 오든... 중전 데려와! 만약 기한 내에 중전을 데려오지 못한다면... 니들 다 해고야!!!" 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이 정도면 겸손이 지나치다 못 해 어깃장을 부리는 걸로까지 보인다. 심지어 부원군과 부부인의 작호를 회복시키겠다고 숙종이 계모(아버지의 3번째 부인)의 작호를 물으니 기억 안 난다고까지 했다. 중요한 것은 그 머리 하나 빗는데도 온갖 발광을 다 했던 숙종이 짜증 한 번 안 내고 다 받아줬다는 거. 자기가 지은 죄가 있으니 참은 걸로 보인다.
  12. 김혜수가 장희빈으로 출연했던 동명의 드라마에서 복위된 인현왕후가 세자 내외와 아주 다정한 모습으로 노는 장면이 나오는데, 세자 내외가 인현왕후에겐 어마마마라 칭하면서, 친모인 희빈 장씨에겐 희빈 마마라고 부르는 바람에 희빈이 크게 노하기도 했다. 애초에 일개 빈에게 마마라 하면 불경죄 내지는 역모죄에 해당하잖아
  13. 체하거나 다른 이유로 속이 메스껍고 울렁거리고 구역질이 나지만 정작 구토는 안 나오는 증세. 겪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차라리 토하는 게 편하지 정말 미치도록 괴롭다...(...)
  14. 방성혜·차웅석, 인현왕후의 발병에서 사망까지 <승정원일기>의 기록 연구, 한국한의학연구원논문집 통권 34호
  15. 작자 미상으로 계축일기, 한중록과 함께 궁중수필의 수작으로 꼽힌다. 단,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를 극과 극으로 대비시키는 등 사료적 가치는 매우 떨어진다.
  16. 유교에선 가장 이상적인 부인이자 어머니의 상으로 꼽히는 여성이다. 율곡 이이의 어머니인 신씨가 자신의 호를 '사임당'(師任堂)으로 정한 것도 태임을 본받는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것이다. 게임판을 보면 태임에 대한 간략한 설명에 한글로 '여편네 중 제일이라'이라고 적혀 있다.
  17. 하지만 인현왕후가 죽은 후 숙빈 최씨가 인현왕후 상중에 그녀의 노리개를 훔치고, 그것을 취선당의 신당에 숨겼기에 장옥정이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모함을 받게 되어 장옥정은 사약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