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태조

북송의 역대 황제
후주 3대 공황제 시종훈초대 태조 무황제 조광윤2대 태종 문황제 조경
묘호태조(太祖)
시호계운입극영무예문신덕성공지명대효황제
(啓運立極英武睿文神德聖功至明大孝皇帝)
연호건륭(建隆, 960년 ~ 963년 11월)
건덕(乾德, 963년 11월 ~ 968년 11월)
개보(開寶, 968년 11월 ~ 976년 12월)
조(趙)
광윤(匡胤)
생몰기간927년 3월 21일 ~ 976년 11월 14일
재위기간960년 2월 4일 ~ 976년 11월 14일

오대십국시대의 명장이자 송나라의 건국자.

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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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폐하와 사커타임. 야! 신난다~

그림의 제목은 송태조축국도(宋太祖蹴鞠圖). 조광윤은 상당한 축국실력을 자랑했다고 한다. 병장 공도 못막는데 황제폐하의 공을 누가 막으랴 이 그림에는 참모인 조보, 뒷날 태종이 되는 동생 조광의도 그려져 있다. 드리블하는 사람이 태조 조광윤이고 뒷쪽 가운데쯤에 태조와 똑같이 생긴 인물이 동생인 태종 조광의. 누가 형제 아니랄까봐


무장의 모습을 그린 현대의 작품.

북송의 개조로 이름은 조광윤(趙匡胤) (927 ~ 976, 재위기간 960 ~ 976) 시호는 영무예문신덕성공지명대효황제(英武睿文神德聖功至明大孝皇帝). 그리고 포청천의 최종보스이자 최고 난관

2 생애

2.1 초기

하북성 출신으로 조광윤이 태어난 시기는, 당나라 멸망 이후 수많은 왕조들이 난립하였다가 빠르게 테크타고 이어서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던 5대10국 시기였다. 실제 조광윤의 집안도 원래 후당의 금군을 지휘하는 장수였다가, 후당이 망하자 후주에 복속된 군관집안 출신이었다. 아버지 조홍은은 후주의 금군을 지휘하여 여러 군벌들과 맞서싸우면서 공적을 세운 고위급 지휘관이었고, 조광윤 역시 당시 후주 태조 곽위의 양아들인 시영[1]의 수하로 들어가 군관으로 활약하였다.

시영(후주 세종)이 954년 제위에 오르자 영토확장 의지를 천명하였고, 조광윤은 군의 지휘관으로서 남벌에 참여하여 상당한 공적을 세웠다. 그리고 당시 거란족의 도움을 받아 후주를 위협하던 군벌들을 모조리 박살내고 버로우시켰다. 조광윤이 탁월한 지휘능력을 발휘하여 후주에 수많은 승리를 선사하자, 세종은 금군 총사령관직을 내려 후주의 모든 병력를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게다가 조광윤은 세종이 제위에 오르기 전부터 수하로 있었던 인물이었고, 상당한 충성심을 가진 인물이었기에 세종으로부터 상당한 총애를 받았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게 세종 시영은 죽기 전에 금군 총사령관이었던 자신의 처남을 해임시키고, 그 후임으로 조광윤을 앉혔다. 그 이유는 "내가 죽으면 처남이 내 어린 아들을 죽이고 황제에 오를 테니, 연줄이 없고 충성스러운 조광윤을 앉혀놓자!"였다. 결과는, 반만 맞았다. 사실 시영 본인도 직계혈통이 아닌 고모부의 양자로 황제가 된 경우이기 때문에, 외척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2.2 황제 즉위

959년 세종이 승하하고 그 뒤를 이어 시종훈이 공제로 즉위하였다. 즉위 당시 공제는 어린아이에 불과했기 때문에, 유제의 등극으로 후주를 갈아 마시기 딱 좋은 시기라고 판단한 거란과 후주와 대립 중인 여러 군벌들은 서로 결탁하여 후주를 압박하였다.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조광윤이 나섰으나, 당시 부하들은 "이게 모두 저 어린 황제 때문이다"란 생각과 함께 시씨 황실에 대한 불만을 품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조광윤의 엄청난 군공과 명성, 후주에서의 위치를 감안하면, 충분히 황제가 될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조광윤은 제위에 대한 욕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는데, 결국 참다못한 부하들이 조광윤을 옹립하기로 결정하고 행동에 나섰다.

조광윤은 술자리를 가지면 술에 취해 떡이 되도록 마시는 버릇이 있었는데, 이를 이용하여 부하들은 술을 계속 권하였고 결국 필름이 끊길 정도로 술을 마신 조광윤은 부하들의 계획대로 떡실신(…). 그 사이 부하들은 조광윤에게 황포를 입혔고, 술에서 깬 조광윤에게 "우린 당신을 황제로 모시기로 했으니 얼른 어린 황제로부터 양위 받으삼? 안 그럼 우리 삐침!"이란 말을 하며 양위받을 것을 강요하였고, 조광윤은 갑작스런 상황에 난감해하다가, 황실과 신하들, 백성들에 해를 입히지 않겠다는 조건과 절대복종의 맹세를 받아낸 후에야 부하들의 요청을 수락하였다. 결국 병력을 이끌고 개봉에 입성한 조광윤은 공제의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올랐고 북송을 건국하였다. 왕건과 마찬가지로 자신은 군주가 될 생각이 없었는데 부하들이 억지로 밀어넣어 군주가 된 케이스다.

이것이 공식적인 설명이다. 그러나 현대에 이런 설명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거란의 공격으로 조광윤이 출동했다는 것은 송나라측 기록이고, 요나라측 기록에는 당시 송나라를 공격했다는 내용이 전혀 없다. 자국 내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느라 바빴을 뿐이다. 즉 거란의 공격 자체가 조광윤이 군사를 이끌고 출동하기 위한 거짓 정보에 불과했다. 더구나 부하들이 억지로 황포를 입혔다고 했는데, 황포는 군중에 굴러다닐 만한 물건이 아니다. 사전에 준비하지 않았으면 황포가 갑자기 등장할 리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조광윤은 출동하기 전에 자기 가족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 놓았다. 이를 종합해보면 조광윤은 처음부터 반란을 일으킬 목적으로 거란의 공격이라는 거짓 보고를 이용해서 군사를 이끌고 출동했던 것이다. (관련글)[2]

중국 역사 내내 선양으로 제위에 오르는 경우가 많았고, 남북조시대부터 전 황족은 그 자리에서 족치거나 적당히 대접하다가 몰래 암살하는 일이 빈번했는데, 조광윤은 시종훈을 우대하였고 단서철권(丹書鐵券)[3]을 내려 시씨 문중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시씨 문중은 북송이 금나라에 쫓겨 남쪽으로 내려갈 때도 송나라 황실이 함께 데리고 갔고, 남송이 멸망할 때까지 양송 4백 년간 보호받았다. 그리고 선양한 공제 시종훈이 968년에 16세의 나이로 죽었을 때 황제에 준하는 예우로 장사까지 지냈다. 이러한 후대는 이후 송나라 내내 이어졌고, 그래서였는지 후에 송나라가 멸망할 때 많은 시씨 일족이 끝까지 송나라 황실과 명운을 같이 했다. 이런 시씨 일족 중 한 명이 수호지에도 등장하는데 바로 시진이다. 시씨 이외에도 5대 10국의 군주나 장수들도 죽이지 않고 관용을 베풀었고[4] 정복한 지역의 백성들의 약탈을 엄금하면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반면 관용을 베풀되 통일에 대한 의지는 확고했던 거 같다. 남당후주 이욱이 조광윤에게 "천하를 반분해서 각자 다스립시다"라고 말하자, "내가 누운 침대 옆에서 외간남자가 코골며 자는 것을 어찌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라며 으름장을 놓으며 사신을 내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2.3 배주석병권

일단 제위에 오른 조광윤은 병권을 가진 군벌들이나 자신을 옹립한 장수들의 존재가 매우 위험하다고 판단하였다. 수많은 창업군주들은 자신을 도운 공신들을 삭 썰어죽이는 비정한 면모를 보이거나, 쳐죽이려다가 오히려 역관광타는 안습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조광윤은 잠시 고민하다가, 자신과 형제처럼 지낸 공신들과의 의리를 이용해 병권을 받아 오기로 마음먹었다. 그 방법은 정직하게 설명을 한 뒤 설득으로 병권을 받아오는 것이었다.

일단 휘하 장수들을 모두 초청하여 연회를 벌였는데, 이 자리에서 장수들이 만취 상태에 놓이자 갑자기 시종들을 멀리하고 공신들만 남긴 다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아주 솔직하게 설명했다.

조광윤 : "만일 너희들의 힘이 없었으면 나는 황제로 되지 못했을 거다. 그러나 황제가 된 후 나는 매일 밤에 잠을 잘 수가 없다'"

장교들 : "에이... 우리가 통수라도 칠까봐? 절대 안그래요"

조광윤 : "너희들은 통수 안쳐도 너네 부하가 통수치라고 부추기면? 그럼 너희들이 거절하기 힘들 것이 아니냐."

장교들 : "폐하가 안심하려면 우리가 어쩌면 좋을까요?"

조광윤 : (크게 한숨을 내쉬면서)"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돈. 그리고 마음의 평화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잘 생각하도록 해라."

그러자 장교들은 조광윤의 말 뜻을 완전히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러자 다음날 모든 고급 장교들은 모두 황제에게 사직서를 제출하였고, 조광윤은 그들의 사표를 바로 받지 않고 병권이 주어지지 않는 자리로 전보 조치했다. 이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5대 10국이 왜 벌어졌는가를 다시 정리한 것인데, 각 장수들이 군권을 갖고 있다 보니 장기적으로는 황제를 우습게 보고 또 다른 분란의 원인이 된 경우가 허다했다는 것. 그렇게 술자리에서 자신의 고민을 토로함으로써 하루아침에 군벌들의 세력을 넘겨받아 중앙으로 복속시킨다. 이 사건은 지방 군벌에 의한 군웅할거의 국면을 종식시키는 계기가 된다. 태조는 동일한 수단으로 왕언초(王彦超) 등 여러 명의 절도사들의 병권도 자발적으로 받아내고, 지방의 행정과 재정을 모두 중앙으로 복속시켰다.

왜 황제에게 병권이 집중되어야 하는지를 설득하는 한편, 병권을 내놓은 개국공신들에게 그에 따른 혜택도 약속했다. 그리고 동일한 방법으로 각 지방의 절도사들을 불러 역시 정직하게 설명하고 설득한 뒤, 병권, 지방행정권, 재정권 등을 중앙정부로 흡수하였다. 이로써 조광윤은 숙청없이 상황을 말끔히 정리하였다. 다른 많은 나라의 초대 왕이 개국공신에게 피튀기는 숙청을 하는 것으로 유명한 데 비하면 꽤 특이한 사례. 물론 병권 반납에 대한 불안감을 가질 사람들을 위한 혜택은 철저하게 줬다. 조광윤은 병권을 내놓은 휘하 장수들이나 지방 절도사, 군관들을 지방의 관리로 전보하거나 토지를 하사하는 등, 공신들이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게끔 조치를 취함으로써 자신이 한 약속을 모두 지켰다.

물론 이는 조광윤이 휘하의 장수나 군벌들과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했기에 가능한 일이긴 했다. 실제로 조광윤 자신조차도 처음부터 군권 회수를 생각한 것은 아니었는데, 휘하에 있던 군인들의 설득[5]으로 군권 회수를 최종 결정했다고 한다.

다만 이 배주석병권도 말 그대로 설득으로 좋게좋게만 풀린 게 아니라, 적절히 숙청의 경고를 통해 결과적으로 비폭력적으로 해결되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어찌 되었든 결과는 비폭력적으로 좋게 끝난 건 사실.

2.4 이루지 못한 통일

이후 조광윤은 통일을 위해 대립 왕국들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하였고, 반항하는 군벌들을 밟아나아가면서 중국대륙 통일작업에 착수하였다. 더불어 과거제도를 시행하고 문치주의를 표방하면서 사회제도 개편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여러 공신들이 불만을 품고 반발하기도 했으나, 유혈숙청을 싫어했고 뭐든지 인간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조광윤은 그 때마다 필살오의 술자리 초청 스킬을 발휘하여 대화로 풀어나갔다. 이런 점을 보면 인간적으로는 정말 괜찮은 사람이었던 모양.황제가 술자리에서 진지하게 속마음 털어놓는데 안된다고 떽떽거릴 수도 없고 망했어요.

조광윤은 중국 통일 위업을 달성하지 못하고 976년 숨을 거두고 영창릉에 안장되었다. 그 뒤를 이어 동생인 송태종 조광의가 즉위하였으며 조광윤이 시작한 중국통일 및 국가체계 정비를 완수하였다. 다만 즉위 과정에서 의문점이 많아 혹시 암살당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엄청나게 의심스러운 것이, 조광윤이 죽던 날 밤 동생 조광의가 광윤의 침실에 들어가 다른 사람들을 물리치고 단둘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신하들이 방문 밖에서 바라보니 누군가 도끼를 방바닥에 찍으면서 "그렇게 하라!" 라고 외치는 게 촛불 그림자로 비치고 있었다. 갑자기 방문이 열리며 조광의가 나와 "형님이 말씀하시기를, '장남 조덕소가 아직 어리고 천하일통이 아직 이뤄지지 않았으니, 어린 아들을 황제로 삼으면 후주 공제처럼 나라를 잃을까 두렵다. 아우가 제위를 물려받으라.' 라고 하셔서 내가 사양하니, 형님이 도끼로 나를 위협하여 어쩔 수 없이 제위를 받겠다 고 하자 형님이 숨을 거두셨다."라고 주장하며 제위에 올랐다(…). 도끼 던지느라 정력을 다 쓰신 태조

당연히 의심할 만한 일인지라, 일부 신하들은 태조가 아니라 태조의 첩을 희롱하다 걸린 태종이 도끼를 들고 형을 위협하다 죽이고 제위를 찬탈한 것으로 믿었다. 사실 맨 위 초상화에서 보듯이, 이 두 형제가 서로 너무 닮아서 그림자만으로는 누군지 구분할 수 없었던 것이 이 의심의 근원이 되었다. 태조의 장남 덕소는 이 음모론을 믿고 제위를 노리다가 발각되어, 태종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이 고사를 '촛불 그림자와 도끼 소리'라는 뜻의 촉영부성(燭影斧聲)이라고 한다. 애당초 태종의 주장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당시 태자 덕소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거의 30살에 가까운 나이였다는 것이다. 사실 위에서 설명한 조광윤의 즉위 과정도 작전을 계획하고 총지휘한 게 바로 동생인 조광의였다는 걸 생각해보면, 묘하게 섬뜩한 부분이다. 정말로 저 모든 걸 계획해서 계획대로 자기가 황제가 된 건지, 아님 형에게 충성스런 동생으로 살다가 자연스럽게 형의 뒤를 이은 건지는 당사자밖에 모르겠지만(...) 참고로 이 때부터 북송의 역대 황제와 남송 초대 황제 송고종때까지는 송태종의 후손이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송태종의 자손이 귀했고, 송고종 이후에는 송휘종정강의 변으로 송태종의 자손들이 대거 금나라로 끌려가고 송고종의 대도 끊기면서[6] 송태조의 자손들이 황제에 오르게 된다.[7]

한국의 성씨 중에 배천(白川)[8] 씨는 조광윤의 차남 위왕 조덕소(趙德昭)의 삼남 조지린(趙之遴)이 시조로 그는 황실의 난[9]을 피해 979년 고려로 망명해 경종황해도 배천군 도태리에 정착해 살았다고 한다. 그는 현종 때 좌복야 참지정사가 되었으며 아들 조양유(趙良裕)는 덕종정종 때 판위위사승(判衛尉寺丞)을 지냈고 추의찬화익조공신(贊化翊祚功臣) 문하시중으로 백천군에 봉해졌다고 한다. 유명한 사람으로는 임진왜란의병장이었던 조헌(趙憲)이 있다.

마찬가지로 임천(林川)[10] 조씨는 조광윤의 사남[11] 위왕 조덕소의 차남 기왕 조유길(趙惟吉)의 오남 조천혁(趙天赫)을 시조로 한다.읽다가 혀꼬인다 979년 조덕소가 화를 입자 숙부 위왕 조유고(趙惟固)와 함께 고려로 망명해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조천혁은 현종 때 강감찬과 함께 요나라를 격파한 공으로 가림백(嘉林伯)[12]에 봉해졌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가수 조용필의 본관이 임천 조씨이다.

3 이야기거리

조광윤이 세상을 떠날 때 돌에 유훈을 새겼고, 새 황제가 즉위를 하였을 때 반드시 이를 보고 지키도록 하였다. 이를 돌에 새겨 남긴 유훈이라 하여 석각유훈이라 하는데, 존재 자체가 송 황실 최고의 극비였던 까닭에 아무리 총애받는 신하라고 해도 그 존재를 몰랐다. 결국 이 석각유훈은 수도 변경(개봉)을 점령한 후에야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시씨의 후손은 죄가 있어도 형을 가하지 말고, 역모의 죄를 지었다 해도 옥중에서 자진하게 해주고, 저잣거리에서 공개처형하지 말 것. 그리고 지속(支屬)에게 연좌시키지 말것.

2. 사대부와 상소하는 사람을 죽이지 말 것.
3. 자손으로 이를 어기는 자는 하늘이 반드시 죽일 것이다.[13]

역사 소설가 진순신의 경우에는 <18사략> 등에서 이 석각유훈을 비롯한 송태조의 통치 방식을 높게 평가하면서 중국 사상 최고의 군주로 평가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곤술(棍術)에 뛰어나서 태조곤술이라는 것도 있었는데, 무림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을 정도로 달인이었다. 편곤의 기원을 따지다 보면 이 사람의 이름이 꼭 튀어나온다. 다만 실제로는 조광윤이 아니라 서융족의 무기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송(宋) 태조(太祖) 삼십이세장권(三十二勢長拳) 즉 장권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축국도 잘하고 봉술도 권법도 마스터인 걸 보니 꿈의 적마도사무술고수황제인 듯.

선견지명도 있었는데 송나라의 수도지로 낙양[14]개봉를 택일하려고 하였을 때, 조정제신들은 모두 험준하지만 당말 이래로 쇠퇴해진 낙양 대신 조운이 편리한 5대 이래로의 도읍 개봉에 정도할 것을 지지하였고 송 태조는 마지못해 이를 따르면서 개봉은 수비할만한 험한 지형이 없는 평야니 훗날 후손들에게 해가 될 것이라 탄식했는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배주석병권의 일화에서 보듯 공신들에게는 관대한 인물이었다. 이런 사건도 있었는데, 뇌덕양이라는 신하가 자신의 일등참모인 조보를 비판하자 울컥해서, 도끼자루로 뇌덕양의 입을 쳐서 옥수수를 털어버렸다.(…) 그리고 뇌덕양은 지방관직으로 좌천. 뒷날 조선세조는 강론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한 신하가 "죄가 있으면 마땅히 관련 부서에서 처리할 일이지 송태조처럼 신하의 이를 부러뜨린 건 잘못입니다"라고 평가하자, "무슨 소리! 조광윤 그 양반 재위 20년간 과감히 결단한 것은 이것 뿐이구만!"이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자기도 신하들 제멋대로 다뤘으니 어련하실까. 더욱이 세조는 한무제, 당태종빠였으니.[15]

대중 매체에서는 판관 포청천에서 자주 언급되는데, 주로 그가 하사한 물품이나 어명 때문에 죄인을 처벌할 수 없어, 포청천이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천하제일장', '도룡기', '뇌정노'등의 에피소드). 태조인 그의 명이라 당대의 황제인 인종도 어쩔 수 없어 쩔쩔 매다가 허점을 노려 모가지를 날리는 결말이 대부분.[16]

드라마 삼국으로 유명한 고희희 감독이 '조광윤'이라는 사극을 찍고 있는데, 조광윤 역은 삼국에서 조조로 유명한 진건빈이 맡는다. 동생 조광의는 신삼국의 육손 역이었던 소봉이 맡았는데, 문제는 둘이 안 닮았고, 분장도 전혀 다르게 했다. 위에 나오는 의심스러운 조광윤의 죽음을 어떻게 처리할 지가 불명이다.

4 가족관계

조광윤이 듣보시절에 하경사의 딸을 아내로 삼았다. 그러나 송이 건국되기 전에 죽어, 후에 효혜황후로 추봉하였다. 이후에 창덕군절도사 왕요의 딸을 계실로 맞이하였는데, 송이 건국되자 황후로 삼았는데 곧 효명황후이다. 이어 효명황후가 죽자 집안이 화려한 송악의 딸을 황후로 삼았는데, 그녀가 효장황후[17]이다.

효혜황후가 연의왕 조덕소와 위국대장공주, 노국대장공주를 낳았으며 효명황후가 진강혜왕 조덕방을 낳았다. 그 외의 자녀들은 요절해서 설명을 생략한다.
  1. 원래 곽위의 아내의 조카, 다시 말해서 곽위의 처조카이다. 고모부의 성인 곽(郭)씨 성을 받고 양자가 되었으나, 고모부가 죽은 뒤 도로 시(柴)씨 성으로 돌아왔다.
  2. 그래서 고우영 십팔사략에서도 이런 논지에 입각해 조광윤이 의도적인 묵인 또는 미필적 고의로 찬탈을 하는 식으로 그려진다. 부하들의 추대를 받는 조광윤이 술도 얼마 마시지 않아 정신이 멀쩡한 상태에서, 부하들이 황포를 입히자 군말없이 껄껄 웃으며 기꺼이 입는다.
  3. 면사금패(免死金牌)라고도 하며, 죄를 지어도 처벌받지 않는 일종의 증명서 역할을 하는 문서였다.
  4. 조광윤이 특별한 건 아니고 황족만 바뀌고 지배층은 그대로 유지한 게 5대 10국 전체의 특징이다. 풍도가 대표적 예이다.
  5. 군권을 가진 사람 개개인의 충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그 부하들이 엉뚱한 생각을 하고 그들에게 군권을 사용할 것을 강요한다면 어쩔 것이냐는 지적이었다. 실제 역사를 보면 이런 사례가 굉장히 많다. 당장 조광윤 본인부터가 후주의 장군으로 동분서주하다가 부하들이 술먹이고 황제로 추대한 사람이다.
  6. 다만 황제가 될 만한 가까운 황족이 없었다는 거지, 태종의 후손이 완전히 멸절한 건 아니다. 대표적으로 남송 영종 때 재상을 지낸 조여주가 있는데 그는 태종의 후손이었다.
  7. 남송의 송효종은 사남 조덕방의 차남 조유현의 후손이며 송이종은 차남 조덕소의 차남 기왕 조유길의 후손이다.
  8. 황해도 배천군이다. 특이한 케이스로 한자 표기는 白川이지만 백천이 아니라 배천으로 읽는다.
  9. 조덕소가 태종의 압력에 의해 자살한 사건
  10.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이다.
  11. 장남 등왕 조덕수, 삼남 서왕 조덕림(趙德林)은 요절해서 사실상 차남이었다.
  12. 임천의 옛 이름
  13. 자손은 아니지만 사대부와 상소하는 사람들을 마구 죽였던 나라가 환관의 발호와 암군들의 행패 속에 어떻게 망했는가를 보면 결국 벌을 받은 셈이다.물론 송나라도 결국 망한게 함정흑형
  14. 혹은 장안
  15. 세조실록, 세조 1년(1455년) 8월 5일.
  16. 주성치구품지마관에서는 이를 패러디한 장면이 나오는데, 선황의 하사품으로 버티는 죄인에게, 그보다 더 선황이 주성치의 선조에게 하사한 보검을 들고 나와 명령을 따르라고 협박한다. 그런데 청나라 배경인데 명나라 황제가 하사한 보검으로 협박한 통에 오히려 반역으로 궁지에 몰린다.(…)
  17. 할머니가 후당의 의령공주, 외조부가 후한의 시조 유지원, 어머니가 후한의 영녕공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