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송의 역대 황제 | |||||
초대 태조 무황제 조광윤 | ← | 2대 태종 문황제 조경 | → | 3대 진종 원황제 조항 |
묘호 | 태종(太宗) | |
시호 | 지인응도신공성덕문무예열대명광효황제 (至仁應道神功聖德文武睿烈大明廣孝皇帝) | |
연호 | 태평흥국(太平興國, 976년 12월 ~ 984년 11월) 옹희(雍熙, 984년 11월 ~ 987년) 단공(端拱, 988년 ~ 989년) 순화(淳化, 990년 ~ 994년) 지도(至道, 995년 ~ 997년) | |
성 | 조(趙) | |
휘 | 경(炅)[1] | |
생몰기간 | 939년 6월 7일 ~ 997년 5월 8일 | |
재위기간 | 976년 11월 15일 ~ 997년 5월 8일 |
1 개관
북송(北宋)의 제2대 황제. 재위 기간은 976년∼997년. 이름을 여러 번 바꿨는데, 본명은 조광의(趙匡義)였으나 형인 태조가 황제가 되자 피휘하여 광의(光義)로 바꿨다가 즉위 후에는 경(炅)으로 고쳤다. 시호는 지인응도신공성덕문무예열대명광효황제(至仁應道神功聖德文武睿烈大明廣孝皇帝).
2 생애
조광윤의 동생으로 즉위에는 약간의 의문점이 있었지만 명군이었기에 크게 문제되진 않았다. 978년 오월의 항복을 받고, 다음해 북한(北漢)을 멸망시켜 오대십국시대를 종식시키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형이 진행하던 절도사 제도의 폐지를 완료하여 번진체제를 종식시켰고, 문치주의를 완료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요의 토벌에 실패하고[2] 부상을 입어 997년 죽었으며 영희릉에 안장되었다. 그의 재임 중에 서하가 일어나는 등 그가 죽은 후에 송의 군사력 약화는 심화된다.
그러나 문치주의의 기틀을 다져 훗날 송진종, 송인종 시대의 "함평-경력의 치"라는 송나라 내부의 태평성대의 기반이 되었으며 송조 전체의 뼈대를 잡고 기틀을 닦은 인물이다. 후일 송사대서라고 불리는 태평어람, 태평광기, 문원영화 등을 완성시켰다,[3] 괜히 '태종'이라는 묘호를 받은 게 아니다.
여담으로 남당의 후주(後主) 이욱을 죽여버렸다. 남당은 송태조 조광윤에 의해 멸망했고, 마지막 황제 이욱은 송나라의 수도로 끌려와서 살고 있었는데, 자기 생일날 고향을 그리워 하는 시를 지었다가 격노한 송태종에게 독살당했다. 생일 선물 쩌네 실향민들 다 죽일 기세 위의 형의 죽음에 대한 의혹도 그렇고, 명군이지만 뒤가 구린 부분이 많은 인물로, 이와는 상관은 없겠지만 후에 정강의 변으로 북송이 멸망한 뒤 태종의 자손인 송고종은 후손을 보지 못하고 또한 다른 물려줄만한 친척이 없어서 결국 태조의 자손인 송효종에게 제위를 물려주게 된다. 태종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어쩐지 '사필귀정'이라고 생각될 만한 부분.
개인적으로는 굉장한 독서가였는지 1000권의 책을 하루마다 시간 날때 틈틈이 3권씩 탐독하여 1년만에 읽으니 신하들이 황제의 건강을 걱정해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때 신하들에게 '책은 펼치기만 해도 이득이 있다'고 말한 것이 오늘날 개권유익(開卷有益)이라는 고사성어로 전해진다.
양문호장전기의 배경이 되는 시대이기도 하다.
2.1 즉위 과정에서의 의문점이라 쓰고 사실이라 읽는다
송태조 조광윤이 죽던 날 밤 동생 조광의가 광윤의 침실에 들어가 다른 사람들을 물리치고 단둘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신하들이 방문 밖에서 바라보니 누군가 도끼를 방바닥에 찍으면서 "그렇게 하라!" 라고 외치는게 촛불 그림자로 비치고 있었다. 갑자기 방문이 열리며 조광의가 나와 "형님이 말씀하시기를 '장남 조덕소가 아직 어리고 천하일통이 아직 이뤄지지 않았으니 어린 아들을 황제로 삼으면 후주 공제처럼 나라를 잃을까 두렵다. 아우가 제위를 물려받으라.' 라고 하셔서 내가 사양하니 형님이 도끼로 나를 위협하여 어쩔수 없이 제위를 받겠다고 하자 형님이 숨을 거두셨다."라고 주장하며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일부 신하들은 태조가 아니라 태종이 도끼를 들고 형을 위협하다 죽이고 제위를 찬탈한 것으로 믿었는데 누가 봐도 그게 맞는 거 같은데 송태종: 왕위를 계승 중입니다. 형님.이 두 형제가 서로 너무 닮아서 그림자만으로는 누군지 구분할 수 없었던 것이 이 의심의 근원이 되었다. 태조의 장남 조덕소는 이 의혹을 믿고 제위를 노리다가 발각되어 태종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이 고사를 '촛불 그림자와 도끼 소리'라는 뜻의 촉영부성(燭影斧聲)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송태종은 금궤지맹(金櫃之盟)을 언급했다. 송태조 조광윤과 태종 조광의의 어머니인 두태후가 임종시에 아들들을 불러서 조광윤에게 물었다고 한다. "강산을 어떻게 얻었는가?" 조광윤이 조상님의 보우하심 덕분이라고 하자 두태후는 머리를 가로저으며 그것은 주세종이 어린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주었기 때문이라고 하고,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조광윤이 어린 아들이 아닌 장성한 동생 조광의에게, 조광의는 다시 동생인 조광미에게 황위를 계승시키고, 조광미는 다시 조광윤의 아들 조덕소에게 제위를 물려주어야 한다고 했다. 조광윤과 조광의 모두 이에 동의하여 이 내용을 기록하여 금궤에 넣어 보관하였다고 하며, 이를 금궤지맹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또한 의문의 대상이다. 조광의가 금궤지맹을 공개한 것은 황위에 오르고도 5년이 지난 후였다. 금궤지맹이 처음부터 있었다면 왜 진작 공개하지 않았는지를 설명하기 어렵다. 더구나 두태후가 사망할 때 조광윤은 고작 34세였고, 장남인 조덕소는 이미 14세였다. 조덕소가 장성하기 전에 조광윤이 사망할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실제로 조광윤이 사망할 때 조덕소는 이미 28세였으니 황제가 되기에 부족한 나이는 아니었다. 주세종이 7살짜리 아들에게 황제를 물려준 상황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