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 전쟁

1 개요

ثورة جزائرية (아랍어)
Guerre d'Algérie (프랑스어)
Algerian War (영어)

X알전쟁[1]

1954년부터 알제리가 1964년 독립할 때까지 알제리 민족 해방 전선(FLN, Front de Libération Nationale)과 프랑스 정규군과의 전쟁.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탈식민지화의 대세와 흐름을 무시하고 벌어졌던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 인도차이나 전쟁,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과 더불어 유럽 식민 제국주의 국가들의 시대착오적인 식민국가 재침략 및 식민지 유지 전쟁의 전형을 보여준 전쟁이었다.

또한 국가의 이익과 개인의 이익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처음으로 보여준 전쟁이기도 하다. 국가 지도층의 오판으로 힘든 세월을 보내야 했던 프랑스 젊은이들은 그저 밥그릇 나누기 싫어서 벌인 베트남 전쟁[2]과 이 전쟁에서 개죽음을 당하면서 국가에 대한 감정이 나빠졌고, 결국 외인부대 의존도는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오늘날 프랑스군이 해외파병에 소극적이고 외인부대 위주로 돌아가는 데는 이 전쟁이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원인

프랑스는 알제리를 북아프리카의 지리적 요충지로 여겨 관심을 가져왔으며, 제국주의 시대 프랑스의 아프리카 횡단정책의 발판으로 여겨졌다. 결국, 1830년 프랑스는 알제리 정복을 결의했다. 이 결정에는 당시 알제리의 지방 총독에게 프랑스 외교관이 신발을 맞고 쫓겨난 것이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하였다. 결국 알제리 북부의 지중해 바르바리 해적소탕을 명분으로 공격을 가해 명목상 오스만의 지방 총독이었던 알제리의 술탄을 제거하고 알제리를 식민지로 삼았다. 이는 로마 이래 끊겼던,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세계가 아프리카에서 도시 개개가 아니라 지역 단위의 정복을 다시 시작한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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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뒤 알제리가 독립할 때까지 수많은 항쟁과 독립운동이 일어났으나 프랑스 정부는 회유와 강압을 통해 알제리 식민지를 끝까지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세계 식민지가 연이어 해방을 맞이하는 환경 속에 프랑스의 알제리 유지는 갈수록 불투명해지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2차대전이 끝날 무렵인 1945년 5월 8일, 프랑스가 나치에서 벗어났다고 프랑스계 백인들은 잔치를 벌이며 환호했다. 그러나 반대로 그 날,알제리 독립을 주장하는 비무장 시위대가 시위를 하면서 싸움이 벌어졌고 프랑스 민병대들이 마구 사격을 하면서 알제리 국기를 들고 있던 12살 소년 사르 알 부지드가 머리에 맞아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이 소년의 죽음에 알제리 사람들이 격분하면서 덤벼들었고 결국 29명 프랑스인 민병대원들이 참혹하게 죽게 된 것을 포함해 103명의 유럽인이 죽었는데, 이 일을 폭동으로 여긴 프랑스군이 출동하면서 무차별 공격으로 독립운동 시작점이 되게 만들었다.

출동한 프랑스군이 시위대에게 총질만 했다면 그나마 나았겠는데, 본보기로 알제리인 마을을 초토화시킨답시고 해안 마을에는 순양함이 함포사격을 하고 내륙의 40개 마을에는 급강하폭격기가 폭탄을 퍼붓는 대학살을 벌였다. 당시 인구 4천명이 넘은 마을이 알제리 국기를 내걸었다고 프랑스군의 무차별 폭격을 받아 겨우 3명만 살아남은 참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살아남은 3명은 중년여성 1명, 20대 청년 1명, 꼬마아이 1명이었는데 이 꼬마아이는 커서 알제리에서 유명한 소설가가 되었고 부모와 형제를 죄다 잃은 이 학살을 절대 잊지 못하여 글로 당시 현장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이때 죽은 알제리인의 숫자에 대해 프랑스 정부는 1,020~1,300명이라는 숫자를 공식적으로 내세웠으나 아랍인들은 못해도 45,000명은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2차대전 당시 프랑스를 위해 싸운다고 프랑스군에 지원해서 독일군과 싸우고 돌아온 알제리 병사들이 이 꼴을 보고 말았으니, 이들 중 다수가 FLN에 투신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실전 경험을 가진 이들이 참여하면서 오합지졸이던 FLN은 이전과 다르게 군조직을 잘 정비하고 프랑스군과 외인부대를 괴롭히게 된다. 독립 알제리의 초대 국가원수였던 벤 벨라(1916~2012)도 이렇게 해서 반프랑스 항쟁에 뛰어든 2차대전에 참전한 프랑스군 부사관 출신이었고 벤 벨라에 이어 2대 총리이던 우아리 부메디엔(1932~1978)도 프랑스군 부사관이었다.

여하튼 학살사건의 파장이 커지자 프랑스에서 알제리의 자치권을 확대하겠다고 나섰지만 알제리 현지인과 피에 누아르(비율로 피에 누아르가 인구의 13% 가량을 차지했다.)에게 배당된 의석수를 같게하는 게리멘더링을 시행했고 그나마 치러진 선거도 금권, 관권, 부정선거로 얼룩졌다. 이런 기만적인 조치에 알제리인들이 빡친건 당연했다.

3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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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1954년 알제리 민족 해방 전선이 알제리의 독립을 선포하고 게릴라전을 벌이기 시작하자 프랑스 정부는 알제리 독립을 유혈폭동으로 규정하고 NATO에 파견된 정예 사단까지 빼내서는 무력 진압을 시작한다.

한편 같은 시기 똑같이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던 베트남에서는 호치민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승리하고 독립을 쟁취하자 이 사실이 알제리인들에게도 크게 자극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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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국방부의 전쟁'으로 일컬어지는 이 기간 동안 프랑스군은 전력에서는 월등하게 앞섰으나 현지의 압도적 지지속에 게릴라전을 펼치는 FLN을 일소할 수는 없었고, 수년간 그들의 테러와 약탈에 시달려야 했다. 프랑스는 계속 보복 학살을 자행했지만 벌일수록 알제리인들의 증오와 비협조로 알제리 거주 프랑스인들이 보복 살해를 당하기 일쑤였으며 외인부대에서조차 알제리계들이 선동하여 내부 총격전을 벌이기까지 했다.

프랑스군의 마구잡이 학살과 진압은 전세계적으로 욕을 먹었으며, 소련 및 다른 공산권 나라들이 전쟁에 끼어들 기미가 보이자[3] 미국은 알제리 독립을 받아들이라는 압력을 가한다. 심지어는 알제리와 같이 프랑스 식민 통치를 겪었던 튀니지모로코같은 북아프리카 주변 국가들도 프랑스를 비난했다.[4] 특히 튀니지는 자국에 알제리 독립운동가들의 망명과 독립운동 활동을 허용하며 사실상 알제리를 지지했으며[5] 이에 프랑스는 주권국가인 튀니지를 반란군 소굴로 규정, 폭격을 감행해 무고한 인명을 살상했고 이에 대한 자제를 촉구하는 미국의 요구에 대통령은 미국의 개인가?라고 총궐기하여 씹어버린다.

그나마 독립 운동에 유화적이던 좌파 사회당(프랑스)[6] 정권의 르네 코티는 여론의 반발과 프랑스 정규군의 쿠데타 위협속에 무기력하게 끌려다니며 전쟁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된다.

이렇게 전세계적으로 욕을 먹어가면서 막대한 희생을 무릅쓰고 계속 진압에 나선 이유는 알제리를 식민지가 아닌 프랑스 본토의 일부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단 프랑스 남부에서 지중해만 건너면 마주보고 있을 정도로 가까우며, 영구지배를 생각하고 100년이 넘는 시간동안 기반시설에 투자를 많이 한 덕분에 적어도 대도시는 완전 유럽식으로 만들어놓았다. 덤으로 외인부대와 프랑스 해군의 주요 군항도 알제리에 있을 정도로 군사적 요충지 대접까지 받았다. 게다가 후술하지만 현지에 정착해서 사는 피에 누아르라고 불리는 알제리 거주 프랑스인도 숫자가 많을 뿐 아니라 식민 역사도 120여년에 육박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북아프리카 전역 당시 미군이 횃불 작전으로 모로코와 알제리에 상륙하기 전에 샤를 드 골모로코와 알제리는 아프리카가 아니라 유럽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환경이 다르다는 충고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계속 이어진 전쟁으로 프랑스군도 67만 대군 중 9만여명에 이르는 사상자를 내며 200만에 이르는 알제리인들과 6천에 이르는 프랑스계들이 사망하면서 프랑스 여론도 전쟁에 환멸을 느끼게 된다. 베트남 전쟁으로 억지로 징용되어 싸우던 프랑스 젊은이들은 알제리에서 똑같이 전쟁을 치루면서 징병기피자들만 늘어났고 결국 1961년 사실상 평화협정 체결이 확정되자 극우파 장군[7]들이 쿠데타를 시도하고 심지어 외인부대 제1공수연대가 이에 호응해 알제리의 주요 전략거점을 수 시간 동안 무력으로 장악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전대미문의 사건은 아슬아슬하던 유지되고 있던 제4공화국에 치명타를 가했다. 4월 21일 일어난 이 반란이 번져나가자 정계은퇴후 시골에 칩거하던 2차 대전의 영웅 샤를 드 골은 군복차림으로 방송에 나와서 반란에 동참하지 말 것을 호소했으며, 26일 결국 반란은 실패로 끝났다. 방송 한번으로 반란을 진압한 드골은 바로 내각 수상으로 취임해서 정권을 장악하고 외인부대를 종전 대통령 직속에서 국방장관 직속으로 격하하고 제1공수연대를 영구해산해버렸다. 그럼에도 일부 반란군은 알제리 내에서 게릴라전을 벌였고 적이었던 프랑스군과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이 손잡고 이들을 진압하게 된다.

시간이 흐르자 아랍 국가와 소련의 압력은 가중되고, 자국내 좌우익간 여론이 분열되며 지속적으로 피해가 누적되면서 프랑스의 알제리 유지는 불투명해지기 시작했고, 결국 알제리에 유화적인 드골주의자들이 정권을 잡게 되면서 제4공화국은 무너지고, 대통령에게 강력한 권한을 부여한 제5공화국이 들어선다.

정권을 잡은 드골우파 정부는 알제리에 "1. 알제리는 프랑스의 한 주가 되며 프랑스인들과 똑같은 혜택을 받는다. 2. 알제리는 프랑스의 자치공화국이 된다. 3. 알제리는 국민투표를 통하여 완전한 독립국가가 된다"의 세가지 제안을 내놓았고, 알제리 독립세력은 이에 3번안을 선택하여 1962년 에비앙 합의를 통해 알제리는 독립을 쟁취한다.

3.1 전쟁 결과

결국 알제리의 독립으로 종료되었다.

알제리 민족해방전선병력: 34만여 명
피해: 14만 1천-15만 3천여 명 전사, 16만여 명 부상
알제리계 민간인 200만여 명 이상 사망(알제리 측 주장, 프랑스에선 20만 정도로 축소하고 그동안 학살이 아니라고 반론해왔다가 일부 학살을 인정하고 있다)
프랑스병력: 프랑스 군 67만여 명, 아르키(Harki, 알제리계 프랑스 군인) 9만 명
피해: 프랑스 군 2만 9천여 명 전사 및 6만 5천여 명 부상, 아르키 3만-9만 명 사망
프랑스계 알제리 민간인 3천-6천여 명 사망

3.2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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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알제리 민족 해방 전선 양쪽 다 학살을 벌였는데, 특히 프랑스는 1961년 파리 학살을(2001년 10월에 프랑스 정부가 인정), 알제리 민족 해방 전선 역시 1962년 오랑 학살을 감행하였다(알제리 정부는 인정하지 않고 있음).

그리고, 지금까지 프랑스를 까대는 데 명성을(?) 날리고 있다.알제리가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을 비웃을 정도, 프랑스가 EU가입 문제로 터키가 저지른 아르메니아 학살을 거론하면 터키는 알제리인 학살을 언급하면서 반격한다. 당연히 죽은 사람 수로는 아르메니아가 주장하는 150만~200만과 맞먹거나 넘는 수이기에 프랑스가 아르메니아 학살을 인정하라 터키에게 뭐라고 하면 알제리에서도 그러는 늬들이 알제리에서 한 짓은 뭐냐? 폭풍같이 까면서 대꾸하여 프랑스를 애먹이고 있다. 더불어 아르메니아 학살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선 과장되었다고 주장하는 꼴이 터키랑 똑같고 나중에서야 일부 학살을 인정하지만 학살자가 20~30만 정도라고 줄여 주장하는 것도 숫자까지 터키랑 똑같다! 내가 하면 폭동진압, 남이 하면 학살 여담으로 벨기에레오폴드 2세때문에 똑같은 꼬라지를 겪는 중.

4 그 이후

독립 이후 알제리는 당연히 좌경노선을 걷게 되었다. 알제리의 독립운동가였고 초대 대통령이자 수상이었던 아흐메드 벤 벨라는 제3세계의 해방 및 좌익 혁명을 위해 적극적 지원을 하다 너무 지나치다는 좌익 세력 내부의 불만으로 인해 쿠데타로 망명을 떠나는 등[8] 알제리는 정치적 혼란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련 붕괴 전까지는 국제사회에서 좌경노선을 따르는 제3세계 대표 국가 중 하나였다. 또한 독립 이후에도 양국의 관계는 좋지 않으며,1980년대 초까지는 알제리의 경제는 그럭저럭 굴러갔지만 1980년대 중반의 유가하락으로 알제리의 경제가 파탄나면서 20~30대 알제리 청년들이 프랑스에 밀입국해 프랑스 사회심각한 문제거리가 되었다.

프랑스 내에서 좌우익의 견해가 가장 다른 것이 이 알제리 전쟁인데, 좌익들은 이 전쟁을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의 독립을 억누른 전쟁" 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우익들은 이 전쟁을 "소련이집트를 위시한 아랍제국들의 지원으로 발생한 자국내의 중대한 반란"으로 취급한다. 즉, 알제리의 독립운동 성격을 인정하지 않으며 아직도 알제리가 프랑스 땅이라고 지껄인다.

여튼 이 전쟁 역시 68운동의 도화선을 당기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역대 프랑스 대통령들이 거부해왔던 공식적인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의 뜻을 표했다. 하지만 알제리에서 요구하는 학살 보상 및 핵실험 관련 문제와 같은 일은 보류하고 있기에 알제리 반응은 반쪽도 안되는 사과라고 받아들이지 않는 상황이다.

반대로 프랑스 백인우월주의자이며 극우정당 국민전선(FN) 총재인 장 마리 르펜이 젊은 시절, 장교로 알제리 전쟁 참전했던 바 있는데 당연히 학살을 부정하고 알제리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며 지금도 프랑스계 거주자들에게 경제적 보상을 해라 요구를 하고 있다. 그걸로도 부족한지 2009년 선거 당시 자신의 홈페이지에 알제리를 피로 물들이는 그림으로 대문 장식했다가 알제리 여론의 반발을 불러오자, 알제리에서 반프랑스 움직임이 일어날 것을 우려한 사르코지 정부에게 피선거권 박탈까지 당했다. 결국 2011년 정계에서 완전 은퇴하면서도 알제리를 내버린 프랑스를 따져가며 지 잘못은 일절 거론하지 않았다.

르펜의 딸인 마린 르펜도 애비의 뜻을 따라 주장해왔는데 2017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를 노리는 그녀로서도 알제리 및 북아프리카 이슬람 나라들의 교류를 위하여 일부 학살을 인정하고 알제리와 관계개선에 나서고 있다. 물론 알제리에서는 개소리 한다 그 애비를 따라 그동안 알제리의 폭동, 프랑스 영토 알제리라고 하던 여자가 잘도 이제와서 일부 학살 인정에 사이좋게 지내자고 하다니 참으로 가소롭다며 진정으로 사죄한다면 200만 학살 인정 및 보상을 하고 그런 소리나 하라고 맞서고 있다.

5 일화

1962년 알제에 있던 프랑스의 영웅이자 성녀인 잔 다르크 동상이 알제리 군중들에 의해 끌어내려져 참수형을 당했다.(영국군도 잔 다르크를 화형에만 처했지 참수형은 하지 않았다.)(...) #

사실 자신들에게 악랄한 식민 지배와 탄압을 하던 나라의 상징이기도 하고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이슬람교 신자들인 대부분인 알제리 군중들에게 수도 한복판에 위치한 잔 다르크의 동상은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이 동상은 결국 프랑스로 옮겨져 수리한 다음 보쿨뢰르에 다시 세워졌다. 보쿨뢰르로 옮겨진 동상 모습

현재의 알제리에도 잔 다르크 동상이 있긴 있다. 그나마 식민지배와 전혀 무관한 동상이라 파괴하지는 않았다. 스킥다에 있는데, 알제에 있던 동상처럼 광장에 높이 세워져 있는 게 아니라 박물관 근처에 크게 눈에 띄지 않는 수수한 모습으로 있다. 보기크게 보기

잔 다르크 광장으로 부르던 알제에 있던 중앙 광장도 독립하자마자 독립 전쟁 시초가 된 사르 알 부지드(위에 서술한 대로 당시 사살된 12살난 사내아이)광장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알제리 전역의 프랑스 관련 건물은 죄다 용도가 달라졌다. 알제에 있던 노트르담 성당은 국립도서관으로 바뀐지 오래이며 그래도 참 관대하게(?) 성당 바깥 성화는 안 지우고 그대로 남겨두었다. 아니면 더 많은 성당들이 이슬람 모스크로 바꿔버렸다.

이방인으로 유명한 문인 알베르 카뮈는 알제리 출신자(피에 누아르)였지만 정작 알제리의 독립에는 반대하였다. 대신 그는 프랑스 연합 내에서의 자치권을 확대하는 등 양측 모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정전협정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그 때문에 프랑스 좌파 지식인들에게서 왕따 취급당했다. 정작 카뮈는 그에 개의치 않긴 했다.

이 때문에 알제리 사람들에겐 카뮈 이름조차 견딜 수 없는 침략자를 상징하기에 지금은 알제리에 가면 그가 살던 집들은 부숴지거나, 재공사로 사람들이 살면서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더불어 알제리에선 그의 이름은 아예 모르는 이름이다. 카뮈가 노벨문학상을 받으면서 세워진 그의 문학 기념비도 남아있지만 카뮈 이름을 누군가가 부숴놓아서 누굴 위하여 만든 건지도 모르게 되었다. 당연히 관리도 되지않아서 금이 가고 한동안 누군가가 신나게 두들겨패서인지 금이 가고 낡고 언젠가 무너져버릴 듯...

이 전쟁 당시, 아르키(harki)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알제리계 보조병들은 프랑스 편에 서서 싸웠다. 그리고 독립이 되자, 이제 매국노가 된 그들은 알제리 전역에서 끔살이 기다릴 뿐이었다. 지뢰밭에 맨몸으로 밀어넣어지기도 하고 광장으로 끌려나와 사람들 욕설과 같이 침으로 범벅이 되어 산 채로 몰매를 맞아 죽거나, 총살당하거나, 광장에서 목매달린 시체로 며칠이고 방치되었는데 그 수는 최저 3만에서 최대 8만으로 추정된다. 이런 학살을 모면한 이들은 프랑스로 가서 살아야 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건 온갖 잡일과 차별 뿐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토사구팽한 것.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 자기네 청년들에게 해준 것도 없으면서 가서 죽으라고 전장에 내몬 게 프랑스 지배층들이었으니 아르키들이야 그보다 가치가 없다고 볼 수 있다.[9]

애초에 프랑스는 자기들에게 충성하던 알제리인 공무원이나 군인들이 어떤 운명을 겪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이들의 안위에 대해 한 점도 배려를 하지 않았다. 프랑스로 갈 수 있었던 아르키들은 행운아라고 해야 할 정도. 참고로 이때 도망친 아르키 중 한 사람이 그 유명한 지네딘 지단의 아버지.

검은 발, 즉 피에 누아르들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인이지만 알제리에서 100년이 넘게 살다보니 프랑스가 낯설고, 알제리에 모아둔 재산은 죄다 가루가 되었으며. 급히 챙길 돈이나 귀중품만 가지고 프랑스로 가보니 프랑스에선 이들을 아니꼽게 보면서 이들은 서운한 마음이 들고... 결국 미국이나 다른 나라로 귀화하거나 아니면, 다시 튀니지같이 프랑스어가 많이 쓰이지만 프랑스에 대하여 증오가 덜한 이웃 나라로 이민가 살기도 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떠나는 이들만 속출했다고 한다.

알제리가 아르키 후손들을 용서해주면서 이들 일부가 프랑스로 가서 살기도 하는 와중에 피에 누아르들도 알제리로 돌아갈려는 뜻을 밝히기도 한다. 그러나 일부 피에 누아르들은 거의 50년전, 알제리 독립 당시 몰수당한 농장이라든지 여러 재산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물론 알제리 측은 전혀 그럴 마음이 없고,[10] 프랑스 측도 알아서 하라는 투로 물러서 있기에 이뤄질 일은 없어 보인다.

6 창작물에서

이 직후 벌어진 베트남 전쟁이 워낙 시끄러웠고 정작 프랑스쪽에서는 잊어버리고 싶은 과거인 탓인지 그 규모와 피해에 비하자면 이를 소재로 한 창작물은 그리 많지 않다.

1964년에 나온 영화 쉘부르의 우산이 이 때를 배경으로 하고 남주인공이 알제리 전쟁에 징집되었다가 다리를 다치고 애인과도 헤어진다는 설정으로 나온다. 그리고 은근슬쩍 전쟁으로 인해 힘들어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영화 전반에 깔아두고 있다. 그러나 태생적인 한계(멜로 영화) 때문에 전쟁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는 하지 않는다.

이후 1966년에 나온 알랭 들롱이 나온 로스트 코맨드(라스페기[11])가 이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룬 최초의 작품이다. 도입부 부분에 나온 디엔비엔푸 전투 부분이 인상적인 작품, 디엔비엔푸에서 같이 싸운 전우들이 알제리인과 프랑스인으로 나뉘어져 적으로 전선에서 만나게 된다는 프랑스 현대사의 아이러니가 담겨 있다.

종전 직후 이탈리아 좌파 영화인들의 지원을 받아 알제리 쪽 시각에서 제작된 세미 다큐멘터리《알제리 전투(La batalla de Argel. 1965)》가 가장 유명하다. 베니스 영화제 출품,상영 당시 프랑수와 트뤼포만 마지막까지 남아 시상될때 손뼉까지 치며 축하해주었다. 그밖에 장 뤽 고다르[12], 루이 마르와 같은 프랑스 유명 영화인들은 앞서 언급한 한 사람을 빼고 모두 보이콧한 일화는 꽤 유명하다. 그 뒤에 트뤼포를 프랑스 극우들이 엄청 씹었으나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아했다. 2009년 10월 한국에서도 아트하우스 극장 재개봉 형식으로 개봉되었다.

전쟁으로 부터 반세기 가까이 흘러서야 비로소 프랑스의 시각으로 다루어진 창작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그중 오스트리아 출신 미카엘 하네케 감독이 프랑스에서 만든 2005년작 '히든'이라는 영화가 유명하다. 이 쪽은 1961년 파리 학살에 대한 프랑스 지식인들의 망각을 스릴러로 비판한 영화. 이 영화를 보면 지금 알제리인들이 프랑스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 대충 알 수 있다... 2005년 칸느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했으며 2006년 국내에서도 개봉했다. DVD 출시.

하지만 프랑스 영화로서 알제리 전쟁을 직접적으로 다룬 첫 작품은 2007년에 등장한 《친밀한 적(L'ennemi intime)》이 사실상 최초이다.

이외에도 알제리 출신 프랑스인인 라쉬드 부샤렙 감독은 《영광의 날들》(2006)과 《법 밖에서》(2010)라는 연작을 만들었다. 《영광의 날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알제리 출신 식민지군 병사들의 이야기고, 《법 밖에서》는 파리 학살에 대한 이야기다.

《Simon: An English Legionnaire(국내 개봉명-톰하디의 도망자)》(2002)는 이 당시 외인부대에 입대한 영국인 주인공의 입장에서 바라본 전쟁을 묘사하고 있다. 톰 하디가 국적을 조작하고 입대한 프랑스인 전우로 출연하기도 했다

프레데릭 포사이스의 출세작 《자칼의 날》은 알제리 전쟁 직후 우익 테러의 표적이 된 드골에 대한 암살 음모를 배경으로 한다.
  1. 란서-제리 간의 전쟁이므로...다만 프랑스를 가차음인 불란서로 표기한다면 알제리도 가차음인 아이급으로 표기하여 '불-아'라고 하는 게 일관성이 있을 것이다. 아니면 프-알이라고 하든지.
  2. 1차 전쟁이다. 2차와는 사정이 많이 다르다.
  3. 냉전 시절 소련은 전세계적인 반제국주의연대라는 명분을 내걸고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등 제3세계의 반미 반서방 세력에 막대한 지원을 하였다. 굳이 좌익 성향이 아니더라도, 적(서방)의 적은 친구라는 논리로 도와주곤 했다.
  4. 사실 튀니지와 모로코는 알제리보다 먼저 1956년 프랑스에서 독립했다.
  5. 이 때문인지 알제리와 튀니지는 이웃나라면서도 서로 사이가 좋다고 한다..심지어는 알제리 사람들 사이에서도 착취,학살하고 사과조차 안하는 프랑스 놈들보다는 그래도 독립,해방을 지원해준 아랍,이슬람 형제인 튀니지가 그나마 낫다고 말 할 정도라고..
  6. 이 시절에는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라는 명칭을 쓰고 있었다.
  7. 정확히는 프랑스 아프리카 군 소속 장군들. 아프리카 군과 본토군은 사이가 거의 구일본육군-해군 관계에 가까울 정도로 나빴다.
  8. 1990년대에 알제리로 돌아와 알제에서 2012년 만 95세로 숨을 거둔다.
  9. 드골의 제5공화국이 쉽게 집권한 것도 이런 지배층들의 행태에 분개한 청-장-노년층들이 일치단결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1차대전 때 그렇게 국민을 총알받이로 내몰고, 2차대전 때도 오판으로 국민들을 죽여놓고, 이제는 식민지 지키겠답시고 또 총알받이로 내몰고 있으니, 격분하지 않는 게 이상한 일.
  10. 당장 청년실업 문제 해결이 급한 상태인데다가 알제리 정부 입장에서 농장을 다시 되돌려준다는거 자체가 어불성설이기에 다시 줄 이유도 없기도 한다.
  11. 국내 상영 제목, 대부분 이 이름으로 기억하는 분이 많다.
  12. 고다르가 감독한 영화 《작은 병정》은 알제리 전쟁을 간접적으로 다뤘는데, 프랑스 당국의 검열에 걸려서 3년 동안 상영금지를 당해서 1963년에서야 개봉한 경험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