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흑백사진으로만 봐도 참혹하다.
축구계 최초의 대형사고[1]
1 소개
이 사건은 1949년 5월 4일. 이탈리아의 토리노 FC 팀 선수들과 스태프들이 탄 비행기가 추락함으로서 일어났다. 당시 비행기가 추락한 언덕인 수페르가의 이름을 따서 흔히 수페르가의 비극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2 마지막 경기
당시 토리노 FC(이하 토리노)는 전쟁 이후 재개된 세리에 A에서 5연패를 앞두고 있는 강팀이었다.[2] 그들의 기량은 이탈리아 전역에서 인정받고 있었고 이는 그들 멤버 대부분이 이탈리아 대표팀의 멤버였다는 것에서 증명되었다.
일 그랑데 토리노
당시 토리노는 4월 30일 인터 밀란과의 리그 경기에서 0:0으로 비겼고 당시 토리노의 회장 페루치오 노보의 요청에 의해 벤피카의 초청을 받아 리스본으로 떠났다. 페루치오 노보는 벤피카의 수비수 시코 페레이라의 팬이었던터라 그의 기념 경기에 토리노 선수들을 보낸 것이었다. 그 경기의 결과는 벤피카의 4:3 승리로 끝났지만 그들의 목적은 승패가 아닌 양팀의 우호였었다.
그렇게 경기를 잘 끝내고 토리노 팀 선수들은 알리탈리아 소속 비행기를 타고 토리노로 돌아갔다.
3 사고
리스본에서 9시 40분에 이륙한 Fiat G.212 비행기는 바르셀로나에서 한 차례 착륙하여 급유를 한 다음 토리노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당시 토리노에는 갑작스런 번개가 쳤고 그로 인해 시야가 매우 불량했다. 결국 사고 기체의 기장이었던 피에르루이지 메로니 중령은 눈으로 보고 비행할 수 있도록 기체를 하강시킬 수 밖에 없었는데 오후 5시, 이렇게 하강하는 동안 수페르가 언덕 위의 성당을 발견하지 못했고 성당의 뒤쪽 벽에 그대로 충돌해버리고 말았다.
4 희생자
이 사고로 인해 탑승객 31명이 전원 사망하였으며, 여기에는 토리노의 선수 18명과 매니저와 코치 등 스탭 5명이 타고 있었다.
사고 피해자들을 기리는 기념비
4.1 희생자 명단
- 토리노의 팀 구성원
이름 | 나이 | 포지션 | 국적 | 국가대표 | 비고 |
발레리오 바치갈루포 | 25 | GK | 이탈리아 |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 |
알도 발라린 | 27 | DF | 이탈리아 |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 |
디노 발라린 | 23 | DF | 이탈리아 | ||
에밀레 본조리니 | 28 | FW | 프랑스 |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 |
에우제비오 카스틸리아노 | 28 | MF | 이탈리아 |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 |
루벤스 파디니 | 21 | MF | 이탈리아 | ||
굴리엘모 가베토 | 33 | FW | 이탈리아 |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 |
루게로 그라바 | 27 | FW | 이탈리아 | ||
쥐세페 그레자르 | 30 | MF | 이탈리아 |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 |
에지오 로익 | 29 | MF | 이탈리아 |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 |
비르질리오 마로소 | 23 | DF | 이탈리아 |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 |
다닐로 마르텔리 | 24 | MF | 이탈리아 | ||
발렌티노 마촐라 | 30 | MF | 이탈리아 |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 |
로메오 멘티 | 29 | FW | 이탈리아 |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 |
피에로 오프레토 | 22 | DF | 이탈리아 | ||
프랑코 오솔라 | 27 | FW | 이탈리아 | 이탈리아 U-20 축구 국가대표팀 | |
마리오 리가몬티 | 26 | MF | 이탈리아 |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 |
율리우스 슈베르트 | 26 | MF | 헝가리 | 체코슬로바키아 축구 국가대표팀 | |
아날도 아그니세타 | 매니저 | 이탈리아 | |||
이폴리토 시발레리 | 매니저 | 이탈리아 | |||
에르네스트 에르브스타인 | 50 | 트레이너 | 헝가리 | 전직 토리노 FC 감독 출신[3] | |
레슬리 리브슬리 | 37 | 감독 | 잉글랜드 | ||
옥타비오 코리나 | 안마사 | 이탈리아 | |||
안드레아 보나유티 | 브로커[4] | 이탈리아 |
- 기체 승무원
이름 | 나이 | 국적 | 직책 | 비고 |
피에루이지 메로니 | 이탈리아 | 기장 | 공군 중령 | |
안토니오 파그라치 | 이탈리아 | |||
셀레스티노 디 잉카 | ||||
세사르 비앙카디 |
- 기자
이름 | 나이 | 국적 | 직책 | 비고 |
레나토 카사르보레 | 58 | 이탈리아 | 저널리스트 | 투토스포르트의 창립자[5] |
루이지 카발레로 | 기자 | 라 스탐파[6] | ||
레나토 토사티 | 기자 | 가제타 델 포폴로[7] |
5 후유증
그 충격은 실로 대단했다. 이 불의의 사고로 인해 이탈리아 전역에서 100만 명이 넘는 추도 인파가 몰려들었다.
토리노는 당시 리그 4경기를 남겨놓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 사고로 인해 토리노는 당시 베스트 11을 전부 잃어버렸고 유스 선수들을 급히 콜업하였다. 결국은 리그에서 우승하여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선배들의 영전에 우승컵을 바칠 수 있게 되었다.[8] 하지만 유스 선수들로 메운 공백은 오래가지 못하였고 결국 토리노는 리그의 주도권과 토리노의 대표 클럽 이미지를 라이벌 유벤투스에게 넘겨줄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이 비행기 안에는 발렌티노 마촐라, 마리오 리가몬티 등 당시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선수들도 많이 타고 있었던지라 이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대표팀에게도 큰 손실로 다가왔다. 이탈리아가 1950년 월드컵에 출전하기는 했지만 치명적인 전력의 공백을 메우지 못하였고 결국 조별 리그에서 탈락하고 말았다..[9] 그리고 이탈리아는 이 공백을 메우는데 20년 정도의 시간을 써야만 했다.[10]
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프랑스, 잉글랜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이 사고에 대해 큰 충격을 받았다. 프랑스는 당시 자국이 자랑하는 축구선수인 에밀레 본죠리니를 이 사고로 잃었고 체코슬로바키아 역시 자국이 자랑하는 축구선수인 율리우스 슈베르트를 이 사고로 잃었다. 헝가리는 자국이 자랑하는 명장인 어네스트 알베스타인을 이 사고로 잃었으며 잉글랜드는 자국이 자랑하는 명장인 레슬리 리브슬리를 이 사고로 잃었다.
이 사고가 뒤에 카테나치오로 대표되는 이탈리아 축구의 현재 색깔이 나오는 원인이 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6 사고를 비껴간 사람들
원래 경기의 출전 명단에는 있었지만 개인 사정으로 인해 이 비행기를 타지 못한 덕에 목숨을 건진 3명의 선수가 있었다.
토리노의 사우로 토마는 부상으로 인해 포르투갈에 가지 못했고, 후보 선수 루이지 줄리아노는 여권 문제로 공항에 묶였다가 화를 면했다. 또한 초청 선수 자격으로 토리노 팀에서 뛸 계획이었던 라디슬라오 쿠발라는 갑자기 아이가 아파서 리스본에 가지 못했다.
7 리베르 플라테와의 자선경기
1949년 5월 26일 이 사고로 인한 유가족들을 돕고자 하는 의미로 자선 경기가 개최되었고 상대는 아르헨티나의 리베르 플라테로 낙점되었다. 이 경기에는 라 마키나의 멤버였던 앙헬 라브루나와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출전했고 경기는 2:2로 비겼다.- ↑ 선수들이 사고를 당해 팀이 휘청이게 된 사례로는 사상 최초이다. 관중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일어난 사고는 수페르가의 비극 이전에도 잉글랜드의 버든 파크 참사 등이 있다
- ↑ 전쟁으로 중단된 1943-45년을 제외하고 그 이전 시즌인 1942-43, 그리고 그 다음 3시즌을 내리 우승하고 1948-49 시즌도 우승을 거의 확정 지은 상황이었다
- ↑ 1938년 ~ 1939년
- ↑ 토리노팀의 경기일정 담당
- ↑ 이탈리아 최대 스포츠 신문중 하나이다.
- ↑ 토리노 지역의 조간지
- ↑ 토리노 지역 일간지
- ↑ 이탈리아 축구협회에서는 4경기를 치르지 않아도 시즌 우승은 토리노라고 발표했지만 토리노 구단에서는 유스를 출전시켜서라도 끝까지 시즌을 진행하겠다고 나섰고, 토리노의 남은 리그 4경기에서는 상대 팀도 토리노에 대한 애도 차원에서 같이 유스를 출전시켰다.
- ↑ 뮌헨 비행기 참사를 겪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차이를 굳이 비교하자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뮌헨의 사고에서 감독 매트 버스비경을 포함하여 보비 찰튼 등 스쿼드의 일부가 살아남았고 그들을 주축으로 새로 팀을 건설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다시 영광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토리노는 선수와 감독 거의 전부를 잃어버렸던 관계로 그 상처가 더욱 컸다
- ↑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이 사고가 없었더라면 1950년 월드컵에서 3연패까지는 못하더라도 브라질, 우루과이 등 남미팀과 상당히 좋은 시합을 펼쳤을 것이다. 이 사고 이후 이탈리아가 다시 세계구급 강호로 인정받게 된 계기는 1968년 유로 우승과 1970년 월드컵에서의 준우승이었다. 이 이전의 이탈리아는 국제대회에서 별 볼일 없는 성적을 거두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