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역사

1 개요

알프스 산맥을 지나는 통로를 갖고 있어 지리적으로 중요해 외침 시도가 꽤 있었다.

2 시대별

2.1 고대

헬베티족이 나라의 기원이며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첫 갈리아 원정 당시 게르만족에게 심한 등쌀을 당해 이주하다 카이사르에게 된통 맞고 다시 돌아간 것이 고대에 남긴 조금 큰 족적이다. 이후 로마 제국에 속해 있다가 서로마가 망한 뒤에는 프랑크 왕국에 속했다. 프랑크 왕국이 쪼개지고 흐지부지되는 과정에서 고지 부르군디아 왕국, 그리고 그 후인 고지 부르군디아와 저지 부르군디아가 합쳐진 아를 왕국을 거쳐[1] 신성 로마 제국 하에 들어갔다.

2.2 서약 동맹의 성립

체링겐가 하에서 비교적 자유를 누렸으나 합스부르크 가가 점차 세력을 넓히면서 억압적인 통치를 시작하자 이에 벗어나기 위한 기나긴 투쟁을 벌였다. 이 무렵 스위스 서약 동맹이 최초로 정치적 실체를 갖추게 된다. 1316년 독일 국왕이었던 루드비히 4세(아직 황제로 즉위하기 이전이었다)는 스위스의 독립을 인정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는데 이는 그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라이벌이었던 비텔스바흐 출신이었기 때문에 합스부르크를 견제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이후 모르가르텐 전투의 승리로 합스부르크 가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다.

2.3 프랑스에 예속

스위스 주정청들은 실력이 좀 쌓이자 이탈리아를 공격했다가 마리냐노 전투에서 프랑스프랑수아 1세에게 참패하고, 이후 발루아 왕가에만 군사를 보내겠다는 서약을 하여 사실상 예속된다. 그러나 프랑스가 카를 5세신성 로마 제국과 적대관계가 되면서 그만 스위스 본토마저 관광당하는 꼴을 겪었다. 또한 스위스 용병들은 신성 로마 제국과의 파비아 전투, 사코 디 로마 등에서 잇따라 참패해 체면을 엄청나게 구겼다.

2.4 종교 개혁에서 30년 전쟁

그리고 종교개혁으로 인해 결국 전토가 두쪽으로 쪼개져 내전을 치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초반 울리히 츠빙글리의 개신교군이 기세를 올렸으나, 결국 카를 5세가 지원에 나선 가톨릭군의 역습에 대참패를 당하고 이후 제네바장 칼뱅이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때까지 쥐 죽은 듯 기다려야만 했다. 종교개혁 당시 개신교가 크게 전파되어 이 문제로 칸톤끼리 싸우고 멀쩡했던 칸톤이 반 토막 나는 일까지 있었다. 개신교, 가톨릭교회 사이의 30년전쟁에서 정식으로 독립을 인정받았다.

프랑스 혁명나폴레옹에게 점령되면서 칸톤들을 지휘할 중앙정부가 만들어졌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의 혼란을 수습할 빈 회의에서 독립과 영세중립국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2.5 제2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은 스위스 역사상 최악의 위기 중 하나였다. 한 방면을 막으면 어떻게든 국가를 방위할 수 있었던 이전과는 달리, 나치스의 세력은 독일은 물론, 프랑스, 오스트리아를 모두 점령했고, 남쪽의 이탈리아 역시 나치스에 동조하는 추축국이었다. 온 유럽 대륙이 모두 나치스의 지배 아래 들어갔는데, 스위스는 그 한 가운데서 유일하게 나치스의 지배가 미치지 않는 손바닥 만한 땅이 된 것이었다.

1939년 8월, 폴란드 침공 직전 이미 스위스는 국가적 위기를 감지하고, 연방 정부 지도부는 8월 30일 무장 중립과 비상 사태를 선포했다. 지도부는 비상 위원회에 전권을 위임했는데, 비상위원회는 1932년 부터 국가 국방위원회을 맡고 있던 위원 앙리 기잔(Henri Guisan) 대령준장으로 승진시키고 군 최고 사령관으로 선출한다. 스위스는 평소 장성급이 없으므로 대령이 최고 계급이며, 위원회에도 참가하고 있었으므로 당시 이미 스위스군의 톱이었다.

앙리 기잔 장군은 43만 명의 예비군과 민병대를 총 동원 하는 한편, 적이 침략해오면 알프스 통로를 전부 폭파시키고 끝까지 싸울 것이라며 배째라고(…) 버티는 선언을 실행했다. 하지만 1940년이 되자 20년간 스위스 외교를 주도하던 외무장관 주세페 모타(Giuseppe Motta)가 급사, 이탈리아가 추축국에 참전, 프랑스는 항복 하는 등.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스위스는 완전포위를 당하게 된다.

더 큰 문제는 스위스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독일계 주민의 비율이 70% 이상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독일계 주민들 사이에서는 친독일로 기울어 중립을 폐기하고 독일 측으로 참전하자는 분위기가 일어났다. 오스트리아가 독일에게 합병 당한 안슐루스와 같이, 스위스도 어이없이 나치에게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1940년 7월 25일, 앙리 기잔 장군은 주요 군 장교와 간부를 스위스 건국 전설의 땅 뤼틀리에 모았다. 뤼틀리는 1291년 우리, 슈비츠, 운터발덴 3주의 대표가 모여 스위스 서약 동맹을 시작했다는 곳.인데 여기서 앙리 기잔 장군은 선조들의 뜻과 같이 스위스의 자유와 독립을 지켜나가자는 연설을 했다. 앙리 기잔의 뤼틀리 연설은 스위스 국내에 널리 퍼져 독일 측으로 참전하자는 주장은 크게 줄어들었다.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스위스 행정부는 경제적 이유에서 독일 측에 '배려'하는 정책을 취했다.[2] 하지만 기잔 장군은 양 진영 모두에 가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고, 독일 측에서 공작원으로 일한 스위스 인에 대해서는 사형을 포함하여 엄격한 처분을 내렸다. 군부와 행정부 사이에서는 갈등이 일어났다.

하지만 국민의 지지를 받는 앙리 기잔의 무장중립 노선은 흔들리지 않았으며, 독일은 스위스 점령 계획을 종종 수립했지만 기존의 전략을 깰 만한 전술을 완성할 수 없었기 때문에 스위스는 끝까지 침공받지 않고 무사했다.

2.6 현대

1953년 한국전쟁 정전협정 이후 중립국 감독위원회 구성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중립국 감독위원회는 중립국이 감독한다는 거지, 중립국을 감독한다는게 아니다. 여기서의 중립국은 전쟁 비참여국을 의미한다. 참고로 그 구성원은 UN군이 인정한 스위스와 스웨덴, 인민해방군조선인민군이 인정한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분리 후 체코)였지만 북한은 동구권 붕괴 이후 폴란드와 체코를 추방시켜서(하긴 엄밀한 의미의 중립국이 아니기도 하다. 어차피 체코, 슬로바키아 모두 승계를 별로 원치 않고 폴란드는 상주하진 않지만 분기별로 참석한다.) 스위스와 스웨덴만이 남은 중립국 감독위원회를 "미제의 도구"로 몰아 세우고 있다. 물론 남한에서도 과거에는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 추방하라는 관제시위를 일으키기도 했다.

흔히 스위스는 중립국으로서 EU는 물론 국제연합까지 가입하지 않았다고 알려졌지만, 국민투표를 거쳐 2002년 9월 10일 190번째 국가로 가입했다. (참고로 동년 9월 27일 동티모르 가입.)
  1. 이 부분의 자세한 역사는 부르고뉴 공국 문서 참고.
  2. 이러한 행정부와 스위스은행들의 삽질 때문에 전후 철광석 거래문제로 욕먹은 스웨덴처럼 지금까지도 두고두고 까이는 형편이다. 거기다 현재까지도 암암리에 저질러지는 인종차별 문제랑 겹쳐져서 스위스가 말로만 중립국이지 실제로는 친나치 국가 아니었냐는 의혹도 사는 중.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도 1999년판부터 저 흑역사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는 장면을 넣었다.